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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기록

مؤلف: 데이지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6-29 07:24:19

지연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고, 그 늦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만들지도 않았고,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집 안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준혁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식지 않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그 배치가 묘하게 정돈돼 있었다.

“늦었네.”

그가 말했다. 책망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지연은 신발을 벗으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

“조금.”

그녀는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전보다 느렸다.

준혁은 그 느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은 자주 그래.”

그 말은 관찰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경고에 가까웠다.

지연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

“자주?”

“응.”

그가 대답했다.

“예전엔 이런 적 없었잖아.”

예전엔이라는 말 속에는 기준이 숨어 있었다.

그 기준은 항상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바뀌어.”

지연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준혁은 그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사람이 바뀐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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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75. 기록

    지연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고, 그 늦음에는 이유가 없었다.일부러 만들지도 않았고,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집 안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준혁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앞에는 식지 않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그 배치가 묘하게 정돈돼 있었다.“늦었네.”그가 말했다. 책망이 아니라 확인이었다.지연은 신발을 벗으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조금.”그녀는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전보다 느렸다.준혁은 그 느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요즘은 자주 그래.”그 말은 관찰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경고에 가까웠다.지연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자주?”“응.”그가 대답했다.“예전엔 이런 적 없었잖아.”예전엔이라는 말 속에는 기준이 숨어 있었다.그 기준은 항상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사람은 바뀌어.”지연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준혁은 그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사람이 바뀐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그에게는 통제 밖의 선언처럼 들렸다.“갑자기?”“갑자기는 아니야.”지연은 차분하게 말했다.“당신이 못 느꼈을 뿐이지.”그 순간, 준혁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지연을 똑바로 봤다.“무슨 뜻이야.”질문이었지만 답을 요구하는 방식은 아니었다.해명을 기대하는 톤이었다.지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냥.”그녀는 말을 골랐다.“요즘 당신이 집에 없는 시간이 늘어서.”같은 문장이었다.아침에 했던 말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밤에 들리는 그 말은 무게가 달랐다.준혁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건 일 때문이야.”“알아.”지연은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이 준혁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런데도 불편해?”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조심스럽다는 건 이미 불안하다는 뜻이었다.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불편하다기보다는…”“…익숙하지 않아.”익숙하지 않다는 말은 거부가 아니라 거리였다.

  • 불륜해드립니다.   74. 침묵의 기록

    준혁은 그날 아침, 아내보다 먼저 일어났다. 의도는 없었다.잠이 깼고, 다시 잠들지 못했을 뿐이었다.그는 부엌으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마실 것도 없었고,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지만가만히 서 있기에는 몸 안이 너무 시끄러웠다.아내는 그가 커피를 내리는 소리를 듣고도 일어나지 않았다.그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예전 같았으면“일찍 일어났네?”한마디쯤은 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준혁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에 서서 잠긴 방문을 바라봤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이 이렇게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선명해졌다.아내는 일부러 늦게 나왔다.시계를 본 것도 아니고, 시간을 계산한 것도 아니었지만지금은 마주치는 타이밍을 조절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준혁 앞에 섰다.“오늘 일찍 나가네.”준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어제 말했잖아.”그가 말했다.“요즘 좀 바빠.”아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쉽게.“그래.”그녀가 말했다.“그럼 오늘도 늦겠네.”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준혁은 그 확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그가 물었다.“뭐 할 말 있어?”아내는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사실 이미 생각은 끝난 뒤였다.“아니.”그녀가 말했다.“그냥 요즘 당신이 집에 없는 시간이 늘어서.”그 문장은 공격이 아니었다.그래서 방어하기도 어려웠다.준혁은 잔을 내려놓았다.“괜히 예민하게 굴지 마.”그가 말했다.“별일 아니야.”그 말은 상대를 달래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규정하는 말이었다.아내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기록이었다.준혁은 집을 나서며 뒤를 한 번 돌아봤다.아내는 현관까지 나오지 않았다.예전에는 꼭 그랬다.귀찮다는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따라 나와“조심히 다녀와.”한마디는 남겼다.그 부재가 그를 불

  • 불륜해드립니다.   73. 파장

    준혁은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손의 감각이 먼저 떠올랐고,그 다음에는 그 손을 거두지 않았던 짧은 지연이 반복됐다.그는 그 지연을 의도라고 부르지 않았다.실수라고도 부르지 않았다.그저 ‘잠깐’이었다고 생각했다.잠깐이면 지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아침이 되자 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고, 집 안은 아직 조용했다.아내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준혁은 그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익숙한 얼굴이었다.그래서 어디서부터 낯설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그는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와 부엌으로 향했다.커피를 내리면서도 손이 자꾸 멈췄다.물의 양, 필터의 위치,평소라면 자동으로 하던 동작들이 그날은 자꾸 어긋났다.통제는 이런 순간에 필요해진다.준혁은 컵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알림은 없었다.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지 못했다.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어제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카페, 골목, 우산, 어깨.그중 가장 오래 머문 건 어깨였다.닿았다는 사실보다, 닿아 있었다는 시간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불안은 사람을 두 가지 방향으로 몰아간다.숨기거나, 통제하거나. 준혁은 후자를 택했다.그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아무 이유도 덧붙이지 않았다.이유를 붙이지 않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그는 그 문장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먼저 보내는 메시지는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착각을 준다.장미 미용실에서, 이수는 아침 내내 손이 느렸다.바쁘지 않았고, 일정도 비어 있었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어제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지워질 필요도 없었다.그건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하빈은 미용실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왔다.“아침부터 메시지 왔어.”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뭐래.”“오늘 늦는다고.”이수는 그 말을 예상했다.예상된 행동은 설계

  • 불륜해드립니다.   72. 감각의 잔존

    비는 생각보다 빠르게 굵어졌다.카페의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대화 사이사이에 끼어들었고,그 소리는 시간을 늘리는 대신 결정을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준혁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이런 날은 집에 바로 가기 애매하죠.”그 말은 질문처럼 들렸지만, 이미 결론을 포함하고 있었다.이수는 잔을 비우지 않았다.비우지 않는다는 선택은 밤을 길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비 그치면 움직이죠.”그녀의 대답은 조건이었고, 조건은 선택을 미룬다.준혁은 그 미루기를 허락으로 받아들였다.비가 조금 잦아들 즈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수는 계산대 쪽으로 먼저 걸었고, 준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둘 사이로 밀려들었다.준혁은 우산을 펼쳤다.그리고,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이수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였다.그 동작은 배려처럼 보였고,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이수는 우산 아래로 조금 더 들어왔다.이번에는 조금이 아니었다.어깨가 닿았다.닿았다는 사실을 둘 다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준혁은 몸을 떼지 않았다.떼지 않는다는 선택은 행동이었다.골목을 걷는 동안, 그는 자기 손이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고 있었다.의식하고 있다는 건 이미 넘고 있다는 뜻이었다.그의 손이 이수의 팔꿈치 근처로 왔다가 멈췄다.완전히 닿지는 않았지만, 비를 핑계로 거리 조절은 가능했다.이수는 그 움직임을 피하지 않았다.피하지 않는다는 건 허락처럼 보인다.그 오해를 그녀는 정정하지 않았다.골목 끝에서, 이수는 멈춰 섰다.“여기서 갈게요.”그 말은 분명한 경계였다.준혁은 그제야 자기 손을 거두었다.거두는 동작이 늦었다.그 지연이 사진에는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하빈은 맞은편 차 안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아직은 이수의 선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준혁은 한 걸음 다가왔다.이번에는 망설임이 적었다.“잠깐만.”그가 말했다.그 말은 잡아두고 싶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시

  • 불륜해드립니다.   71. 우연

    준혁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면 전날의 선택이 오늘의 일정으로 굳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는 그 굳어짐을 조금 더 미루고 싶었다.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셔츠를 고르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어제, 닿지 않았던 손의 거리. 멈춘 순간의 공기.그 기억은 후회가 아니라 재현 욕구에 가까웠다.회사에 도착한 뒤, 준혁은 의외로 일을 잘했다.집중력이 높아졌고, 회의에서는 말을 줄였다.말을 줄이는 건 마음을 숨길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점심 무렵, 휴대폰이 진동했다.예약 알림.장미 미용실. 며칠 전 그가 직접 잡아둔 시간이었다.그는 그 알림을 지우지 않았다.지우지 않는다는 선택이 이미 오늘의 방향을 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이수는 그날, 일부러 미용실 문을 조금 일찍 열었다.바쁘게 보이지 않게, 한산해 보이게.우연히 들러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그 분위기는 준비된 우연의 기본값이었다.하빈은 카운터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그녀를 봤다.“오늘 들어올 거야.”“알아.”“네가 먼저 연락한 건 아니지.”“아니.”이수는 일정표를 넘기며 말했다.“그가 만든 약속이야.”하빈은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자기가 만든 약속이면 책임도 자기 몫이지.”“그래서 더 빨리 가.”이수는 머리끈을 정리하며 덧붙였다.“우연처럼 보여야 해.”준혁은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일찍 도착했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시켰다.자발적이라는 착각은 사람을 대담하게 만든다.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수는 창가 쪽 정리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개를 들지 않는 건 환영보다 더 강한 신호였다.예상했다는 뜻.“오셨어요.”그 말은 확인에 가까웠다.“네.”준혁은 의자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오늘은 사람이 없었다.그 공백이 그를 편하게 만들었다.머리를 감고, 정리하는 동안 대화는 많지 않았다.이수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준혁도 설명하지

  • 불륜해드립니다.   70. 의도된 멈춤

    카페를 나설 때, 준혁은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라는 감각이 그를 느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이미 늦었고, 이미 돌아가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 시간을 세는 건 의미가 없었다.이수는 그보다 한 발 앞서 문을 열었다.나서는 동작이 자연스러웠고, 뒤돌아보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갈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인다.준혁은 그 오해를 붙잡았다.밤공기는 차분했다.골목은 밝지 않았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이수는 일부러 큰길로 가지 않았다.지름길도 피했다.이건 도망이 아니고, 유도였다.준혁은 그 선택을 문제 삼지 않았다.문제 삼는 순간, 지금의 이동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여기,”이수가 멈춰 섰다.간판은 작았고, 불빛은 낮았다.밖에서 보면 무슨 곳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운 장소.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자리였다.“괜찮아요?”준혁이 물었다.“잠깐이면요.”이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조건이었다.그는 그 조건에 고개를 끄덕였다.조건을 받아들이는 건 이미 책임을 나누는 일이었다.안은 조용했다.테이블 간 간격이 넓었고, 음악은 낮게 깔려 있었다.이수는 구석 자리를 골랐다.벽 쪽, 뒤가 막힌 자리.사람은 뒤가 막힌 자리에 앉을 때 앞으로 더 쉽게 기운다.준혁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그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이수를 보았다.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이런 데는,”그가 말했다.“설명 안 해도 되니까 좋네요.”이수는 잔을 받으며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설명 안 해도 되는 곳은,”그녀가 말했다.“대신 오해는 빨라요.”그 말은 경고 같았지만, 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오해라는 단어는 아직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술이 나오고, 잔이 채워졌다.이수는 먼저 들지 않았다. 기다렸다.기다림은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긴다.준혁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건,”그가 웃으며 말했다.“회사 사람들한테 말할 수 있

  • 불륜해드립니다.   10. 탐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 불륜해드립니다.   9. 거리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 불륜해드립니다.   8. 느려진 생각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 불륜해드립니다.   7. 문 앞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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