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블레싱 나이트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미드나잇 블루 앤 실버’. 밤하늘의 깊은 청색과 은하수 같은 은빛이 어우러진 연회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보석함 같았다.
도진은 수진이 고심해서 골라준 미드나잇 블루 수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장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도진은 주변의 시선이 비릿한 조소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저 패턴…… S&C의 시그니처 아닌가?”
“맞네. CB 그룹 대표가 하필이면 합병 전쟁 중인 경쟁사 메인 컬렉션을 입고 오다니. 드레스 코드는 맞췄지만, 상도덕은 내다 버렸군.”수진은 당황한 도진의 안색도 모른 채, 제 허리에 감긴 실버 시퀸 드레스의 자락을 매만지며 우쭐거렸다.
“도진 씨, 다들 우리만 봐요. 미드나잇 블루가 당신한테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수진은 몰랐다. 지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지수
품평회가 끝난 당일 밤, 도진은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홀로 머물고 있었다.은은한 조명 아래, 고급 크리스털 글라스에 담긴 싱글몰트 위스키를 빙글빙글 돌리자 얼음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창밖으로 펼쳐진 화려한 야경을 내려다보는 도진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깊은 해방감과 승리감이 감돌고 있었다.지난 면세점 입점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이지수에게 당했던 쓰라린 패배. 그 참담했던 기억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클로이 벤넷의 결혼식’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완벽히 갚아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쾌감이 오롯이 차올랐다.지수와 이혼한 이후, 도진의 삶은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사업도, 브랜드 확장도, 하는 일마다 막다른 길에 부딪힌 듯 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밤마다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면 불쑥불쑥 기분 나쁜 의문이 꼬리를 물곤 했다.‘정말 지금까지의 내 성공이…… 지수의 조용한 서포트 덕분이었던 건가.’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는 그 잔인한 의구심은 도진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소리 없는 형벌이었다. 하지만 오늘, 글로벌 패션 커미션의 심사위원단과 클로이 벤넷 본인의 손으로 CB의 손을 들어준 순간, 도진은 마침내 그 끈질긴 한지수의 그늘에서 완벽히 벗어났음을 느꼈다. 자신이 구축한 완벽한 상업적 클래식, 그리고 찰스의 정교한 재단이 한지수의 기획을 정면으로 눌러버린 것이다.‘역시 내 방식이 틀리지 않았어.’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자 묵직한 알코올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따뜻하게 내려갔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열등감의 사슬이 마침내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승리 뒤에 따라올 부수적인 효과들 역시 도진을 완벽한 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지금은 비
"이어서 A국 CB의 강도진 대표 기획 PT가 있겠습니다."사회자의 호출과 함께 단상 중앙에 선 강도진의 모습에 객석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완벽하게 맞춘 3피스 수트 핏과 행커치프 하나까지 흐트러짐 없는 그의 자태는 오랫동안 패션계의 정점에 군림해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강도진은 마이크를 잡고,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클로이 벤넷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배우 한 명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독보적인 아이콘이자, 대중이 갈망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아름다움입니다."강도진의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프레젠테이션 룸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스크린 위로는 클로이가 그동안 세계적인 시상식과 레드카펫에서 정점에 섰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저희 CB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집중한 것은, 바로 그 대중이 사랑하는 '스타 클로이'의 극치입니다. 클로이 씨가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주요 공식 석상마다 늘 함께했던 선은 바로 신체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밀착되는 머메이드 실루엣이었습니다."강도진은 마네킹 위의 머메이드 드레스와 하트 에메랄드 목걸이를 가리켰다."0.1mm 오차도 없이 떨어진 찰스의 재단 라인은 클로이 씨의 우아한 바디라인을 완벽하게 재현합니다. 그리고 그 쇄골 위를 장식하는 백금 하트 프레임의 에메랄드 하이주얼리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도 그녀를 단번에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클래식의 결정판입니다."지극히 계산적이고 정교한 프레젠테이션. 강도진은 대중이 대형 스타에게 기대하는 상업적 가치와 완벽성을 명쾌하고 논리정연하게 타격했다."대중이 열광하고 기대하는 가장 완벽한 화려함. 그 기대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충족시켜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CB가 제안하는 왕관입니다."강도진의 깔끔한 결언에 심사위원석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감탄과 함께 우레와 같은
품평회장의 조명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긴장감이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중앙 무대 위, 장막으로 가려진 두 개의 마네킹을 향해 클로이 벤넷과 글로벌 패션 커미션 심사위원단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럼, 글로벌 브랜드 선정을 위한 2차 실물 샘플 품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CB 디자인실의 작품부터 공개합니다."사회자의 신호와 함께 CB의 마네킹을 덮고 있던 패브릭이 부드럽게 거두어졌다."아……!"심사위원단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CB가 선보인 드레스와 주얼리는 대중이 '클로이 벤넷'이라는 클래식한 대형 스타에게 기대하는 완벽한 가치 그 자체였다.쇄골과 팔라인을 부드럽게 감싸는 섬세한 시스루 롱 슬리브 위로 은사 레이스가 정교하게 얹힌 슬림한 머메이드 드레스. 그 백미는 드레스의 쇄골 라인을 타고 흐르는 강도진의 메인 하이주얼리 세트였다.백금으로 세공된 커다란 하트 프레임 안쪽으로, 최상급 콜롬비아산 에메랄드들이 정교하게 세팅된 목걸이. 마네킹의 미세한 진동에 맞춰 펜던트 하단의 에메랄드가 물방울처럼 흔들리며 초록빛 광채를 사방으로 흩뿌렸고, 귀 밑으로는 동일한 그린 빛깔의 에메랄드 드롭 귀걸이가 길게 떨어져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대중성과 정밀함, 그리고 정통 하이주얼리 세트의 극치였다.강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찰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실수 없는 배수진 속에서 0.1mm 단위의 재단과 세공으로 완성해 낸 정교함, 대중이 완벽히 환호할 만한 상업적 화려함의 정석이었다."이어서, 제이아우라의 작품을 공개합니다."두 번째 장막이 슬르르 내려앉은 순간, 품평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CB의 슬림한 머메이드 라인과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압도적인 볼륨감의 클래식 볼가운(Ball Gown) 드레스였다. 깊은 브이넥 상체에는 입체 꽃 모티프가 피어올라 있었고, 허리 라인을
CB 디자인실의 작업대 위에는 은빛 광택이 흐르는 최상급 실크 원단이 펼쳐져 있었다. 강도진 대표가 인맥을 총동원해 해외에서 어렵게 구해온 원단이었지만, 그 양은 딱 드레스 한 벌을 간신히 제작할 수 있는 '소량'에 불과했다. 여분 원단은 단 1cm도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원단을 제외한 나머지 부자재들은 사정이 달랐다. 도진이 최고급 실과 특수 안감, 은사 레이스, 그리고 드레스 장식에 쓰일 최고급 진주와 멜리 다이아몬드를 아낌없이 지원해 준 덕분이었다.문제는 단 하나, 겉감을 이루는 주 원단 재단칼 끝이 1mm만 어긋나거나 바느질 한 땀에서 실수하는 순간 2차 제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배수진이라는 사실이었다."모두 들었겠지. 부자재는 원하는 만큼 쓰되 메인 원단 여분은 없다. 가위질 한 번, 바느질 한 땀에도 실수하는 순간 이번 프로젝트는 그자리에서 끝이야."강도진의 낮고 무거운 경고에 디자인실 전 팀원의 얼굴이 바짝 경직되었다.찰스가 가위와 패턴지를 들고 재단판 앞에 섰다. 평소의 오만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핏줄이 서설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했다. 메인 패턴사와 디자이너들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원단 끝을 다치지 않게 가만히 눌러 잡았다. 시침핀 하나를 꽂는 위치조차 세 사람이 달라붙어 수평계를 대듯 0.1mm 단위로 확인을 거듭했다.스윽, 사악—서늘한 칼날 소리와 함께 살얼음판을 걷던 메인 원단 재단이 끝나자, 디자이너들의 정교한 손길이 드레스 세부 공정으로 일제히 뻗어 나갔다.선임 디자이너들은 재단된 실크 겉감 아래 최고급 수입 안감을 대고, 0.5mm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섬세한 시침질로 원단의 핏을 잡아 올렸다. 그 위로 은사 레이스가 미세한 간격으로 결을 따라 올려붙여졌다. 디자이너들은 루페를 눈에 대고 바늘 끝을 오가며 은사 레이스 결 사이에 은빛 광택의 진주와 영롱한 멜리 다이아몬드를 한 땀 한
원단과 원석 수급 문제로 난항을 겪던 CB였지만, 2차 실물 샘플 제작이 본격화되자 디자인실과 세공실의 공기는 급격히 달라졌다.강도진 대표는 아스테리아의 신규 원석 공급이 막히자 결국 CB 지하 보석고에 오래 묵혀두었던 비축 원석들을 풀기로 결정했다. 비록 최근 트렌드에 맞는 최상급 컬러의 원석은 아니었지만, CB의 수석 원석 가공사인 채준영의 눈빛에는 오히려 오만하고 진한 자신감이 일렁였다.과거 블랙 다이아몬드 대결에서 지수에게 완패하고 김인식 장인에게 제자 타이틀마저 박탈당했던 굴욕을 기억하는 그였지만, 그렇기에 이번 2차 실물 제작 판은 준영에게 더없는 기회였다."대표님,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이번에 보석고에서 풀린 원석들은 지난 수년간 제가 성질을 완벽히 파악하고 손에 익혀온 녀석들입니다. 결이 어디로 터지는지, 어느 각도에서 깎아야 빛을 가장 크게 받아들이는지 제 손끝이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채준영은 돋보기를 눈에 매고 원석의 단면을 훑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수년간 다뤄온 이 익숙함과 세공 속도라면 지수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원석 가공, 그중에서도 에메랄드만큼은 과거 김인식 장인에게도 인정받았던 분야입니다. 찰스 실장님의 디자인에 맞게 세공 단계를 하나 더 늘려서 반짝임을 극대화해 보죠. 제이아우라가 어떤 원석을 들고 나오든, 숙련도와 완성도에서 우리가 압도할 겁니다."채준영의 당당한 장담에 강도진은 그제야 타들어 가던 속을 조금 쓸어내렸다. 비록 최고급 신규 원석 라인을 새로 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수석 가공사의 단단한 오기와 숙련된 기술력만큼은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세공실 안에는 휠이 돌아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원석의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하자, 유현에게도 비로소 작은 안식처가 생겼다.사람들의 냉담한 시선과 찰스의 은근한 견제로 숨이 턱턱 막
유진의 연락을 전해 받은 동기는 곧바로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이아우라의 핵심 디자이너인 유진 선배가 직접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수화기 너머 돌아온 유현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고맙지만, 난 안 만날래.”[뭐? 유현아, 유진 선배는 너처럼 디자인 빼앗겼던 경험이 있어서 너한테 정말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셔. 이런 기회가 어디 있다고 그래?]“나 아직 CB 소속 디자이너야. 아무리 억울해도 타사 디자이너를 만나서 회사 내부 일을 이야기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대표님도 사정이 있으셨을 거야.”자신의 공을 빼앗기고 짓문드러지면서도, 강도진을 향한 미련과 디자이너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유현이었다. 동기의 안타까운 설득에도 유현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 통화를 끊었다.하지만 전화를 끊고 돌아선 CB 디자인팀 내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지난 회의실 사건 이후, 유현을 바라보는 팀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낙하산처럼 들어와 단기간에 전문 분야 디자이너로 승진한 유현을 향한 짙은 시샘과 질투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실세인 찰스 실장의 눈밖에 난 유현이었기에, 찰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팀원들은 앞다투어 유현을 은근히 따돌렸다."유현 씨, 이 잡일 좀 처리해 줘. 아, 참. 유현 씨는 이제 '독자적인' 디자이너라 이런 공용 서류 정리 같은 건 안 하나?""찰스 실장님 2차 컨셉안 보조는 저희가 할 테니까, 유현 씨는 그냥 남은 잔업이나 봐요."대놓고 주고받는 뼈 있는 말들과 차가운 외면. 여기에 찰스는 겉으로는 온화한 척 유현의 의견을 묻는 듯하면서도, 막상 유현이 제출한 디자인 보완안은 훑어보지도 않은 채 테이블
이지현은 비서 슬비가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다거 결국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류 봉토 안에는 동생 지수의 처절한 결혼 생활과 강도진의 외도 증거들이 빠곡히 담겨 있었다. "하, 이지수,, 이딴 남자 때문에 그렇게 속상해하고 있었던 거야?" 지현은 화가나고 속상한듯 서류를 구기며 슬비를 봤다."박비서님은 지수의 친구이기도 하니 당분간 A국에서 가서 지수 옆에 있어 주실수 있다요? 이건 상사로서 명령이라기 보다는 지수 오빠로서의 부탁입니다. 아 그리고 지수가 부탁한 사람은 이 이사람이 좋겠군요""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날 시어머니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지수는 K국에 있는 오빠 이지현에게 연락을 했다. " 오빠~ 잘 지내? 너무 오랫만에 연락했지? 실은 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 지금 K국은 아침 6시였다. 지현은 시차도 잊은 채 걸려온 동생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우리 공주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줘야지. 무슨 일인데. 말만해. 오빠가 다 처리해 줄께."여전히 자신을 아껴주는 오빠의 음성이 지수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 오빠 나 아이가 생기면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기
3일간 안정을 취한 지수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거울 앞에 선 지수의 차림새는 단조로웠다. 연한 하슬색 원피스에 검은색 C사의 핸드백이 전부였다. 초췌해진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ㅇ낳았고 푸석해진 머릿결과 여전희 볼록하게 남아있는 복부는 지수를 실제보다 훨씬 지쳐보이게 했다.누가 이모습을 보고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라 할까. K국의 공주님으로 불리던 지수는 이제 A국의 가정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뒤로 한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집을 나섰다.그녀의 차는 도진이 3년전 결혼 기념으로 사준
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