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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장 어의의 안색이 굳어졌다.평국공 부인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그쪽 눈 밖에 나는 것도 곤란했다. 하지만 서 군왕 역시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어의 노릇이란 본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목이 날아가기 십상이었다.장 어의가 이리저리 저울질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며 설연준이 성큼 들어섰다.“서 군왕 전하, 지금 무얼 하고 계십니까?”서경수는 손에 든 찻잔을 만지작거릴 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별것 아니다. 그저 장 어의에게 차 한 잔을 대접하는 중이다.”설연준이 말했다.“군왕의 호의는 장 어의가 마음으로만 받아야 할 듯합니다. 서 군왕 전하, 제가 잠시 장 어의를 데려가야겠습니다.”서경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 나와 사람을 두고 다투겠다는 것이냐?”“아닙니다.”설연준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태자빈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황태손의 병을 봐 달라며 장 어의를 급히 입궁시키라 하셨습니다. 황태손께 관련된 일이니 한시도 지체할 수 없지요. 만에 하나 황태손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서 군왕 전하께서도 저도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말을 마친 설연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경수를 흘겨보았다.황제는 황태손을 몹시도 아꼈다. 그렇기에 서경수라 해도 감히 막아설 수 없었다.서경수는 멀어지는 설연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가 근질거렸다.어의가 떠나 버렸으니 이 재미난 연극도 더는 이어 갈 수 없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설연준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장 어의, 가시지요!”그가 장 어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미처 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란이 들려왔다.“금의위가 왔다.”오원산이 검은 옷을 걸치고 허리에 칼을 찬 채, 십여 명의 금의위를 이끌고 성큼성큼 다가왔다.그는 가까이 이르러 장 어의를 담담히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이 자를 당장 끌고 가라.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 어의의 머리 위로 삼베 자루가 푹 씌워졌다. 장 어의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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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일행이 곁채로 끌려가 보니, 평국공 부인이 춘향을 시켜 장치가 달린 찻주전자와 남은 찻물을 치우게 하는 중이었다.찻잔 속의 차는 이미 바닥에 모조리 쏟아 버린 뒤였다. 춘향은 찻주전자를 들고 막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다행히 오 첨사는 제때 현장에 도착했다.오 첨사가 하녀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두 마디를 내뱉었다.“저 자를 묶어라.”곧바로 금의위가 다가가 춘향을 붙잡으려 했다.춘향은 찻주전자를 품에 꼭 끌어안고 목청을 높였다.“무슨 짓이에요? 어의께서 분명 부인이 배탈이 나신 거라 하셨어요. 누명을 씌우시면 안 됩니다! 저는 평국공 부인 사람이에요. 저를 건드리시면 안 돼요!”오원산이 눈짓을 보냈다. 금의위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춘향의 입부터 틀어막고, 찻주전자를 오원산 앞으로 가져갔다.“대인, 보십시오!”오원산은 찻주전자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곧 장치를 알아챘다.“과연, 이중 찻주전자로군.”그가 춘향을 돌아보았다.“말해라. 안에 무슨 약을 넣었느냐? 말하지 않겠다면 안에 든 차를 전부 네 입에 들이붓겠다.”춘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설연준은 몸이 묶였어도 입만은 살아있었다. 그는 오원산이 한눈을 판 틈을 타 뒤에 선 하인에게 말했다.“내 명첩을 가지고 화친왕께 가거라. 오 첨사가 도관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현정의 평온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아뢰어라.”설현정은 예비 화친왕비다. 이 소식을 듣고도 화친왕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리 없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오원산이 말했다.“평국공 부인은 배탈이 난 것이고, 설 아가씨는 달거리가 시작된 것뿐이니 두 분 다 큰 탈은 없는 셈이군. 가서 두 분 모두 모셔 오너라! 다른 사람들도 빠짐없이 불러오고.”분부를 마친 그는 금의위 둘을 남겨 설연준과 장 어의를 지키게 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위 천호, 나를 따라오게.”두 사람은 소설아의 처소 앞에 이르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들건들하며 거만을 떨던 위 천호는 표정을 싹 거두더니, 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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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사람들을 모조리 곁채로 불러 모은 뒤에야 오 첨사는 배율승과 사건의 경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배율승이 말했다.“처음에는 최 아가씨가 차를 올리며 사과를 했습니다. 평국공 부인과 설 아가씨가 그 차를 마신 뒤로 몸이 좋지 않아지셨고요.”오원산이 최희정을 힐끗 쳐다보았다.“최 아가씨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과를 한 것입니까?”배율승이 말했다.“최 아가씨가 여러 사람 앞에서 탁자를 뒤엎었습니다.”오원산이 빙긋 웃었다.“그런 일이었군요. 최 아가씨는 힘이 참으로 장사시네요.”그는 뒤에 선 위 천호에게 분부했다.“적어 두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적거라!”“예, 대인!”최희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오 대인, 이런 사소한 일까지 적어 두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오원산이 눈꺼풀을 치켜뜨고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무슨 말입니까? 최 아가씨는 지금 저에게 사건 처리하는 법을 가르치시겠다는 겁니까?”최희정이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오 대인께서는 사건을 처리하시면서 어찌 저를 모욕하십니까?! 저는 그저 우리 최씨 가문도 만만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오원산이 웃으며 말했다.“최 아가씨, 제가 언제 아가씨를 모욕했단 말입니까? 이 탁자는 아가씨께서 직접 뒤엎으신 것 아닙니까? 힘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이 탁자를 뒤엎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저에게 화를 내시는지요?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다가 저를 기습할 셈이었습니까?”“풉…”소명지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주위에서도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최희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바로 그때 밖에서 기별이 들어왔다.“오 대인, 안 어의께서 오셨습니다!”“안 어의, 마침 잘 오셨습니다. 평국공 부인과 설 아가씨를 다시 진맥하게 해서,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밝혀 봅시다!”설연준은 의자에 묶인 채 내던져진 신세였지만, 말만큼은 거침이 없었다.“오 대인, 모친께서는 배탈이 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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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평범한 차라니 잘되었군요. 그럼 안 어의께서는 진무사로 가시지요. 그곳에서 차 한잔하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안 어의의 낯빛이 변했다.“오 대인, 제가 평소에도 대인의 댁에 자주 찾아가 진료하지 않았습니까. 저와 대인의 부친께서도 예전부터 꽤 깊은 교분을 나누어 왔습니다!”오원산이 말했다.“그런 사이셨군요. 그렇게 두터운 사이시라면, 안 어의께 차를 더욱 대접해드려야겠습니다!”말이 끝나자 뒤에 선 금의위가 달려들어 안 어의를 묶었다. 그들은 어의의 고개를 억지로 젖히게 하고는 차를 들이부을 채비를 시켰다.서경수는 보다 못해 연신 혀를 내둘렀다. 과연 금의위는 독했다.설연준이 노하여 소리쳤다.“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시는 것 아닙니까! 안 어의께서는 태의원의 원판이십니다. 그분의 의술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지금 첨사 어르신께서는 고문을 가해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려 하시는 것 아닙니까! 배 장군, 서 군왕 전하, 두 분께서도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계실 수는 없을 겁니다! 금의위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앞으로는 금의위가 더욱 함부로 행동하게 될지도 모릅니다!”오원산이 말했다.“시끄럽군요.”즉시 사람이 다가가 설연준의 입을 틀어막았다.“으읍…”안 어의는 바닥에 꿇어앉아 온몸을 덜덜 떨었다.“내일 당장 입궁해 폐하께 아뢰겠습니다. 정말이지 금의위는 두려운 게 없나 봅니다!”오 첨사가 코웃음을 치더니 손을 들어 멈추라 외쳤다.“안 어의께서 폐하를 뵙겠다 하시니, 차라리 오늘 입궁하시지요. 저도 마침 폐하께 아뢰어, 안 어의께서 사내의 맥을 짚고 달거리가 고르지 않다고 진단하신 일이 대체 어찌 된 것인지 폐하께서 직접 판단하시게 하겠습니다.”안 어의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금의위가 몸집이 자그마한 어린 도사 한 명을 데려왔다.“방금 안 어의께서 맥을 짚은 사람은 이 어린 도사입니다.”그제야 사람들은 평국공 부인과 설현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오원산이 설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조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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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민씨는 최희정이 쓴 것이 평범한 설사약인 줄로만 알았다. 그토록 악랄하게 불임약까지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민씨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명주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어머니, 걱정 마세요. 전부 토하셨으니 괜찮아요.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나중에 어의를 불러 다시 맥을 짚어 보면 되고요.”소명주는 소설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소설아가 그 약을 먹었다면 좋았을 텐데.'소설아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그녀와 최희정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 쌓인 원한이 깊을 리 없었다. 배후에서 사주한 사람은 틀림없이 설현정일 터였다.서경수는 이를 드러내며 혀를 찼다.“가장 독한 것은 여인의 마음이라더니, 옛사람의 말이 틀림이 없군요!”소설아가 그를 흘겨보았다.“최희정은 여인이 아니에요. 사내가 되려는 사람이잖아요. 사내가 하는 방식대로 일을 벌였을 뿐인데, 여인과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서경수는 빙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설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서 사장님, 감축드려요. 곧 큰돈을 벌게 되시겠어요.”서경수가 곧바로 정색을 하며 옷깃을 바로잡았다.“큰돈을 벌게 된다니요?”소설아가 웃으며 말했다.“서 사장님도 차를 드시지 않았나요? 듣자니 이 불임약을 사내가 잘못 먹으면 그쪽 능력에 손상이 간다더군요. 서 사장님은 장공주마마의 외아들이시니, 후사에 지장이 생겼다고 하면 당당하게 최씨 가문에서 거액을 뜯어낼 수 있잖아요. 최씨 가문은 황실 상인이라, 재산이 나라와 맞먹는 집안이에요. 서 사장님, 곧 큰 부자가 되시겠네요!”서경수의 눈이 처음에는 반짝 빛났다가 이내 어두워졌다.“그러니까 지금 제게 사내 구실을 못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라는 말인가요?”소설아가 웃었다.“나중에 치료되었다고 하면 되지요. 서 사장님이 혼인하신 뒤 아들을 여럿 낳으시면 소문은 저절로 잦아들 거예요. 그야말로 밑천 없이 많은 이윤을 남기는 장사지요.”서경수가 입을 삐죽거렸다.“그만하시지요. 그러다 또 누가 제가 바람을 피웠다고 떠들어 댈 것 아닙니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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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설현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최희정, 그 속없는 멍청이가 잡혀가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조리 불어 버릴 게 뻔했다.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국공부와 최씨 가문의 명성은 끝장이었다.‘안 돼. 이렇게 순순히 최희정을 데려가게 둘 수는 없어!’설현정은 벌떡 일어나 최희정의 앞을 가로막았다.“저는 곧 화친왕비가 될 몸입니다. 제가 여기 있는 한, 누가 감히 희정이를 건드리는지 두고 보겠습니다!”위 천호가 말했다.“설 아가씨, 이미 아이를 가지실 수 없게 되셨는데, 최 아가씨는 무엇 하러 감싸시는 겁니까? 최 아가씨가 아가씨 목숨이라도 구해 준 적이 있습니까?”소명지도 옆에서 거들었다.“설 아가씨, 그 사람을 감싸실 게 아니라 불임약을 드신 몸을 아직 고칠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불임’이라는 말이 귓가에 박히는 순간, 설현정의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저는 희정이의 성품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이 아이가 절대로 우리를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분명 누군가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습니다!”그녀는 몸을 돌려 최희정을 와락 끌어안았다.최희정은 뜻밖의 도움에 감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현정 언니, 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설현정이 화친왕비가 될 몸이라는 신분을 내세우고 있으니, 금의위도 선뜻 나서서 사람을 붙잡지는 못했다.바로 그때, 하인이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평국공께서 오셨습니다! 화친왕 전하께서도 오셨습니다!”설현정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번졌다.잘되었다. 국공 어르신과 전하께서 함께 오셨으니, 이 일도 아직 돌이킬 여지가 있었다.추영우는 붉은 관복을 걸치고 구름 모양이 그려진 검은 신을 신고 있었다.비단 옷에 가죽 띠를 두른 채 서 있는 모습은 깊은 못처럼 고요하면서도 산처럼 우뚝했다.붉은 비단 도포는 분명 따뜻한 빛깔이건만, 눈매와 눈썹에 서린 냉담하고 서먹한 기운에 눌려 먼 산에 맺힌 찬 이슬처럼 서늘하기만 했다.추영우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곁채 안의 온도가 까닭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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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곁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특히 평국공부 사람들의 표정은 저마다 달랐다.사실 평국공은 이 혼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평국공부는 태후와 태자비를 뒷배로 두고 있었기에, 굳이 화친왕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앞날이 창창한 집안이었다.그저 설현정이 추영우를 마음에 들어 하니 마지못해 받아들였을 뿐이었다.훗날 태자가 보위에 오르면 평국공부의 지위는 추영우를 훌쩍 뛰어넘게 될 터였다.하지만 이런 이유로 설현정이 외면당한다면, 그것은 평국공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다.평국공이 말했다.“서 군왕 전하, 말씀을 삼가십시오. 현정이를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어의의 뜻을 물어봐야 알 일입니다. 안 어의, 장 어의, 다시 한번 현정이의 맥을 짚어 주시기를 청합니다.”설현정은 잇따른 충격에 정신이 크게 흔들렸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탓인지 아랫배가 다시 쑤시기 시작했다.앞서 장 어의가 침을 놓아 멎었던 출혈도 다시 조금씩 흘러내렸다.설현정은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눈시울에 맺힌 눈물이 두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 기운이 없었고, 몸은 한겨울 얼음장 같은 강물에 잠긴 듯 차갑게 떨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애끊는 슬픔이 묻어났다.‘나는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화친왕 전하께 시집갈 수도 없겠지.’평국공 부인은 그런 설현정에게 다가가 위로했다.“현정아, 정신을 차리거라. 어의가 아직 결론도 내리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하느냐?!”최희정이 설현정을 끌어안았다.“현정 언니, 걱정 마요. 제가 반드시 명의를 두루 찾아서 언니의 병을 낫게 해 드릴게요!”세 명의 피해자가 한데 모여 선 모습은 처연했지만, 동정심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안 어의와 장 어의가 차례로 설현정의 맥을 짚었다. 두 사람은 맥을 짚는 내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진맥을 마친 두 어의는 이중 주전자에 남은 차를 들어 살펴본 뒤, 한동안 낮은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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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평국공이 눈살을 찌푸렸다.소명지가 불쑥 입을 열었다.“저희 셋째 사촌 오라버니가 귀의를 스승으로 모시고 산에서 의술을 배우고 있습니다!”민씨가 눈살을 찌푸렸다.“누구 말이냐?”소명지가 말했다.“소명풍 오라버니요.”민씨는 그제야 위원후부에 그런 가난한 친척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평국공 부인이 온화한 눈매로 소명지를 바라보았다.“혹시 그분을 우리 평국공부에 소개해 줄 수 있겠느냐?”소명지가 멋쩍게 웃었다.“다만… 셋째 사촌 오라버니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요.”그저 사이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예 왕래조차 하지 않는 사이였다.“설아 언니가 셋째 사촌 오라버니와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설아 언니를 해치려다가 도리어 스스로 화를 입으셨으니, 분명 도와주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오히려 훼방을 놓을지도 몰라요.”소명주는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소명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어쩌자고 저렇게 아무 말이나 다 내뱉는지… 정말이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만 같았다. 이제는 더 캐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속사정을 짐작하고 있었고, 소명지조차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결국 설현정과 최희정이 소설아를 해치려 했다가, 도리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었다.하지만 평국공이 절대 이 일을 들추지 못하게 했기에, 모두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이 일을 끝까지 들추지만 않는다면 평국공부의 체면은 아직 지킬 수 있었다.평국공 부인 역시 소명지가 이렇게 눈치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그대로 내뱉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민씨가 황급히 꾸짖었다.“명지야, 그 입 다물거라.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서 설 아가씨께 사과드리지 못하겠느냐!”“어머니, 제가 뭘 잘못 말했다고… 읍읍읍…”소명지가 말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소명주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소명천은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어의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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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설현정은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최희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현정 언니, 왜 또 우세요? 귀의만 찾으면 언니의 병도 나을 수 있잖아요. 현정 언니, 기운 내세요!”설현정의 속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이 멍청한 아이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최희정이 고개를 돌려 추영우를 바라보았다.추영우의 눈빛은 차가운 물처럼 담담했고,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어깨와 등은 꼿꼿하게 펴져 있었으며, 온몸에서 풍기는 냉기가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주변의 소란을 갈라놓고 그만의 쓸쓸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최희정의 눈에는 화친왕 전하가 몹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현정 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화친왕 전하께서도 언니를 걱정하고 계시잖아요. 저렇게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계신 걸 보면 분명 언니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계신 게 분명해요.”설현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지금 추영우가 자신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설아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희롱하고 있었다.소설아는 어찌 그리 천박하단 말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감히 추영우에게 꼬리를 치다니!그녀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여인의 예법과 규범을 줄줄 외웠고, 거문고와 바둑, 서예와 그림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하필 소설아 같은 천한 것에게 눈길을 주시는 걸까!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러나 최희정은 설현정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재잘거렸다.“현정 언니, 안심하세요. 화친왕 전하께서는 소설아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으세요. 전하께서 들어오신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소설아는 한 번도 쳐다보지 않으셨잖아요.”설현정이 소설아를 바라보았다.소설아는 손을 들어 머리에 꽂은 비녀를 매만지고 있었다.비녀는 양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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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평국공은 그만 사레가 들렸다. 옆에 있던 최희정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전하, 그것이 아니라…”추영우가 소명지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조금 전 소씨 가문의 셋째 아가씨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어찌하여 반대하지 않은 것이냐? 이것만 보아도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의가 있다면, 나는 계속해서 조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성에서 금의위가 밝혀내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평국공은 입을 다물었다.이렇게 되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최씨 가문의 명성은 손상되겠지만, 그래도 평국공부의 체면은 지킬 수 있었다.귀의를 찾아 현정이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현정이는 여전히 화친왕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최희정이 소명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명지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소설아는 피식 웃었다.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강한 사람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그저 미련한 것에 불과했다.추영우에게는 감히 따지지도 못하면서, 만만한 사람만 골라 괴롭히는 것이었다.이어서 추영우는 서경수와 배율승을 바라보았다.“형님, 배 장군, 두 분도 차를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계속 추궁하시겠습니까?”서경수는 고개를 연신 저었다.“전하, 저와 배 장군이 마신 것은 평범한 차였습니다. 어의께서도 진맥해 보시고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하셨으니, 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겠습니다. 전 괜찮으니, 배 장군께 물어보심이 좋겠습니다.”말끝이 유난히 다급했다. 혹시라도 그쪽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살까 두려웠던 것이다.배율승도 곧바로 입을 열었다.“저도 따지지 않겠습니다.”마지막으로 추영우의 시선이 민 부인에게 향했다.“민 부인, 불임약을 잘못 복용하신 듯하구나. 지금은 별다른 영향이 없으나 훗날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는데, 이 일을 추궁하겠느냐?”평국공 부인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민 부인께서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이따가 보약을 좀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후 몸에 불편한 일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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