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90

195 فصول

#180. 도를 넘어온다면 나 역시 선 밖으로

화요일 늦은 밤, 최기범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일주일 남짓 이 나라를 비웠을 뿐인데, 기분만큼은 몇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유학생처럼 생경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신작 게임이 출시될 때까지 일본에 계속 머물고 싶기도 했으나, 하나뿐인 아들이 보고 싶다며 성화를 부리는 부모님의 요청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곧장 본가로 향하기 위해 인천공항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워둔 차의 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희뿌연 공기 탓인지 수북하게 쌓인 먼지 때문에 방치된 남의 차를 보는 듯했다.다행히 배터리가 방전되지는 않아 곧바로 가까운 주유소로 향했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세차까지 마치자, 차체는 비로소 제 빛깔을 되찾았다.최기범은 운전대를 잡은 채 룸미러에 비친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 밑에 그늘진 짙은 다크서클이 마치 어머니의 악행을 묵인해 온 죄의 증거처럼 느껴졌다.신하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입술을 깨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런 평화로운 명절 연휴에 자신 같은 사람의 연락이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될 것 같았다.'회사에서 만나면 제대로 사과하고 정면으로 마주해야지.'3월 1일이 지나면 신하늘은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터였다. 회사에 남아 있는 동안만큼은 그녀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었다.잠시 확인한 포털 사이트에는 다행히 그녀를 향해 날을 세우던 자극적인 기사들이 한풀 꺾여 있었다. 인간적으로 베푼 그녀의 선행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차준호가 손을 썼거나 친구인 이아준이 언론에 압박을 가한 게 아니더라도, 미디어 스스로 자정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보였다.하지만 신호가 바뀌고 차를 몰아가면서도 최기범의 손끝은 끊임없이 떨려 왔다. 기사가 가라앉을수록 제 어머니는 더욱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건을 터뜨릴 준비를 할 테니까. 불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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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반격이 시작되는 시각

자정을 갓 넘긴 시각.Umm- Umm-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국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기자라는 단어를 보고 녀석도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사무실을 둘러보니 직원들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고, 이 늦은 시각에도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이무휼과 김강무 과장의 모습이 보여 나 역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도국아. 미안해, 바쁜 거 아니지?”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이돌의 시간을 뺏는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너만 할까.내가 얼마나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도국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바로 앞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부모님이 계신 추모공원에 들렀다가 세종동 집으로 향해 그 참상을 확인하고, 다시 봉사활동과 집 정리를 거쳐 이렇게 회사로 돌아와 야근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맞아, 나도 좀 정신이 없었네.”― 아는 기자들 많아. 전부 소개해 줄 테니까 걱정 마.왜 그러냐느니 무슨 일이 생긴 거냐느니 꼬치꼬치 묻기도 전에, 도국은 가장 확실한 결론부터 내어놓았다. 역시 내가 살아오며 얻은 복 중 최고는 단연 친구 복이었다.명절 전후로 내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위아래로 거세게 요동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붕 떠 있던 마음은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마치 운명이 내 역량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도국아, 고마워. 누군가가 그러더라고, 내가 요즘 변했다고.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변해볼까 싶어서.”― 하늘아, 너는 그냥 너야.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차분하고 단단한 음성이 가슴 깊은 곳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이 세상은 가만히 엎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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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시원하게 쏘아 올려진 악녀의 축포

같은 시각, 테헤란로 CH-컴퍼니 23층 게임 개발실.“받으십시오. 밤샘에는 따뜻한 게 최고입니다.”김강무 과장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두유 한 병을 내게 건네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와,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진짜 능력자이십니다, 신 과장님.”김강무는 내가 밤새 오류를 수정해 둔 보고서를 언제 출력했는지, 손에 쥐고 서류를 펄럭펄럭 흔들어 대며 소리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나는 그가 건넨 따뜻한 두유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방긋 웃어 보였다. “어머, 김 과장님도 같이 밤새우셨잖아요.”립서비스가 아니었다. 김강무는 확실히 이 분야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고, 어제 꽉 막혀 있던 내 업무에 물꼬를 터주는 결정적인 한 방을 건네준 진짜 능력자였다.그러자 김강무는 내 책상을 목재 소리가 나도록 콕콕 두드리더니, 깊은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방긋 웃어 보였다.“힘내십시오. 세상은 올바르게 걷다 보면 시간이 조금 걸릴 뿐, 결국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다 알아내게 되어 있으니까요.”그가 짧게 건넨 말에 담긴 묵직한 위로가 가슴 깊은 곳까지 온기로 전해졌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글쎄요, 전 거짓말쟁이들도 종종 이해해요. 저도 가끔은 지름길로 가고 싶을 때가 있더라고요.”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응답하는 내 모습에, 김강무 과장의 눈동자가 호기심과 감탄으로 깊게 일렁였다.***시간은 어느덧 오전 9시를 향해 달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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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바닥을 치고 곧 날아오를 퀸

신하늘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최기범은 석상처럼 굳어버린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가는 김희주를 망연히 바라보았다.그때, 거실 쪽에서 고용인들의 당황스러운 소란이 일더니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윽고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주방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당장 당사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아니, 다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어수선하게 굴어?”뒤따라 들어온 보좌진 두 명이 최승현 회장과 최기범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리다가, 눈이 뒤집힌 김희주와 마주했다.김희주의 수석 보좌관이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이미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하기 시작한 정치 섹션 단독 기사들이 번뜩이고 있었다.“신하늘의 행보가 보통이 아닙니다! 명절 내내 세종동 주민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받은 서명이······ 단순한 재개발 동의서가 아닐 확률이 커 보입니다.”“게다가 첫 보도를 터뜨린 곳이 다름 아닌 XX일보라 신빙성이 너무 높습니다!”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최기범은 숨을 크게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최승현 회장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로 김희주를 노려보았다.“그러게 계속 그 애를 건드려 대더니! 박 보좌관, 설마 지금 이게 사실이라면······!”“네, 회장님. 이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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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라는 치트키

명절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평온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하지만 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하나는 이미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 만큼 거대한 파장을 몰고 오고 있었다.수요일 오후.회사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으나, 내 휴대전화만큼은 끊임없이 진동하며 불이 나고 있었다.[신하늘, 이게 비밀이었군. 판을 이 정도로 크게 키우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야.]차준호는 그답게 능청스러운 화법으로 서늘한 놀람을 표시해 왔고,[하늘아, 일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간다. 언론이 아주 알아서 소설을 써주네.]도국의 말대로 대한민국 기자들이 터뜨린 단독 특종은 그 뒤로 수많은 추측성 기사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었다.[대한민국 언론들 진짜 대단하다. 억측성 기사가 도를 넘었어. 그래도 조만간 커다란 폭죽을 터뜨릴 것 같다. 힘내라!]이아준 역시 신이 난 듯 연신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나는 친구들에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자는 답신만 짧게 남긴 뒤, 다시 내 할 일에 집중했다. 여전히 모니터 앞에 앉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신작 게임이 정식으로 출시될 때까지, 회사라는 이 안전한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업무에만 몰두했다.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김희주에게 당하고 또 당해왔다.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려 하면 더 잔혹하게 짓눌러왔던 그녀였다. 그런 김희주를 상대로 내가 골라낸 신의 한 수.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아킬레스건인 선거판을 흔드는 일이었다.사실 나는 직접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었고, 세종동 어르신들에게 받은 동의서를 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식 제출할 생각조차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국회의원을 꿈꾼 적도 없었거니와, 오랫동안 정계를 바라보며 차근차근 준비해 온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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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역린, 모두 판을 잘 살펴야 해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를 향해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일본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최 실장님?”김희주는 증오스러울지언정 최기범은 내게 평범한 직장 상사였다. 죄는 미워하되 핏줄까지 매도할 수는 없는 법.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위치를 철저히 분리하며 인사를 건네자, 최기범은 풋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양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진짜 제대로 우리 엄마한테 한 방 먹였더군요. 좋습니다. 내가 힘을 실어줄 테니까 진짜 선거에 나가보세요. 제대로 도와줄 테니까.”사람이 어찌 이리 순수할 수 있을까.최기범의 말과 표정에서 위선이나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김희주가 악독한 정치인이라 한들, 저자에게는 엄연한 어머니일 텐데.“실장님, 도움은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려요.”“안 그래도 면목이 없었는데, 신 과장. 진짜 응원하겠습니다.”제 일도 아닌 것처럼 통쾌해하는 그의 표정이 낯설면서도 씁쓸했다. 고마움과 애매함이 섞인 답을 건네려던 그 순간, 최기범의 등 뒤로 차갑고 묵직한 공기가 스며들었다.“네가 설칠 때마다 판이 망쳐진다는 거, 아직도 왜 몰라? 최기범, 넌 신하늘한테서 떨어져서 네 할 일이나 해.”차준호의 목소리가 최기범의 등 뒤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명확하게 꽂혔다.***차준호가 등장하자 주변의 공기가 서리가 내리듯 묵직하게 내려앉았다.근처에 서성거리던 직원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흩어졌고, 나정아와 한은숙 역시 뒷걸음질 치며 조용히 사라졌다. 그 모습에 내 입에서는 절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가 올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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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차가운 시선 끝에 타오른 불꽃

이아준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현실이 맞는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이왕춘 회장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언제나 이아준의 경영 능력을 시험하듯 날 선 시선으로 엄격하게 평가해 왔다. 십만 명이 넘는 임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계, 나아가 대한민국 경제 전반을 흔들 수 있는 자리였기에 회장의 선택은 지독하게 신중했다.“올봄이요?”그런 그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판을 움직이고 있었다.“내 지분 전체, 4월 초에 네 앞으로 전부 넘겨주마.”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이아준은 늘 복수라는 칼을 품은 채 L그룹을 제 손으로 집어삼키는 것을 인생의 단 하나뿐인 목표로 삼아왔다.아버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음에도 이왕춘의 반대로 내쳐졌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뒤늦게 혈육을 찾겠다며 악착같이 자신을 거두어들였던 늙은 너구리 같은 이왕춘.단 한 번도 아버지의 온기를 느껴보지 못한 채, L그룹이라는 거대한 지옥 굴에 들어와 지난 십 년 동안 견뎌내야 했던 핍박과 수모를 아준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그래서일까. 지금 이 순간 그의 심장은 폭발할 듯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이건 조금 놀랍네요, 할아버지.”여유로움을 가장한 시선으로, 이아준은 그동안 자신을 벌레 취급했던 나지란과 이아정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아······ 아버님······.”발끈하며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모자랄 나지란과 이아정마저 넋이 나간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 역시 뜻밖의 광경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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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심장으로 번지는 전율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소속사 대표실. 때아닌 신하늘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긴급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강소희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다. 굳이 신하늘 같은 밑바닥이 조금 꿈틀거렸다고 소속사 전체가 비상이라니.“대표님, 대체 이게 무슨 난리예요?”“소희 씨, 지금 보통 큰일이 아니야. 신하늘 때문에. 김희주 똥물이 우리한테 튈 거야.”김희주가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에 강소희는 내심 자나 깨나 바라던 숙원이 이루어진 듯 쾌재를 부르던 참이었다. 누구보다 김희주의 몰락을 열렬히 바라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세종동 서쪽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최기범과 가까이 지내면 오물이라도 묻는다는 듯 벌레 취급하던 여자였다. 최기범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짝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수모와 멸시를 준 악녀 중의 악녀가 김희주였는데.최기범을 멀리하기만 하면 부와 인기를 모두 안겨주겠다며 주원형 대표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퍼붓고, 정치적 입김을 넣어 강소희의 입지를 다져준 것 역시 김희주였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은 세월이었다.“이를 어쩌죠, 대표님? 큰일이네요, 정말.”옆에 있던 김훈까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지.“김희주가 힘을 잃고 무너지면 그게 우리 소속사에 경사가 아닌가요? 그동안 그 여자가 얼마나 내 피를 말리게 했는데요. 쯧!”사실 주원형 대표 역시 김희주에게 또 연락이 왔다며 부들부들 떨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맛대로 본인이 속한 정당의 행사에 불러내고, 강소희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은근한 협박과 압박을 일삼던 김희주가 아니었던가.“소희 씨,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진짜 문제는····&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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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맛있게 매운 맛을 터트리다

차준호가 나를 위해 공식적인 연인이라 선언을 한다고?늘 내 뒤를 묵묵히 받쳐주고, 나를 품어 안을 때나, 심지어 차진철 회장 앞에서도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기던 그였다. 하지만 미래까지 함께할 수는 없다며 단단한 벽을 치던 남자가 이제 와서 나를 자신의 여자라고 세상에 밝히겠다니.나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직시하며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이 회사의 명운을 짊어진 분입니다. 굳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한 발짝 바짝 다가서며 낮게 읊조렸다.“이대로 혼자 달려 나가다 멈춰 섰을 때, 내 여자라는 태그를 달아놓아야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결국 이것 때문이었나.내가 또다시 홀로 남아 처참하게 짓밟힐까 봐. 판을 흔든 뒤 감당해야 할 그다음까지 그가 미리 걱정해 주는 건가.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길은 고마웠고, 모든 것을 걸고 지켜주려는 그의 중후한 헌신에 가슴이 울컥거릴 만큼 감격스러웠지만······.“너무 늦었네요, 대표님.”말을 마친 나는 서늘하게 돌아설 준비를 하였다.어차피 나를 온전히 안아줄 마음이었다면,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확실히 내 옆에 서 주었어야 했다.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었다.내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차준호가 전격적으로 일어서며 내 손목을 강하게 쥐어잡았다.“그래, 지독하게 늦었다는 거 알아.”억센 악력 뒤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러니 내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일단 식사라도 제대로 마치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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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슬픔 따위 짓밟고 나아가는 밤

그날 밤, 자정을 넘긴 시각.신하늘이 터트린 충격적인 파장 덕분에 도국은 예정에 없던 일정이 백지화되며 간만에 유쾌한 여유를 얻게 되었다.그가 발길을 옮긴 곳은 잠실에 위치한 이아준의 레지던스였다.JW 대표실에서 보쌈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음에도, 도국은 문을 연 24시간 분식집에 들러 맥주와 떡볶이, 순대, 튀김 따위를 포장했다.벅차오르고 기분 좋은 일이 생길 때면 어째서 이런 투박한 음식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까. 어린 시절,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마다 늘 곁에 놓여 있던 음식들이라 그런지도 몰랐다.“나 어제도 최고의 하루였는데 오늘도 운수 좋은 날로 쳐야겠다. 도국이가 불쑥 찾아오다니, 하하!”도국이 이아준의 레지던스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이아준은 그를 기꺼이 환대했다.거실 TV를 나지막이 틀어둔 채,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맥주 캔과 떡볶이, 순대, 모둠 튀김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을 펼쳐놓았다.“대표실에서 보쌈을 그렇게 먹고 왔는데, 이상하게 이게 또 당기더라고.”그 말에 이아준이 손가락을 튕기며 화답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도 저녁에 스테이크를 썰긴 했는데, 떡볶이 들어갈 배는 따로 있지. 아무래도 나, L그룹을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집어삼키게 될 것 같다. 혼술이라도 할까 했어.”“잘됐네. 축하한다.”“지금 심정 같아선 팬티만 입고 잠실역 한복판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니까, 하하!”도국은 맥주 캔을 내밀며 이아준을 향해 넌지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아준은 떡볶이 조각을 집어 먹으며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더니, 도국의 맥주 캔에 제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몸 관리 끝판왕인 주원형 대표가 너랑 보쌈을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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