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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용기 없는 체념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0 07:49:35

그 제목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조유리라는 사람 자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잔인한 한 줄이었다.

이현은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손끝에 힘이 풀렸다.

“…어머니.”

그의 입술 끝에서 비죽이 새어나온 어머니라는 단어조차 오늘따라 낯설고 차가웠다.

그는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그 칼날이 유리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함께 찢어버리려 드는 순간,

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유리는 그 뉴스를 평범한 손님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카페 안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마주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듯

마구잡이로 소비했고, 그녀는 그것을 말없이 듣고 있어야 했다.

‘내가… 누구지?’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유리라는 사람의 정체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가장 깊은 곳부터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핸드폰 화면 너머 세상은 이제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세상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그녀가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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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9. 홀로 남은 식탁의 온도

    그녀 역시 이현과의 거리에서 숨을 쉬고 싶다고 느낀 적이 최근 들어 너무 자주 있었기에.“그래요.”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우리… 잠깐, 서로에게서 벗어나 있어봐요.”그 말은 이별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끝에 가까운 말이었다.그날 밤, 서로 다른 방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이불을 덮었다.이현은 손끝으로 휴대폰을 쥔 채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낼 말을 떠올렸다.그러나 어떤 말도 지금의 그녀에게 닿을 수 없을 거란 걸 알기에 그는 끝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유리는 베개를 껴안은 채 자신이 한 말을 되뇌었다.“우리… 떨어져 있어요.”그 말은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들렸지만그 속에 담긴 진심은 그녀의 심장을 천천히 조이고 있었다.며칠 후, 이현은 짐을 싸고 있었다.“당분간 회사 기숙사에 있을게요.”그는 조용히 말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 말 없이 그가 챙긴 셔츠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그들의 손끝은 가끔 마주쳤지만 이제는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이현이 현관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고마웠어요. 지금까지… 곁에 있어줘서.”그 말에 이현은 작게 웃었다.“…내가 더 고마워요. 그 곁에 있을 수 있어서.”그리고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유리는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긴장이 풀린 어깨, 멍해진 시선, 무언가를 참는 듯한 입술.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거창한 말 없이, 비난도 없이, 눈물도 없이.단지, 마주 보던 두 사람이 서서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사랑은… 이렇게도 끝나는구나.”그리고 그 말 끝에 조용히 무너져내린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은 아직 그녀 안에 없었다.이현이 떠난 집은 그리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그의 옷 몇 벌이 빠져나간 옷장,책상 위에 놓였던 노트북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것 외엔, 소파도 그대로 화병의 꽃도 시들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하지만 유리는 안다. 그의 부재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지 않아도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8. 당신 마음한테 솔직하면 되는 거잖아요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이현은 유리의 손끝에서 느껴졌던 미묘한 떨림을 잊을 수 없었다.그것은 단순한 피로나 지침이 아니었다.손끝을 스쳐 지나가던 망설임,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동.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또렷한 신호처럼 느껴졌다.“괜찮아요?”그가 조용히 물었다.유리는 순간 작은 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냥 좀 피곤해서.”그 말은 익숙한 핑계였고, 그 익숙함은 오히려 이현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날 저녁, 이현은 평소보다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비했다.유리가 한때 좋아했던 가지 그라탱과 토마토를 얹은 바삭한 바게트, 그리고 레몬향을 곁들인 화이트 와인.식탁 위에 놓인 음식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준비된 것이 없었지만,그가 진짜로 차리고 싶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서로를 마주 보는 자리였다.“오늘은 내가 만들었어요. 맛 봐줄래요?”그는 조심스럽게 웃었고, 유리는 그 웃음에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응. 고마워요.”그녀는 포크를 들어 조용히 음식을 입에 넣었지만,그 안에 감탄도, 익숙한 미소도 예전처럼 머물러주지 않았다.식사가 끝난 후, 이현은 두 손을 모은 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유리를 바라보았다.“유리 씨.”그녀가 고개를 들었다.“나… 요즘 당신이 너무 멀게 느껴져요.”그 말은 마침내 꺼내든 고백이었다.유리는 입술을 다문 채 작게 눈을 감았다.“미안해요.”그 말은 사과가 아니라 회피였다.그녀조차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그 외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이현은 그녀의 그 말이 지금껏 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가장 아프게 들린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왜 미안한 거예요?”그가 물었다.“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당신 마음한테… 솔직하면 되는 거잖아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자신이 조금씩 감정의 무게를 외면하고 있다는 걸.지금 이현이 건네는 손을 붙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걸.그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7. 당신의 세계에 내가 없을 때

    이른 아침, 이현은 오랜만에 유리에게 여행을 제안했다.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모른 척 웃으며 말했다.“멀지는 않아요. 기차로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하니까요. 그냥 바람 쐬러 가는 거예요.”유리는 잠시 말이 없었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수락은 적극적인 것도, 기대에 찬 것도 아니었지만이현은 그 ‘그래요’라는 한 마디 안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읽고 있었다.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들판과 나무들,가끔 스쳐 지나가는 마을의 풍경이 유리의 눈동자에 흘러들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현은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그 손길에 유리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그 손에 스며드는 따뜻함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그녀의 손은 말없이 이현의 손에 얹힌 채 가만히 식어가고 있었다.도착한 도시는 작고 조용했다.산책하기 좋은 언덕이 있었고, 작은 포도밭과 돌로 된 골목길이 이어져 있었다.이현은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찍으며 간간히 유리의 모습을 담았다.그녀가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햇살이 머리카락을 통과해 빛날 때,조용히 벤치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 맬 때.그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점심을 먹은 작은 레스토랑에서 이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나랑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어요?”유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힘들다기보다는…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그녀의 말은 길고 조심스러웠지만 그 속에 감춰진 감정은 오히려 명확했다.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괜찮아요. 말해줘서 고마워요.”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 뒤에 숨은 절망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해가 지고, 두 사람은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그 밤, 침대에 누운 유리는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을 애써 지우려 했다.민우와 함께 있었던 강변의 정적, 그의 노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6.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그날 밤, 유리는 오랜만에 불을 끄고 누운 방 안에서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창문 밖에서는 늦은 비의 잔재가 길가를 적시고 있었고,부드러운 빗소리는 방 안 공기마저 축축하게 적시는 듯했다.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민우가 건넸던 노트 속 문장을 조용히 떠올렸다.“그 부재가 자꾸 생각난다면, 그건 감정일지도.”그 문장은 하루 내내 그녀의 머릿속 어딘가에서맴돌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주는 무언의 거울처럼 반짝였다.‘나는 왜 자꾸… 그 사람과 있었던 시간을 떠올리는 걸까.’그 질문은 너무 솔직했고, 또 너무 위험했다.다음 날 아침, 이현은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식탁 위엔 따뜻한 크루아상과 그가 직접 내린 커피가 놓여 있었고, 그는 오랜만에 조금 더 정성 들인 아침을 준비했다.유리가 방에서 나왔을 때, 그는 반갑게 미소 지었다.“오늘은… 내가 먼저 준비했어요.”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식탁 위에 놓인 빵과 잔잔한 향기를 머금은 커피.그 익숙하고 다정한 풍경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고마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그녀의 말엔 분명 감사가 담겨 있었지만, 이현은 그 속에서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그건 마치 그녀가 감정을 완전히 실어 말하지 않는 사람처럼 마음을 숨긴 채 예의를 지키는 느낌이었다.아침 식사 후, 유리는 평소처럼 외출 준비를 했고이현은 책을 펴 들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자꾸만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선 유리.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유리 씨.”그녀가 고개를 돌렸다.“…오늘은 어디 가요?”그의 질문은 평범했지만 그 속엔 분명한 무게가 있었다.‘누구와’라는 단어를 삼킨 채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시선을 붙잡으려 했다.유리는 아주 짧은 침묵 끝에 작게 웃었다.“그냥 혼자 걸어요. 혼자 있고 싶어서요.”그 말에 이현은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혼자 있다는 말보다 ‘나누고 싶지 않다’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5. 당신 없는 풍경 속에서 가벼웠다

    파리의 공기는 부드러웠고, 초여름을 닮은 바람은 오전의 거리를 조용히 매만지고 있었다.유리는 혼자 산책을 나섰다.목도리 없이 가벼운 셔츠 차림에 머리는 느슨하게 묶였고,가방에는 책 한 권과 작은 메모장이 들어 있었다.그녀는 오늘이 유난히 조용하고 싶었다.바람이 말을 거는 하루, 사람들이 천천히 걷는 거리,그 속에서 자신도 모든 생각과 감정을 한 템포 늦추고 싶었다.강변 쪽 오래된 벤치에 앉아 유리는 책을 펴지도 않은 채 멀리 강을 바라보았다.물결 위에 흔들리는 햇살, 유유히 지나가는 유람선,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자전거 바퀴 소리.그 조용한 풍경 속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안녕하세요.”낮고 담백한 목소리.고개를 돌린 순간, 그가 서 있었다.민우.그녀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짧게 웃었다.“또… 우연이네요.”그는 어깨를 으쓱였다.“이 도시가 그렇게 크지는 않나 봐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기 자주 오세요?”“가끔요. 생각 정리하고 싶을 때.”그 말에 유리는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저도요.”민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말을 덧붙였다.“혼자 있는 사람의 기운은 서로 알아보는 것 같아요. 유리 씨도…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려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민우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침범하지도 않았다.그저 있는 그대로 그녀의 현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순간, 유리는 아주 잠깐 스스로가 ‘보호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꼈다.그 감정은 이현과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더 자주 잊곤 했던 것이었다.두 사람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오히려 그 침묵이 서로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민우는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괜히 적어본 건데요.”유리는 펼쳐보았다.짧은 문장들이 조용히 적혀 있었다.어느 날,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이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4. 마주보는 마음, 닿지 않는 온기

    창문을 두드리는 가늘고 긴 빗소리. 파리의 밤은 온통 잿빛이었다.불 켜진 작은 부엌에서 유리는 조용히 찻잎을 우려내고 있었다.은은한 캐모마일 향이 잔잔히 번져나가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지만,그 어떤 따뜻함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지는 못했다.이현은 소파에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지만 책장은 넘겨지지 않았다.그는 방금 전 유리의 옆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그녀의 고요한 표정. 말없이 커피를 내리던 그 뒷모습은 그에게 점점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사랑을 어떻게 꺼내야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이제는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차 마실래요?”유리의 조용한 물음에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좋아요.”그녀는 두 잔의 찻잔을 들고 소파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그들의 무릎 사이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그 위에는 함께 놓인 책 한 권과 말라가는 라벤더 잎 몇 송이.이현은 잔을 들고 조심스레 물었다.“요즘은… 무슨 생각해요?”그의 물음은 무겁지 않았다.다만 너무 오래 묻지 못했던 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꺼내진 것이었다.유리는 잔을 들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생각이 많아요.”짧은 대답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변할까 봐 겁이 나요.”그녀의 고백은 정적 속을 천천히 파고들었다.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떼며 말했다.“나는… 그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요. 그러니까 유리 씨가 어떤 말이라도 꺼내줘도 돼요.”그의 말은 진심이었다.그러나 유리는 그 진심마저 버거워 보였다.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이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끝을 올렸다.그 미세한 접촉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또 동시에 조심스러웠다.유리는 손을 거두지 않았지만 그 손끝에 온기를 더하지도 않았다.그녀는 단지 그 온도를 가만히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이현은 그 침묵을 받아들이듯 작게 말했다.“내가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4. 뒤돌아선 발끝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3. 선 긋는 건 너였는데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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