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의 모든 챕터: 챕터 681 - 챕터 690

732 챕터

제681화

순식간에 최희정은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그녀는 찻잔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며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 온몸까지 미세하게 떨려 왔다.찻물 수면 위로 가느다란 파문이 일렁였다.‘고모님께 마시게 할 순 없어! 고모님은 어차피 아이를 더 낳지 못하시지만, 이 약은 틀림없이 몸을 상하게 할 거야. 고모님 다음에는 곧바로 현정 언니에게 차를 올릴 텐데, 현정 언니는 한창 꽃다운 나이니 더더욱 마시게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고모님과 현정 언니가 마시지 않는다면, 소설아 저 독한 계집도 절대 마시려 들지 않겠지! 저년이… 이토록 영악할 줄이야!’최희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최희정의 수상쩍은 행동은 너무나 뻔했다. 소설아는 단번에 이 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 말이다.서경수 역시 순간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저 평범하게 사죄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제법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흥미가 동한 그는 최희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느긋한 여유가 가득했다.배율승 역시 상황을 눈치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최희정을 찬찬히 살폈다. 깊은 눈빛 속에 경계와 의심이 은은히 어려 있었다.소설아는 눈을 올려 최희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눈빛은 평소처럼 부드럽고 온화했다.하지만 최희정은 그 시선이 살을 파고들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마치 제 찔리는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보는 듯했다.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설현정이 능청스럽게 끼어들어 최희정을 감싸고 나섰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아, 그런 뜻이었군요. 전 또 소 아가씨께서 희정이를 용서해 주지 않으려는 줄로만 알았지 뭐예요.”소설아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신분이 미천한 제가 어찌 평국공 부인과 설 아가씨보다 앞설 수 있겠어요.”설현정이 거들었다.“희정아, 어서 큰어머니께 차를 올리렴.”최희정은 찻잔을 꽉 쥔 채 평국공 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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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2화

최희정은 눈앞이 아득해지며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배 도련님,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건가요?”배도혁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동그란 얼굴을 한껏 엄숙하게 굳힌 채,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설현정을 노려보았다.설현정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이제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왜요, 수줍어서 말이 안 나오는 건가?”유모가 곁에서 대신 나서며 아뢰었다.“설 아가씨, 저희 도련님께서는 모략에 능하고 간사한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설현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누가 간사하다는 거야? 저 통통한 꼬맹이 녀석이야말로 꿍꿍이가 가득하면서!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저 꼬마 녀석, 참으로 얄미운 구석이 있구나!’배도혁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두 손을 뒷짐 진 채 기고만장하게 기우뚱거리며 소설아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바짝 들어 칭찬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소설아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우리 도련님, 정말 대견하네요.”최희정은 탁자 위에 순서가 엉망으로 섞여 버린 다섯 잔의 차를 내려다보며 또다시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침묵이 길어져 괜한 의심을 살까 봐 조바심이 난 설현정이 얼른 새 차를 한 잔 따라 자연스럽게 최희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먼저 큰어머니께 차를 올려라.”최희정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현정 언니는 역시 똑똑해.’그녀는 찻잔을 모아 들고 평국공 부인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였다.“고모님, 제가 고모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실망을 안겨 드렸습니다.”평국공 부인이 차를 받아 한 모금 축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희정아, 난 네가 본래 착한 아이라는 걸 안다. 허물을 깨닫고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선함은 없으니, 이제라도 뉘우쳤으면 되었느니라.”사실 평국공 부인 역시 최희정의 수상쩍은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두 아이가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았기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알지 못할 뿐이었다. 분명, 방금 최희정이 소설아에게 올리려 했던 그 차에 분명 문제가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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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3화

평국공 부인은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아랫배가 쥐어짜듯 아릿한 것이, 꼭 음식을 체하게 먹은 듯한 불쾌한 통증이었다. ‘오늘 아침 죽 한 그릇을 든 게 전부라 딱히 탈이 날 만한 것도 없었건만…’마침 달거리 주기가 다가왔던 설현정 역시 아랫배가 묵직하게 조여 오더니 하반신이 젖어 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달거리가 시작된 모양이라 여긴 그녀는, 소설아가 차를 완전히 마시는 광경을 확인한 후 옷을 갈아입으러 갈 참이었다.이제 막 터진 참이니 혈의 양이 그리 많지는 않을 터, 잠시 후에 다녀와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다행히 이곳은 규율이 그나마 완만한 도관이라, 달거리 중이라 해서 엄격하게 자리를 피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밑에 힘을 주며 살그머니 괄약근을 바짝 조였다.최희정은 손에 집히는 대로 찻잔을 하나 집어 들고는 민씨 앞으로 걸어갔다. “민 부인, 제 결례를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민씨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최 아가씨,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말을 마친 민씨는 차를 살포시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나 차를 목으로 넘기지 않고 입안에 가만히 품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을 때 몰래 뱉어낼 작정이었다. 최희정의 태도가 워낙 기괴하고 수상쩍었던 탓에 함부로 삼킬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민씨에게 차를 올린 최희정의 시선이 마침내 소설아에게 닿았다. 그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격이 떠올랐다. 최희정은 차가 놓인 탁자로 다가가 위에 놓인 네 잔의 차를 재빨리 훑었다. 두 잔은 설현정이 나중에 따른 것이라 여전히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남은 두 잔은 자신이 처음에 따른 것이라 이미 김이 완전히 식어 있었다.그렇다면 방금 민씨에게 올린 차 역시 약이 든 차였다는 뜻이었다. 최희정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스스로의 기지에 뿌듯해했다.그녀는 식어 버린 찻잔 하나를 집어 들어 두 손으로 살포시 받쳐 들고는 소설아에게 다가갔다. “소 아가씨, 제 결례를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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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4화

최희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배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죠?”배도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오동통한 고사리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더니, 최희정 앞으로 불쑥 내밀며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설현정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배 도련님이 왜 저러시지?”원래 배도혁은 소설아가 물을 때만 입을 여는 아이였다. 평소 이런 상황에서는 유모가 아이의 뜻을 대신 전하곤 했다.유모가 큰 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까 최 아가씨의 의자를 걷어차 넘어뜨리셨으니, 사죄의 뜻으로 직접 차를 올리겠다고 하십니다. 아가씨께서 꼭 한 잔 받아 주셔야 한답니다. 그래야 도련님도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뉘우친 셈이 된다면서요. 사죄의 뜻으로 올리는 차이니, 체면을 보아서라도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마셔 달라고 하셨습니다.”최희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배율승이 최희정을 향해 가볍게 손을 모으며 거들었다. “최 아가씨, 결례를 범했습니다. 요새 아이가 남을 따라 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답니다.”상황이 이쯤 되니 최희정은 꼼짝없이 차를 마셔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소설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원래는 실수인 척 찻잔을 엎지를 생각이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에 그저 여유롭게 최희정을 지켜보기로 했다.최희정이 마시지 않는 한, 소설아 역시 찻잔에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최희정이 어찌 선뜻 그 차를 마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찻잔을 받아 드는 것조차 겁이 났다. 배 도령의 손에 들린 저 찻잔 속에 불임약이 들어 있을지, 아니면 그저 평범한 찻물일지 그 누가 안단 말인가.유모가 재차 목소리를 높여 재촉했다. “최 아가씨, 어서 드시지요. 도련님께서 은근히 고집이 있으셔서 아가씨께서 차를 드시지 않으면, 아직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조금 전 설현정이 소설아에게 내세웠던 핑계를, 이제는 유모가 그대로 최희정에게 돌려주고 있었다.최희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설아를 힐끗 바라보았다.소설아는 찻잔을 든 채 생글생글 웃으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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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5화

사람들은 최희정의 시선을 따라가고 나서야 설현정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현정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의자 등받이를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그토록 오래 숨죽여 기다렸건만, 끝내 소설아가 그 불임약을 마시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눈앞이 캄캄해진 설현정은 이내 정신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현정 언니, 왜 그러세요? 여봐라! 어서 사람을 보내 의원을 모셔 오너라!”원래라면 이럴 때 평국공 부인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고개를 돌려보니, 평국공 부인 역시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기력이 쇠해 있었다.그때 배율승이 앞으로 나섰다.“여봐라, 당장 평국공 부인과 설 아가씨를 처소로 모시어라! 내 명패를 가지고 가서 어의를 모셔 오너라! 그리고 찻주전자와 찻잔을 빠짐없이 거두어 밀봉해라! 누군가 찻물에 약을 탔을 가능성이 있다!”호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장한 친위대 병사들이 들이닥쳐 대리석 원탁을 겹겹이 에워쌌다.최희정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가장 믿었던 설현정이 기절해 버린 데다, 이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최희정은 그저 하녀들의 뒤를 따라 설현정을 처소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현정 언니가 깨어난 뒤에 어떻게든 방도를 찾는 수밖에.’한편, 민씨는 깜짝 놀라 아연실색했다.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탁자 위에 놓인 식은 차를 집어 들어 급히 입안을 헹궈 냈다.남몰래 찻물을 입안에서 뱉어 내긴 했지만, 혹시라도 약기운이 남아 있을까 두려웠던 것이다.대체 최희정이 무슨 약을 탔기에 이토록 독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최희정 그 아이도 참 멍청하기 짝이 없지. 소설아 하나를 해치겠다고 설현정에 평국공 부인까지 희생양으로 삼다니 말이야.”“소설아가 얼마나 교활한 년인데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가겠어요?”소명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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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6화

“큰어머니께서 어찌 몸이 안 좋으신 걸까? 대체 무슨 일이람?”‘설마 찻물을 마셔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큰어머니께 올린 차는 내가 직접 따른 것이니, 절대 문제가 될 리가 없어!’설현정이 기운 없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을 때, 하녀가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현정 아가씨, 어의께서 오셨습니다.”배율승이 보낸 첩지가 있었기에 어의가 이토록 빨리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설현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어째서 너의를 먼저 큰어머니께 모시지 않았느냐?”하녀가 대답했다.“국공 부인께서 몸이 많이 나아지셨다며, 어의께 현정 아가씨부터 먼저 진찰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큰어머니의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는 말을 들은 설현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나아지셨다면 찻물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겠지.’설현정은 평소에도 달거리를 할 때마다 통증이 심한 편이었다. 어의 역시 나중에 시집가 아이를 낳고 나면 한결 나아질 것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최희정은 안방으로 물러났고, 하녀는 침상 휘장을 내려 드리웠다.설현정은 손을 내밀어 어의에게 진맥을 맡겼다. 평소에도 달거리만 하면 어의를 불러 진맥을 받고 침을 맞거나 약을 지어 먹곤 했기에, 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으리라 여겼다.하지만 이번에는 어의가 맥을 짚는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맥을 다 짚고도 어의는 맥침을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아가씨, 반대쪽 손도 내어 주십시오.”설현정의 가슴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점점 짙어졌다. 그녀는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을 내밀었다.어의는 계속해서 맥을 짚었다.맥을 짚는 내내 어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그의 미간만 보아도 설현정의 증상이 단순한 생리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찻물 한 잔을 마실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어의가 마침내 손을 거두었다.설현정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어의는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대답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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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7화

어의가 침을 놓고 뜸을 뜬 뒤에야 평국공 부인의 통증은 다행히 한결 가라앉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윙윙 울리고 관자놀이가 터질 듯이 지끈거렸다.“수고하셨습니다.”평국공 부인은 곁에 서 있던 하녀 춘향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춘향아, 어의를 배웅해 드리거라.”“예, 부인.”춘향은 어의를 처소 밖으로 배웅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품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 조용히 내밀었다.“수고 많으셨습니다. 부인께서 주시는 진료비이니 거두어 주십시오.”장 어의는 은표의 액수를 슬쩍 확인하고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국공 부인께서 너무 과하게 주셨습니다.”춘향은 은표를 어의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며 당부했다.“부인의 뜻입니다. 밖에서는 부인께서 배탈이 나셨고, 현정 아가씨는 달거리를 하는 중이라 두 분 모두 큰 지장은 없다고 말씀해 주십시오.”장 어의는 더는 사양하지 않고 은표를 받아 품에 넣었다.“국공 부인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그는 태의원에서 오랫동안 의술을 펼치며 후궁과 명문가의 은밀한 일들을 숱하게 보아 왔다.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오래 버티기도 어려웠을 터였다.어의가 돌아가자, 평국공 부인은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당장 설현정과 최희정을 데려오너라!”설현정이 막 문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찻잔 하나가 발밑으로 날아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고모, 왜 그러세요? 손이 미끄러지셨어요?”최희정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또 다른 찻잔이 정확히 그녀의 발밑으로 날아와 산산조각이 났다.“당장 꿇어앉지 못할까!”최희정과 설현정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일이 탄로 났음을 직감한 두 사람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무릎을 꿇은 최희정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소리쳤다.“고모, 벌하시려거든 저를 벌하세요. 다 제가 낸 생각이지, 현정 언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설현정이 뒤이어 말했다.“큰어머니, 저를 벌하십시오. 제가 희정이를 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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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8화

혹여 누군가 눈치챌까 봐 미리 손을 써 둔 것이었다.하지만 최희정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뒤의 네 잔에 모두 약이 든 찻물을 따라 버렸다. 차를 다 따른 뒤에도 찻주전자의 장치를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은 채 상 위에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다.설현정은 최희정이 장치를 되돌려 놓았으리라 믿었다. 그 결과 자신이 직접 따른 두 잔의 차에는 모두 약이 들어가고 말았다.스스로는 천의무봉한 완벽한 계책이라 여겼으나, 정작 최희정이라는 어리석은 동조자의 존재를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사정의 내막을 모두 파악하고 자신이 불임약을 마셨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설현정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뒤이어 최희정의 배도 쥐어짜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목놓아 울부짖었다.“고모님, 저 정말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겠죠? 전 겨우 한 모금밖에 안 마셨어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부디 절 구해 주세요! 전 나중에 아들도 낳아야 한단 말이에요!”평국공 부인은 모든 일의 원흉인 최희정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우리 최씨 가문에서 어떻게 저런 멍청이가 태어났단 말인가!’평국공 부인은 깊이 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내 명함을 들고 가서 당장 온 원판을 모셔오너라!”온 어의는 태의원의 원판으로, 태의원에서도 손꼽힐 만큼 의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국공부와도 가까운 사이였다.온 어의를 불러온다면 어쩌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을지 몰랐다.시녀가 밖으로 나가 하인에게 뜻을 전한 뒤 돌아와 아뢰었다.“부인, 장 어의께서는 아직 도관에 계십니다. 온 원판께서 오시기 전에 장 어의를 먼저 불러 아가씨를 진찰하게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장 어의의 의술도 제법 훌륭해 보였습니다. 침을 놓으시자마자 설 아가씨의 통증도 가라앉았으니까요.”평국공 부인이 날카롭게 호통을 쳤다.“멍청한 짓 마라! 장 어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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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9화

어의가 산문에 미처 다다르기도 전에 배율승의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평국공 부인과 설 아가씨께서는 대체 어찌 되신 겁니까?”장 어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배 장군님, 평국공 부인께서는 음식을 잘못 드신 것이고, 설 아가씨께서는 달거리 중이십니다. 소생이 침을 놓아 드렸으니 두 분 모두 이미 한결 나아지셨을 것입니다.”배율승은 그 순간, 평국공 부인이 이미 손을 써두었음을 눈치챘다.오늘 일은 십중팔구 최희정이 남을 해치려다 도리어 제 발등을 찍은 것이리라.다행히 소 아가씨는 영민하여 화를 입지 않았다.“번거로우시겠지만 소 아가씨의 맥도 한번 짚어 탈이 없는지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진찰이 끝나는 대로 제가 사람을 붙여 산 아래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배율승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장 어의를 소설아의 처소로 안내하게 했다.서경수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졌다.“배 장군님, 조금 전 편전에서 소 아가씨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정작 차를 마신 것은 민씨 부인이니, 잘 살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듯합니다만.”그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게다가 장군과 나 역시 차를 마셨는데 진맥이 필요 없단 말입니까? 어찌 소 아가씨의 맥만 짚는다는 것인지. 제가 보기엔 모두가 어의의 진찰을 받아야 마땅한데, 유독 소 아가씨만은 예외로 두시는 듯합니다.”배율승이 픽 웃었다.“조금 전 편전에서 제가 보기에 소 아가씨의 낯빛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필시 입을 떼기 부끄러워 참고 계신 듯하니, 어의가 온 김에 겸사겸사 진찰을 받아두는 것이 신중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서경수가 미소로 응수했다.“배 장군은 참으로 세심하시군요.”조금 전 편전에서 소설아는 속으로 신이 나 죽을 지경이었는데, 배 장군이 대체 어디를 봐서 그녀의 낯빛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이 배 장군이라는 자, 소설아에게 무슨 딴마음이라도 품은 게 분명했다.배율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서 군왕 전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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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0화

“연준아, 어미도 네가 한순간에 이 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안다. 허나 지금은 반드시 그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 어미가 너를 위해 더 좋은 아가씨를 찾아주마.”설연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노릇이었다.악독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가족이었다. 남을 해치려다 도리어 자신들이 화를 입은 것이다.소설아는 여전히 백옥처럼 흠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설연준이 최희정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현정이와 희정이는 어찌하여 그 아이를 해치려 한 것이냐? 그 아이는 장차 내 아내가 될 사람이다. 그 아이가 아들을 낳지 못하게 만든다고 해서 나에게 무슨 득이 있단 말이냐?”사실 설현정은 이미 깨어 있었지만, 이 힐책을 듣고도 끝내 정신을 잃은 척했다.최희정이 흐느끼며 말했다.“오라버니, 소설아 그 사람은 간계가 많고 천성이 음란해요. 배 장군과 서 군왕 전하를 유혹한 것도 모자라 화친왕 전하까지 차지하려 한다고요… 흑흑… 오라버니, 저희가 이런 일을 벌인 것도 모두 평국공부를 위해서였어요. 훗날 그 여자가 평국공부의 혈통을 어지럽힐까 두려웠던 거예요…”설연준이 말했다.“그야말로 허튼소리다! 그 아이를 집안에 들인 뒤에는 내가 알아서 가르칠 것인데, 너희가 어찌 쓸데없이 참견한단 말이냐! 내가 보기엔 너희야말로 자업자득이다!”최희정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스쳤다.“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그 외간 사람 때문에 저를 이토록 모욕하시다니… 흑흑… 고모님, 저 너무 억울해요……”설연준이 말했다.“억울하긴 뭐가 억울하다는 것이냐, 이 멍청한 것아. 네가 아니었으면 어머니와 현정이도 이런…”평국공 부인이 말을 끊었다.“됐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더 말할 것 없다.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설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체면을 지킬 방도를 찾는 것이다.”설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어머니, 어찌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평국공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준아, 너는 대국을 볼 줄 아는 아이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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