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직장 적응할 만합니까?”
최기범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나직하게 물었다.
이제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말을 얹기는 민망했지만, 마음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편한 게 사실이었다.
“네. 덕분입니다. 매 순간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충동적으로 사직서까지 던지려 했던 것을 떠올리면,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뼈가 굵은 베테랑들로 가득 차 있어 나는 그저 햇병아리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묘한 고양감이 일었고, 더 의욕적으로 일을 배울 맛이 났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질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종동, 거긴 집이 너무 낡았던데. 보일러는 괜찮습니까?”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몸이 움찔 굳었다. 하필이면 오늘 아침, 보일러가 차갑게 고장
[지난해 12월 31일, 강원도 모 병원에서 차준호와 강소희 목격! 해당 병원 간호사 진술 확보][배우 강소희, 알고 보니 임신? 모 산부인과 진료 정황 포착······ 설마 차준호의 아이?][3월 1일 거대한 스캔들의 주인공 강소희! 임신 중에 블록버스터 계약? 산부인과 방문은 단순 진료인가][파문] 희대의 악녀는 신하늘 아닌 차준호? 천하의 바람둥이 CH-컴퍼니 대표의 두 얼굴][1월 1일 강소희와 차준호, 그날의 진실은 무엇인가······ 대중의 궁금증 폭발!]3월 1일 오전 10시.개발 기간 2년, 총사업비 250억 원. 차준호가 야심차게 출시한 신작 게임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던 바로 그 순간.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차준호를 삼킨 채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강소희의 이름과 함께 터져 나온 메가톤급 폭탄은 순식간에 회사 전체의 공기마저 기괴하게 변질시키고 있었다. 하필이면 세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오늘이라니.CH-컴퍼니의 명운을 짊어진 차준호의 가슴에 잔인한 칼날을 노골적으로 밀어 넣고, K-컬처를 이끄는 대세 여배우 강소희의 인생마저 한순간에 매장하려는 음모는 참아줄 수가 없었다.김희주는 정말 최악의 악마이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고개를 돌리니 사무실 어디서나 나를 향한 안타까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 날카로운 눈길 하나하나가 내 뼈마디를 파고드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끝내 모르는 척 연기를 이어가야 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분하게 책상 위를 정리했다.“어휴, 신 과장님. 이거 다 별것도 아닌 루머 가지고 김희주가 과장님 괴롭히려고 퍼뜨린 걸 거예요.”나정아가 슬며시 곁으로 다가오며 초조하게 내 눈치를 살폈다. 차준호가 나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밝힌 이상, 이 루머의 진위와 상
어떻게 이 남자와 나의 삶엔 단 한 순간도 편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을까.언론의 집요한 추적과 자극적인 기사라면 이미 지난 몇 달간 숱하게 겪어온 터였다.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대중의 억측 속에서 내 심장은 이미 단단한 돌처럼 무뎌지고 단련되었을 거라 믿었건만, 귓가를 난폭하게 때리는 심박수는 여전히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가빠지고 있었다.평온한 일상을 허락하지 않는 잔인한 운명이 또 어떤 패를 던진 걸까.“허 실장, 무슨 일이야?”차준호의 나지막하고 서늘한 물음이 정적을 깨고 떨어졌다. 순간, 23층 복도 전체를 채우고 있던 어수선한 소음이 거짓말처럼 싹 가라앉았고, 상황을 지켜보던 개발실 직원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혹시 게임 쪽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최기범 역시 평소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쭈뼛거리던 그때, 허기찬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전 세계 동시 서비스 개시를 불과 몇 분 앞둔,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순간. 모여든 이들의 날카롭고 불안한 시선이 모조리 허기찬의 헐떡이는 입 끝으로 쏠렸다.“강소희 씨 때문에 지금 언론이 난리가 났습니다! 대표님, 피하십시오! 절대 지금 프레스룸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허기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짧은 호칭 하나가 공기를 갈라놓는 순간, 내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내렸다.하필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 찬란하고 거대한 순간에, 꼭 강소희라는 이름으로 차준호의 발목을 잡아채야 했을까.차준호 역시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그게 뭐 별거냐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옆에 서 있던 최기
둘만의 고요가 가라앉은 시간.나는 차분하게 차준호의 깊은 눈동자를 응시했다.그는 본래 자신의 가장 깊은 진심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다.그에 관한 결정적인 이야기들을 매번 타인의 입을 통해 들어야 했던 나로서는, 오늘 밤 그가 과연 얼마나 솔직한 속내를 꺼내놓을지 깊은 의구심이 들었다.“신하늘, 선거는 나갈 거야?”처음부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그의 단정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정작 내 마음조차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사실 아직 결정 전이에요. 대표님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차준호는 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기며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는 안 나갔으면 좋겠어. 정치,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니까. 붙어도 걱정이고, 떨어져도 후폭풍이 클 거야. 일단 회사는 그만두는 건가?”사실 나 역시 평생 정치가를 꿈꿔본 적은 없었다. 도의를 저버린 행동과 말을 한 김희주에게 철퇴를 내리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으니, 이미 절반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차준호의 말에 일리가 없지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나지막이 끄덕였다.“참고는 할게요. 그리고······ 회사는 그만둘 생각이에요.”“왜? 좋아하는 일이잖아.”“일단은 좀 쉬고 싶어요. 전 누구 때문에 1월 1일부터 너무 힘들었거든요.”차준호는 싱겁게 웃어 보이더니, 순순히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고생시킨 건 사실이니 할 말이 없군.
‘가소롭게, 감히 나를 어떻게 하려고?’위험이라니.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오기를 넘어 허탈한 헛웃음마저 흘러나왔다.“김희주가 그 정도로 치졸하게 나오는 거야?”-김희주가 아니야. 그리고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네 생명까지 위협하려는 정황이 포착됐어. 심각한 수준이야. 부디 조심해.이아준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늘하게 서려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더욱 밀착시킨 채,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누가 나를?”악플이나 저열한 기사로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선을 넘다 못해 목숨까지 위협하려 든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어. 하지만 아군이 늘어날수록 적군도 비례해서 늘어나는 법이니까. 경찰에 정식으로 조사를 의뢰했고, 김정규도 사력을 다해 추적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줘. 곧 정체를 밝혀낼 테니까.이아준의 음성은 얼음 조각처럼 날이 서 있었다.김희주 말고 대체 그 적군이라는 존재가 누구란 말인가. 살면서 타인에게 손가락질받을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으며 살아왔는데.나라는 존재가 탐탁지 않을 수는 있어도, 물리적인 폭력으로 위협하려 들다니.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무서운 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지 비로소 현실로 와닿았다.-일단 너를 향해 지속적으로 비방글을 유포하거나, 악의적인 기사만 쏟아내는 기자를 추적 중이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물리력을 행하려는 세력은 김희주 측 소행은 아니라는 점이야.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순간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명에 세상이 뚝 멈춰 선 듯했다.-일단 혼자 다니는 건 절대 금물이야.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나는 유리창에 비친 차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
신하늘과의 대립만으로도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는데.당에서 젊은 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세종동 출신 앵커를 차기 후보로 내세운다는 소문을 듣자 김희주의 입지는 순식간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머리채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독기가 치밀어 올랐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을 뱉어냈다.“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공식 입장을 밝힙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세종동의 운명을 바꿀 재개발 사업을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등 뒤에서 날아드는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취재진인지 군중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기괴한 메아리였다.스스로가 비참하고 억울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그녀가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선언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 폭발하며 시야가 순식간에 백색의 무명으로 물들었다.“아드님 최기범 씨께서 세종동 봉사활동을 본인이 이어받겠다고 발표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한 기자의 송곳 같은 질문이 심장에 꽂히며 김희주의 혈관 속 혈압을 기어이 폭발 직전까지 밀어 올렸다.아들까지 들먹이다니. 귀를 막고 싶어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강소희 씨가 신하늘 캠프에 합류하며 김희주 씨의 과오 폭로를 예고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젊은 여기자였다. 송곳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남성 기자들의 고성 사이에서도 단연 선명하게 귓전을 때렸다.강소희라니. 도대체 왜 이런 판국에 기어 나오는 걸까.‘멍청한 것, 숨길 치부도 많은 년이!’김희주는 강소희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허탈한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며 맥이 탁 풀어졌다.최근 확보한 강소희의 결
2월 28일 점심. 사내 카페테리아에는 평소보다 한결 가벼운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그러나 사람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대비되듯, 나의 내면은 지독한 악몽의 잔재로 까마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 번 뒤흔들린 입맛은 돌아올 줄 몰랐고, 정성스레 정돈된 차분한 대화 속에서도 온전히 그 온기를 누리지 못했다.직원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내일 정식 출시를 앞둔 게임의 최종 빌드를 실행했다. 앱 마켓 검수까지 완벽하게 끝마친 모바일 화면 위로 유려한 그래픽과 찰나의 화려함이 감각적으로 흘러나왔다.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던 김강무가 나지막이 탄성을 뱉어냈다.“수백억을 쏟아부을 때만 해도 PC와 모바일을 동시에 잡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마켓 검수까지 무사히 넘기고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네요.”김강무의 감탄에 나정아가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 화면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나저나 전 이제 휴대폰 화면이 훨씬 더 익숙해진 것 같아요. 줄곧 PC로만 테스트를 해왔었거든요.”“요즘은 데스크톱이 없는 가구도 많습니다. 그래픽과 타협하지 않고 모바일 최적화에 과감히 사활을 건 게 결국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사전 예약자만 해도 이미 300만을 가뿐히 넘어섰더군요.”옆자리의 최기범이 특유의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보탰다. 그러자 찻잔을 들고 있던 한규련이 은근히 분위기를 띄웠다.“게다가 이번에 에스텔라가 부른 메인 OST 반응이 그야말로 뜨겁던데요? 음원 차트 상위권은 물론이고 MV 조회수까지 폭발적이라 초기 유입은 확실히 잡은 셈이죠. 그건 그렇고·····&mi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