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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침묵의 밤

Autor: 데이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6-22 08:53:54

밤이 완전히 내려앉은 시각.

궁 안의 등불들은 하나둘 사그라들고, 회랑에는 장식용 등만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바람은 낮보다 차가웠고, 달빛은 지나치게 맑아서 숨조차 조심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도진은 세자의 명을 받은 뒤, 오늘부터 빈의 처소 주변 경계를 직접 맡고 있었다.

그 명이 의미하는 바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는 처소 앞 회랑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의 호흡 또한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서도 가슴 한복판에는 말할 수 없는 결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전의 방문. 대비의 경고. 궁 안에 퍼진 소문.

그리고… 정원에서 마주친 이수의 눈빛.

그 모든 것이 도진의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반대쪽 회랑에서 이수는 혼자 걸어나오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밤 공기를 쐬기 위해 잠깐 회랑을 도는 것이 그녀의 작은 습관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그 습관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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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32. 검을 쥔 손이 흔들리다.

    새벽의 궁은 하루 중 가장 맑고 가장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아직 해가 뜨지 않은 흙빛 하늘 아래에서 살짝 하얀 물안개가 땅 위를 흐르는 듯 피어오르고,대나무 숲은 서늘한 바람에 조용히 몸을 떨었다.이 시간은 도진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잡념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검과 하나가 되는 시간.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던 시간.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련장은 아직 텅 비어 있었고, 도진은 홀로 검을 들고 서 있었다.그의 손끝에 닿은 검의 감각은 늘 같아야 했다.단단하고, 차갑고, 정확한 감각.하지만 오늘, 그 감각이 이상하게 생경했다.마치 손이 아닌 마음이 먼저 흔들리는 듯한 기분.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요란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미묘한 흔들림이었다.그런데도 그 흔들림은 심장을 아주 조용히 휘감으며 검을 쥔 손까지 퍼져갔다.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칼끝이 새벽 안개 속에서 반짝였고, 몸을 낮게 숙이며 발을 굴렀다.첫 동작은 정확했다.둘째 동작도 흠잡을 데 없었다.그러나 셋째 동작에서 칼끝이 흔들렸다.아주 미세한 흔들림.하지만 도진에게는 치명적인 흔들림이었다.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그는 눈썹을 좁히며 자세를 고쳤다.다시 한 번. 검을 높이 올리고, 허공을 가르며 내리쳤다.휘익~소리는 정확했지만 동작의 맥이 끊겼다.도진의 숨이 깊게 흔들렸다.'왜 이리… 집중이 되지 않는가.'평생 칼을 잡아온 사내에게 이 정도의 흐트러짐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그는 검을 들고 선 채 가볍게 눈을 감았다.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달빛 아래에 선 이수.바람결에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카락.가볍게 떨리던 목소리.“…유난히 긴 밤이옵니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의 눈.그 눈 속에서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결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도진은 숨을 내쉬었다.그 순간 현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호위관은… 자리를 지키는 법을

  • 천년의 기억   31. 위험한 반문

    밤은 이미 궁을 완전히 삼켜버렸다.달빛은 높고 얇아서 궁의 지붕들을 희미하게 빛으로 두드릴 뿐, 회랑에는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바람조차 살금살금 스치는 듯한 고요한 밤.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의 방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세자의 처소였다.현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등불은 작은 불씨처럼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하루 내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장면.전날 밤 회랑에서 보았던 이수와 도진의 모습.정확히 무엇을 본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그 침묵 속의 떨림, 눈빛의 잔해,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맴돌음.그 모든 것이 현의 마음 한 부분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워냈다.그는 하루 종일 그 감정을 억눌렀다.'빈이 흔들린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인가.'그 질문은 현 자신에게조차 위험한 것이었다.그는 책상 위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입에 대지 못했다.술보다 더 뜨겁고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의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전하, 모실까요?”내관이었다.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작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문을 향해 말했다.“들라.”내관은 조심스럽게 들어와 예를 올렸다.형식적인 절차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공기 자체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내관은 재촉하지 않았고, 현은 서두르지 않았다.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리고, 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궁의 움직임을 어찌 보았느냐.”내관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특별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다만… 빈마마께서 밤에 잠시 회랑을 거닐었다는 정도만…”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움직임은 발각될 만큼 크지 않았지만,내관은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늘의 대화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잠시 후, 현이 낮게 말했다.“도진은… 어디에서 경계를 섰느냐.”내관은 숨을 삼키듯 대답했다.“호위관 도진

  • 천년의 기억   30. 낮의 침묵, 말로 가려진 칼날

    다음 날 아침의 궁은 전날보다 훨씬 조용했다.바람은 느리게 흘렀고, 새벽 안개가 아직 회랑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햇빛은 비스듬하게 기와 사이를 파고들며 궁의 윤곽을 은근히 밝혀주고 있었다.이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세자의 아침 문안을 드리러 나섰다.어제의 밤을 잊으려 애썼지만,떨림은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가벼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전날 밤 회랑에서 마주했던 도진의 모습이 어딘가에서 느리게 흔들렸다.'그의 눈빛이… 왜 아직도 떠오르는가.'그 이유를 스스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수는 더 괴로웠다.조금 흔들린 마음을 다잡으며 세자의 처소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내관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빈마마를 들이라 하셨나이다.”문이 열리고, 이수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아침 햇빛에 비친 그의 옆얼굴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침착했다.그러나 이수는 그의 침착함 아래 알 수 없는 기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이수는 예를 올렸다.“전하, 평안하셨사옵니까.”현은 고개를 들었다.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이전과 달랐다.조금 더 깊었고, 조금 더 조용했으며,조금 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빈은 어제… 밤에 잘 들었소?.”평범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평범하지 않았다.이수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 떨림을 숨기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네, 전하. 밤공기가 차가워 잠시 회랑을 거닐었사오나…이내 잘 들었사옵니다.”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진실 모두는 아니었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수의 얼굴을 향해 오랫동안 머물렀다.오늘따라 그 눈빛이 지나치게 깊어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현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빈은 어찌하여 밤중에 혼자 거닐었느냐.”그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말의 결이 분명히 달랐다.이수는 놀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 마음

  • 천년의 기억   29. 무언의 조율

    밤의 회랑은 점차 어둠에 잠겨 있었다.달빛은 처마 끝에서 가늘게 흘러내렸고,바람은 촛불 같은 숨결로 회랑을 스쳐갔다.그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아주 천천히 회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현이었다.그는 내관 하나 없이 혼자 회랑을 걷고 있었다.오늘 밤만큼은 누구의 눈도 원치 않았다.발걸음은 규칙적이었으나 그 규칙 속에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숨어 있었다.도진.빈.그 두 사람의 이름이 오늘 하루 종일 마음 한복판 어딘가에서 자꾸만 마찰을 일으켰다.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말해서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놓지 못했다.현이 빈의 처소 쪽 회랑을 지날 때였다.바람이 문득 방향을 바꿨다.아주 희미하지만, 사람의 숨이 섞인 기척이 바람 사이에서 실처럼 엮였다.현은 걸음을 멈추었다.눈을 찡그린 채 회랑 끝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달빛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도진. 그리고… 이수였다.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이상할 만큼 고요했고,말로 할 수 없는 결이 흐르고 있었다.현은 움직이지 못했다.아니,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그저 숨을 낮게 깎아내리며 그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도진이 이수에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이고, 이수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머뭇이는 모습.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말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사이에서 흘러가고 있었다.이는 세자의 눈에는 숨결처럼 명확하게 보였다.이수의 눈빛은 고요했으나 아렸다.도진의 태도는 절도 있었으나 흔들렸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람이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 아주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현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그는 자신이 분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아니, 알 수 없었다.왜냐하면 그가 보고 있는 장면에 명백한 잘못은 없었기 때문이다.둘은 멀찍이 서 있었고 예를 갖추고 있었고 그 어떤 무례도 없었다.하지만, 이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마음이라는 것이 거리로 측정된다

  • 천년의 기억   28. 침묵의 밤

    밤이 완전히 내려앉은 시각.궁 안의 등불들은 하나둘 사그라들고, 회랑에는 장식용 등만이 희미하게 깜빡였다.바람은 낮보다 차가웠고, 달빛은 지나치게 맑아서 숨조차 조심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세자의 명을 받은 뒤, 오늘부터 빈의 처소 주변 경계를 직접 맡고 있었다.그 명이 의미하는 바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그는 처소 앞 회랑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의 호흡 또한 절제된 움직임이었다.그러나 그 절제 속에서도 가슴 한복판에는 말할 수 없는 결이 자리하고 있었다.중전의 방문. 대비의 경고. 궁 안에 퍼진 소문.그리고… 정원에서 마주친 이수의 눈빛.그 모든 것이 도진의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반대쪽 회랑에서 이수는 혼자 걸어나오고 있었다.저녁 식사 후, 밤 공기를 쐬기 위해 잠깐 회랑을 도는 것이 그녀의 작은 습관이었다.그러나 오늘 밤 그 습관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이수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회랑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가벼운 발소리가 아주 조용히 들렸다.밤공기 속 바람이 흐르는 소리가 아닌,궁녀들의 분주한 걸음도 아닌 익숙한, 단단한, 규칙적인 발걸음.이수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회랑의 길목에서 마주쳤다.달빛 아래, 둘은 말없이 서 있었다.도진이 먼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빈마마.”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오히려 마음속의 떨림을 감추기 더 어려운 결이었다.이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호위관은 이 밤에… 왜 여기에…”도진은 정직한 듯 대답하려다가 말을 삼켰다.'경계 때문입니다. 저하의 명 때문입니다. 빈마마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그 어떤 문장도 입에 올리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대신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경계를 돌고 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복잡하게 흔들렸다.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 바라봄이 왜

  • 천년의 기억   27. 소문의 찌꺼기

    밤은 어느새 궁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달빛은 얇게 깎인 조각처럼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회랑을 스치는 바람은 하루 종일 궁을 뒤흔든 소문들의 찌꺼기를 어디엔가 쓸어가는 듯 섬뜩하게 흘렀다.이수의 처소는 조용했다.궁녀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고, 촛불 몇 개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이수는 홀로 앉아 있었다.책상 앞, 손등 위로 떨어지는 달빛이 마치 차가운 손길처럼 느껴졌다.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그러나 말은 공허했고, 마음은 그 말을 붙잡아주지 않았다.머릿속은 온종일 들었던 말들로 가득했다.대비의 경고. 중전의 차가운 눈빛.궁녀들의 떨리는 손끝. 스치는 시선들.그리고… 도진의 낮은 목소리.“빈마마… 몸을 조심하시옵소서.”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맴돌았다.그 말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그 문장이 더 선명해졌다.이수는 조용히 손을 쥐었다.그러나 손끝은 식은 지 오래였다.그녀는 섬세한 자태로 컵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컵의 옆면을 스친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떨림이 컵의 가장자리에 작게 반사되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수는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두렵다.’궁의 소문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질책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비난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두려운 것은 소문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더 선명해지는 것이었다.그녀는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부드러운 비단이 바닥에서 미세하게 닿으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방 안에 깔린 침묵이 마치 물속처럼 무거워질 때쯤, 이수는 창문을 올렸다.바깥의 공기가 스며들었다.차갑고, 맑고, 어디에도 거짓이 없는 공기.그런데,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이수는 이유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그러자 낮에 마주쳤던 도진의 눈빛이 떠올랐다.짧았지만, 그 안에는 감춰진 떨림이 있었고, 그 떨림이 지금 이수를 더 흔들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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