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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무언의 조율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3 07:31:20

밤의 회랑은 점차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달빛은 처마 끝에서 가늘게 흘러내렸고,

바람은 촛불 같은 숨결로 회랑을 스쳐갔다.

그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아주 천천히 회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현이었다.

그는 내관 하나 없이 혼자 회랑을 걷고 있었다.

오늘 밤만큼은 누구의 눈도 원치 않았다.

발걸음은 규칙적이었으나 그 규칙 속에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숨어 있었다.

도진.

빈.

그 두 사람의 이름이 오늘 하루 종일

마음 한복판 어딘가에서 자꾸만 마찰을 일으켰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말해서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놓지 못했다.

현이 빈의 처소 쪽 회랑을 지날 때였다.

바람이 문득 방향을 바꿨다.

아주 희미하지만, 사람의 숨이 섞인 기척이 바람 사이에서 실처럼 엮였다.

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찡그린 채 회랑 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달빛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도진. 그리고… 이수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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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128. 잠들지 않는 의심의 결

    문을 닫고 난 뒤에도, 도진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문 안쪽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고, 복도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그러나 그 고요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숨을 고른다고 해서 사라질 기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어둠 속에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궁의 벽과 기둥, 처마의 그림자가 모두 조금씩 달라 보였다.어제까지는 단순한 구조물이었고,그저 지켜야 할 공간이었을 뿐인 곳들이오늘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숨기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지금부터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안 된다.이수의 처소를 등지고 몇 걸음 물러났을 때, 도진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더 이상 기척도 말소리도 없었다.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그 안에서 이수는 결코 편히 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세자의 의심은 말로 끝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한 번 시작되면 사람을 시험하고,사람을 고립시키고, 마침내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자라났다.도진은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세자의 곁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가 발걸음을 옮길수록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바뀌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빈의 처소 근처를 도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기록에 남을 수 있고, 누군가의 입에 오를 수 있었다.그 순간, 멀리서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도진은 즉시 몸을 낮추었다.기둥의 그림자 안으로 반 발짝 물러나 소리가 나는 방향을 주시했다.근위 둘이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평소와 다르지 않은 순찰처럼 보였으나, 걸음의 속도와 간격이 미묘하게 달랐다.둘 다 말을 하지 않았고, 서로를 확인하는 눈빛만을 주고받고 있었다.도진은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그 시선은 자연스러웠으나, 마음은 이미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다.세자의 명이 내려간 것이다.직접적인 명령일 수도

  • 천년의 기억   127. 그 어떤 거리도 두지 않겠습니다

    바람이 멈춘 듯 고요한 밤이었다.궁의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조차 지나치게 크게 들릴 만큼, 모든 기척이 조심스러웠다.이수의 처소에서는 촛불이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방금 전 세자가 문을 닫고 돌아선 여운이 아직 공기 속을 떠돌았다.그 여운에는 의심과 질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상처가 섞여 있었다.상궁은 여전히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움츠린 채 서 있었다.말을 꺼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지금의 이수를 안정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고르려 했으나,숨이 생각처럼 고르지지 않았다.세자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얼마나 무겁게 마음을 흔드는지오늘 밤만큼 또렷하게 깨닫는 순간은 없었다.“상궁.”그녀가 아주 낮게 부르자 상궁은 즉시 허리를 숙였다.“예, 마마.”“문을… 잠시 열어두어라.”상궁은 놀란 눈을 들었다.“마마, 혹여 밤공기가”“괜찮다. 이 밤의 공기가… 나를 더 차분하게 만든다.”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문이 반쯤 열리자, 어두운 복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수의 소매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기척 하나가 문 안쪽의 기류를 약하게 흔들었다.바람도 아닌데 생긴 흔들림이었다.잠시 후, 복도 끝에서 낮게 들려오는 발걸음.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숨을 누르고 오는 걸음이었다.도진이었다.그는 문턱 앞에서 멈춰섰다.상궁이 그를 알아보고 조용히 말렸다.“마마께서… 지금은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압니다.”도진은 상궁의 손보다 먼저 말을 막았다.“문 앞까지만. 그 이상은 들지 않겠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으나, 그 낮음 안에서조차 깊이 가라앉은 우려가 흘러나왔다.상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러서며 이수를 돌아보았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문 가까이로 한 발 다가왔다.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문턱이 있었지만 그 문턱은 오히려 서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거리였다.도진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예를 갖추었다.“마마, 이렇게 밤중에 찾아

  • 천년의 기억   126. 균열이 바람을 데려오는 밤

    복도 끝에서 세자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이수의 처소 안은 더 깊은 밤으로 가라앉았다.촛불은 방금까지 현이 다녀간 방향을 향해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마치 방금 스쳐 지나간 무언가가 촛심을 건드리고 간 듯 흔들림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상궁은 바싹 마른 숨을 내쉬었다.“마마… 방금 저하의 말씀이… 너무…”“김 상궁.”이수가 조용히 불렀다.그 한마디에 상궁은 놀란 듯 입을 닫았다.“저하는 오늘, 나를 꾸짖으려 오신 것이 아니었다.”“그러하온데… 눈빛이… 너무 서늘하셨사옵니다.”“서늘한 것이 아니다.”이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두려우신 것이다.”상궁은 고개를 들었다.이수의 말은 비난도, 원망도 아니었다.그저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조용한 관찰에 가까웠다.“두렵사옵니까… 저하가?”“그래...”이수의 음성은 부드러웠다.“내가 잃어버릴까 두려우신 것이다.”“…무엇을 말씀이옵니까.”“자신이 가진 모든 것 중에, 가장 잃기 쉽고 가장 흔들리는 것을.”그 말은 상궁의 심장을 한순간 멈추게 했다.이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녀조차도 그 문장이 가진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바로 그때 멀리서 아주 낮은 북소리가 들려왔다.밤을 지키는 북이었으나, 오늘의 북소리는 ‘지킴’보다는 ‘경고’에 가까웠다.도진은 궁의 어둠 속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걷는 것만으로도 상처 부위가 묵직하게 당겼다.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무언가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예감을 등 뒤에서 계속 밀어붙이는 듯했다.그의 발걸음이 복도 끝에 이르렀을 때 근위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도진 경.”도진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저하께서 방금… 빈마마의 처소에서 나오셨습니다.”그 말은 단순한 사실이었지만, 사실이 때로는 칼날보다 더한 위협이 되기도 했다.“…혹, 빈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도진의 음성이 낮게 내려갔다.근위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저하께서… 마음을 억

  • 천년의 기억   125. 내 눈으로 보고 싶다

    “…왜 대답하지 못하십니까.”“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가 아니옵니다.”“그런 의미가 아니라?”현의 음성이 낮게 꺾였다.“빈.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빈이 안다는 듯이 들리는구려갑작스런 공기가 곤두섰다.상궁이 숨도 쉬지 못한 채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주었다.“저하는… 이 몸과 도진 경이 불경한 연을 맺었다고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그 문장은, 궁 안에서 가장 금기인 문장이었다.그 순간 등불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현의 표정이 잠시 굳어버렸다.“…빈.”그가 낮게 부른 이름이 칼끝처럼 방 안에 떨어졌다.“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요.”“그러나 저하께서 지금”“그 입 다물라 했습니다.”현의 말은 이성을 잃지 않았으나,그 이성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의 얇은 막과 같았다.그리고 그 얇은 막 뒤에서 뜨거운 감정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차오르고 있었다.현은 고개를 돌려 상궁을 바라봤다.“빈.”상궁은 즉시 엎드리며 떨었다.“예, 전하…”“오늘 밤 이 처소에 드나든 모든 기척을 지금 즉시 아뢰십시요.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상궁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저하… 숨긴 것이 없사옵니다. 도진 경 말고는 아무도 들른 이가”현의 눈이 가늘어졌다.“…도진...”이수는 상궁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조용히 하게 했다.“저하. 도진 경이 여기 온 것은 이 몸의 명이 아니라 오히려 궁의 혼란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사옵니다.”“궁의 혼란을 막겠다고?”현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무사 하나가 감히 빈의 처소를 함부로 드나들며 궁의 혼란을 논한단 말입니까.”“저하, 그 말씀이 너무 과하옵니다.”이수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그러나 그 흔들림은 두려움이 아니라,지켜야 할 선이 무너질 것을 감각하며 생겨나는 긴장이었다.“도진 경은 저하의 생명을 지켜온 사람이옵니다. 그 충성을 어떻게...”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충성이란 이름 아래 숨길 수 있는 것

  • 천년의 기억   124. 얼마나 잠시였습니까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바로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마마.”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목소리…!”이수는 숨을 아주 길게 들이쉬었다.이번에는 상궁을 흉내 낸 목소리가 아니었다.그것은“…세자저하의 목소리이다.”상궁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잡았다.“저하께서… 왜 이 시간에 이곳에…”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문을 열어라. 이 밤…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상궁은 문을 열었다.달빛과 등불 사이로 세자 현이 서 있었다.겉으로는 침착했으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의심도, 분노도, 상처도, 모두 억누른 채 매끈하게 정리된 눈빛.그것이 도리어 더 위험했다.현은 이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빈.”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그 부드러움은 폭풍의 중심 같은 침묵이었다.“궁이… 소란스럽구나.”이수는 침착하게 맞절했다.“저하… 이 소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 몸도 알고 싶사옵니다.”현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그래서 왔습니다. 확인하러.”상궁이 숨을 삼켰다.‘확인하러’그 말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연했다.“…혹 그 확인이 도진 경과 관련된 것이옵니까.”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도진이라…”그가 낮게 중얼거렸다.그 하나의 이름이 궁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가졌다.그리고 그 무게는 이미 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부식처럼 자라고 있었다.이수는 숨을 아주 길게 들이쉬었다.“저하. 도진 경은 오늘, 이 몸의 처소에서 물러갔을 뿐입니다.”현의 눈빛이, 아주 천천히 어둡게 가라앉았다.“물러갔다, 빈…? 그 말을 내가 믿어야 하는겁니까.”그 부드러운 말이 칼날이었다.이수의 손끝이 떨렸다.이 밤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궁은 지금, 매우 조용히 누군가를 겨누는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방향은 이미 이수와 도진,두 사

  • 천년의 기억   123. 밤을 삼키는 징조

    세 존재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수는 눈을 감았다.아주 잠깐, 도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멀어지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 믿사옵니다.'그 말이 밤의 촛불처럼 흔들렸다.“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지켜야 한다는 현실이… 왜 이리 서로 닿지 못하는가.”이수의 속삭임은 어둠 속에 부서져 사라졌다.그러나 그 사라짐 뒤에는 또 다른 파문이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궁 전체에 번지고 있었다.새벽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밤의 한가운데. 궁은 까마득한 적막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등불 너머의 바람은 잔잔했으나, 그 고요는 마치 무언가가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것만 같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이수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등 뒤의 병풍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는 가늘고 길었고,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 그림자는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다.상궁이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잠시라도 몸을 눕히시지요. 밤부터 아침까지 소문이 쉬지 않고 오르내렸사옵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눕는다고 편해질 마음이 아니다.”그녀의 음성은 조용했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자신을 붙들기 위한 의지처럼 단단했다.상궁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궁에서 들리는 말들 가운데, 도진 경과 마마를 함께 엮는 이야기가… 점점 선을 넘고 있사옵니다.”그 말이 끝나자, 방 안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이수의 흉곽이 아주 느리게 들썩였다.“…그럴 줄 알았다.”그녀는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오늘 밤의 그 기척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 문을 열라 한 것도,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겠지.”상궁이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 그 모든 것이… 경을 향해 가고 있사옵니다.”이수의 눈빛이 촛불 위에 머물렀다.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마음도 함께 흔들리는 듯했다.“그 사람은… 내 곁에서 멀어지겠다고 했다.”상궁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도진 경이… 직접 그렇게 말씀을?”“그래.”이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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