해남의 겨울은 다시 길어지고 있었다.바람은 차가웠고, 파도는 잿빛으로 흩어졌다.강혁은 새벽 어둠 속에서 홀로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손끝에 닿는 밧줄의 감촉, 기름 냄새, 젖은 철의 냉기 이 모든 게 오히려 익숙했다.그는 평생 이런 냄새 속에서 살았다.피와 물, 그 사이의 냄새.수진이 잠시 서울로 올라갔다.‘희망복원재단’에서 공식 자문으로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떠났다.“잠깐이면 돼요. 돌아오면 다시 꽃을 심을 거예요.”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불안이 숨겨져 있었다.그녀는 늘 떠나는 사람처럼 말했고, 강혁은 늘 남겨지는 사람처럼 웃었다.트럭 조수석엔 그녀가 남기고 간 스카프가 놓여 있었다.흰색 천에 묻은 은은한 향기, 그 향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는 스카프를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그의 기억 속에서, 수민의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했다.그리고 그 따뜻함이,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혁 선배, 사람을 믿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걸 아세요?”그때 수민이 그랬다.그녀는 그를 ‘선배’라 불렀지만, 언제나 더 어른 같았다.그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그것이었다.이제야 그 뜻을 알 것 같았다.사람을 믿는 건 감정이 아니라, 용기였다.오후가 되자, 해안도로 위로 붉은 노을이 드리워졌다.그는 트럭을 몰고 바닷가를 따라 달렸다.라디오에선 오래된 트로트가 흘러나왔다.“사랑은 바람처럼…”가사가 바다 위로 흘러갔다.그의 머릿속에는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꽃을 다듬는 손, 커피를 마시며 웃던 눈,그리고 언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떨리던 입술.그녀는 늘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한쪽은 린자오밍, 복수의 그림자.다른 한쪽은 김수진, 사랑의 잔향.그리고 그 두 얼굴 사이에서 그는 언제나 길을 잃었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그녀가 복수를 멈출 수 있었던 건,그녀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
Last Updated : 2026-04-2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