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41 - Chapter 50

105 Chapters

#40. 누가 뒤통수를 치려 하는 걸까?

나는 또, 최기범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죄송합니다. 전 그곳을 누구에게도 팔 생각 없어요.”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도 팔지 않은 것을 이제 와서 왜 넘기겠는가. 이제는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충분하니 함부로 넘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그 땅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새로 짓거나 보육원을 재건하려는 내 평생의 꿈을 실현해 줄 유일한 기반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나랑 회사 같이 다닐 생각은 없습니까? 출퇴근도 시켜주고 편하게 근무할 수 있도록······.” “잠시만요!”이것도 패스였다. 이미 퇴사를 단단히 결심한 마당이었다. 다소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최기범의 제안을 더 들을 마음이 없어 그의 말을 거칠게 끊어냈다.“죄송하지만 그것도 거절할게요. 퇴사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최기범이 곤혹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신하늘 씨는 참 매력적이시군요. 혹시······ 녀석에게 복수할 생각은 없으십니까?”복수? 차준호에게?“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나도 준호에게 한방 먹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그의 말에 이제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한방이 아니라 여러 방이라도 먹이고 싶지만, 그 감정 소모마저도 이젠 지쳤다. “차준호 대표님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추워서요.”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몸을 돌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최기범이 돌연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스르륵 풀어 건넸다.“미안합니다. 옷도 얇게 입고 있었는데 내가 붙잡았군요.”그러고는 대답할 틈도 없이 목도리를 내 목에 직접 감아주었다. 그 바람에 내가 만지작거리던 목걸이까지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 거절하려 손을 뻗는 순간, 최기범이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이용하십시오.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그는 서둘러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최기범이 멀어지는 뒷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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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감히, 날 가지고 장난쳐?

옆에 있던 매니저 이동근도 억울하다는 듯 손으로 테이블을 거칠게 짚으며 발끈하고 나섰다.“대표님, 제가 현장에 딱 붙어 있어서 잘 압니다. 두 사람, 정말로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억측 기사일 뿐이에요!”이동근의 다급한 비호에도 주원형은 피식 비죽이 웃을 뿐이었다. 그는 앞에 놓인 찻잔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지극히 여유로운 척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 월요일 아침에 주가 판 열리는 거 보면 알겠지. 우리 JW 주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지, 아니면 이깟 구설수 가볍게 씹어 삼키고 건재할지.”그 냉혈한 같은 모습에 도국은 한편으론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주원형의 관심사가 오직 ‘돈과 주가’뿐이라는 사실이,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비밀을 지키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저 짝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아시잖아요.”도국이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기에 이제 바닥 대기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원형은 이번에도 그의 말을 귓등으로조차 듣지 않았다. 그저 모든 인간관계와 사건을 철저히 금전적 가치로만 재단하는 인간다웠다.“네 녀석도 회사 지분을 쥐고 있으니 경솔하게 굴진 않겠지. 그런데 이번 일,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야? 난 말이야, 이번 기회에 우리 경쟁사인 CH 주가가 좋게 흘러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보거든.”또 돈, 그리고 지긋지긋한 회사 싸움이었다. 소속사 대표가 나서서 소속 아티스트를 보호하기는커녕, 주원형은 뱀 같은 눈으로 도국을 떠보고 있었다.“제가 알아서 수습하겠습니다.”도국이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자, 주원형의 짙은 눈썹이 불쾌한 듯 살짝 파르르 떨렸다.“잠깐만.”한참 동안 커피잔 안의 검은 액체를 들여다보던 주원형이 갑자기 눈을 번들거리며 입꼬리를 잔인하게 찢어 올렸다. 무언가 아주 지독하고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 자의 얼굴이었다.“대표님, 왜 그러십니까?”도국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또 다른 덫을 놓으려는 걸까, 아니면 추악한 계략이라도 세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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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판을 뒤집는 페이크(FAKE)

월요일 오전, CH-컴퍼니 테헤란로 본사 10층의 외딴 대기실 휴게실.세나는 사정없이 날아드는 온갖 물건들을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두 팔로 겨우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 여우 같은 나쁜 계집애! 결국 네까짓 게 스캔들을 기어이 터트려?”이제는 새삼 놀랍지도 않은 하나의 상습적인 패악질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세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도 뜨거운 독기가 바짝 차올랐다.“하나 언니! 저 이제 진짜 안 참아요!” “이제 대세 톱스타 빽 믿고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막 나가시겠다?”세나 역시 지금 가만히 앉아서 순하게 당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도국에게까지 추악한 똥물이 튀어 버렸으니 눈앞이 캄캄했고, 다른 멤버들의 가시 돋친 눈치를 살필 형편이 아니었다.하지만 남은 멤버들에게 있어 이번 스캔들은 그야말로 생존 문제였기에 모두 극도로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이제 세나 너만 스포트라이트 받고 아주 승승장구하겠네?” “그러게 말이야! 저 아이는 이제 우리 앞길을 완전히 막아 버린 거라고!”기가 막힌 비난에 세나는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며 얇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원래부터 그리 잘나지도,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던 팀이었으면서 온갖 화풀이를 퍼붓는 꼴이 기가 찼다.“언니들, 진짜 너무들 하세요! 저 도국 오빠랑 정말로 아무 사이 아니라고요!”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세나의 독기 어린 외침이 좁은 휴게실 안을 쨍하게 울렸다. 그나마 이성적이었던 막내 나나가 세나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날 서 있던 다른 멤버들을 향해 앙칼지게 한마디를 거들었다.“언니들, 그만 좀 하세요! 이거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그룹 그날로 끝장이에요!”세나는 자신을 감싸주는 나나의 말을 들으며, 입을 꾹 다문 채 복잡하게 얽힌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 멤버들에게 더 소리쳐봤자 구차한 변명으로 보일 뿐, 도국에게는 눈곱만큼도 이득이 될 게 없었다.“내가······ JW에서 피눈물 흘려가며 연습생 생활만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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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비참함의 유효 기간이 길지 않기를

나를 보러 찾아왔다니.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그와 사적으로 얽힐 이유도, 할 말도 없었다.갑자기 온몸에 차가운 방어 기제가 작동하며 딱딱한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찰나, 백팩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둔 그의 명품 목도리가 퍼뜩 떠올랐다. 나는 차오르는 긴장감을 누르며 급히 몸을 돌렸다.“최 실장님, 잠깐만요.”황급히 가방을 열어 단정하게 개켜둔 목도리를 미리 준비해 두었던 쇼핑백에 담아 최기범에게 내밀었다.“그날 빌려주신 거, 잘 썼습니다.” “아······ 그거 그냥 가져도 되는데.”최기범은 제 손에 쥐어진 쇼핑백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입가에 묘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거나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이런 과분한 호의는 제게 어울리지 않네요.”최기범은 민망한 듯 덥수룩한 머리를 부스스 흐트러뜨리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언제든지 나를 이용하십시오. 하늘 씨와 나는 분명 목적지가 같을 거라는 확신이 들거든요.”그 말을 하려고 굳이 여기까지 온 건가.바로 그 순간, 벌컥 -!단 한 번의 노크 소리도 없이, 날카롭고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비서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그곳에 서 있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차준호였다.흐트러짐 없는 은빛 슈트에 자로 잰 듯 단정한 헤어스타일로 등장한 그는, 특유의 오만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실내를 서늘하게 훑었다. “신 비서, 오늘도 옷차림이 영 별로네. 일부러 내 취향을 비껴나가고 싶었던 거라면…… 축하해, 성공했으니까.”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 침묵에 오히려 차준호의 서늘했던 표정이 기묘하게 풀어졌다.“그래도 오늘 아침엔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출근했네?”역시 그는 내가 지난 주말의 충격으로 도망치듯 그만둘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맡은 업무 마무리는 깔끔하게 하려고요.”제멋대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말하는 차준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나는 가방 속 사직서의 존재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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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역린, 끊지 못한 소꿉장난

사직서를 손에 쥔 채 차준호에 대한 원망으로 입안이 씁쓸해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허기찬이 입을 달싹이며 내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참, 나 없는 동안 병실로 출근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 이거 별거 아니지만 간식이야.”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하려던 참에 갑자기 선물이라니.“홍보실에서 다 들었어. 임원 분들도 이번 기자 대응 꺼려서 죄다 신 비서에게 떠넘겼다고 하시더라고.”그는 자신의 캐비에서 쇼핑백을 꺼내 내밀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였는지 고개까지 푹 숙여댔다.“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슬쩍 들여다보니, 쇼핑백에는 디저트가 들어 있었다.“오키나와 명물이래. 당 떨어질 때 먹어.” “다 연봉 속에 그런 일 하라고 포함된 걸요.”나는 민망함에 쭈뼛거리며 그 쇼핑백을 든 채 허기찬을 바라보았다.“알아, 그러니까 조만간 통장 찍히는 거 기대해 봐. 우리 대표님이 다른 건 몰라도 돈으로 하는 보상 하나는 또 확실하게 잘해주시잖아?”이맘때 성과급이 나오는 시즌이라는 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 작은 웃음을 흘렸다.“아, 네.” “뼈 빠지게 일한 보람이 통장에 찍힐 때마다 기분은 얼마나 좋은데. 신 비서도 통장 입금 알람 걸어 놨지?” “아니요. 전 월급 빼고는 따로 돈이 들어올 곳이 전혀 없어서요.”허기찬은 이번 성과급과 명절 보너스가 쏠쏠하게 입금된다는 말과 더불어 본인의 이야기도 슬쩍 덧붙였다.“사실 1월 1일에 그 난리가 터졌을 때 나 혼자라도 바로 비행기 타고 돌아오려 했거든. 그런데 이번 여행이 우리 엄마 환갑 기념 여행이라 어쩔 수 없었어.” “가족이 당연히 더 중요하죠. 어머니께서 너무 좋으셨겠어요.” “혼자서 나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분이라서 말이야.”허기찬은 표정도 밝아 보였고, 나름대로 가족과 좋은 추억을 쌓고 왔는지 한결 사람이 여유로워 보였다.비록 나는 주말 내내 지옥을 맛봤지만, 만약 허기찬이 여행을 도중에 취소하고 억지로 귀국했더라면 그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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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내 인생의 불순물, 너

소파에 있던 강소희는 통유리창 앞으로 향하면서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알았어요, 대표님. 여기 뷰가 좋아서 차 좀 마시고, 차준호랑 더 놀다 가고 싶었는데. 칫.”나는 봄에 어울리는 연두색 투피스를 입고 왔는데, 강소희는 벌써 여름용 초록색 시폰 원피스 차림이라니. 완벽한 헤어와 메이크업을 갖춘 그녀는 그 자체로 이곳을 화려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것도 철저히 차준호의 공간으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말이다.그렇다고 내가 그녀와 비교하며 일반인이라는 이유로 주눅이 든 건 아니었다. 그저 한때 내 남자라고 착각했던 차준호의 현재 여자가 정말 강소희일까 하는, 지극히 씁쓸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의식일 뿐이었다.어쨌든 여기는 나의 직장이니, 일단 사직서를 내밀더라도 끝까지 제 할 일은 마쳐야 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결재판이 무겁게 쌓여 있었고, 노트북과 데스크톱 PC도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강소희는 주원형과의 통화 내내 입술을 깨물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눈부신 도시 풍경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탐욕스럽게 반짝였다.반면 차준호는 강소희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철저히 무시하며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급한 거부터.”오늘 자 전자결재 사안은 이미 인트라넷으로 올렸기에, 당장 차준호가 대면으로 확인해야 할 스케줄들을 하나씩 열거해 주었다.“먼저 네오워크와의 미팅을 조율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일본 U게임즈와의 MOU 체결 및 게임 홍보 건에 대해 협의하셔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2분기 목표치 점검을 위한 임원 협의회 개최 날짜를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준호는 개인 태블릿을 살피더니 몇 개의 날짜를 기계적으로 불러주었다.강소희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이 숨 막히는 공간에, 그는 왜 굳이 나를 불러 올린 것일까.차준호의 무심한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과 서러움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대통령 비서실에서 신년 행사 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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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덫 위에 덫, 지뢰밭

퇴근길 버스 창밖으로 찬바람이 부는 한밤중.뒷자리에 앉은 나는 차가운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끼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대표실에서 있었던 차준호의 마지막 귓속말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았다.‘우리의 과거도 확실하게 청산할 겸.’과거를 청산하자니. 그 오만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차준호한테 온갖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그 문장을 버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말의 의미가 뭘까.그가 말한 ‘과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걸까. 크리스마스에 날 처참하게 차버렸던 그 기억? 아니면, 지난 1년 동안 비서와 대표라는 공적인 관계 뒤에 숨겨져 있던 그 침대에서 은밀하고 뜨거웠던 시간들?도대체 그는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기억이 남아 있는 걸까. 기억을 다 되찾아 놓고 모른 척 연기를 하며 날 시험하는 건지, 아니면 단편적인 파편만 쥔 채 덫을 놓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게 가라앉았다.허벅지 위 가방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눈을 깜빡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도국이었다.[오늘 회사에 별일 없었어?]순간 손가락이 키패드 위에서 갈 길을 잃고 망설였다.강소희가 기습적으로 찾아왔었다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차준호가 나를 붙잡으며 ‘과거’를 운운했다는 소름 돋는 이야기도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전에 차준호와의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데.하지만 도국에게까지 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전하고 싶진 않았다. 안 그래도 소속사 압박에 군대 가기 전 찍은 영화 개봉까지 겹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였다. 결국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아끼기로 했다.[별일 없었어. 평소랑 똑같지 뭐.]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도국에게서 곧바로 답신이 날아왔다.[세상 돈 벌기 쉽지 않네. 고생 많았다.]화면 너머로 도국의 씁쓸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세상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건 사실이었다.도국의 말에 안 그래도 낮에 대표실에서 차준호가 던진 잔인한 말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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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기사 등장, 랜선에서 판이 뒤집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면서도 내 앞에 다가선 최기범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민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슬슬 내가 필요해진 거 아닙니까?” “날이 추워요. 실장님, 어서 돌아가세요.”나는 손사래를 치려 했지만, 최기범은 그저 사람 좋게 환하게 웃으며 가로등을 등지고 흉물스러운 내 대문을 물끄러미 살폈다. 붉은 래커 칠이 가득한 대문을 바라보는 그의 안경 너머 눈빛에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났다.“여기 CCTV도 없네, 민원 넣어서 달아주겠습니다. 그나저나 이거 서쪽 동네 재개발 조합 사람들이 압력 넣은 건가 보군요.” “네. 제가 이 동네 발전을 더디게 만드는 원흉이래요. 가만히 살기만 했을 뿐인데요.”씁쓸한 혼잣말에 최기범이 미간을 찌푸렸다.“하긴, 아직 이주 공고가 공식적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건설 시공사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마당에 벌써 이런 짓을 하다니. 너무 잔인하군요.” “저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에요.”안쪽 골목 어르신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밤새워야 할 판국이라 나는 말을 아꼈다. 그때 최기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신하늘 씨, 언제든지 나를 이용하십시오.”요즘 그가 반복적으로 내게 던졌던 도발적인 선언이 오늘도 귓전을 스쳤다. 하지만 이제 차준호에게 진저리가 난 나는, 또 다른 권력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실장님, 그냥 가세요. 제 결정은 같아요.” “부자 팔라고 온 것도 아니고, 차준호 복수나 뒤통수 치자는 말도 아닙니다. 인력이 부족합니다. 게임개발실로 당분간만 좀 와주십시오.”최기범이 장난기를 벗고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신하늘 씨는 우리 부서 와서 좋아하는 게임 실컷 하고, 새로 출시되는 신작 게임 데모 버전 플레이하면서 오류가 뭔지, 유저 입장에서 개선점이 뭔지만 보고서로 툭 던져주면 됩니다.”날도 춥고 더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가 잠시 게임이라고 하니 멈칫하게 되었다.“전 전문가도 아니고, 비서 일만 3년 하느라 컴퓨터 관련 직무수행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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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쁜 남자를 발끈하게 만드는 법

다음 날.어제 늦게 퇴근한 탓에 차준호는 병원에 들렀다 출근한다며 내게도 오후 2시까지 출근하라 지시했다. 덕분에 10억이라는 거금에 대한 고민과 최기범이 던진 ‘게임 인연’을 되짚느라 밤을 꼬박 설쳐 머리가 지끈거렸다.하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 크리스마스 때 입었던 분홍 원피스를 차려입고, 목걸이도 옷 밖으로 당당하게 꺼내 찬 채 회사에 도착했다. 어차피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위약금 문제를 고민하는 동안은 내 일에 집중하자는 계산이었다.“허 실장님, 식사하셨어요?”오후 1시. 내가 비서실을 지키면 허기찬 실장이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허기찬은 나를 보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로 반갑게 속삭였다.“반가워요, 신 비서! 그런데 대표님도, 강소희 씨도, 최기범 실장님도 벌써 다들 나오신 거 있지? 휴, 살얼음판이었는데 지원군이 와서 다행이야.” “강소희 씨가 또요?” “나도 몰라. 그나저나 신 비서, 오늘 유독 더 예쁘네.”이 시각에 차준호가 벌써 출근한 것도 모자라 대표실 안에 최기범과 강소희까지 있다니.“대표님께서 친구분들과 무슨 사업 하세요?” “에이,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어. 다들 왜 왔냐고 짜증을 내셨거든.”코트를 벗어 라커에 넣는 순간, 허기찬의 인터폰에 불이 들어왔다.[허 실장, 혹시 신하늘 왔어?]허기찬이 어제와 같은 익숙한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기시감이 들었다.“역시 우리 신 비서는 저 점심 먹으라고 벌써 온 거 있죠?”[잘됐네. 대표실로 들어오라고 해.]허기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난 운명을 가를 대화가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에 태블릿 PC를 챙겨 들고 대표실 문을 열었다. *** 대표실 안에서는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차준호는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소파에는 최기범과 강소희가 마주 보고 앉아 일제히 나를 응시했다. “어머, 토끼 비서님. 자주 보네? 우리도 막 왔어. 그 원피스는 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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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급발진, 선 넘고 싶게

그날 저녁 8시.도국은 방송 스케줄을 마치고, 사옥 21층에 위치한 개인 프라이빗 숙소로 향했다.그러나 문 앞에는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캡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흰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나였다. 문고리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숏패딩이 걸려 있었고, 바닥의 커다란 백팩은 제법 묵직해 보였다.“······오빠, 오셨어요.”도국을 발견한 세나가 서둘러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반듯하게 인사를 건넸다.“왔어?”도국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답답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저 아이는 자신이 신하늘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도국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자, 세나는 거실의 통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야경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전망 좋네요. 그 유명한······ VIP 숙소인가 봐요.”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태도에 도국의 심사가 점차 뒤틀렸다. 과연 이렇게 만나는 게 옳은 걸까. 제 이기심 때문에 이 아이의 인생에 주홍글씨라도 새겨지면 어쩌나 싶었다.“너, 겁이 없구나. 앞으로 조심해. 남자들은 이성을 놓으면 다 짐승이야.”이렇게 뼈 있는 말을 던지면 자신이 얼마나 불순한 의도로 그녀를 불렀는지 눈치챌까 싶었다. 고백을 한 것도, 사귀는 사이도 아닌 남자의 독채 숙소에 발을 들이면서도 세나는 마스크 위로 빼꼼 드러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네? 아, 아······ 네. 오빠가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 드릴 게 있어요.”초대는 무슨. 도국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는 사이, 세나가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정말 순수하게 집들이라도 온 양 와인 한 병을 내미는 손길이었다.“고마워. 스케줄은 괜찮고?” “다 뺐어요. JW에서 공문 보내줬거든요.”도국은 순간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소속사 공문까지 발송해가며 어린 여자애를 이곳으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주원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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