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른 아침의 파리. 하늘은 엷은 푸름을 띠고 있었고,빛은 아직 도시의 틈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지 못한 채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방은 여전히 단정했고,벽에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탁상 위에는 어젯밤 적다 만 메모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유리 씨. 사랑해서 붙잡는 것보다,사랑했기 때문에 놓아주는 쪽이 더 어렵다는 걸 이제 알 것 같아요.그 문장을 덮으며,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오늘은 그녀에게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그렇게 결심했으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유리가 머무는 거리로 향했다.그것은 마치 몸이 기억하는 길처럼,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를
파리의 겨울은 이제 본격적으로 모든 것을 얼려놓고 있었다.바람은 낮게 불었고, 사람들은 코트를 한껏 여민 채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이현은 그 거리의 한가운데서 홀로 멈춰 있었다.그의 손엔 사진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엷게 접힌 종이의 끝자락에는 민우와 유리가 함께 앉아 있는 익숙한 공원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누군가 무심히 전해준, 의도 없는 호의처럼 보였던 사진.하지만 그 사진은 이현의 마음을 조용히, 아주 깊게 찢어놓았다.민우.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유리 옆에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그는 이미 유리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그녀의 조용한 미소,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유리의 웃음, 유리의 손끝, 유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그는 이제 그녀가 스스로를 위해 떠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녀가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잠시 자신의 품에서 물러섰다는 것도 안다.하지만, 그녀가 웃고 있는 풍경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사실은 이현을 천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침대 옆 메모지에 펜을 들었다.유리 씨. 묻지 않을게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언제부터 당신 곁에 있었는지.다만 한 가지만, 부디 잊지 말아줘요.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당신과 함께였다는 걸.그리고 그 시간이 나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재라는 걸. 그는 그 메모를 찢어 서랍 깊숙이 넣었다.결국 그 말도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어떤 감정은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없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이현은 말하지 못한 감정의 무게를 안은 채 천천히 스스로를 향한 이해의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선택하지 않은 마음들이 이별을 만드는 날이 있다.그리고 그날은 언제나 늦게 온다.파리의 겨울은 생각보다 더 느리고 조용했다.사람들이 분주하게 지나가는 광장과는 달리 유리가 머무는 골목은 늘 한 박자 늦은 시간 속을 걷고 있었다.그 늦은 박자 속에서 유리는 자신을 재정비하고 있었다.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또렷하지 않았지만확실한 것은 이현이 없는 삶이 그녀의 일상 안에서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바람이 잔잔한 루브르 인근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몇 장의 엽서를 손에 쥔 채, 그녀는 오래전 이현과 함께 다녀갔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첫 번째, 생미셸 다리. 그날, 당신은 내 손을 처음 잡았죠.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던 건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였어요.’‘두 번째, 몽마르트 골목. 작은 가게 앞에서 웃으며 먹었던 파운드케이크.내가 만들었을 때보다 맛있다고 말했던 그날 당신의 거짓말이 고마웠어요.’그녀는 적다 멈추고, 잠시 엽서를 무릎 위에
파리의 회색 하늘 아래, 이현은 혼자였다.회사 기숙사의 작고 단정한 방,희미한 형광등 아래 놓인 얇은 책상과 무채색의 침대 시트는 그의 감정과 닮아 있었다.그는 유리의 곁을 떠나온 이후 단 한 번도 연락을 먼저 하지 않았다.그것이 배려라 믿었고, 시간이 그녀에게 필요하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설득했다.하지만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자신이‘기다리고 있는’ 쪽이 아니라 ‘잊혀지고 있는’ 쪽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맞은편 베개가 비어 있는 것을 보지 않아도 그녀의 부재는 또렷했다.그는 씻고 옷을 입고, 정리된 책상에 앉아 무의미하게 노트북을 켰다.일을 하다 말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그럴 때면 문득, 유리의 작은 습관들이 떠올랐다.말없이 냅킨을 곱게 접던 손끝, 식탁을 정리한 후에도 남은 소스를 아까워하던 웃음,자신은 맛보지 않고 이현의 표정을 먼저 살피던 시선.그것들은 지금 와서 어쩌면 사랑보다 더 이현의 하루를 지탱하던 것이었다.퇴근길, 그는 습관처럼 그들이 함께 걷던 거리를 피했다.한번은 무심코 두 사람이 함께 갔던 카페 앞을 지나쳤고,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숨을 멈춘 적도 있었다.물론 그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슴 속이 어딘가 찢긴 듯 저려왔다.'나는… 그녀가 없는 하루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그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랐다가 그보다 더 무서운 질문으로 이어졌다.‘혹시, 그녀는 이미 익숙해진 건 아닐까.’밤이 되어, 그는 조용히 침대에 앉았다.핸드폰 화면에는 마지막으로 나눈 문자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유리 씨, 우리 조금 떨어져 있어요.내가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어요. 기다릴게요. 언제든.그때는 진심이었다. 지금도 진심이었다.하지만 그 진심이 더는 닿지 않을 곳에 있다는 생각이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가 그 진심을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면 아니,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면 그건 사랑의 끝이
유리는 말없이 커피 잔을 받아들었고 그 안에 담긴 온기를 천천히 느꼈다.그 후로 두 사람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서로의 옆에 앉아 굳이 채우지 않아도 되는 침묵을 나눴다.어떤 감정은 말보다 침묵 속에서 더 깊이 자라나는 법이다.유리는 이 조용한 공간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연습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그 감정은 설렘도, 동경도 아니었다.단지,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누군가의 눈 앞에서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민우는 먼저 일어섰다.“오늘도… 좋은 시간이었어요. 유리 씨 덕분에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도요. 덕분에… 많이 편했어요.”민우는 짧게 인사하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그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유리는 어딘가 가볍고, 어딘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그 감정은 아직 이름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 안에는 자신조차 모르게 무너져가던 ‘마음의 균형’이 담겨 있다는 것을.집에 돌아와 그녀는 테이블 위 이현의 컵과 자신이 남긴 메모를 바라보았다.그 자리는 그대로였지만 자신의 마음은 아침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앉아 민우의 말 한 구절을 떠올렸다.“어떤 혼자 있음은 누군가와 함께 있던 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줘요.”유리는 지금 그 혼자 있는 시간 안에서 새로운 감정의 윤곽을 조금씩 이해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사랑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면, 그 자리에 무언가 다른 이름의 마음이 살며시 머물러도 되는 걸까.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커피 향에 남아 있는 오늘의 바람을 들이마셨다.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소리 하나가 부서지듯 피어났다.'나, 지금… 흔들리고 있어.'이른 아침, 파리의 창문 틈 사이로 가느다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그 빛은 조용하고 단정하게 거실 바닥을 쓰다듬었고,부엌의 은색 손잡이에 반사되어 마치 투명한 물방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유리는 그 빛 속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오랜만에
바로, 나눌 사람.해질 무렵, 거실 한 켠에 앉아 있던 유리는 이현이 남기고 간 노트를 펼쳤다.그 마지막 페이지엔 그가 썼던 낙서 같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유리 씨,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조차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었어요.''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였던 것 같아요.'그녀는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이제는 그 마음을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현이 떠나야 했던 이유,그가 머물며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것,그리고 그가 손 놓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까지.그 모든 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밤이 깊어지고, 유리는 식탁 앞에 다시 앉았다.그녀는 오늘 만든 요리를 작은 통에 담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그리고 종이 메모지 한 장에 짧은 글을 남겼다.'오늘은 가지를 구웠어요.''당신이 좋아하던 바질은 조금 진하게 넣었어요.''당신이 없으니까, 간을 맞추는 게 어렵더라고요.'그녀는 그 메모를 테이블 위 이현의 컵 옆에 놓았다.마치 그가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와 그걸 읽어줄 것처럼.그녀는 그렇게 그의 부재를 조용히 품고 앉아 있었다.그 공간에는 사랑이 남아 있었다.끝나버린 사랑이 아니라 아직 끝내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이.주말의 파리는 평일보다 더 조용했다.관광객들로 북적이던 중심가와는 다르게,강변의 작은 골목길은 누군가의 삶이 낮은 숨결로 이어지고 있는 공간이었다.유리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혼자 걸었다.가방도 없이, 목도리도 없이, 그저 걷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녀는 거리로 나왔다.이현이 떠난 뒤 처음 맞는 주말. 함께여서 익숙했던 풍경이 혼자여서 낯설게 느껴졌고, 그 낯섦은 그녀의 감정을 더 예민하게 깎아내고 있었다.카페 ‘Jardin’ 앞. 작은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유리는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으며,그녀 또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완벽한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