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 126. 내가 고른 맛이니까

Share

126. 내가 고른 맛이니까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5 08:35:50

파리는 그날도 맑았다. 어딘가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은 손등에 내려앉는 대로 따뜻했고 그 온도차가 유리의 기분을 묘하게 가볍게 만들었다.

조금 늦은 오전, 유리는 장바구니를 들고 마르셰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요리 계획이 없었다.

그냥 하루의 감정대로 재료를 고르고, 그 감정으로 식탁 하나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시장 안은 여느 때처럼 익숙한 낯섦으로 가득했다.

프랑스어로 빠르게 주고받는 상인들의 말,

포장을 뜯는 손끝 소리, 귤껍질이 터지는 즙의 향기,

사람들 옷깃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그 사이, 유리는 어느 야채 상자 위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재료 하나를 발견했다.

길쭉하고 창백한 잎, 미세하게 말라가는 끝자락,

그러나 뿌리 부분은 다부지고 탱탱했다.

이름도 모르고, 향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이 재료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물음은 마치 ‘이 도시에서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과도 닮아 있었다.

집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00.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 아침

    파리의 겨울은 늘 그랬듯 차갑고 무표정했다.하지만 이현에게 그 계절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었다.그저 하루를 지나기 위한 시간, 숨을 쉬고 있는 듯하지만 어딘가 부유하는 감정의 무게 속에서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카페의 창 너머로 낮게 깔린 빛이 번졌다.그는 혼자 앉은 채 식지 않은 커피에 손을 대지도 못한 채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날, 한 동료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그의 내면을 처음부터 다시 뒤흔들어 놓았다.“이사님, 들었어요? 그… 조유리 씨. 남프랑스로 여행 갔다던데요.같이 갔던 남자 분이… 꽤 가까워 보였다고 하던데.”가벼운 농담이었고, 아무 의도도 없었지만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99.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 아침

    아침 햇살은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했다.창을 반쯤 연 틈으로 레몬나무 향이 살짝 스며들었고,그 향기만으로도 이곳이 잠시 머물다 가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라는 것을 유리는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미 일어나 간단한 아침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토스트 위에 버터와 무화과 잼, 한 잔의 오렌지 주스, 그리고 그녀를 위한 따뜻한 홍차 한 잔.유리는 부스스한 머리로 부엌 문가에 서 있다 민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일어났어요? 조금 전까지 아주 깊이 자던데요.”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오래간만에…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 아침이었어요.”민우는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98. 그곳에서 피어나는 온도

    기차는 느릿하고 조용하게 남쪽으로 달렸다.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점점 도시의 윤곽을 잃고부드러운 초록빛 들판과 작은 마을들의 풍경으로 바뀌어갔다.유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햇살에 비쳐 반짝이는 언덕의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민우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종종 창밖 너머 그녀에게 닿고 있었다.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엔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그 침묵은 조심스러운 예의가 아니라, 스스로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인정과도 같았다.유리는 그 조용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도착한 마을은 생폴드방스였다.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요한 절벽 위,돌담 사이로 라벤더 향이 희미하게 퍼지고, 햇살은 유난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민우는 여행가방 대신 작은 백팩 하나를 들고 있었고,유리는 베이지색 스카프를 어깨에 둘러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살짝 눌렀다.“생각보다 조용하네요,”그녀가 말했다.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파리와는 전혀 다르죠. 여긴 시간을 오래 묵히는 곳 같아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웃었다.“오래 묵히는 시간… 그게 참 필요한 요즘이었어요, 저에게는.”게스트하우스는 작고 아담했다.나무로 된 창틀, 하얀 린넨 커튼, 테라스엔 작은 식탁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짐을 풀고 잠시 쉬자며 들어선 방에서 유리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꽃병에 시선을 두었다.하얀 들꽃이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있었고, 그 무심한 아름다움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가볍게 했다.민우는 방금 사온 바게트와 과일을 꺼내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해요. 내일 시장에 가면, 좋은 해산물과 와인을 고를 수 있을 거예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처음 보는 공간, 처음 쓰는 조리도구, 하지만 묘하게 익숙한 감각.그녀는 조심스럽게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테라스엔 바람이 불고 해는 천천히 바다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97.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바람

    파리의 오후는 햇살도, 그림자도 모두 부드러웠다.차가운 바람 사이로 볕이 스며들며 사람들의 어깨를 적셨고,잎이 진 나무들 사이엔 조금 이른 새들이 머물다 날아갔다.유리는 작은 공원의 나무 벤치에 앉아 민우가 건넨 따뜻한 코코아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온기를 통해 조금씩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기분이었다.민우는 무심한 듯 옆에 앉아 있었고,그 둘 사이에는 굳이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여백이 흐르고 있었다.그 침묵이 유리에게는 오히려 가장 솔직하고 편안한 말처럼 느껴졌다.“혹시…”민우가 말문을 열었다.“다음 주 주말, 시간 괜찮으세요?”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민우는 조심스럽지만 의외로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남프랑스에… 아주 작은 바닷가 마을이 있어요. 제가 예전에 머물던 곳인데, 그냥… 같이 가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그 제안은 어떤 맥락도 요구하지 않았다.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는 부담도 없었고,유리가 거절해도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침착하게 받아들일 사람이란 걸 유리는 알고 있었다.“꼭 여행이라기보단… 잠깐 머물러보는 거예요. 다른 공기 속에서 다른 마음으로.”민우의 말은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유리는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잔을 두 손에 감싼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푸른 하늘 아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그 바람이 유리의 뺨을 지나 머리카락을 흔들며 마치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 가볍게 지나갔다.그날 저녁, 유리는 혼자 부엌에 앉아 작은 오렌지를 천천히 깎고 있었다.귤보다 조금 단단한 껍질, 손끝에 남는 시트러스 향기.그녀는 그 향을 들이마시며 민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남프랑스의 바닷가. 잠시 머물러보자는 말.그건 어떤 고백도 아니었고, 어떤 약속도 아니었지만 묘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그는 그녀를 데려가려는 게 아니었다.다만,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96. 나만의 식탁에서 지켜낸 온도

    아침 햇살이 길게 거실 바닥을 타고 들어왔다.짧고 맑은 숨처럼 떨어지는 빛의 조각들,그 사이를 느리게 걷는 먼지의 궤적까지도 어쩐지 오늘은 유리의 눈에 조금 다르게 보였다.창문을 열자, 늦겨울의 공기가 조용히 들어왔다.그 공기는 차가웠지만 맑았고, 무언가 새로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배어 있었다.며칠 전. 이현의 흔적이 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어떤 인사도, 어떤 말도 없이 그는 조용히 떠났고, 유리는 그 이별의 방식을 고요하게 받아들였다.슬프지 않았다. 그보다는 애틋했고, 서늘했고,마침내 ‘끝’이라는 단어가 비로소 마음 안에서 하나의 문장으로 정돈되는 기분이었다.그날 아침, 유리는 오래도록 닫아두었던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95. 돌아서야만 도착하는 마음

    이른 아침의 파리. 하늘은 엷은 푸름을 띠고 있었고,빛은 아직 도시의 틈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지 못한 채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방은 여전히 단정했고,벽에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탁상 위에는 어젯밤 적다 만 메모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유리 씨. 사랑해서 붙잡는 것보다,사랑했기 때문에 놓아주는 쪽이 더 어렵다는 걸 이제 알 것 같아요.그 문장을 덮으며,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오늘은 그녀에게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그렇게 결심했으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유리가 머무는 거리로 향했다.그것은 마치 몸이 기억하는 길처럼,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를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4. 뒤돌아선 발끝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3. 선 긋는 건 너였는데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