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11 - Chapter 20

105 Chapters

#11화. 독이 오른 거짓말쟁이

“어머!”나는 발끝이 병실에 들어오는 손님의 발에 걸리며 몸이 기우뚱했다. 팔과 허리를 낚아채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볼썽사납게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기에 간담을 쓸어내렸다. 그 낯선 남자의 손길이 팔을 단단히 붙들어 매는 바람에 우아한 자세 그대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이 얼마나 행운인가 고마운 마음에 도와준 이를 올려다보았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을 지닌 처음 보는 이 남자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나를 다정하게 잡은 채 염려의 시선을 보냈다.“괜찮습니까? 신 하늘 씨?”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코트와 슈트 사이로 풍기는 낯선 향이 코를 자극했다. “아, 잡아 주셔··· 고맙습니다.”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내 몸의 주인은 현재 내 것이 아닌 듯. 날 지탱해 주는 다른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과 커피 향 섞인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익숙한 냄새가 역설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신 비서? 운동 신경 이리도 없는 거야?”하지만 내 귀에는 현실을 파악하게 해 주듯 날카로운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하필 망할 차준호의 가슴팍에 내 등이 겹쳐 있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으로 ‘대표님’이라는 말만 맴돌 뿐이었다.아무리 미운 차준호라도 넘어지는 것은 막아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그에게 안겨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오래전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랜만에 느낀 익숙한 품 안이라 말문이 막혔다.머릿속에선 그를 경멸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몸은 익숙한 그의 체온에 녹아내려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얼른 그에게서 떨어져 뭐라 말을 하려는 그때.“최기범, 넌 왜 왔어?”최기범이라는 손님이 친구인지 차준호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편안한 말투가 흘러나왔다.“소식 지금 들었어.” “멀쩡하니 가 봐.”차준호는 여전히 날 뒤에서 안은 채로 최기범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는 이 상황에서는 더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틈을 타 휘감고 있는 차준호의 단단한 팔을 풀어내어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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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처음부터 덫을 쳐 놓고

강소희는 흐드러지듯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잘게 떨리는 붉은 아랫입술을 지시시 베어 문 그녀가 차준호의 등 뒤로 바짝 다가섰다. “나, 천의 얼굴로 칸 레드카펫도 밟아본 배우잖아.”강소희는 제 가슴을 차준호의 등에 부벼오며 살포시 차준호를 끌어안았다. 늘 갖고 싶었던 남자였다. 차준호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난 3년간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니. 차준호는 지금 어디까지 기억하고, 제 상태를 얼마만큼 눈치채고 있는 걸까.차준호의 등에 뺨을 기댄 채 강소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닿아오는 차준호의 체온이 너무나 냉랭해 강소희는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착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겹겹이 껴입은 가면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지독한 온도였다.‘그래도 좀 봐주지.’화장기 없는 맨얼굴이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피부과를 드나든 덕에 완벽하게 아름다울 터였다. 거울 속 제 표정 역시 사랑에 푹 빠진 여인처럼 애틋하고 가련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차준호의 시선은 끝내 강소희에게 닿지 않은 채, 창밖의 어느 한 지점만을 집요하게 꿰뚫고 있었다.“차준호, 우리 강원도까지 왜 내려갔었는지,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잖아?”천하의 차준호와 동승하다가 이리 사고까지 났으니, 비참하더라도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소희는 차준호의 넓은 어깨를 더 세게 감싸 안았다.“전혀.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머지않아 네가 필요해서 내 몸을 갈구하게 될 거야.”“거짓말.”차준호의 나직한 음성이 병실의 공기를 얼려버렸다.“네 인생에 진짜가 있기는 해?”송곳 같은 한마디에 강소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긴, 강소희의 인생은 전부 거짓뿐이었다. 이제는 스스로도 뭐가 진실이고 뭐가 가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였다. 세종동 서쪽의 지독하게 가난한 동네 태생이 해외 명문가 출신으로 둔갑한 것도, 모태 미녀로 포장된 완벽한 이목구비도 모두 칼을 대어 만들어 낸 새빨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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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의 구원자, 원티어급 남사친

게임계에서 손꼽히는 대작을 출시한 IT회사인 CH-컴퍼니에 합격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비서실에 발령이 나고 엔터 회사로 확장하면서 일에 파묻혀 살다 대표와 비밀 연애에···,좋아했던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고가 나 기억상실이라는 황당한 사건을 겪으니 지금은 숨통을 죄어오는 악몽이 되어 버렸다.그동안 번 돈의 일부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빚을 갚는 데 써버렸고, [하늘 재단]에 기부하여 세종동 어르신들을 위해 지출한 바람에 재정 상태는 당연히 좋지 못했다.이게 현실인가 싶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정류장의 고요를 깨트렸다. 액정 위로 뜬 이름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이어폰 너머로 친구 이아준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하늘아, 지금 집이면 잠실로 넘어올래? 도국이도 불렀는데.“아준아···. 미안, 나 아직 병원 앞 정류장이야.”-뭐?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이아준의 타박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들이었지만, 차준호와의 은밀하고 파괴적인 연애사만큼은 차마 녀석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결국 속내를 조금 흘리고 말았다.“사실··· 안 그래도 퇴사를 고민 중이야. 이직을 하든 그만두든 해야 할 것 같아서.”어차피 기억상실이라는 황당한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내 첫 경험이자 첫 연애였지만, 남겨진 상흔은 너무나 처참하고 지독해 어서 이 지옥에 벗어나고 싶었다.-오호, 그래? 안 그래도 너 우리 개발실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잘됐네. 이직하고 싶으면 언제든 우리 회사로 와. 네 전공 살려서 컴퓨터 실컷 만지게 해줄 테니까.눈물이 핑 돌 만큼 고마운 소리였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진짜 고마워, 하지만 내 계약서 조항이 되게 복잡하게 꼬여 있어. 3년 동안 동종 업계 이직도 안 되고, 일방적으로 나가면 위약금이 너무 많아서 꼼짝도 못 해.”내 하소연에 수화기 너머로 이아준의 낮은 웃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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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잃고 싶지 않아, 선(線)도 못 넘고

강소희는 밤이 늦어 조용한 병원 복도에서 홀로 창가로 향했다. 유리에 비친 제 맨얼굴이 어쩐지 낯설고 처량해 보여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 사고가 났어도 최기범은 늘 똑같았다. 미련할 정도로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며 말이다.“병문안 왔다며. 나 좀 깨우지.”-자는데 무슨.세상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려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비빌 언덕이 되어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줬으면 싶었다. “너 아직도··· 세종동에서 혼자 살아?”-왜?“놀러 가고 싶은데.”강소희의 손이 갈 곳을 잃고 입술 주변을 맴돌다, 결국 습관처럼 손톱을 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초조할 때마다 나오는 오랜 버릇이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 빈말 이제 그만해.차갑게 선을 긋는 음성에 강소희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전화를 끊기 위해 콧방귀를 먼저 뀌었다.“빈말 아닌데.”손톱이 살점을 파고들어 아릿한 통증이 밀려오자, 입 밖으로 나가는 말도 비틀려 나갔다. 새해가 지나 한 살 더 먹어 나이 서른둘이 되었는데,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 민망해 얼굴에 화끈하게 열기가 돋았다. 그때, 귓가로 전혀 기대하지 않은 무거운 소리가 날아들었다.-앞으로 나 다른 여자 만날 거야. 앞으로 연락하지 마. 일순, 강소희의 심장이 저 깊은 바닥으로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가 통화 종료 버튼을 쉽게 누를 수가 없었다. 가슴이 찌르르하게 아파왔다.“그 여자는 너로 인해 상처 안 받았으면 좋겠네! 쳇!”최기범의 대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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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독한 일방통행

대한 종합 병원 VIP 병실.극도의 정적을 깨고 거친 숨소리와 살결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사정없이 엉켜 들었다. 은밀한 소파 위, 남녀의 격정적인 입맞춤과 온몸을 소유하려는 듯 거칠게 쓸어내리는 스킨십이 밀도 높게 펼쳐졌다. 강소희는 주원형이 오자마자 맹수처럼 자신에게 몸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냈다.그녀의 새하얀 환자복은 짐승의 발톱에 걸린 것처럼 이미 찢겨 나갔고, 힘없이 떨어진 단추들은 대리석 바닥 여기저기로 요란하게 흩어졌다. 이미 이 지독한 포식자에게 철저히 길들여진 몸이었다.이 가학적인 행위가 나름의 주원형식 애정 표현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원형의 단단한 가슴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면서도, 강소희의 머릿속은 오직 차준호라는 존재로만 가득 차 있었다.‘늘 이런 뜨거운 욕망을, 차준호와 가져보고 싶었는데.’그나마 잘되려던 찰나에 그 남자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 잔인했다. 물론 그 완벽한 남자를 제 곁에 묶어두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강원도까지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두긴 했지만, 결국 신(神)은 강소희에게 차준호를 온전히 가질 수 있는 아량 따윈 베풀어 주지 않았다. “왜 딴생각이야?”주원형은 귓가를 파고드는 숨결 사이로 그녀의 미세한 굳어짐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턱을 강하게 쥐어틀어 올리는 손길은 거침없었다.사고로 상처 난 제 몸을 내려다보면서도 저런 지배욕 가득한 말이 하고 싶을까. 입술을 집어삼키고 여배우의 몸 구석구석에 강렬하고 붉은 흔적을 남기면서, 그녀의 영혼과 생각까지도 독차지하려는 남자의 집착이 소름 끼치도록 뜨거웠다.“대표님, 뭐예요? 나 환자인데···. 꼭 이런 데서까지 이러고 싶어요?”“환자라니까 특별히 위로해 주러 왔잖아.”자신의 몸을 탐하는 건 결국 제 뒤틀린 욕구를 채우기 위함일 터였다. 게다가 차준호에 대한 열등감과 라이벌 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주원형이었으니, 소희가 준호와 사고가 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있을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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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 인생에 특별한 퀸

잠실 초호화 레지던스 70층, 거대한 통유리창 밖으로 떠오르는 일출은 압도적인 장엄함을 드러냈다.동쪽 하늘이 붉은 비명을 지르듯 처절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신하늘의 폭발 직전의 감정처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상태 같다는 기분이 들어 도국은 슬그머니 미간을 좁혔다.“지난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내내 불안해 보이더니.”도국의 묵직한 혼잣말에 이아준 역시 향긋한 커피를 머금으며 나직하게 대답을 건넸다.“그 변호사 출신이라는 CH-컴퍼니 비서실장은 태평하게 휴가나 다니던데. 국아, 나는 하늘이만 혼자 지옥 같은 데서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영 안 좋아.”우유 잔을 든 채 창밖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도국은 잠시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정돈했다. 요즘 신하늘이 보여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실루엣이 유독 그의 심장을 옥죄듯 걱정스러웠다.화려한 연예계에 몸담으며 이성을 몇 번 만나보았어도, 여자의 깊은 속마음까지는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걸 도국은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무심한 척 단단히 선을 긋던 사람이 오히려 한순간에 집착하기도 하고, 쿨한 척 돌아서도 뒤에서는 질척대며 우는 모순적인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으니까 말이다.“어쩌면··· 겉보기에만 점잖고 완벽해 보이는 차준호 대표가 문제일지도.”도국은 우유를 삼키며 창밖의 푸른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일출이 완전히 끝나 사방을 눈부시게 밝힌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핏줄이 설 만큼 눈을 찡그렸다. 이젠 정면으로 태양을 바라보기엔 부담스러울 만큼, 세상이 강렬하고 거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좀 시켜서 뒷조사라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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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 거슬리게

차준호는 대체 무엇이 그토록 오만하고 못마땅한지 인상을 팍 찌푸린 차진철 회장을 관조하듯 바라보며 체스 게임을 이어갔다.“지난 세월 애써 키워놓은 CC그룹을 이제 통째로 물려주려는 찰나에 하필 기억을 잃다니······. 에잇, 판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잖아.”평생을 바쳐 일궈놓은 거대한 왕국을 자신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차진철의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차준호는 늘 그의 소망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던 아들이었기에, 이번에도 역시 무심하리만치 냉정하게 대꾸할 뿐이었다.“전문 경영인 체제로 돌리시라니까요.”타인의 커다란 책임이나 거대 기업의 명운 따위를 제 어깨에 짊어지는 건, 지금의 그로서는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쯧쯧, 어째 성격은 날카롭고 되바라졌던 어렸을 때로 완전히 돌아가 버렸구만.”그 말에 차준호는 가만히 팔짱을 끼며 병실 내부를 서늘하게 둘러보았다. 이질감이 훅 끼쳐오는 고미주와 차진아를 보더니 이내 묵직한 한숨을 삼키며 차진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기억을 잃고 눈을 뜨니 갑작스레 제 삶을 침범한 거대한 가족들이라니. 지난 3년간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건지 지독한 의문이 치밀었다. 이 머릿속 공백이 제대로 채워지기는 할는지, 주치의인 강진욱도 갑갑한지 내내 한숨만 쉬었다.초호화 호텔을 통째로 사서 본가를 뛰쳐나와 철저히 혼자 고립되어 산 것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마다 제 변해버린 성격을 운운하는 것도 지독하게 기묘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과거 따윈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차준호는 바로 다가올 냉정한 미래의 손익 계산서만 따지기로 했다.그런데 그 순간, 차준호의 뇌리를 강하게 스치는 궁금증이 있었다.“그런데 지난 3년간 제가 아버지와 둔 체스 승률은 대체 어떻게 되나요?”분명 현재의 서늘한 자신이라면 일부러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고 져줄 위인은 절대 아니었지만, 기억 저편에 묻힌 3년 동안의 자신이 어땠을지 급작스러운 호기심이 일었다.그때 차진철은 다시 나이트(Knight)를 집어 들었다. 기물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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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손에 쥔 목줄

최기범은 사무실을 나와 성마른 걸음으로 대표실 앞, 그녀가 머무는 비서실로 향했다.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그의 커다란 손은 제 손에 쥔 종이 한 장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마주치던 사원들이 하나둘 최기범을 향해 다급히 목례를 하고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그가 목에 걸고 있는 회사 ID 카드의 테두리가 붉은색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숨 막히는 침묵의 이유가 설명되었다. 파란색 테두리의 과장급이나 초록색 테두리의 대리들은 감히 통성명할 기회조차 없는 임원에 속하는 고위 직급.최기범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이 비상구 철문을 거칠게 밀치고 계단을 뛰어올라 25층 복도를 가로질렀다. 세미나실과 응접실, 그리고 대표실이 위치한 그곳은 차준호의 공백으로 인해 기묘할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달음에 달려와 어느새 도착한 비서실의 문앞. 이곳을 거쳐야만 대표실에 이를 수 있겠지만, 최기범의 종착지는 오직 여기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두꺼운 문을 두드렸다.“네, 들어오십시오.”문틈 사이로 신하늘의 낭랑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자료를 한참 정리하던 나는 낯선 노크 소리가 들리자, 흐트러진 원피스 자락을 매끄럽게 정리한 뒤 허리를 곧게 폈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차림새에 잠시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굵은 뿔테 안경, 편안한 점퍼와 청바지 차림의 낯선 이방인이라니. 그러다 그가 목에 걸고 있는 ID 카드를 확인한 순간, 최기범 실장임을 알아보았다.“최기범 실장님, 오셨습니까. 용건 말씀해 주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병원에서 보던 반듯한 수트 차림과 회사에서의 수수하면서 캐주얼한 모습이 전혀 매치되지 않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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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 짐승이 움직였다

JW 소속사 대기실 문이 무겁게 닫히자, 사방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며 두 사람만의 밀폐된 공간이 완성되었다.“안녕, 세나야.”“안녕하세요! DG 선배님!”도국은 음악방송 스케줄을 거칠게 마치고 숨을 고르던 중, CH-컴퍼니의 신인 아이돌 ‘에스텔라’의 멤버 세나를 제 대기실로 불러들였다. 아슬아슬한 튜브톱과 미니스커트로 위태로운 청순함을 강조한 세나는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도국에게 인사를 건넸다.“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우리 오늘 키스해야 하는 거, 맞지?”철없던 어린 팬이었던 시절, 농담처럼 뽀뽀해 달라고 조른 것도 세나였고, 성인이 되면 약속을 꼭 지켜달라던 것도 그녀였다. 도국은 평범한 팬이었다면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CH-컴퍼니 소속의 세나였기에 기꺼이 그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었다. “네···!”먼저 움직인 것은 세나였다. 소파에 깊숙이 앉은 도국을 향해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와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그럼, 하면 되겠네. 이리 와.”도국의 낮고 은밀한 재촉에 세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단한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수줍은 고백과도 같은 입술이 맞닿았다.평소 인위적인 화장품 향 따위엔 멀미를 느낄 만큼 예민한 도국이었다. 수많은 작품에서 비즈니스적인 스킨십과 농익은 베드신까지 소화하며 여성에 대한 스킨십은  익숙해서 무뎌진 감각이었건만, 오늘 뭔가 조금 달랐다. 가벼운 버드 키스로 시작된 순간은 찰나의 부딪침을 지나 점차 깊고 진득하게 번져갔다. 인위적인 향수 냄새 대신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순수한 세나의 살취가 날것 그대로 들이쳐 그런가. 비누향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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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미친 갈증, 바로 너

지금 도국은 세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미끼를 던진 참이었다.그러자 제 눈앞의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어떤 지옥이라도 기어 들어가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영락없는 희생양의 눈빛으로 눈을 반짝였다. 도국은 제 덫에 걸린 세나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신하늘과 이아준을 떠올리며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세나야, 말해봐. 뭐라도 좋으니까.” “아··· 대표님은 엄청 젠틀하시고, 심지어 사내에 팬클럽이 있을 만큼 인기가 어마어마해요.”팬클럽? 경영인 주제에 사내 팬클럽이라니. 잘생긴 재벌이라 그런가. 도국은 어이가 없어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세나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건 그때였다.“오빠, 혹시 우리 소속사로 옮기실 생각 있으세요?” “뭐··· 글쎄,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긴 했는데.” “어쨌든 제가 저희 대표님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볼게요!”잔뜩 상기된 세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국은 가증스러우리만치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한 주가 어찌 흘러가는지. 금요일 늦은 밤.나는 오늘도 병실에서 차준호에게 진을 다 빼고 마지막 버스를 운 좋게 타고는 퇴근하게 되었다.고장 난 대문에는 덕지덕지 붙은 '빨리 이사가라'는 메모와 붉은 페인트로 거칠게 칠해진 악담들을 보며 반쯤 열린 문을 들어섰다.마당에는 재개발과 재건축을 종용하는 스산한 전단지들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오만한 동네인 강남과 서초, 경계 사이에 위치한 세종동. 동쪽은 주상복합과 고급 빌라가 즐비하여 내로라하는 재벌가 사람들이 사는 빛나는 부촌인 반면, 서쪽은 허름한 구옥과 천막이 쳐진 판자촌이었다. 가난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인 이곳은 서울이 숨겨둔 가장 짙은 그림자 중 하나였다.그래도 이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유일한 안식처였다. 불타버린 보육원 옆자리에 간신히 마련된 낮은 단층짜리 방 두 개짜리 주택은 험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품어주는 공간이었다.도국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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