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자정을 갓 넘긴 시각.
Umm- Umm-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국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기자라는 단어를 보고 녀석도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직원들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고, 이 늦은 시각에도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이무휼과 김강무 과장의 모습이 보여 나 역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국아. 미안해, 바쁜 거 아니지?”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이돌의 시간을 뺏는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 너만 할까.
내가 얼마나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도국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바로 앞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계신 추모공원에 들렀다가 세종동 집으로 향해 그 참상을 확인하고, 다시 봉사활동과 집 정리를 거쳐 이렇게 회사로 돌아와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선거 당일의 공기는 미세먼지와 황사가 어제보다 한층 지독해져, 대지마저 내 마음만큼이나 무겁고 탁하게 눌려 있었다.창밖으로 건너다보는 세종동의 풍경은 불투명한 회색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이미 거대한 전쟁터였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속보들이 섬광처럼 눈을 찔러왔다.[속보! 김희주 후보, 어젯밤 돌연 사퇴! 과연 그 표심은 신하늘에게 향할까?][운명의 시간, 세종동 민심의 향방은? 신하늘, 승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나][정가 이슈, 신진 정치인의 화려한 탄생 예고! 금배지 거머쥘까······ 해외 언론도 조명][글로벌 시선! 전 세계에 K-선거 열풍 일으킨 신하늘, 최종 성적표는?]김희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치졸했다. 패배를 직감하자마자 비겁하게 도망치듯 사퇴하며 마지막까지 내 탓이라고 독화살을 쏘아댔다.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려는 그 악의적인 셈법에 치가 떨렸지만, 그런 정치적 소음 따위는 지금 내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대세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 온 신경은 오직 곁에 서 있는 차준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평소라면 이미 거실에서 노트북을 열어 두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정오가 다 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차준호의 안색은 잿빛이었고, 표정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민하게 서 있었다. 뒤늦은 식사를 마치고 옷을 차려입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집 앞을 가득 메운 [스카이 블루] 지지자들 앞에서도 차준호는 특유의 오만하고 도도한 미소를 유지했지만, 내 손
폭풍 전야의 고요가 세종동의 초라한 침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모두가 떠나고, 서로의 노고에 감사하며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 지금. 시계는 이미 새벽 2시를 지나치고 있었다.하루 중 가장 짙고 참담한 어둠이 방 안을 집어삼키고 있는 시간이었다.요 며칠 미세먼지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종일 야외 유세를 하며 들이마신 공기는 폐부 깊숙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목이 까끌거려 침 한 번 삼키는 것조차 버거운 밤이었다. 온종일 세상을 흔들던 확성기 소리와 지지자들의 환호성은 유리창 너머 아득한 소음으로 밀려났고, 실내에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짙게 깔려 밀도를 높였다.어스름한 간접 조명만이 은밀하게 침실에 부서지는 가운데, 나는 그의 서늘한 체온에 기대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선거 운동이라는 잔혹한 레이스를 마친 뒤 마주한 이 시간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처럼 치명적으로 위태롭고도 아름다웠다.이제 정말 끝인가.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내일의 해가 뜨면 오늘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예감이 전신을 훑었다.“후련하네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차준호는 복잡한 내 속내를 정돈해 주듯,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은 평소의 오만함을 벗어던진 채,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는 깊은 애틋함으로 일렁이고 있었다.“신하늘, 잘 버텼어.”“또 하라면 절대로 못 할 것 같아요. 정말······ 죽을 만큼 피곤했거든요.”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고, 차준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귓가를 간지럽힐 만큼 다정한 웃음소리를 흘렸다.차준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여전
선거를 단 하루 앞둔 화요일, 세종동의 공기는 폭염에 대지가 들끓는 한여름처럼 숨이 턱 막힐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오늘 밤 12시까지입니다! 단 한 표,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더 잡아야 합니다!”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이승은의 날카롭고 명확한 음성이 캠프 전체의 정적을 깨부쉈다.그녀의 지휘 아래 선우현과 허기찬이 유세 원고를 최종 점검했고, 수많은 자원봉사자는 차량의 마이크와 음향 장비를 풀가동하며 동선을 체크했다.오늘 밤까지 남은 시간은 이미 가혹한 카운트다운에 돌입해 있었다. 법적으로 허용된 시간이 종료되기 전까지 단 1분 1초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는, 사생결단의 마지막 스퍼트가 시작된 것이다.유세차 상단에 올라선 나는 공약을 하나하나 토해냈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유권자들은 미친 듯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휴가까지 내고 달려온 20, 30대의 젊은 [스카이 블루] 지지자들은 나의 매 걸음을 구름처럼 따라다녔다. 허기찬은 거리를 메운 인파 사이를 누비며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손바닥이 짓무르도록 신호봉을 휘두르며 안전을 확보했다.이승은의 치밀한 지휘 하에 나는 세종동 전역을 샅샅이 훑으며 폭풍처럼 질주했다.그리고 그 정중앙에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차준호가 있었다.지독한 통증이 이미 시작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태양 아래 당당히 서 있는 남자는 나약한 환자가 아니었다.세상의 모든 권력을 내 손에 쥐여주기 위해 판을 흔드는, 오만한 군주 그 자체였다.그는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세로 나를 위해 선거 점퍼를 입고 외조하는 남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나를 대신해 마이크를 잡고, 나를 위해 목청껏 내 이름을 세상에 외쳤다. 그리고 언제나 내 손을 꼭 잡
월요일 밤이 깊어 갈수록, 대한민국 언론과 정치권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완전히 파묻혀 갔다.[속보! L그룹 회장실 전격 압수수색······ 총선 단 2일 전, 정재계 매머드급 파장][이왕춘 회장 돌연 쓰러져······ 실권 쥐었던 거물의 행방에 검찰 총력전][L그룹 파문의 진실은? 자택까지 수사관 급파, L그룹은 이아준 회장 대리의 비상 체제 가동]TV 앵커들의 격앙된 목소리와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는 광풍 속에서도, 이아준은 냉철하게 중심을 잡았다.쏟아지는 언론의 문의를 차단하고 임원진을 긴급 소집하며 L그룹 내부를 견고하게 다잡고 나서야 VIP 휴게실로 돌아온 그였다.도국은 미리 와서 기다렸다가 이아준이 등장하자 어깨를 다독였다.“수고했다.”“어휴, 진짜 정신없네. 할아버지가 대체 어디서 무슨 죄라도 지으신 건가?”“글쎄.”도국은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하는 이아준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달콤한 음료나 술 대신 얼음처럼 차갑고 시원한 생수병을 건넸다.아무리 여야가 운명을 걸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정쟁의 계절이라지만, 총선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이토록 무자비한 칼날이 정면으로 들어올 줄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바로 그때, 도국의 슈트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나지막하게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찍힌 이름을 확인한 도국의 눈매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평소라면 결코 이 시간에 올 리 없는 연락이었다. 그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며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짧은 정적 끝에 익숙하면서도
문 앞에 서서 차준호를 떠올린 나는 다시 거울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곳에 비친 내 모습은 조만간 대한민국 정치인이 되어 거대한 권력을 포상받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남편을 살리려는 비정한 마녀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인생에서 오답을 낸다면 그 대가는 신에게서 받는 벌이 될까.그 오만하고 완벽한 남자가 화마로 얼룩진 몸을 회복시키느라 병원 신세를 진 차진아의 일상을 다시 훼손해 생명을 연장하는 상황을 견딜 리가 없었다.수술 후유증이 차진아에게 발생한다면 지독한 낙인이자 저주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난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던 그때였다.-그래도 전 대표님의 이식 수술을 권하고 싶습니다.강진욱의 냉혹한 설명이 내 폐부를 짓눌렀다.이를 어쩌나.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저 역시 대표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 신에게 의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고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와 마주했다.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플랜 B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그 시각, 잠실 L그룹 본사 세미나실 옆 VIP 대기실.회장 대리라는 무거운 직함을 짊어지고 임원진과 전 본사 직원이 운집한 대형 행사를 무사히 치러 낸 이아준은 무대 뒤로 걸어 나오자마자 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오늘따라 이왕춘은 왜 부재중인 것인지. 마냥 기뻐야 하지만, 어깨 위를 짓눌러 오는 수천 개의 시선이 안겨 준 중압감
월요일 아침, 서울 성수동 스튜디오.잡지 화보와 글로벌 명품 브랜드 협찬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튜디오는 수많은 취재진과 스태프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메이크업을 마친 세나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나타난 도국을 보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 숨이 막혀 왔다.“세나야, 왔어?”그래도 오랜만의 재회가 어색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그의 눈빛에 세나의 가슴속 깊은 곳은 다른 의미로 속이 타들어 갔다.‘한때 키스도 나누고, 계약일지언정 몸과 마음을 다 건네며 연인으로 지냈던 사이인데······.’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지만, 차갑게 선을 그으며 관계의 종말을 선언한 것 역시 도국이었다.“오빠. 더 근사해지셨네요.”“세나 너도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하다며.”인기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민망했던 어젯밤 공항의 해프닝이 떠올라 화제를 돌렸다.“전 아직 멀었어요. 어제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설마 제 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신하늘 후보님 지지자들인 거 있죠?”그 말에 도국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풋, 하고 낮고 감미로운 탄성을 흘렸다.“녀석의 인기는 지금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지.”신하늘의 이름만으로도 눈부시게 풀어지는 그 미소에 세나의 가슴 한구석이 짓뭉개지듯 아려 왔다. 자신을 떠올릴 때도 저런 눈빛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도국이 신하늘을 향해 품은 감정은 단순한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괴로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