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는 예리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녀의 뒤를 서준이 그림자처럼 따랐다.홀로 남은 예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대가만 따진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가 결정을 방해하고 있었다.커플 매니저로서 직업윤리 같은 건 없었다.굳이 만들자면 사랑을 철저히 비즈니스 수단으로 여기는 것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고객의 마음은 철저히 배제되었다.그저 이득이 되는 조건을 계산하고 유효기간이 넉넉한 상대를 골라주면 그만이었다. 사랑을 운운하던 고객들도 조건에 딱 맞는 상대를 마주하면 금세 말을 바꾸곤 했으니까.예리가 업계 1위의 위상을 일궈낸 것도 이런 비정한 태도 덕분이었다.그런데 왜일까. 죽은 줄 알았던 양심이 자꾸만 옆구리를 찔러댔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를 거 없잖아…?”지금껏 처리해 온 수만 건의 의뢰와 해미의 의뢰나 본질은 같았다.VIP 전담팀이 상대하는 고객들의 요구는 99%가 일치했다. 집안에서 정해준 기준에 부합하는 재력과 배경을 갖춘 가장 매칭률 좋은 조각을 찾을 것.그들이 제시한 기준에 당사자의 진정한 사랑이나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그저 이 조각 저 조각을 비교하며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줄 맞춤형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 전부였다.결국 최고의 상대를 찾는 부모들이나, 최악의 상대를 찾는 박 회장이나 도긴개긴이었다.잠시 희생양이 될 유은호가 떠올랐지만, 예리는 금세 생각을 털어냈다.사랑에 빠질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해미의 함정에 빠져 지옥을 맛볼지 아니면 무사히 피해 갈지는 결국 그의 선택에 달린 문제였다.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을 괴롭히던 작은 불편함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깔끔하진 않지만 충분했다.자리로 돌아온 예리는 수화기를 들어 소진을 호출했다.“박 회장님께 제안 수락하겠다고 전달해 주세요. 아, 그리고 조건 하나 덧붙이세요.”수화기를 고쳐 쥐는 예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어떤 방식을
Huling Na-update : 2026-04-12 Magbasa 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