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작은 식탁 하나를 놓기엔 충분할 만큼 넓고 조명을 달기엔 조금 낮은 천장이었다.유리는 오래전부터 눈여겨봤던 그 빈 공간에 조심스럽게 ‘자신만의 부엌’을 들이기 시작했다.큰 간판도 없었다. 그저 문 앞 유리창에 흘림체로 써둔 메모 하나.“오늘은 가지된장무침과 차가운 두부를 준비했습니다. 천천히 드시고, 마음도 함께 따뜻해지시길.”손님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다시 요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누구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도,누군가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의 마음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아침 준비를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려던 찰나,문 아래로 조용히 밀려든 한 장의 엽서.유리는 몸을 굽혀 엽서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앞면엔 흐릿하게 번진 도쿄의 야경,뒷면엔 낯익은 손글씨로 적힌 한 문장.“유리 씨의 식탁은, 지금 어떤 향이 나고 있나요?”그 아래엔 민우의 이름이, 그리고 짧은 안부가 적혀 있었다.“저는 여전히 바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만든 그 국물의 온도를 문득문득 떠올리곤 해요.”그녀는 엽서를 쥔 손끝에 서서히 따뜻함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어느 도시의 밤 속에서도 그가 자신을 떠올려 주고 있다는 사실이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그날, 식당엔 한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흰색 코트를 입은 프랑스 여성.조용히 메뉴를 보고, 가지된장무침과 따뜻한 현미차를 주문했다.유리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위한 접시를 준비했다.정확히 같은 재료였지만 이날의 가지는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고,된장의 깊이는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그녀는 식탁에 요리를 올리고 작게 인사했다.“Bon appétit.”그 말엔 한국에서의 기억과,파리에서의 다짐과, 지금 이 순간을 준비한 모든 시간이 고요히 담겨 있었다.식사를 마친 손님은 천천히 입가를 닦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음식엔… 뭔가 그리움 같은 게 있어요. 어머니와 함께 있던 어느 여름밤이 문득 떠올랐어
파리의 바람은, 종종 기억을 흔든다.그날도 그랬다. 하늘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고 구름은 잿빛도 아니고 흰빛도 아니었다.그 모든 것이 애매하고 중간쯤에 머무는 날,유리는 오래된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바구니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뭔가를 사려는 마음보다 그저 걷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그래서 손끝은 느슨했고, 눈길은 자주 멈추었다.그녀는 길모퉁이 작은 채소 가게 앞에 멈췄다.줄지어 놓인 작은 가지들,조심스레 쌓인 토마토 상자,파슬리와 고수가 바람에 흔들리며 조용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그때, 바로 옆에서 낯선 한국어가 들려왔다.“이거… 고수 맞죠? 음… 향이 꽤 진하네.”고개를 돌리자, 편안한 셔츠 차림에 낯익은 표정의 남자가 한 손엔 고수를,한 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유리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가렸다.그는 마치 향기와 싸우는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의외로 따뜻했다.남자는 고개를 들고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혹시… 한국 분이세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고수 처음 드셔보세요?”“예. 여행 중인데… 이거 뭔가 맛있다면서도 무섭달까…요리에 도전해보려고요.”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그럼… 고수는 조금만 사세요. 많으면 요리 버릴 수도 있어요.”그 말에 남자는 활짝 웃었다.“감사합니다. 혼자서 이런 시장 돌아다니는 게 조금 쓸쓸했는데… 덕분에 기분 좋아졌어요.”그 말은 그녀의 마음에 부드럽게 닿았다.낯선 이의 다정함은 때때로 익숙한 위로보다 더 깊게 남는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남자와 헤어진 뒤, 유리는 자신의 바구니에 고수를 몇 줄기 담았다.그리고 문득, 오래전 자신이 만들었던 레시피 하나를 떠올렸다.‘들기름 가지볶음에 바질을 올려볼까?’‘된장소스에 레몬을 넣으면 어떨까?’‘한국의 장과 프랑스의 허브를 섞는다면…’그녀는 갑자기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싶어졌다.시장을 빠져나와 조용한 카페에 앉아 메모
그가 떠나고 난 파리의 첫 아침은, 의외로 조용했다.사람의 부재란, 유난히도 생활 속 구석진 곳에서 느껴지는 법이다.이를테면 조용히 물을 데우는 주전자 옆에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부엌,창가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빛이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진 채 굳어 있는 식탁,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티백 하나가, 찬장 구석에 그대로 남겨져 있는 광경 따위에서.유리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가벼운 소음조차 그녀의 발끝에 붙은 먼지처럼 느껴질 만큼, 공간은 고요했다. 무언가를 끓이고 싶었다.그저 국물 하나라도 만들고 싶었다. 소리를 내고 싶었다.자신의 마음이 멈춰있지 않다는 증거를,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그래서 그녀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민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다시팩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물 위에 띄웠다.물은 서서히 온도를 올리고, 다시는 천천히 그 안에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무언가가 익어가는 냄새는 언제나 사람을 다독이는 힘이 있다.그건 마음의 표면을 덮고 있던 조용한 불안까지 덜어주는 힘이었다.식탁 위에는 된장국, 계란말이, 그리고 김치 한 접시가 놓였다.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누군가와 나눌 것도 없는 한 끼였지만,그녀는 아주 정성스럽게 식탁을 정리했다.숟가락과 젓가락의 각도를 맞추고, 국그릇이 기울지 않도록 물 수평까지 맞춰가며.그건 더 이상 외로움의 몸짓이 아니었다.삶을 가만히 다독이는 방식이었고, 그녀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주는 위로의 기술이었다.유리는 조용히 앉아, 식탁에 손을 모았다.기도처럼, 혹은 기억을 더듬듯.그녀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익숙했던 온기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민우의 목소리, 웃음, 다정한 눈빛,그리고 그가 그려준 식사의 온도.그 온기들은 지금 식탁 위로 다시 떠오르고 있었고, 비록 함께하지 않지만그는 여전히 그녀의 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국 한 숟갈을 입에 넣었을 때,그 국물은 예상보다 훨씬 깊고 부드러웠다. 민우의 다시팩에, 자신의 손끝이 더해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았다.파리의 겨울은 아직 눈을 뿌리지 않았지만,공기엔 뭔가 끝을 향해 가는 계절의 기척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유리는 손에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천천히 공항으로 향했다.민우는 떠나는 날, 별다른 인사를 청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저 자신이 보내고 싶어서 이 길을 걷고 있었다.한 계절을 함께 보낸 사람을 그냥 보내는 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일처럼 느껴졌기에.공항의 출국장은 여느 때처럼 붐볐지만 유리는 그 속에서도 민우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차분한 회색 코트, 검은 여행 가방 하나.그는 늘 그래왔듯 사람들 속에서도 조용히 서 있었고시간을 서두르지 않는 사람처럼 그곳의 공기마저 천천히 감싸 안고 있었다.그녀를 발견한 민우는 놀란 듯, 그러나 따뜻한 미소로 손을 들어 보였다.유리는 걸음을 멈춘 채 작게 인사를 했다.그 사이, 아무 말도 없었다.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품고 있었다.“올 줄은 몰랐어요.”민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와야 할 것 같았어요.”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인사는, 보내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니까요.”그 말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엔 고마움도, 아쉬움도, 그리고 조금의 미련도 담겨 있었지만 무엇보다 깊은 다정함이 천천히 번져 있었다.유리는 손에 쥔 종이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이거… 길에서 배고플까 봐, 작은 도시락이에요. 마지막 식사는 함께 못하지만 그래도… 제 손끝을 기억해줬으면 해서.”민우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종이 너머의 따뜻함이 그의 손가락을 데우는 것처럼 느껴졌다.“유리 씨의 요리는 앞으로도 오래 기억날 거예요. 맛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들을 함께 먹었기 때문이죠.”그 말은 요리라는 형식을 빌린 가장 깊은 감정의 고백이었다.탑승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민우는 작은 숨을 들이쉬고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았다.그녀도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그들 사이엔 이름 대신 감정이, 말 대신 기억이
파리의 겨울 저녁은 해가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하루가 반쯤 남은 듯 보였지만하늘은 이미 짙은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가로등의 불빛은 아직 저녁이 되기도 전부터 작은 따뜻함을 흘리고 있었다.민우는 유리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오늘 저녁, 한 번만 더 같이 식사할 수 있을까요? 이번엔… 제가 조금 더 정성을 들여볼게요.”그 말은 어쩌면 소박한 제안이었지만, 유리의 마음 한쪽엔 작은 떨림으로 스며들었다.‘한 번만 더’그 단어에 스친 뉘앙스, 이별이나 결심 같은 것들.그녀는 문득, 무언가가 마무리를 준비하는 감정을 그 짧은 문장에서 느꼈다.그러나 동시에, 그게 꼭 슬픈 의미만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피어났다.민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커튼을 살짝 걷은 창가에는 조용한 촛불이 켜져 있었고,작은 조명등들은 은은하게 주방과 식탁을 비추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조심스럽게 정리된 수저 세트와직접 접은 냅킨, 그리고 무언가 따뜻한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이건…?”유리가 묻자 민우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소고기무국이에요. 집에서 늘 먹던,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국.”“근데 향이… 이상하게 마음을 눌러요. 좋은 쪽으로요.”그녀의 말에 민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누군가를 위한 식탁이란 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잖아요. 기억나는 맛이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두 사람은 마주 앉아 뜨거운 국을 나누며 말없이 시간을 씹었다.그 식사는 조용했지만 따뜻했고,말이 없어도 충분히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한참 후, 유리는 손에 쥔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민우를 바라보았다.“민우 씨, 오늘 왜 마지막처럼 말했어요?”그 물음은 그녀가 애써 감춰두었던 불안의 실마리를 드러내는 말이었다.민우는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내리고 천천히 대답했다.“사실… 파리에서의 일정이 다음 주로 마무리돼요.회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본사 복귀가 결정됐어요.”그 말은 짧았지만
그날 오후, 유리는 시장에서 돌아와 작은 택배 박스를 열고 있었다.거기엔 한국에서 온 식자재와 함께 작은 메모 하나가 들어 있었다.‘이따금 네 요리가 그리워진다.몸은 괜찮니? 우리도 이제는 서로의 이름을 조금은 다정하게 부를 수 있기를.’그 짧은 글은 유리의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잠시 박스 안의 검은콩을 꺼내 들고 있었다.손에 닿는 단단한 감촉,그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먼지들.그 속엔 말보다 오래된 시간들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전화는 저녁 무렵 울렸다.익숙한 번호, 하지만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곳.“유리야, 오랜만이다.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