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거실 불은 낮게 켜져 있었다.이수는 소파 한쪽에 앉았고, 하빈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기대 앉았다.TV는 켜지지 않았다.대화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그런데도 이상하게, 공기가 어색하지 않았다.“예전엔.”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렇게 조용한 게 싫었어.”“왜.”“생각이 많아지니까.”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되는 말이었다.조용해지면 과거가 소리 없이 밀려왔다.병실의 냄새.기계 소리.민준의 낮은 웃음.이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근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뭐가.”“생각이 많아져도, 난 결국 도망 안가니까”하빈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도망 안 간다는 게.”그가 천천히 물었다.“그 생각 안 한다는 뜻은 아니지?”“응.”“무서워도 버틴다는 거.”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더 힘들어.”“그래도.”그는 짧게 말했다.“네가 선택한 거잖아.”그 말은 책임을 돌리는 게 아니었다.오히려, 인정이었다.이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진짜 변호사 같다.”“지금은 그냥 남자야.”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가 아주 미묘하게 달라졌다.이수는 시선을 피했다.“그 남자.”“응.”“어제… 무너진 것 같았어.”태훈을 말하는 거였다.“처음으로.”“응.”“근데.”이수는 손을 모았다.“무너진 사람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하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맞아.”“자존심이 센 사람일수록.”정확한 분석이었다.“그래서 대비할 거야.”하빈의 말은 짧았다.“접근금지 나오면 일단 한숨 돌리고, 위반하면 바로 형사 처벌로.”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엔 나도 빠지지 않을게.”“무슨 뜻이야.”“네가 앞에 서고, 내가 뒤에서 계산하는 구조 아니고.”잠시 멈췄다.“같이 끝까지 함께 하자고”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하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알았어.”짧게 대답했다.다음 날. 법원에서 임시조치 결정이 나왔다.접근금지 100미터.연락 금지.통지서
접근금지 신청서는 생각보다 얇았다.A4 몇 장.체크 박스 몇 개.사실관계 기재란.그 종이를 보며 미정은 한참을 펜을 들지 못했다.“여기… 폭력 유형 체크하는 부분.”이수가 조용히 설명했다.“신체적, 정서적, 통제, 협박.”미정은 ‘신체적’에 체크했다.잠시 망설이다가 ‘통제’에도 표시를 했다.손이 조금 떨렸다.“이거 내면… 진짜 끝인 거죠?”하빈이 답했다.“끝이라기보단.”잠시 단어를 고르고.“되돌리기 어려워지는 거죠.”정직한 말이었다.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할게요.”이번엔 망설임이 적었다.신청서를 접수하고 나오는 길.하늘은 맑았다.너무 맑아서, 오히려 어색했다.미정은 작게 웃었다.“어제는 그렇게 비가 오더니.”이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어제의 빗소리,창고의 냄새,벽의 차가움.그리고.“나 진짜 무서웠어.”하빈의 목소리.“괜찮아요?”미정이 물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그 시각. 태훈은 법원에서 온 연락을 받았다.접근금지 신청 접수.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신청이 받아들여지면.”변호사가 차분히 설명했다.“일정 거리 접근 금지, 연락 금지, 위반 시 형사처벌.”태훈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그저 물었다.“이렇게까지 해야 됩니까.”“그건.”변호사가 말했다.“상대가 그렇게 느꼈다는 뜻이죠.”‘무서웠어요.’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태훈은 주먹을 쥐었다.자존심이 먼저 반응했다.하지만 그 아래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상실.저녁 시간, 미용실 이수는 가위를 쥔 채 거울 속 자신을 봤다.손은 안정되어 있었다.손님이 나가고 나자,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하빈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임시조치 빠르면 내일.”“생각보다 빠르네.”“이번 건은 명확해.”이수는 가위를 내려놓았다.“하빈아.”“응.”“태훈… 가만히 있을까?”하빈은 잠시 생각했다.“모르지.”정직한 대답.“자존심 센 타
새벽 공기가 희게 번질 무렵, 이수는 결국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얇았다.밤과 아침 사이, 애매한 시간.몸은 무거웠지만,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창고 안에서 벽에 밀렸던 순간,하빈의 팔이 자신을 감싸던 순간, 경찰차의 붉은 불빛.모든 장면이 또렷했다.하지만 그 장면들 사이에 하나가 더 끼어 있었다.-네가 도망치던 날부터.그 말은 밤새 마음 한쪽에 걸려 있었다.이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하빈은 이미 깨어 있었다.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안 잤어?”이수가 물었다.하빈은 고개를 들었다.“조금.”“거짓말.”그는 작게 웃었다.“너도.”이수는 대답 대신 물을 따랐다.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태훈 쪽에서 연락 왔어?”“아직은.”“미정 씨는?”“아침에 통화하기로 했어.”잠시 정적.이수는 하빈 맞은편에 앉았다.“하빈아.”“응.”“태훈… 변할까?”그 질문은 단순하지 않았다.하빈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사람이 바뀌는 건.”그가 천천히 말했다.“자기가 무너졌다는 걸 인정할 때야.”“어제는?”“흔들렸지.”짧은 판단.“근데 아직은 자기한테 화난 상태일거야.”“자기한테?”“네가 아니라, 상황이 아니라, 자기 통제가 안 된 자기 자신한테.”이수는 고개를 숙였다.“그럼 더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그래서 접근 금지.”단단한 어조였다.“이번엔 우리가 끝까지 가야 해.”그 말은 일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수는 그 안에 다른 의미도 느꼈다.도망치지 않는 선택.같은 시각. 태훈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잠은 잔 게 아니었다.그냥 의식을 잃었다가 돌아온 느낌이었다.거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휴대폰을 들었다.미정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눌렀다.신호음. 그리고 연결되지 않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분노가 아니라, 막막함이 올라왔다.“이렇게까지…”
밤은 끝내 깊어졌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이수는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눈을 떴다.천장이 여전히 낯설었다.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몸은 아직 그 방법을 잘 몰랐다.방문 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발소리. 하빈이었다.물 마시는 소리, 컵이 싱크대에 닿는 소리.이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주방 쪽 작은 등만 켜져 있었다.하빈이 컵을 내려놓으며 돌아봤다.“왜. 잠 안 와?”“응.”잠시 어색한 침묵.이수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하빈도 마주 앉았다.“태훈.”이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내일 미정 씨한테 연락할까?”“연락해야지.”“접근 금지 신청… 하게?”“그건 본인이 결정해야 해.”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울 거야.”“그래도 오늘보단 덜 무서울 거야.”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잠시 정적. 이수가 낮게 물었다.“하빈아.”“응.”“나 오늘… 진짜 멈출 뻔했어.”그의 눈이 올라왔다.“창고에서.”“네가 문 열고 들어오기 전.”“나 잠깐 생각했어.”“그냥… 멈출까.”그 말은 작았지만, 무겁게 내려앉았다.하빈의 손이 조용히 움켜쥐어졌다.“근데.”이수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네가 사랑한다고 한 말이 자꾸 떠올랐어.”그의 숨이 멎었다.“그 말이… 이상하게.”“내가 나를 막았어.”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도망 안 간다고 말해놓고…”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내가 아니니까.”한참 후, 하빈이 낮게 말했다.“그래서 오늘 안 도망친 거야?”“응.”그녀는 솔직했다.“나 혼자였으면… 또 달랐을지도 몰라.”그 말은 고백이었다.하빈은 고개를 숙였다.기쁜데, 무거웠다.“그럼 나 때문에 안 도망친 거네.”“응.”이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래서 무섭기도 해.”“뭐가.”“내 선택이… 너를 힘들게 할까봐.”그 말은 생각보다 솔직했다.하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선택은 네가 한 거야.”“내가 한 건 문 열고 들어간 거고
집 안은 조용했다.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멈췄고, 하빈이 컵 두 개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따뜻한 거 마셔.”이수는 컵을 받았다.김이 천천히 올라왔다.손끝이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는 않았다.컵을 쥔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떨림을 본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미정 씨는?”“임시 거처 들어갔어. 지금은 안전해.”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태훈은?”“조사 받고 귀가 조치 될 가능성 커. 초범이고, 크게 다친 건 없으니까.”“그럼 또…”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하빈이 천천히 말했다.“이번엔 달라.”“뭐가.”“기록이 남았어.”짧은 문장이었다.하지만 그 안에는 무게가 있었다.오늘 밤은 ‘말’이 아니라 ‘사건’이 되었으니까.이수는 컵을 내려놓았다.“내가 밀었어.”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하빈이 시선을 들었다.“뭘.”“미정 씨한테.”“용기를 강요했을지도...”그녀는 고개를 숙였다.“도망치지 말라고 했어. 참지 말라고 했고.”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근데 내가 그 말 할 자격이 있나 싶어.”하빈은 한참을 생각했다.“왜 없는데.”“난 도망쳤잖아.”정적. 거실의 공기가 잠깐 멈춘 듯했다.“아버지 병원에서.”“민준한테서.”“이름도 버렸고.”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묵은 죄책감이 눌려 있었다.하빈은 천천히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그건 도망이 아니야.”“그럼 뭐야.”“살려고 한 거지.”이수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살려고 선택한 걸 도망이라고 하면, 그럼 세상에 도망 아닌 선택이 몇 개나 되겠어.”그는 과하게 위로하지 않았다.판단하지도 않았다.그냥, 사실처럼 말했다.“미정 씨는 오늘 처음으로 나왔고, 넌 오늘 처음으로 안 도망쳤어.”“……”“둘 다 다른 방향으로 같은 선택한 거야.”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숨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잠시 후, 이수가 조용히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그가 낮게 물었다.“왜 자꾸 네가 다치는 선택을 하는건데.”이수는 눈을 감았다.“나 때문이잖아.”“뭐가.”“미정 씨”그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내가 밀었어.”하빈은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이 밀었지.”잠깐의 침묵.그리고.“아까 널 사랑하는 말...진심이야”이번엔 급하게 말하지 않았다.담담하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처럼. 이수의 숨이 멈췄다.“오래전부터.”그는 덧붙였다.“네가 도망치던 날부터.”이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난…”그녀는 말을 멈췄다.“난 아직 정리 안 된 사람이야.”하빈은 웃지 않았다.“괜찮아. 상관없어”“뭐가.”“그냥 네 모습 그대로 사랑하니까. 상관없다고”그 말은 과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이수는 처음으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떨어졌다.“지금은.”그녀가 낮게 말했다.“미정 씨가 먼저야.”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래도...”멀리서 경찰차 불빛이 사라지고 있었다.오늘 밤, 한미정의 집에는 균열이 생겼고 태훈은 선을 넘었다.그리고 동시에, 이수와 하빈 사이에도 넘지 않으려던 선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밤은 이미 깊었는데,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창고를 떠나 돌아오는 차 안,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다.하빈은 운전에만 집중하는 척했고, 이수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창에 번졌다가 흘러내렸다.그 빛이 마치 물처럼 흔들렸다.“집에 가서 쉬자.”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조금 전, 그의 품 안에서 들었던 심장 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나 너 사랑해.'그 말이 차 안 어딘가에 아직도 떠 있는 것 같았다.집에 도착했을 때도 둘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신발을 벗고, 각자의 자리에 섰다.늘 하던 대로.하지만 오늘은 늘 하던 대로가 어색했다.이수가 먼저 물을 꺼내 마셨다.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하빈아.”“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이수가 말했다.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잠이 안 와서요.”그는 그렇게 답했다.변명처럼 들리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