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 세계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대한 해일, [The Origin] 쇼가 마침내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K국 최고의 보석 유통 기업이자 원석 공급의 거대 축인 ‘오닉스 사’의 수장 지현이 주최한 이번 쇼는 단순한 패션쇼 그 이상이었다. 자회사인 ‘아스테리아’가 보유한 희귀 원석의 압도적 위상을 각인시키기 위해, 양국을 대표하는 정상급 디자이너 20명이 선발되어 아스테리아의 원석으로 빚어낸 결정체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하지만 업계가 진정으로 술렁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쇼가 디자이너들의 경연장이자, 동시에 수년간 자취를 감췄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Z’의 복귀를 공식화하는 거대한 무대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행사장 로비는 선택받은 자들의 열기와
문이 열리는 순간, 한수진을 맞이한 것은 기대를 품었던 다정한 연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오만함과 탐욕으로 가득 찬, 냉혹하기 짝이 없는 비즈니스맨의 얼굴이었다.강도진은 그녀가 들어왔음에도 변변한 인사 한마디 생략한 채, 탁자 위로 두꺼운 브로셔를 거칠게 밀어 던졌다. 툭,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수진의 앞에 멈춰 선 종이 위로 거대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보였다."성운 재단 자선 경매에 곧 출품될 블랙 다이아몬드야. 내일 경매가 끝나는 즉시, 이걸 메인으로 한 프리미엄 라인의 런칭 보도자료를 대대적으로 배포할 거니까 디자인팀은 지금부터 밤샘 대기해."자신의 화려한 복귀 무대와 기업 이미지 쇄신만을 꿈꾸며, 수진을 철저히 부려 먹기 좋은 ‘도구’로만 바라보는 도진의 일방적인 명령조 대사였다. 하지만 그 눈빛에 감춰진 서늘함과 이용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 채, 수진은 그저 도진이 다시 자신을 불러주었고, 그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눈이 멀어 있었다.어떻게든 도진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자신을 다시 찾아준 도진을 위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그를 만족시켜야만 이 불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강박이 그녀를 지배했다.도진은 수진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시선은 수진의 얼굴을 지나, 그녀의 원피스 위로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로 향했다. 순간 도진의 미간이 좁아지며 거친 분노가 일었지만, 그는 간신히 이빨을 악물며 분노를 삼켜냈다."너도 내일 경매에 참석해야 하니까 미리 준비해 두고." "네……? 저도요?" "약혼식까지 대대적으로 치른 마당에, 내가 너를 내버려 두고 이런 공식 행사에 혼자 참석한다면 사교계가 우리를 가만두겠어? 또 다른 추문이 돌기 전에 완벽한 파트너처럼 보여야 해."차가운 다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진
화려한 조명이 꺼진 늦은 밤, K국 오닉스 본사 최상층 대표실.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슬비는 탁자 위에 놓인 책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운 재단 자선 경매의 최고 기밀 브로셔. 그 두꺼운 종이 재질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기묘한 광채를 내뿜는 50캐럿짜리 ‘블랙 다이아몬드’였다.그것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오만함에 눈이 먼 강도진을 단숨에 파멸의 늪으로 끌어당길, 가장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미끼였다.지현의 비서로 오랜 시간 그의 가장 가까운 곁을 지켜온 슬비였다. 그렇기에 지현이 일 처리 하나만큼은 칼날처럼 정확하고 유능한 남자라는 사실은 이미 그녀에게 숨 쉬듯 당연한 일상이었다. 빈틈없고 완벽한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짝사랑하며 혼자 가슴앓이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서류를 한 장씩 넘기는 지현의 손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냉철하고 거침없었다."성운 재단 쪽에 밑작업은 이미 완벽하게 끝났어. 제이아우라는 이 판에서 완전히 배제했으니, 강도진 그 인간도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물 거야. 오직 나와 진우 씨, 그리고 아스테리아의 이름으로만 움직인다."비서로서 그의 곁에서 묵묵히 서포트하던 슬비는, 문득 가슴속에 맴돌던 의문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런데 대표님, 이 정도 크기와 퀄리티의 블랙 다이아몬드는 구하기 정말 어려우셨을 텐데…… 혹시 지수가 예전에 흘리듯 한 말을 기억하고 계셨던 거예요?"그 질문에 서류를 보던 지현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지현의 서늘했던 눈빛이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렸다. 냉혹한 비즈니스맨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오직 동생 지수만을 생각하며 짓는 무조건적이고 다정한 미소였다."당연하지. 우리 지수가 지나가면서 예쁘다고 한마디 했던 건데, 오빠가 되어선 당연히 기억해야지. 그리고 애초에 그 아이가 원하는 보석을 마음껏 구해주기 위해 만든
강도진이 눈앞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CB 그룹의 명예를 시장 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지는 동안, 박진우의 움직임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고 신속했다."대표님, 예상대로 강 대표가 대대적인 할인전을 감행했습니다. 당장 급한 불을 끌 현금은 돌기 시작했겠지만, 시장의 신뢰는 완전히 바닥을 쳤습니다. 백화점 매장 철수설까지 돌면서 오늘만 주가가 또 8% 추가 하락했습니다."진우는 비서가 올린 주가 그래프를 보며 낮게 읊조리듯 실소를 터뜨렸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거대한 짐승을 숨죽여 기다리던 하이에나의 잔인한 미소였다."멍청한 새끼. 제 손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랐군."보석 브랜드의 생명은 고결함과 희소성이다. 한 번 싸구려 이미지로 낙인찍힌 브랜드는 정재계 VIP들의 폐쇄적인 사교계에서 두 번 다시 살아남을 수 없다. 강도진은 당장의 퇴출과 부도를 면하기 위해, 가문의 미래를 통째로 팔아치운 꼴이었다.진우가 서늘하게 명령했다."돌아다니는 CB의 유통 주식, 그리고 사외이사들이 겁을 먹고 던지는 투매 물량까지 단 한 주도 남기지 말고 긁어모아. 강도진이 제 발밑의 땅이 꺼지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내 허락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상태여야 하니까.""네, 알겠습니다."진우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차가운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한수진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바라보던 도진의 화려한 성은, 이미 밑바닥부터 진우의 거대한 자금력에 잠식당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A국 패션계와 상류층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CB의 처참한 타락을 비웃듯, 제이아우라는 보석 시장의 완벽한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무서운 기세로 비상하고 있었다.지수가 선택한 전략은 철저한 '투트랙(Two-Track)'이었다.디자이너 유진의 독창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hope’ 라인이 합리적인 가격과
수진이 제 욕망에 눈이 멀어 있는 사정은 강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진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개인사의 추악한 스캔들이 사교계를 뒤흔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진짜 치명적인 맹독은 강도진이 가장 자신만만해하던 CB 그룹의 심장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흘러들고 있었다.시작은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불거진 '안젤라이트 원석 크랙' 이슈였다. 처음엔 그저 몇몇 까다로운 소비자의 불만 제기 정도로 치부하려 했으나, 여론의 흐름은 도진의 예상보다 훨씬 험악했다. 가뜩이나 대표의 불륜과 가짜 임신 스캔들로 CB라는 브랜드 자체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던 소비자들이 단체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A국 소비자 규제당국에 CB를 상대로 한 단체 고발장과 전수조사 청원이 접수되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보고에 도진은 집무실에서 연신 담배를 비벼 껐다. 재떨이에는 이미 장초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규제당국? 고작 보석 표면에 실금 좀 간 걸로 국가 기관이 움직인다는 게 말이 돼?!""그게…… 고발 건수가 이미 만 건을 넘어섰습니다. 당국에서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오늘 오전, CB의 물류창고와 제조 공장에 대한 엄격한 전수조사에 착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도진의 미간이 거칠게 좁아졌다. 불길한 예감은 단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A국 규제당국의 칼날은 매서웠고, 조사 결과는 순식간에 CB의 숨통을 조여왔다. 결함의 근본적인 원인은 후처리 공정 이전에, 원석 공급처인 '루체른'에 있었다. 루체른 측이 안젤라이트 원석 자체의 치명적인 경도 결함을 명확히 인지하고도, 자신들의 마진을 남기기 위해 CB 측에 아무런 고지도 없이 결함 가득한 날림 물량을 넘겨버린 것이 당국의 전수조사로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루체른 이 개새끼들이…… 우리를 감히 기만해?!"
다음 날 저녁.A국 전역에 풀린 CB 그룹의 주가 동향을 날카롭게 살피던 박진우는 현수와 현지의 보모로부터 다급하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보모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대,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아이들이…… 현수와 현지가 사라졌습니다!""……뭐라고요?"순간 진우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리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아이들 엄마는요? 한수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사, 사모님께서는 현재 연락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전날 무슨 일인지 집안 물건을 집어던지며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는 밤늦게 집을 나가셨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진우는 이가 갈렸다. 제 욕망에 눈이 멀어 아이들을 방치한 수진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을 움켜잡으며 아이들이 다니는 로얄 유치원에 즉각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전날 약혼식장에서 터진 강도진의 무정자증 진단서와 수진의 불륜 스캔들이 이미 학부모 커뮤니티를 통해 아이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 상태였다. 현수와 현지는 유치원에서 '불륜녀의 자식', '엄마가 가짜 임신을 했다'라며 아이들에게 잔인한 놀림을 당했다. 게다가 콧대 높은 학부모들은 유치원 측에 '추악한 불륜녀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을 한 공간에 둘 수 없으니 당장 내보내라'며 입학 취소 민원을 폭주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그 어린것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잔인하고 무거운 폭력이었다.진우는 당장 RV의 보안 팀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지금 당장 로얄 유치원 주변 인근 CCTV와 포스트 빌리지 동선을 확인해. 수단 방법 가리지 말
약혼식 겸 베이비샤워가 열렸던 연회장은 그야말로 ‘초토화’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A국 유통 대기업의 서 대표가 구급차에 실려 나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형 스크린에 박제되었던 강도진의 무정자증 진단서는 그야말로 핵폭탄급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A국의 자극적인 타블로이드 찌라시는 물론이고, 상류층의 폐쇄적인 비밀 커뮤니티는 온통 CB 그룹의 해괴한 스캔들로 마비되었다.[CB 강도진 대표, 난임 진단 숨기고 불륜녀와 베이비샤워? 뱃속 아이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온 인터넷을 도배한 그 시각, 가장 먼저 뒤집어진 곳은 다름 아닌 도진의 본가였다."이게 무슨 소리냐! 이게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도진의 어머니인 김미자 여사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과거 지수를 향해 '애도 못 낳는 씨 없는 박', '가문을 끊어먹을 불임녀'라며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천대를 퍼부었던 김미자였다. 그런데 정작 씨가 없는 쪽이 제 금쪽같은 아들이었다니.옆에 있던 부친 강수한 역시 굳은 얼굴로 연신 담배만 태우며 벼락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명예를 목숨보다 아끼는 강수한에게 이번 A국 사교계의 스캔들은 평생 쌓아 올린 명성에 먹칠을 한 수준이었다."강도진이 무정자증에 준하는 상태인데…… 한수진 그 불륜녀 배 속에 든 게 우리 피붙이가 아니라고?! 내가, 내가 남의 집 자식새끼한테 가문의 돈을 쏟아부었단 말이냐!!"김미자는 핏대를 세우며 거품을 물고 쓰러질 듯 악을 썼다. 당장 한수진의 머리채를 뽑아버리겠다며 날뛰는 김미자를 비서들과 강수한이 차갑게 뜯어말렸다. 당장 배를 갈라서라도 친자 확인을 하라며 실성한 듯 부르짖는 어머니를 향해, 초췌해진 얼굴의 도진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어머니, 진정하세요. 아직
산부인과에서 들었던 “축하합니다.”라는 의사의 음성. 도진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섰던 명품관의 서늘하고 고급스러운 공기.서너 개의 화려한 쇼핑백을 팔목에 걸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진은 복도식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코 끝에 스며드는 눅눅한 습기 냄새와 오래된 페인트 향. 그것은 방금까지 도진의 마세라티 조수석에서 느꼈던 우아한 우디 향과 안락함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팔에 걸린 쇼핑백이 아니었다면, 낮 동안 누린 그 모든 것이 허상이며 이곳이 네가 있어야 할 비루한 현실이라며 날카롭게 일깨우는 듯했다.흥얼거리던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