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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핏빛 유산: Chapter 91 - Chapter 100

128 Chapters

91화 — 본진의 문

사고 현장 위로 아직도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회장의 피 묻은 얼굴, 찌그러진 차량, 그리고 그 옆에 선 서아. 그 모든 장면은 이미 실시간으로 퍼지고 있었다.도윤의 태블릿 화면 위 숫자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공유 속도 계속 증가합니다. 회장님 발언, 주요 커뮤니티랑 언론 계정으로 퍼졌습니다.”지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민서윤, 제대로 물 먹었네.”태준은 지연이 빼앗아온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화면 한가운데 떠 있는 단체방 이름.Committee Core서아는 그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열 수 있어?”도윤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잠금은 풀려 있습니다. 방금 운전자가 급하게 도망치면서 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내부 메시지 일부는 자동 삭제 설정입니다.”태준이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 봐야 해.”회장이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말했다.“조심해라.”서아가 그를 돌아봤다.“왜요.”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그 안에는 민서윤 하나만 있는 게 아닐 거다.”지연이 피식 웃었다.“위원회 본진이라 이거지.”도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접속합니다.”화면이 열렸다.짧은 메시지들이 빠르게 지나갔다.M.S.Y: 발표 전 차단 실패.K-Node: 회장 발언 확산 중.L-9: 혈연 프레임 전환 실패.M.S.Y: S-01 직접 대응 단계로 전환.Core-1: N-12 회수 가능성 재검토.Core-3: Y-00 노출. 기존 폐기라인 복구 필요.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Y-00.”태준이 낮게 말했다.“네 어머니.”지연이 화면을 노려봤다.“폐기라인 복구라니. 아직도 사람을 문서처럼 말하네.”서아는 도윤에게 말했다.“계속 내려.”도윤이 메시지를 더 열었다.그 순간 새 메시지가 떴다.M.S.Y: 회장 제거 실패. 다음 대상 전환.공기가 얼어붙었다.태준이 바로 물었다.“다음 대상?”도윤이 메시지를 따라갔다.몇 초 뒤, 다음 문장이 올라왔다.M.S.Y: N-12 위치 재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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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 미끼를 문 사람

민서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그 짧은 변화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늘 사람을 숫자로 읽고, 반응을 계산하고, 감정을 조건값으로 처리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이 계산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서아는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도로 한가운데. 앞에는 민서윤. 뒤에는 회장 차량. 옆에는 태준. 그리고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는 지연이 검은 차량 쪽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민서윤이 낮게 말했다.“네가 미끼였다고?”서아가 대답했다.“응.”짧은 침묵.“하윤이도, 엄마도 아니고.”민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그래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아니.”서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이제 시작이라고 했잖아.”민서윤은 서아 뒤쪽을 훑었다. 태준, 도윤이 탄 차량, 피 묻은 얼굴로 안쪽에 앉아 있는 회장.그리고 다시 서아를 봤다.“하윤은 어디 있지.”서아의 눈빛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그 이름 네 입에 올리지 마.”민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이름을 되찾았다더니, 더 예민해졌네.”“아니.”서아가 낮게 말했다.“이제 그 이름이 뭔지 알았으니까.”짧은 정적.“네가 숫자로 덮으려고 했던 사람 이름.”민서윤은 바로 흔들리지 않았다.“이름은 감정을 붙이는 도구야. 감정은 판단을 흐리고, 흐린 판단은 아이를 위험하게 만들지.”태준이 옆에서 이를 악물었다.“아직도 그 말을 해?”민서윤의 시선이 태준에게 갔다.“강태준. 넌 늘 늦어. 알고도 늦고, 움직이고도 늦고, 지키려 해도 늦지.”태준의 얼굴이 굳었다.서아가 바로 말했다.“태준 건드리지 마.”민서윤의 눈이 다시 서아에게 향했다.“보호하나?”“아니.”짧은 숨.“내 앞에서 시간 끄는 거 보기 싫어서.”그 말에 태준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서아는 그를 보지 않았다.서아의 시선은 오직 민서윤에게 고정돼 있었다.“네가 S-01 생포 승인했지.”민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아는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Core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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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 강씨 피 안쪽

도로 위에 남은 것은 부서진 차와 깨진 유리,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피 냄새였다.민서윤의 차량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위원회 사람들도 철수 명령을 받은 듯 하나둘 물러났다. 하지만 누구도 안도하지 못했다.끝난 게 아니었다.오히려 지금 막, 더 깊은 문이 열린 참이었다.서아는 천천히 회장을 바라봤다.“Core-2.”짧은 침묵.“누구예요.”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 너무 길었다. 서아는 이제 그 침묵의 의미를 안다.몰라서가 아니라, 말하기 싫어서. 말하면 무너지는 게 있어서. 그럴 때 회장은 항상 이렇게 침묵했다.서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또 미루실 건가요?”회장의 얼굴은 피로 젖어 있었고,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서아.”“제 이름 부르지 말고 대답하세요.”서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민서윤이 문지기라고 했어요. 뿌리는 강씨 피 안에 있다고 했고요. Core-2는 강씨 성이고, 회장님은 지금 그 이름을 듣자마자 굳었어요.”짧은 정적.“그러니까 아는 사람이잖아요.”지연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회장님, 지금 이 분위기에서 모른다고 하시면 진짜 너무 티 나요.”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장과 서아 사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도윤은 태블릿을 확인하며 말했다.“Core-2 코드 일부 더 복구 중입니다. 아직 전체 이름은 안 열렸지만, 강씨 성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태성 내부 옛 법무라인과 연결 흔적이 있습니다.”회장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서아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법무라인.”짧게.“그 사람, 태성 안쪽 사람이네요.”회장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 이름을 꺼내면.”짧은 숨.“태성은 지금보다 더 크게 흔들린다.”서아는 차갑게 웃었다.“아직도 태성이 먼저예요?”회장은 고개를 저었다.“아니다.”“그럼 말하세요.”회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태준이 낮게 말했다.“회장님.”회장의 시선이 태준에게 옮겨갔다.태준은 조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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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 안전한 집은 없었다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차 안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민서윤은 문지기였고, Core-2는 강도현. 회장의 형. 태성의 피 안쪽에서 사람의 이름과 혈연을 유산처럼 관리해온 사람.그리고 그가 있는 곳이 강릉이었다.서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하윤의 작은 손을 떠올렸다. 조금 전까지 품 안에 있던 따뜻한 체온. 이제 겨우 이름을 되찾은 아이.그 아이가 향하는 곳이 정말 은신처인지, 아니면 더 오래된 덫인지 알 수 없었다.도윤이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민유라 씨 차량 위치 잡았습니다. 강릉 외곽 진입 직전입니다. 아직 추격 차량은 붙지 않았습니다.”서아가 바로 물었다.“근데?”도윤은 잠깐 망설였다.“강도현 접속 위치와 거리가 계속 가까워집니다.”지연이 뒷좌석에서 낮게 욕을 삼켰다.“우연일 리 없지.”태준은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했다.“Core 방에서 새 메시지 떴어.”서아가 돌아봤다.“읽어.”태준은 화면을 한 번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Core-2: Y-00 귀환 가능성 상승. Garden House 관찰 단계 유지.”차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서아가 천천히 되물었다.“Garden House?”도윤이 바로 검색을 돌렸다.“공식 시설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강릉 쪽 태성문화재단 산하 시설 중 비공식 명칭으로 Garden 계열이 붙은 곳이 있습니다.”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G-17, Garden Line, Garden House.”태준이 낮게 말했다.“전부 같은 계열이야.”서아는 회장을 봤다.“아세요?”회장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잠깐의 침묵만으로도 서아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또네요.”회장이 낮게 말했다.“이름은 들어봤다.”서아는 웃지 않았다.“그 말, 이제 지겨워요.”회장은 고개를 숙였다.“강도현이 쓰던 말이다. Garden. 보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관찰과 격리 사이를 뜻했다.”도윤이 말했다.“그러면 강릉 집이 단순 은신처가 아니라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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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 유산의 규칙

“그럼 그 문, 내가 열게.”서아의 말이 떨어지자 강도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서아는 바로 말했다.“대신 먼저 조건이 있어.”강도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조건을 거는 버릇이 있군.”“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니까.”서아는 하윤이 있는 차를 가리켰다.“엄마랑 하윤이를 우리 쪽 차로 옮겨. 그다음 내가 들어가.”강도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민유라가 탄 차량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민유라는 하윤을 품에 안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그러나 아이를 안은 팔만큼은 단단했다.강도현이 낮게 말했다.“유라는 늘 도망칠 곳을 만들었다.”서아가 차갑게 답했다.“당신은 늘 그 도망칠 곳까지 따라왔고.”강도현은 서아를 보았다.“그 집을 남겨둔 건 나다.”“그러니까 이번엔 당신 뜻대로 안 들어가.”짧은 정적.“엄마랑 하윤이 먼저.”태준이 서아 옆으로 다가왔다.“내가 데려올게.”서아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아니. 지연이가 가.”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서아.”“넌 내 옆에 있어.”짧은 침묵.“저 사람은 네가 움직이는 것도 보고 있을 거야.”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연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나 또 쓰네.”서아가 낮게 말했다.“이번엔 믿어서.”지연의 얼굴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런 말 갑자기 하지 말라니까.”“가.”지연은 대답 대신 민유라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가벼워 보였지만, 손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돼 있었다.강도현은 막지 않았다.그가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짧게 손짓했다.“물러서라.”검은 옷의 남자들이 몇 걸음 뒤로 빠졌다.민유라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하윤은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든 채 작은 숨을 쉬고 있었다. 지연이 얼른 다가가 주변을 확인한 뒤, 낮게 말했다.“괜찮아요. 빨리 움직여요.”민유라는 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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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 묻힌 이름들

바닥 아래로 열린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집 안의 불은 꺼졌고, 현관문은 잠겼다. 밖에서는 지연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언니! 들려? 강서아!”도윤의 목소리는 이어폰 속에서 끊겨 있었다. 잡음만 희미하게 튀었다.태준은 서아의 팔을 잡은 채 현관 쪽을 한 번, 열린 계단을 한 번 바라봤다.“지금 내려가면 저 사람 뜻대로 움직이는 거야.”서아는 어둠 속 계단을 내려다봤다.“이미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도 저 사람 뜻이었어.”“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조심할 거야.”서아는 태준을 봤다.“근데 피하면 안 돼.”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서아.”“하윤이를 지키려면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해. 엄마가 숨긴 집이 왜 관찰점이 됐는지, 강도현이 왜 나를 기다렸는지, 왜 나더러 유산을 받으라고 했는지.”짧은 숨.“그 답이 저 아래 있잖아.”태준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때 뒤쪽에서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먼저 내려가겠다.”서아가 돌아봤다.회장은 아직도 이마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이상하게 또렷했다.서아는 차갑게 말했다.“몸 상태로요?”회장은 강도현을 노려봤다.“저 사람은 내 형이다.”강도현은 계단 입구에 서서 조용히 웃었다.“그래. 그래서 네가 제일 늦게 내려와야 한다, 무진아.”회장의 얼굴이 굳었다.강도현은 천천히 말했다.“너는 늘 바닥을 보지 않으려 했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고, 중간에서 모른 척하고, 마지막엔 인정하지 않은 채 물러섰지.”짧은 침묵.“오늘은 끝까지 봐라.”서아가 그 말을 잘랐다.“회장님은 뒤에 계세요.”회장이 서아를 봤다.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이번엔 회장님이 먼저 막는 그림 필요 없어요. 제가 보고, 제가 판단할 거예요.”“위험하다.”“계속 위험했어요.”짧은 정적.“다만 지금은 제가 위험한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그 말에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태준은 서아 옆에 섰다.“그럼 같이 내려가.”서아는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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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 왕관의 덫

UPLOAD COMPLETE.그 문장이 지하 기록실 모든 화면에 떠오른 순간, 강도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평정이 사라졌다.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 관리해온 질서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사람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서아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Blood Approval Authority leaked.Signatory: Kang Do-hyun.강도현의 이름. 태성의 피를 승인하고 지우던 자의 이름. 그 이름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갔다.위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거칠게 쏟아졌다.“언니!”지연이 먼저 뛰어 내려왔다. 손에는 부서진 잠금장치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 뒤로 도윤이 장비 가방을 메고 내려왔고,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서아 씨, 괜찮습니까?”서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랑 하윤이는?”지연이 바로 답했다.“차 안. 내 사람 둘이 붙어 있어. 문 잠그고 있어. 지금은 안전해.”그제야 서아의 어깨에 아주 짧은 힘이 빠졌다.하지만 태준은 여전히 강도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끝난 거 아닙니다.”강도현은 조용히 웃었다.“그래. 끝난 게 아니지.”그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지연의 얼굴이 구겨졌다.“아니, 이름 까였는데도 왜 이렇게 여유로워?”강도현은 지연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서아에게 고정돼 있었다.“강서아.”서아는 차갑게 대답했다.“내 이름 부르는 거 허락한 적 없어.”“네가 방금 뭘 했는지 알고 있나.”“당신 이름을 공개했지.”“아니다.”강도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너는 유산의 문서를 열었고, 네 생체키로 원본에 접근했으며, 외부망으로 전송했다.”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도윤이 급히 단말을 확인했다. 몇 초 뒤 그의 표정이 굳었다.“서아 씨.”태준이 바로 물었다.“뭔데.”도윤은 화면을 확대했다.“전송된 파일에 접근 로그가 같이 붙었습니다. S-01 생체 접근, 원본 권한 열람, 외부 전송 승인.”지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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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 300초의 이름들

285.숫자가 내려가고 있었다.지하 기록실의 모든 화면이 붉게 깜박였다. 캐비닛 안의 오래된 문서들, 벽면을 채운 서버 장치, Y-00과 S-01, N-12로 이어진 파일들.그리고 그 아래 묻힌 수많은 이름들.강도현은 화면 앞에 서 있었다.“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 가져갈 순 없다.”서아는 그를 보지 않았다.“도윤.”“네.”도윤은 단말 앞에 주저앉듯 앉아 장비를 연결했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전체 복사는 불가능합니다. 5분 안에 이 기록실 전체를 긁는 건 무리예요. 우선순위 정해야 합니다.”태준이 바로 말했다.“Y, S, N 라인 전체.”회장이 벽에 기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아니. 혈연 승인권 원본과 Founder Line 프로토콜도 같이 가져가야 한다. 그게 없으면 강도현이 개인 일탈로 빠져나간다.”지연이 계단 위에서 소리쳤다.“그럼 다 가져가! 왜 자꾸 고르래!”도윤이 이를 악물었다.“시간이 없습니다!”267.서아는 화면을 봤다.“도윤, 이름부터.”도윤의 손이 멈췄다.“네?”서아가 말했다.“코드 말고 이름.”강도현의 시선이 서아에게 향했다.서아는 차갑게 말했다.“Y-00, S-01, N-12처럼 숫자로 묻힌 사람들. 그 이름부터 긁어.”도윤의 눈빛이 바뀌었다.“전체 문서가 아니라 인덱스.”“응.”“코드와 실명 매칭표를 먼저 빼내면, 나중에 다른 자료가 일부 손상돼도 피해자 목록은 남습니다.”태준이 바로 이해했다.“그리고 승인권 문서와 연결하면 누가 지웠는지도 남아.”회장이 낮게 말했다.“그걸 가져가라. 그게 뿌리다.”강도현의 얼굴이 처음으로 날카롭게 굳었다.“그 명단은 안 된다.”서아가 그를 봤다.“왜.”“그 이름들이 밖으로 나가면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다친다.”서아는 한 걸음 다가갔다.“당신이 언제부터 그 사람들 걱정했어?”강도현은 낮게 말했다.“이름은 보호이기도 하다.”서아가 웃었다.“아니.”짧은 숨.“당신한테 이름은 목줄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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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 지워진 피의 후손

불타는 집은 생각보다 오래 타지 않았다.겉으로는 작은 불길뿐이었다. 하지만 땅 아래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 났다. 지하 기록실이 하나씩 주저앉는 소리였다.태성의 피를 승인하고, 지우고, 분류해온 기록들. 엄마들의 이름. 아이들의 코드. 유지, 관찰, 폐기라는 말로 사람을 나눴던 문서들.그중 일부는 사라졌다.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도윤의 장비 안에는 피해자 인덱스가 남았다. 회장의 손에는 Y-01 봉투가 있었다. 서아의 품에는 Y-00, S-01, N-12 파일이 있었다.그리고 하윤은 민유라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서아는 불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지연이 옆에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언니,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 불 났다고 신고 들어가면 경찰이든 소방이든 올 거고, 그 전에 위원회 쪽도 다시 붙을 수 있어.”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이동해야 해.”서아는 하윤을 바라봤다.“엄마.”민유라는 하윤을 꼭 안은 채 대답했다.“응.”“괜찮아?”민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하윤이도… 아직은 괜찮아.”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윤이 작게 몸을 뒤척였다. 서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조금 전,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한 하윤이의 작은 손이 떠올랐다.그 반응은 하윤을 구했다.하지만 동시에 또다시 시스템 안에서 사용될 뻔했다.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다시는 안 돼.”태준이 그녀를 봤다.“뭐가.”“하윤이 반응.”짧은 침묵.“다시는 저 사람들 조건값으로 쓰이게 안 해.”민유라의 눈가가 젖었다.“서아야…”서아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엄마도 마찬가지야. Y-00, 민유라, 한서윤. 저 사람들이 어떤 이름을 붙였든 이제 우리가 정해.”민유라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때 도윤이 장비를 들여다보다가 낮게 말했다.“서아 씨.”모두의 시선이 도윤에게 향했다.도윤은 복사된 인덱스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Y-01 아이 기록, 일부 더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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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 법의 얼굴

《핏빛 유산》100화 — 법의 얼굴서울로 향하는 차 안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강릉 바닷가의 불빛은 이미 멀어졌고, 창밖에는 새벽을 앞둔 검은 고속도로만 길게 이어졌다. 도윤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한재욱이 보낸 답장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서울로 오십시오. 단, 아이는 데려오지 마십시오.서아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태준이 낮게 말했다.“마음에 걸려.”서아가 묻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아이를 데려오지 말라는 말?”“응. 함정일 수도 있어. 네 약점을 일부러 떼어놓은 거니까.”회장이 조수석에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한재욱은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직접 위협하지 않아. 상대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게 만든 뒤, 법으로 길을 끊는다.”서아는 손에 쥔 Y-01 봉투를 내려다봤다.오래된 봉투. 그 안에 있던 한 여자와 아이의 기록. 지워진 엄마. 방계 가문으로 흡수된 아이. 그리고 지금의 한재욱.“그 사람도 피해자였죠.”회장은 대답하지 못했다.서아는 고개를 들었다.“그런데 지금은 하윤이 이름을 막으려고 해요.”도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한재욱 쪽에서 긴급 가처분 초안이 실제 법원 접수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아직 정식 접수 전이지만, 준비는 끝났습니다.”태준이 이를 악물었다.“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넣을 수도 있어.”서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넣지 않을 거야.”태준이 그녀를 봤다.“왜 그렇게 생각해.”서아는 Y-01 봉투를 손끝으로 눌렀다.“이걸 봤으니까.”짧은 침묵.“그 사람은 자기 이름이 나오는 걸 두려워해. 그런데 단순히 들킬까 봐가 아니야.”회장이 낮게 물었다.“그럼 뭐냐.”서아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자기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나오면, 지금까지 자기가 만든 법이 전부 다르게 읽히니까.”차 안이 조용해졌다.서아는 이어 말했다.“가해자였기만 하면 버티기 쉬워요. 권력자였으니까. 그런데 피해자였던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다른 피해자를 묶었다는 게 드러나면, 그건 변명이 아니라 선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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