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판 / 남편교환 / Chapter 11 - Chapter 20

All Chapters of 남편교환: Chapter 11 - Chapter 20

37 Chapters

11화 단발머리 루시아

덜덜 떨리는 어깨와 루시아의 것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은 마치 루시아가 비참한 일이라도 겪은 것처럼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 레이루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백금발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제레미가 물려받은 레이루나의 백금발과 달리 까마귀처럼 검기만한 부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싫었다. 제레미가 자꾸만 루시아가 백작을 닮았다고 할 때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을까봐 스스로를 내리누르고 깎았다. 그럼에도 진한 혐오감은 어쩔 수 없었다. 정작 아르테미스 백작을 갈수록 닮아가는 건 제레미 였는데도.“루시.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자꾸나. 아니 내가 공작을 만날까?”레이루나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말했다.“옷부터 다시 입자. 코르셋은 어디 갔니? 셀레나가 챙겨주지 않았니?”머리를 쓰다듬으며 루시아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라면 응당 할법한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의사는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 괜찮냐고도 묻지 않았다. 레이루나는 이런 사람이었다.“어머니.”“응, 루시.”“제가 그런 거에요.”어머니의 눈이 황금색 눈동자가 커졌다.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바라보는 듯 하다. 아주 예전에 그녀가 바지를 입고 다닐 때, 머리를 스스로 잘랐을 때, 코르셋이 싫다고 했을 때. 벨루아와 결혼하기 싫다고 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지금 네가 무슨,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니?”레이루나가 애써 만든 결과물을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녀가 이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만든 자리인데. 어떻게 키워낸 딸인데. 백작의 경멸어린 태도와 바람기를 이겨내고, 그 장례식에서 함께 울지 않고 너는 나의 가장 가까운 존재로 남기로 했잖아.미처 내뱉지 못한 말이 어머니의 입안에 담겨 있었다. 원망의 눈빛이 고스란히 루시아에게로 꽂혔다.“나스로 갈거에요.”그건 무엇보다 충격이었는지 레이루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아니야, 갈 수 없어. 루시.”그녀가 어깨를 훑듯이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엄마의 손끝이 차가웠다.아르테미스 백작에게 쓸모없는 상품이라며 맞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Read more

12화 나 진짜 돈 많아, 루시

황제의 명이 떨어진 이상, 공작이 딴지를 걸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떠나는 날이 언제라고 말은 해야 되어서 일러주었더니, 저택 문이라도 막으려는지 기사들이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셀레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저번에 사용한 비밀 통로로 루시아와 에이든을 안내했다.등불에 의지해 건너는 길에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걸 두 사람이 잡아주었다. 루시아는 하녀복 차림이었다. 에이든도 제국에서 평민 차림새로 갈아입었다. 셋 다 로브를 뒤집어 쓴 채였다.공작저와 영지에 딸린 숲의 경계에 마차가 있었다.“기다렸습니다. 전하.”에이든의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절도 있는 동작을 한 남자가 마부 자리에 올라탔다.셀레나와 에이든, 루시아 세 사람이서 같은 마차를 탔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운송용 마차를 빌려서 사실상 귀족이 타는 마차같은 승차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냥 짐칸에 올라탄 수준이었다.“너무 형편없나.”에이든이 루시아의 눈치를 봤다.루시아는 그런 그가 귀여운지 그저 싱긋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나스에서는 나 진짜 돈많아. 루시.”그러냐고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유치한 논쟁이라 셀레나는 하늘에 뜬 달이나 쳐다봤다. 이대로 가는 길이 평화롭기를 바랐다.바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길목 마다 벨루아의 기사들이 수배지를 들고 서 있었다. 에이든이 검 위로 손을 들려는 찰나였다. 마차를 세운 기사들이 수색을 시작하려는 사이, 얼굴을 가린 괴한들이 들이닥쳐 기사들을 공격했다. 그 저택에서 평생을 보내다시피한 루시아만이 그들을 알았다. 아르테미스의 기사들이었다.레이루나의 안배였을 것이다. 루시아는 모질지 못한 어머니를 알았다. 떠나는 딸조차 자신의 핏줄이라 또 다시 구해준 것이다. 그 뜻을 이루라고.에이든이 마부로 가장한 남자에게 명령했고, 마차가 출발했다. 벨루아의 기사들이 쫓기 전에 수도를 벗어났다.나스로 가려면 이틀을 더 가야했다. 수도를 벗어나자, 하우젠 대공의 가문 상징이 그려진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디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4
Read more

13화 상관 말라

바사의 시내는 트램이 다녀서 마차가 다니기 좋지 않았다.에이든과 셀레나, 루시아가 마차에서 내리고 마부였던 에이든의 사람이었던 남자는 자신을 윌이라고 소개하고는 타운하우스에 가 있겠다고 했다.“그럼 우리도 가볼까?”에이든이 로브를 뒤집어 쓰고 앞장 섰다. 그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사진관이었다.“여긴?”카메라는 제국에서도 황실에서나 쓸법한 물건이었다. 그게 나스에서는 보급됐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이토록 발전한 곳이라니.“네 증명사진이 있어야 해서. 루시.”그럴 줄 알았다면 미용실이라도 다녀올 걸 그랬다. 태어나서 처음 찍는 사진이었다.“디디, 나 머리가.”“예뻐.”“괜찮아.”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에 루시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눈가의 눈물을 훔친 그녀가 카메라 앞에 섰다. 벨루아나 아르테미스에서 어떤 짓을 할지 몰라 한가하게 미용실이나 옷가게에 들를 수 없는 게 에이든은 내내 아쉬웠다.나스의 편안한 여성복 스타일은 분명 루시아의 마음에도 쏙 들 것이었다. 추운 하우젠으로 가기 전에 겨울 옷도 몇 벌이나 사야했다.“다 찍었습니다. 반나절 후에 오시면 됩니다.”사진은 금방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정도면 빠른 편이었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던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금세 셀레나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야 한숨 돌릴 차례 였다. 사진만 나오고 나머지 절차는 그의 신분으로 보증하면 순식간에 해결되리라.에이든이 셀레나와 루시아를 데리고 가장 번화한 바사의 마샬 거리를 걸었다. 루시아는 에이든을 말리고 싶었고, 셀레나는 어깨를 펴고 다녔다. 가는 가게 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달라는 말을 하고 다니니 허영심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같았다.“디디, 이렇게 돈을 많이 쓸 필요 없어.”셀레나가 입을 쭉 내밀며 불만을 조용히 표시했다. 루시아의 말에도 에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내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게 많았다.***다음날 드레스는 드레스대로, 바지와 상의, 자켓과 겨울용 외투와 신발까지 전부 타운하우스로 배달되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5
Read more

14화 나의 신부가 되어주세요

총리 나다니엘은 ‘대공’의 편지를 받고 뒷목을 잡았다. 국경에서 갈등이 있은 지 벌써 며칠이었다. 아내를 납치해갔다는 공작의 증언을 대공이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가 국민의 신망을 살수록 공화정파는 그를 경계했으나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인물이 이렇게 인망을 잃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벨루아 공작 부인을 대공의 곁에서 치워야 할까. 총리는 고민했다. 하지만 에이든 하우젠의 말을 무시했다가는 그의 목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황제 자리를 제 발로 찬 ‘겨울의 왕’의 분노를 사봐야 좋을 게 없으므로.고로 망명 절차는 흠 없이 진행되어야 옳았다. 하지만 보름이 넘도록 한없이 길어졌다. 결국 면담도 하지 않고 절차가 중단되었다. 망명을 담당하는 이민청 자체는 독립기관이라서 총리의 입김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민청은 제국의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대공마저 꼬셨다는 벨루아의 악처. 그녀가 나스에 있어서 좋을 게 뭐란 말이냐고, 남성위원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다. 여론전에 능한 벨루아가 미리 로비를 하고 허를 찌른 것이었다.불허가 통지서를 받은 루시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망명이 불가하다는 도장이 선연하게 찍혀있었고 그 붉은 색이 꼭 제가 제국을 돌아가 흘릴 피의 색 같기도 했다. 일주일 내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면 강제추방행이었다.에이든은 요 며칠 바빠졌는지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였던 듯 싶었다. 총리에게 따져 묻는 전화를 하다가 언성이 높아진 그가 루시아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그는 마른 세수를 여러 번 하다가 코트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며칠 째였다.“루시.”셀레나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괜찮을거야.”루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망명을 불허받은 외국인, 그것도 여성.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제 악명을 신경 쓴 적은 없었는데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제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어떻게 해야 했을까.루시는 타운하우스의 서재를 찾았다. 이민법에 관한 내용을 밤새 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6
Read more

15화 결혼식은 어떻게 할까

셀레나는 벙 찐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이든이 루시아의 곁에서 어느 때보다 말간 얼굴로 웃고 있는 꼴이 꼭 그들의 어린 시절 같았다.“결혼식은 어떻게 할까. 루시.”그는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추방일까지 고작 5일 남았다는 걸 전혀 생각지 않는 듯이.루시아는 반면 살짝 우려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단순한 문제로 고민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듯이.“셀레나에게 설명은 했어, 디디?”그제야 아 하고 그가 입을 벌리며 뒤늦게 설명을 했다.“그러니까, 루시가 에이든과 결혼해서 망명 절차를 밟자는 거죠?”계획을 세운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나가 이마를 짚었다. 이런 일을 그녀와 상의도 안하고 저지르는 건 에이든이나 그럴 줄알았건만 루시아까지 말려든걸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거라기에는 루시아의 기분이 썩 나빠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벨루아에 있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졌다.에이든이 타운하우스의 집사에게 말해 식단을 챙기기 시작한 것도 있었고 꼬박 꼬박 그가 루시아의 산책을 챙기기도 해서였다.셀레나는 매일 바쁠 그가 그녀를 들여다봐주는 게 고마웠다. 적어도 그녀의 조국에 있는 어떤 공작보다는 나아보였다.“오늘은 날이 조금 흐리다, 디디.”산책은 하지 말자는 뜻을 돌려만한 것었다. 사실 에이든과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지만 매일 산책을 가는 일이 조금 체력에 부치던 루시아였다.“그럼 온실을 갈까?”물론 그가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하우젠은 추운 지방이었다. 지금보다 체력이 붙지 않으면 분명 병치레가 잦아질 것이었다. 에이든은 벨루아 공작저에서 쓰러졌던 루시아를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그걸 본 루시아가 자신이 산책을 가지 않으려 하자 그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오해를 했다.“음, 에이든.”그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에이든이 셀레나에게 두었던 시선을 바로 거둬들이고 루시아를 들여다봤다.“왜, 루시?”아까 살짝 찌푸렸던 인상은 어디로 갔는지 아주 해사한 미소였다. 어쩐지 그게 눈부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7
Read more

16화 나스의 디저트가 궁금해

“나 사실 고기 그만 먹고 싶어. 채소나 과일이나 이왕이면.... 나스의 디저트가 궁금해”풋하고 에이든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 것이 그때였다.루시아로서는 정말 오랫동안 말할지 말지 고민하던 일이었으므로 휘둥그레 해질 수 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육식 위주인 식단이 연일 차려져서 부담스러웠다. 남기면 주방장이 슬퍼한다고 셀레나가 말했고, 에이든이 빙긋 웃으면서 맛있게 먹기에 나스의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는구나 생각하고 그들의 관습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매일 먹으니 소화도 안되고 속도 더부룩하고 몸도 무거워지는 것같았다.“알았어. 집사한테 말해둘게.”에이든이 잔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쿡쿡대자 그제야 루시아는 나스의 관습과 무관하게 그가 지시한 사항임을 알아챘다.“네가 그런 거구나.”어쩐지 느껴지는 배신감에 그를 미운 눈으로 흘겨보자 에이든이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내보이며 말했다.“하지만 루시, 넌 정말 말랐었어.”아주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그랬다. 셀레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나, 루시아는 문득 벨루아에서 아이를 잃은 후로 식사를 한 날보다 안한 날이 많았다는 걸 생각해내곤 입을 다물었다.“이제야 좀 보기 좋을 정도야.”셀레나가 굳건하게 말했다. 제 친구의 증언은 꺾이지 않을 그녀의 뜻을 말해주듯 단단해보였다.“알았어. 대신 채소도 좀 많이 줘.”난데없는 편식조차 기쁜 듯 에이든이 당장 꽃이 피어날 듯 활짝 웃었다.“이러니까, 꼭 어릴 때같네.”루시아가 그런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응?”“어릴 때는 디디 네가 아르테미스에서 내가 가져온 식사에 고기가 없다고 그렇게 싫어했잖아.”막 큰 부상을 당했다가 살아난 그가 회복을 할 수 있도록 고기를 잔뜩 먹여주고 싶었지만 레이루나는 아름다운 귀족 영애가 식탐을 부려 살이 쪄서는 안 된다고 하며 루시아에게 주로 채소 위주의 식단을 짜서 주고는 했다. 그걸 조금 먹고 남겨서 디디에게 가져가면 그는 오늘도 풀떼기냐며 실망한 얼굴로 포크로 접시만 뒤적거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8
Read more

17화 황후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황제 카이사르 델레포트는 오늘도 고된 국무에 지쳐있었다. 사랑하는 황후 마리아와 함께 담소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다. 그건 기실 눈앞의 남자때문이기도 했다. 이혼이라는 전적이 있어도 흠결이 없는, 오히려 인간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완벽한 조건과 생김의 미남자. 데미안 벨루아 공작때는 몇 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우젠 대공이 거래를 하자며 사실상 협박을 하고 그에게서 벨루아 공작 부인과 데미안의 혼인 무효 칙서를 받아낸 뒤, 정말로 공작 부인이 나스로 넘어가 자취를 감췄다.황제가 알기로 데미안과 공작부인은 서로 내외를 했다고 들었다. 같은 연적으로서 찝찝하기는 하지만 데미안이 아직도 황후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궁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해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곁이 비더라도 크게 괘념치 않을 줄 알았다. 사실은 오히려 장애물을 치워버렸다며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다음날 새벽에 득달같이 저를 찾아온 남자의 낯은 황량했다.퀭한 얼굴로 밤새 잠을 못 이룬 티가 역력한 그가 금색 실 같은 머리를 예민하게 헝클이며 말했다.“왜 그러셨습니까.”다짜고짜 쳐들어 와놓고 한말이었다. 아직도 황당함의 여운이 남았다. 마치 그가 장난감을 가져간 듯 내놓으라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데미안.”그는 오랜만에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와의 혼인 이후 없었던 일이다.“예, 폐하.”“이미 떠나간 사람일세. 그 좋다는 공작부인의 자리도 싫다고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이란 말이야. 이제와 자리에 앉혀놔 무엇할 셈인가. 애초에 공작부인 업무도 제대로 못하고 후사도 보지 못했다면서.”후사, 그 빌어먹을 후사. 여름에 죽은 아이 때문에 소리 없이 메말라가던 여자는 끝내 그걸 명분 삼아 그의 곁에서 도망쳤다. 그럴 바에 데미안은 차라리 루시아가 제 눈앞에서 말라죽기를 희망했다.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벨루아의 변함없는 충절을 원한다면, 그 여자를 돌려놔야 할 거다. 카이사르”어째 이 남자들은 제국의 황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9
Read more

18화 루시아의 흠

거리감을 두는 그 호칭에 어쩐지 쓸쓸해진 마리아가 공작에게 부러 더 친하게 아는 체했다. 넓은 궁에서 황제가 후궁을 들였다는 소식을 시녀에게 전해 듣고 나면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데미안의 제비꽃 눈동자가 종종 그립곤 했다. 그래서 무도회에서 만나면 그에게 꼭 인사를 건넸고 어쩐지 창백하고 무표정하게 저를 지켜보는 공작부인에게도 몇 번 아는 체를 했지만 결국 친해지지는 못했다.“얼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었어요. 너무 유감이에요.”그녀의 귀에도 들어간 것 같았다.아내 간수도 못하는 남자. 마리아의 앞에서 자존심을 구긴 것 같아 어쩐지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데미안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 모든 게 루시아 벨루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부주의해 외국인 대공 따위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었다면 황제의 분노를 살 일도 없었고, 이렇듯 마리아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작게 느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는 그가 하우젠 대공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까 루시아가 감히 다른 남자 때문에 저를 떠났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여전히 그녀를 벨루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그래서 모든 일의 원인을 루시아 오직 한사람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도.그만큼 제 삶에서 루시아의 존재가 커져있다는 것을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그게 패인이라면 패인이었다.카이사르의 칙서를 전달받았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고급 양피지에 적힌 익숙한 서명. 낯설지 않은 이름.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 단호하고 사무적인 명령. 오직 한낱 종이 한 장으로 3년의 증오와 미움이 갈 곳을 잃었다. 여자는 저택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음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사용인들의 비밀 통로로 빠져나갔다. 고집스럽고 귀족적인 그 여자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방심했던 것이다.미리 국경지대에 배치시켜놓았던 기사들은 의문의 괴한들에게 모조리 당했다. 누구의 짓이었는지 조사하고 있지만 꼬리가 쉽사리 밟히지 않았다. 적어도 이런 짓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1
Read more

19화 너무 어른이 된

루시아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공작부인이 된 이래 그녀의 시녀가 아무리 친정인 아르테미스 백작가에서 데려왔다고는 하나 평민 출신인 것은 내내 그녀에게 흠잡히는 일이었다. 셀레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아주 어릴 적부터 유모인 제 어머니를, 그리고 그 딸인 저를 편견 없이 좋아해주던 아이였다.별을 닮은 듯 반짝이는 큰 눈망울이 어린 사슴 같던 루시아는 악독한 브리짓 언니 보다도 사실 다정한 셀레나가 더 좋다고 귓가에 비밀처럼 속삭이는, 그리고는 쑥스러워하며 볼을 붉히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자신도 비를 맞아가며 피를 뚝뚝 흘리는 소년을 주워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평소의 루시아의 성품이라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도와주고, 함께 지내다 떠난 이가 이제와 이렇게 루시아와 저를 구해주다니 이것도 다 제 친구의 다정함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라고 셀레나는 굳게 믿었다.“이곳에서라면 평민이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고, 에이든이 그렇게 만들었다면서요. 그러면 저는 야간 대학을 다니고 싶습니다.”에이든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스에서 온 이래로 어미새 돌보듯 내내 루시아의 곁을 떠나지 않던 그녀였다.셀레나의 과보호가 때때로 에이든의 그것보다 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물론 그가 없었던 시간에 루시아의 곁을 지켜 본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런 셀레나가 루시아의 곁을 잠시 비워가며 할 일이란,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여성도 보증된 신분이 있으면 야간 대학에 등록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타국에서 왔으나 귀족 여성의 시녀 자격이었으니 어찌됐든 셀레나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제국에서도 그닥 루시아와 달리 책보는 일에는 관심도 없던 그녀가 어쩐 일인지 에이든은 결심의 계기가 궁금했다.“저는 내내 루시아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국에서는 사람도 아니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씁쓸한 자조가 셀레나의 초록눈을 스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2
Read more

20화 악몽

그녀는 언제부턴가 종종 세상에 아주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하거나, 아주 먼 사막을 횡단한 모험가처럼 피로한 낯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늘었다.그럴 때면 셀레나는 그저 잠시 곁을 비우고 방문 밖을 서성이며 혹시나 루시아가 쓰러지지는 않을까밖을 지키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분위기에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셀레나는 궁금했다. 이제껏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 그 세계에, 눈앞의 남자는 과연 어떨 것인지. 루시아는 그에게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것인지.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진부하고 낭만적이고 다만 주인공들은 행복한, 그저 음유시인의 사랑 이야기같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에이든은 자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같았지만.***루시아가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그때였다. 악몽을 꿔서 식은땀으로 온몸이 범벅이었다. 레이스를 두른 잠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마침 셀레나가 자러 간 듯 했다. 부르는 줄을 당길까 하다가 친구에게 이건 너무 하대하는 방식인 것같아 평소에 선호하지 않았던 걸 잠결에 떠올리고는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비교적 나라의 가운데에 위치한 수도라고는 해도 나스는 전반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제국에 비해 갑자기 날씨가 급변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이번 몇 주는 꼭 열대우림의 우기처럼 소나기같은 비가 내리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더니 고작 하루 이틀 만에 겨울 찬바람같은 찬기가 불어왔고, 입에서는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연기가 불었다.하우젠 령에 갈 목적으로 루시아와 셀레나가 주문했던 겨울옷이 늦어지는 것도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로 의상실에 겨울옷 주문 제작이 폭주해서 라고 했다.루시아는 서늘한 복도의 기운을 느끼며 두꺼운 스웨터실로 짠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자박자박 처음으로 혼자가 되어 타운하우스를 거닐었다. 아무도 없이 고요한 통로를 건너는 일은 이곳에서 좀처럼 없어서 오래간만인 일이었다.아이가 죽고 나서, 그러니까 루시아가 겨우 눈을 뜨고 아이의 관을 받아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3
Read more
PREV
12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