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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비서 한수진

Author: 릴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08 17:01:18

CB 그룹 대표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고, 수진이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들였다. 도진의 ‘개인 비서’라는 명찰을 단 첫 출근길, 그녀의 손에는 서류 가방 대신 직접 조향한 향료병들과 화려한 소품들이 가득했다. 수진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집무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이제 지수의 흔적을 지우고 오직 자신의 색으로만 채워질 공간이었다.

수진은 가장 먼저 창문을 넓게 열어젖혔다. 지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수의 취향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형성되었던, 은은한 시더우드와 숲의 내음이 감돌던 사무실 공기를 사정없이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조향한 진한 장미 향 디퓨저를 곳곳에 배치했다. 머리가 아릿할 정도로 달콤하고 비릿한 향기가 순식간에 공간을 점령했다.

이어 그녀의 손길은 도진의 집무 책상으로 향했다. 지수가 선물하여 도진의 손때가 짙게 묻어있던 만년필을 대신하여, 그곳에 자신이 새로 구입한 화려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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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잔인한 축복   224화 도둑맞은 영혼

    공기 중에 가죽 무두질 냄새와 특수 접착제 향이 서늘하게 감돌고 있었다. 한유현은 며칠째 밤을 지새운 탓에 핏발이 선 눈으로 정면에 올려진 세 종류의 구두와 두 종류의 가방 샘플을 바라보고 있었다.은은하면서도 묵직한 광택을 내뿜는 앤티크 샴페인 골드 장식, 절제되면서도 여성의 발목 라인을 가장 완벽하게 감싸 안는 사선 스트랩, 그리고 과한 장식을 배제한 채 오직 최고급 가죽의 결과 클래식한 골드 버클만으로 품격을 완성한 토트백. 강도진 대표가 지시했던 ‘찰스 킴의 드레스와 어우러지면서도 그 자체로 독보적인 상품성을 지닌 스페셜 잡화 라인’의 완성이었다."유현 디자이너님, 이거…… 진짜 미쳤는데요?"도진이 붙여준 보조 어시스턴트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샘플 구두의 골드 장식을 쓸어내렸다."찰스 디렉터님이 만든 그 딱딱한 드레스 아래에 이 앤티크 골드가 배치되면, 드레스까지 살고 구두는 구두대로 빛날 것 같아요. 당장 바이어 피칭에 내놓아도 대박 날 것 같습니다."유현의 가슴이 뜨겁게 요동쳤다. 찰스 킴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는 어시스턴트로 짓밟히며 도면을 빼앗기고 뺨을 맞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강도진 대표님이 내준 칼날이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유현이 결연한 표정으로 샘플들을 박스에 정성껏 포장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 작품들은 도진이 준비한 프리오더 바이어 피칭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할 터였다.다음 날 오전, VIP 및 글로벌 바이어 대상 CB 프리오더 피칭 현장.넓은 피칭룸 내부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찰스 킴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바이어들에게 자신의 F/W 메인 드레스 라인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어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미 며칠 전 제이아우라의 밤 쇼를 경험한 그들에게, 찰스의 전통적인 드레스는 다소 답

  • 가장 잔인한 축복   223화 구원의 가면

    유현은 밤을 새워 수십 장의 드레스를 그려 나갔다. 연필심이 무뎌지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짓무를 때까지 종이를 채웠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도진의 마음에 들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원석으로서는 아주 훌륭하지만…… 하이엔드 드레스의 중량감을 잡아줄 입체적인 구조나 패턴 계산에서는 다소 미숙하고 불안정한 스케치입니다."도진의 차갑고도 정교한 지적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초조함과 절망감에 입술을 깨물던 유현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진의 손수건에 닿았다. 깨진 찻잔 파편에 손을 벨 뻔했을 때, 도진이 손수 손가락을 감싸며 다정하게 닦아주었던 그 고급스러운 실크 손수건.유현은 홀린 듯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수 냄새. 찰스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는 어시스턴트로 짓밟히던 자신을 처음으로 '디자이너'로 바라봐 준 유일한 사람. 자신을 알아봐 준 첫 번째 구원자.'대표님에게 인정받고 싶어. 대표님이 완성된 내 드레스를 보고 미소 짓게 만들고 싶어…….'간절한 갈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피어오른 순간, 유현의 손가락 사이로 실크 손수건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책상 위에 우아하고 입체적인 곡선의 주름을 만들어냈다.유현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억지로 계산해서 그려 넣은 각도가 아니었다. 겹겹이 층을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는 실크 특유의 자연스럽고 깊이감 있는 무게감!유현은 멈췄던 연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도진이 지적했던 미숙한 중량감과 패턴 계산을 완벽하게 보완한, 마치 겹겹의 장미 꽃잎이 피어나는 듯한 드라마틱한 실크 러플 피날레 드레스가 스케치북 위로 미친 듯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그렇게 완성된 디자인이 도진의 앞에 펼쳐졌다.그곳에는 쇄골 라인을 과감하게 드러낸 오프화이트 튜브톱 드레스가 그려져 있었

  • 가장 잔인한 축복   6화 D-10

    3일간 안정을 취한 지수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거울 앞에 선 지수의 차림새는 단조로웠다. 연한 하슬색 원피스에 검은색 C사의 핸드백이 전부였다. 초췌해진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ㅇ낳았고 푸석해진 머릿결과 여전희 볼록하게 남아있는 복부는 지수를 실제보다 훨씬 지쳐보이게 했다.누가 이모습을 보고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라 할까. K국의 공주님으로 불리던 지수는 이제 A국의 가정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뒤로 한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집을 나섰다.그녀의 차는 도진이 3년전 결혼 기념으로 사준

  • 가장 잔인한 축복   5화 D-14

    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 가장 잔인한 축복   4화 안녕 나의 8년의 시간 4

    도진과 전화를 마친 지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익숙한 번호가 아닌, 철저히 숨겨두었던 가른 번호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실장인 혹시 오늘 CB 그룹과 투자 회의가 잡혀 있나요? "라고 물었다. " 네 사장님. 오늘 오후에 미팅이예정되어 있습니다. 혹시 변동사랑이 있으신가요?지수의 입가에 서늘안 미소가 번졌다. 도진이 그토록 화를 내며 중요하도고 외쳤던 미팅은 역시나 지수의 RV인벤스먼트와의 미팅이었다. " 네 변동 사항이 있습니다. 미팅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대신 계약서에 싸인은 하지말고

  • 가장 잔인한 축복   3화 안녕 나의 8년의 시간 3

    도진은 아침 6시가 넘어서야 옷을 갈아입기 우해 집에 들어왔다.주방에서는 가정부가 무미건조한 소리를 내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수가 현관까지 뛰어나와 "여보 왔어?"라며 겉옷을 받아 들었을 시간이었다. 밤새 고생했다며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둔 욕조로 그를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거실은 적막했고 욕조는 차갑게 비어 있었다." 이 사람, 어디 갔어요?" 도진의 물음에 가정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사장님 오셨어요? 사모님은 주무시는지 방에서 안 나오시네요."그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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