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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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강유영은 잔을 내려놓고는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소은경은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강유영은 말없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햇볕이 드는 따뜻한 자리를 골라 섰다.“유영 언니….”저만치서 조월아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려 했으나, 도중에 소은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강유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서히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소은경은 주변의 영애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자연스럽게 행동했으나, 수시로 곁눈질을 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은밀히 살피고 있었다.과연 그녀의 짐작대로 그 침향수에 뭔가 들어 있던 걸까.다행히 그녀는 그것을 진짜로 마시지 않고 소맷자락에 슬쩍 쏟아서 버렸다.‘그렇다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지?’머리가 어지러운 척 비틀거려야 할까?강유영은 정자의 난간을 붙잡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는 몰래 소은경의 표정을 훔쳐보았다.그녀는 본래 소은경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오만방자한 소은경이 이미 그녀를 해칠 마음을 품은 이상, 이번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분명히 다음 기회를 노릴 터였다.차라리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지켜본 후에 대처할 방도를 찾는 편이 나았다.소은경은 강유영의 반응을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그래도 제법 참을성은 있는지 즉시 다가오지는 않았다.강유영은 아예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시늉을 했다.“유영아, 왜 그러느냐? 어디 불편한 것이냐?”역시나 소은경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다정하게 물었다.강유영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흐릿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소은경이 침향수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들통이 날까 두려웠다.“유영 언니, 제가 침소로 모실….”조월아는 강유영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라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려 다가왔다.“월아, 넌 여기 남아서 나랑 있자꾸나. 내가 아직 너와 나눌 이야기가 많아.”소은경은 친근하게 조월아의 팔짱을 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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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소만이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자, 강유영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저토록 미련하게 고집을 부리니, 그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나저나 문에 자물쇠까지 채워놓았다니, 안에 있는 사람이 도망이라도 칠까 봐 미리 대비했던 것일까?소만은 자물쇠를 문고리에 걸고는 문을 반쯤 열었다.“아씨, 이만 들어가시….”그러나 그녀는 말을 맺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강유영은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단숨에 소만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이렇게까지 순조로울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소만이 그녀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지난 몇 달 동안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억지로 체력 단련시킨 조원철 덕분이었다. 체력이 부쩍 좋아진 덕에 시녀 한 명쯤은 쉽게 제압할 힘이 생겼다.그녀는 재빨리 문을 닫아걸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조원철에게서 계책을 배운 지는 꽤 되었으나,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역시 마음속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러나 소만을 밀어 넣지 않았다면 그녀 자신이 고스란히 덫에 걸려 파멸했을 것이다.두려워도 소용없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열쇠를 뽑아 들었다.“아씨, 문 열어주세요! 제발 내보내 주세요. 소인이 다 잘못했습니다….”소만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소은경에게 이 일을 명받았을 때만 해도 소만은 자신이 있었다.딱 봐도 유약하고 다루기 쉬워 보이던 강유영에게 역으로 자신이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강유영은 대문을 짚고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그러고는 주변을 살폈다. 이 상황이라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소은경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이닥쳤을 때 나타나 따지는 게 정상이었다.그러나 그녀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소은경과 다투고 싶지도 않았기에 이곳을 떠나 요월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유영 아씨? 밖에 계신 분이 아씨입니까?”안에서 갈라진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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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강유영은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던 소만이었는데 어찌 이리도 갑자기 돌변한단 말인가.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그녀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소만은 소은경의 심복이지만 아무리 잘나도 한낱 노비에 불과했지만, 도경진은 달랐다.그는 탐화랑 출신에 어엿한 관직을 지닌 몸이었다. 그의 첩실이 된다면 어찌 되었든 반쪽짜리 상전 대접은 받을 터이니, 소은경 밑에서 시녀 노릇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터였다.더군다나 도경진은 인품도 훌륭하고 외모도 수려한 사내이니, 이런 사내는 흔히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만은 분명 그에게 의탁하는 편이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남을 구하는 것도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조원철이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는 지금 약에 취한 상태다. 이 상황에 그를 밖으로 꺼내고도 네가 안전하리라 확신하느냐?”강유영은 정신을 차리고 손에 쥔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바로 그때, 안에서 소만의 무언가에 깜짝 놀란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강유영은 문밖에서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그렇다고 해도 저분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도경진의 명예가 하루아침에 땅으로 추락한다면, 그녀는 평생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조원철은 그녀의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이게 뭐 하는 짓인가요!”강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조원철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홱 낚아채고는 뒤쪽으로 걸어갔다.“이거 좀 놓으세요….”강유영은 팔을 비틀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커다란 손아귀가 손목을 꽉 잡은 탓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대로 도경진이 안 좋은 일에 휘말리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조용히 하거라.”조원철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차가운 벽과 자신의 넓은 품 사이에 그녀를 가두어버렸다.‘소은경이 도착한 걸까?’강유영은 순간 몸에 힘을 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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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부드럽군.”마치 귓가를 스치는 봄바람처럼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강유영은 가슴이 두근거려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비록 그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긴 하지만, 어쩌다 입을 열면 참 당혹스러운 말을 내뱉고는 했다.“가만히 있거라.”조원철이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경고하듯 말했다.그 사이 밖에서는 소은경이 대문을 부술 듯 두드려대고 있었다.강유영이 밖을 살피려 고개를 내밀자, 조원철은 그녀의 머리를 다시 제 품 안으로 눌러 넣었다.강유영이 거부하려 발버둥쳤지만 그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턱을 대고 친근하게 비벼댔다. 거친 수염이 이마를 긁고 지나가는 느낌은 따끔하면서도 간지러웠다.강유영은 목을 움츠리며 그를 피했다.쾅!마침내 대문이 박살났다.조원철은 재빨리 그녀를 놓아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따라오거라.”그의 말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늘해졌고, 눈빛 또한 무미건조해졌다.수려한 얼굴에는 고귀하고도 금욕적인 기운이 감돌았다.방금까지만 해도 친밀한 접촉을 나누던 사람이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이다.마치 조금 전의 애틋했던 일들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는 평소의 무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강유영은 따스한 봄날에서 한순간에 혹독한 한겨울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기가 감돌고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려왔다.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속으로 자신을 질책했다.‘왜 이리도 못났을까? 언제면 나도 저 사람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발을 뺄 수 있을까?’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이제 들어가거라.”곧이어 회랑 기둥 뒤에 멈춰선 조원철이 그녀에게 눈짓했다.“어떻게 된 거지? 소만 이 계집애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방 안으로 들어선 소은경의 목소리에는 경악과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그녀의 기세에 강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조원철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그저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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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강유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조원철은 밖에서 이 모든 상황을 듣고 있을 텐데, 소은경에게 이런 식으로 대꾸하는 당찬 모습이 혹여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밖에서는 그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네까짓 게 어디 감히 내가 하는 일에 참견이냐?”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치미는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소은경이 별안간 손을 치켜들었다.그러나 강유영은 예전처럼 미련하게 서서 맞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서며 날아오는 손바닥을 가볍게 피했다.약이 오른 소은경이 집요하게 뒤쫓아가려던 순간이었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냐?”때가 되었다고 짐작한 한씨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마당으로 들어섰다. 방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국공 부인….”소은경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한씨에게로 다가갔다.“어머니.”강유영 역시 늦을세라 서둘러 다가가 고개를 숙인 채 조신하게 예를 갖추었다.“유영이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멀쩡한 강유영의 모습에 한씨의 마음속에도 거센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했다.“정원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왜 이런 곳에 몰려 있는 게냐?”한씨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 안의 광경을 훑어보며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강유영은 약에 취한 기색이 전혀 없고 너무도 멀쩡했다.‘이 맹랑한 것이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었구나.’소은경이 이런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이 한씨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강유영이 입을 열려던 찰나.소은경은 다가가서 한씨의 팔을 붙잡으며 억울하다는 듯 선수를 쳤다.“부인, 유영이가 저 몰래 제 시녀인 소만을 이곳으로 유인했습니다. 애초에 뭔가 흉계를 꾸민 것이 분명해요. 제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직접 말할 일이지, 어찌 애꿎은 시녀를 해하려 한단 말입니까. 소만이 비록 미천한 신분이라지만 엄연한 여인인데 이리 명예를 더럽혔으니 앞으로 어찌 얼굴을 들고 살아가겠어요.”말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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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국공 부인께서는 지금 제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도경진은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움켜쥔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씨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정 그러하다면 내 처소의 시녀 중 마음에 드는 아이로 한 명 고르게.”한씨도 찔리는 게 있기에 일단 한 발 양보하기로 했다.마침 도경진의 곁에 제 사람을 심어둘 생각도 있었다. 나중에 조사예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어차피 오늘의 주요 목적은 강유영이기도 하니, 일찌감치 도경진을 치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국공 부인은 저를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도경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한씨는 느긋하고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자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나도 모르네. 방금 한 말 역시 증거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쯤에서 한 걸음 양보하는 게 어떤가. 어차피 앞으로 한 가족이 될 사이 아닌가. 자네 어머니도 자네와 사예의 혼사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셨는데, 굳이 이렇게 악착같이 몰아붙여서 서로 좋을 게 없지 않은가?”명문가의 정실부인다운 대처였다.이런 소란쯤이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한씨였다.도경진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법은 이미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는 효심이 지극해 어머니의 말이라면 끔찍이 따르는 자였다.도경진은 쓸쓸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소 군주께서 장차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라 하여, 국공 부인께서 사건을 이런 식으로 무마하려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예 아씨와 저의 혼사는 이쯤에서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 파혼서를 전하지요.”말을 마친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밖으로 나갔다.사실 진작부터 파혼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반대와 마땅한 명분이 없어 차마 입을 떼지 못하던 참이었다.그런데 오늘 소은경이 판을 깐 덕에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그는 강유영이 가여웠다.저런 비정한 양모 밑에서 언제쯤이나 햇빛을 보게 될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강유영 역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삼켰다.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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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유영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명을 받들겠습니다, 어머니.”“어머니께서는 집안을 늘 이런 식으로 관리하십니까?”한씨가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얼음장처럼 서늘한 조원철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원철아, 네가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냐?”고개를 돌린 한씨는 서슬 퍼렇게 굳어 있는 아들의 안색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찔리는 속내를 감추며 서둘러 말을 건넸다.소은경 역시 조원철의 수려하면서도 서늘한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분명 바빠서 저택을 비웠다고 했는데 하필 왜 지금 돌아온 거지?’차라리 계획이 완벽히 성공해서 강유영이 도경진과 사통하는 현장을 조원철이 목격했더라면 나았을 것이다.그랬다면 당당히 강유영의 처벌을 촉구할 수 있었을 터였다.설령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다 한들, 그런 추잡한 꼴을 보고도 조원철이 그녀를 받아줄 리 만무했다.그 어떤 사내가 자신의 여인이 다른 사내와 추잡하게 엮인 현장을 보고도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문제는 성공은커녕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점이었다.간신히 빌미를 잡아 한씨가 강유영을 내쫓으려던 참에, 귀신같이 조원철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의원을 불러 내막을 확인해 봅시다.”조원철은 시선을 강유영에게 고정한 채 낮게 읊조렸다.“원철아.”한씨가 눈치를 주며 타이르듯 목소리를 낮췄다.“소 군주는 우리 집안의 귀한 손님이다.”조씨 집안 사람이 손님의 허물을 들춰서야 되겠느냐는 무언의 경고였다.“귀한 손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어머니께서 유영이를 모함할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조원철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다.“어머니께서는 저를 모함하지 않았습니다. 소만을 이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은 제 잘못이니, 기꺼이 벌을 받고 장원으로 가겠습니다.”강유영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꾹 움켜쥐며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조원철이 소은경을 귀한 손님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은, 결국 그녀의 악행을 추궁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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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객원을 나서서 한참을 걸어간 후에도 강유영의 머릿속은 여전히 멍했고, 가슴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폐하께선 왜 나를 신년 연회에 참석하라 하셨을까?’평생을 살며 황궁의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는 처지였다.아니, 아주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여덟 살 이전까지는 진국공부의 적녀 대접을 받았으니 몇 번 가보긴 한 것 같았다.하지만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조차 희미한 데다, 그 당시 옥좌에 있던 황제는 지금의 그분이 아니었다.‘왜 나 같은 사람을 폐하께서 친히 입궁을 명하신 거지? 혹… 내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황제께서는 그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출생의 비밀을 어찌 안단 말인가.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 전 진국공 조정휘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그는 그저 딴생각 말고 얌전히 입궁 준비나 하라며 말을 아꼈다.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잡념을 떨칠 수 있겠는가?어느덧 눈 깜짝할 사이에 그믐이 찾아왔다.밤이 깊어지자 경성 집집마다 밝힌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온 세상이 명절 분위기로 들썩였다.강유영이 묵고 있는 요월원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녀는 일찌감치 바깥의 유명 주루에 음식을 주문해 풍성한 그믐날 상차림을 준비해 두었다.“어멈, 저는 앞뜰에 잠시 다녀올게요. 얼굴만 비추고 돌아올 테니 우리 함께 저녁을 보내요.”강유영은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오씨 어멈을 바라보았다.오늘은 요월원에 경사가 난 날이었다.바로 오늘 오전, 오씨 어멈이 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조금씩 걷기 시작한 것이다.게다가 더듬거리긴 해도 간단한 말까지 내뱉기 시작했다.지난 몇 년을 통틀어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었다.그동안 들인 지극정성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된 셈이었다.“다녀… 오세요.”오씨 어멈은 어눌한 어투로 힘겹게 그녀에게 당부했다.“부디… 조심하세요….”“예, 걱정 마세요, 어멈.”강유영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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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생각해 줘서 고마워.”강유영은 조원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조월아와 함께 앞으로 걸었다.조원철은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강유영은 그가 뒤에서 자꾸만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것 같아 걸음걸이조차 부자연스러워졌다.그러나 뒤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이 사람이 언제 나한테 마음을 썼다고. 괜히 김칫국 마시지 말자.’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는 그저 은밀한 곳에서 그녀의 몸을 탐하는 데만 혈안이 된 사내였다.진국공부의 대청에는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었고,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북적이고 있었다.워낙 식솔이 많다 보니 한씨는 푸짐한 술상과 음식을 무려 여섯 상이나 준비했다.상석에 나란히 앉은 한씨와 조정휘는 사람들과 한창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강유영과 조월아는 안으로 들어서며 어른들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유영이 왔구나? 어서 이쪽으로 오렴.”한씨는 옆에 앉아 있던 조연화를 툭 치며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보냈다.조연화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강유영을 매섭게 흘겨보았다.그래도 얌전히 굴라던 한씨의 당부가 떠올라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작 황궁 가서 밥 한 끼 먹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난 밥 먹듯 드나들어도 저것처럼 유세를 떨진 않았는데!’조연화는 왜 부모님이 이런 일에 강유영을 하늘처럼 떠받들어 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대청 안이 일순 조용해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유영에게 쏠렸다.황제께서 친히 지목하여 황실 연회에 참석을 명하였다는 풍문을 이미 들은 터라, 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뜯어보고 있었다.“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여기 있는 게 편합니다.”강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심스럽게 사양했다.수많은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오니 가시방석에 앉은 듯 숨이 막혔지만, 지금은 그저 꿋꿋이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분수를 모를 만큼 철없지 않았다.한씨의 바로 옆자리는 그녀가 감히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한씨가 이토록 살갑게 구는 것 역시 결코 자신을 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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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그저 허울뿐인 양녀에 불과한 강유영은 감히 그런 상석에 앉을 수 없었다.게다가 자신과 조원철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상책이었다.“유영아, 왜 거기서 머뭇거리느냐? 어서 네 오라비 곁에 앉지 않고.”조정휘가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너 어릴 적에는 오라비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지 않았더냐?”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청 안을 가득 채운 일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유영에게 쏠렸다.“예, 아버지.”강유영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간신히 대답했다.조정휘가 이리 대놓고 못을 박아버리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이 상황에서 그의 옆자리를 거절한다면 더욱 의문스럽게 보일 것이고, 일가친척들 역시 어른의 호의를 무시하는 배은망덕한 것이라며 수군댈 게 뻔했다.그녀는 별수 없이 조원철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그러고는 은근슬쩍 몸을 반대편으로 틀어 그와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온몸의 신경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새삼 조정휘가 아주 오래전 자신이 조원철의 뒤를 쫓아다니던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빛바랜 수년 전의 기억이었는데 말이다…다행히도 곁에 앉은 조원철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요월원에서 이곳까지 걸어올 때처럼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간간이 느껴지는 그의 묵직하고 깊은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강유영은 아예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저 정면만 응시했다.대충 자리를 지키다 틈을 타서 냉큼 처소로 도망치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조정휘의 신년 축사와 함께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 축복을 전했다.“황궁에서 지켜야 할 예법은 어머니가 사람을 보내 일러주었느냐?”조정휘가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예, 아버지.”강유영은 수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한씨가 보낸 어멈이 가르친 예법은 이미 뼈에 새기듯 달달 외워둔 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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