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점심이 가까워오는 시각.햇빛은 조금 더 강해졌지만 궁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이수는 처소 안 회랑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지만,그 가벼움 아래에 미묘한 불안이 실려 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궁녀들의 움직임은 오늘따라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그들은 대답은 평소처럼 공손하게 했지만,눈길은 이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바닥이나 손끝만 자꾸 바라보았다.이수가 걸음을 멈추면 궁녀들은 동시에 숨을 삼켰고,이수가 말을 건넬 때면 익숙한 말투에도 작은 떨림이 스며들었다.이수는 그 모든 미묘한 변화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무언가가 있다.말로 하지 않아도 궁이라는 장소는'기류'라는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의 전조를 알려주는 곳이다.이수는 조용히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다들… 무슨 일이 있느냐.”궁녀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수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묻는 것이 두렵느냐.”그 말에서 꾸짖음의 결은 없었지만 궁녀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그녀들 중 한 명이 마침내 입술을 눌러 떼었다.“…빈마마, 그게…”그녀는 말하다 멈췄다.다른 궁녀들이 눈으로 말렸다.이수의 눈은 그들의 떨리는 손끝뿐 아니라숨을 죽이듯 움직이는 기척까지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아주 조용히 다가갔다.그리고, 궁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렸다.“괜찮다. 무슨 말이든 하여라.”그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궁녀는 결국 시선을 들었다.그 눈에는 불안이 잔뜩 들어 있었다.“…소문이 하나… 돌고 있사옵니다, 마마.”이수의 가슴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소문이라니. 나에 관한 것이냐.”궁녀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이수는 호흡을 곧게 유지했다.“무슨 소문인지 말해보아라.”궁녀는 주변을 확인하듯 둘러본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세자 저하께서… 요사이… 빈마마를 유독…살피신다 하옵니다.”그 말은 조용했지만
아침 햇빛이 궁의 기와를 가볍게 스칠 무렵,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궁인들의 발자국이 회랑을 옅게 적시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이미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보이지 않는 것.잡히지 않는 것.소문.소문은 언제나 물보다 빨랐다.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소문은 사람의 마음이 낮아진 곳으로 흐른다.그리고 오늘, 그 낮아진 곳은 ‘궁녀들’의 주변이었다.“…정말이래요. 세자 저하께서 빈마마를… 유독 살피신다더군요.”그 말은 부엌 뒤편에서 슬며시 새어나왔다.그곳에는 아침 준비를 하던 궁녀 몇 명이 모여 있었다.“누가 그래요?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목이 날아가요.”한 궁녀가 입을 막았지만 다른 궁녀는 주변을 살핀 뒤 더 낮게 속삭였다.“어젯밤 내가 본 게 있어서요… 저하께서 빈마마 처소 근처를 직접 거닐었다지 뭐예요.”“저하께서… 직접요?”“예. 그 늦은 시각에요. 게다가 오래 머무르셨다는데…”낮은 음성은 점점 더 낮게, 더 은밀하게 변해갔다.그러나 은밀할수록 소문은 더 빠르게 타올랐다.궁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부부끼리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밤에 나서실 일은 없지 않나요…?”“혹시… 빈마마께 무슨 다른 감정을 품으신 건 아닐까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 자체가 멈춘 듯한 느낌이 흘렀다.궁녀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었다.그들은 알았다.이 말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란 것을.궁을 뒤흔들기 충분한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그러나 말은 이미 튀어나왔다.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조금 떨어진 곳, 우물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속삭여지고 있었다.“저하랑 빈마마께서… 예전보다 가까워지신 것 같대요.”“전하께서 직접 빈마마를 부르신다더군요.”“혹시… 중전마마께서 들으시면…”“쉿!”그들의 말은 어느새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류로 바뀌고 있었다.소문은 방향이 없었다.그러나 속도는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 속도는 위험할 만큼 빨라졌다.한편, 대비 쪽 전각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슬
깊은 밤. 궁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달은 높이 떠 있었고, 빛은 너무 밝아서 어둠조차 얇은 막처럼 비쳐 보이는 밤이었다.그 고요함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현이었다.세자의 처소 안은 촛불을 모두 끄고도 달빛만으로 충분히 밝았다.현은 침상에 몸을 뉘었지만 눈을 감아도 마음은 잠들지 않았다.누우면 누울수록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장면이 더 선명하게 피어올랐다.이수. 달빛 아래 선 모습.서늘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도진.그들은 단 한 걸음도 다가가지 않았다.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형식도 어기지 않았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흐르던 그 공기. 현은 그 공기가 잊히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많은 말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현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숨이 너무 답답했다.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아픈 게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그는 한동안 숨을 골랐다.그러나 마음이 조용해지지 않았다.현은 천천히 처소 안을 걸었다.발소리는 옅고 조용했으나 그 발걸음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혼란이 스며 있었다.그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 장면이… 이토록 마음을 울리는가.'경계? 걱정? 책임감?아니었다.그 감정은… 그 어느 단어로도 맞지 않았다.현은 이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다.그러나 부정할수록 그 감정은 더 또렷해졌다.그는 결국 창가로 걸어갔다.달빛이 방 안으로 길게 흘러 들어와바닥에 고요한 물결처럼 퍼져 있었다.현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 장면 앞에서 마음이 이토록 요동치는가.'답은 나오지 않았다.나올 리 없었다.세자가 감정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은 ‘이수’가 아니라 ‘둘 사이에 감지된 설명할 수 없는 조짐’이다.그리고, 그 조짐에 흔들리는 자신을 세자는 가장 두려워했다.그러나 그 모든 금기 속에서 이수라는 존재가 현의 마음 한가운데에 아주 조용히 발을 들이고
새벽의 궁은 하루 중 가장 맑고 가장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아직 해가 뜨지 않은 흙빛 하늘 아래에서 살짝 하얀 물안개가 땅 위를 흐르는 듯 피어오르고,대나무 숲은 서늘한 바람에 조용히 몸을 떨었다.이 시간은 도진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잡념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검과 하나가 되는 시간.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던 시간.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련장은 아직 텅 비어 있었고, 도진은 홀로 검을 들고 서 있었다.그의 손끝에 닿은 검의 감각은 늘 같아야 했다.단단하고, 차갑고, 정확한 감각.하지만 오늘, 그 감각이 이상하게 생경했다.마치 손이 아닌 마음이 먼저 흔들리는 듯한 기분.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요란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미묘한 흔들림이었다.그런데도 그 흔들림은 심장을 아주 조용히 휘감으며 검을 쥔 손까지 퍼져갔다.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칼끝이 새벽 안개 속에서 반짝였고, 몸을 낮게 숙이며 발을 굴렀다.첫 동작은 정확했다.둘째 동작도 흠잡을 데 없었다.그러나 셋째 동작에서 칼끝이 흔들렸다.아주 미세한 흔들림.하지만 도진에게는 치명적인 흔들림이었다.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그는 눈썹을 좁히며 자세를 고쳤다.다시 한 번. 검을 높이 올리고, 허공을 가르며 내리쳤다.휘익~소리는 정확했지만 동작의 맥이 끊겼다.도진의 숨이 깊게 흔들렸다.'왜 이리… 집중이 되지 않는가.'평생 칼을 잡아온 사내에게 이 정도의 흐트러짐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그는 검을 들고 선 채 가볍게 눈을 감았다.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달빛 아래에 선 이수.바람결에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카락.가볍게 떨리던 목소리.“…유난히 긴 밤이옵니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의 눈.그 눈 속에서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결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도진은 숨을 내쉬었다.그 순간 현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호위관은…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밤은 이미 궁을 완전히 삼켜버렸다.달빛은 높고 얇아서 궁의 지붕들을 희미하게 빛으로 두드릴 뿐, 회랑에는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바람조차 살금살금 스치는 듯한 고요한 밤.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의 방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세자의 처소였다.현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등불은 작은 불씨처럼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하루 내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장면.전날 밤 회랑에서 보았던 이수와 도진의 모습.정확히 무엇을 본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그 침묵 속의 떨림, 눈빛의 잔해,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맴돌음.그 모든 것이 현의 마음 한 부분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워냈다.그는 하루 종일 그 감정을 억눌렀다.'빈이 흔들린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인가.'그 질문은 현 자신에게조차 위험한 것이었다.그는 책상 위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입에 대지 못했다.술보다 더 뜨겁고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의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전하, 모실까요?”내관이었다.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작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문을 향해 말했다.“들라.”내관은 조심스럽게 들어와 예를 올렸다.형식적인 절차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공기 자체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내관은 재촉하지 않았고, 현은 서두르지 않았다.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리고, 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궁의 움직임을 어찌 보았느냐.”내관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특별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다만… 빈마마께서 밤에 잠시 회랑을 거닐었다는 정도만…”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움직임은 발각될 만큼 크지 않았지만,내관은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늘의 대화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잠시 후, 현이 낮게 말했다.“도진은… 어디에서 경계를 섰느냐.”내관은 숨을 삼키듯 대답했다.“호위관 도진
다음 날 아침의 궁은 전날보다 훨씬 조용했다.바람은 느리게 흘렀고, 새벽 안개가 아직 회랑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햇빛은 비스듬하게 기와 사이를 파고들며 궁의 윤곽을 은근히 밝혀주고 있었다.이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세자의 아침 문안을 드리러 나섰다.어제의 밤을 잊으려 애썼지만,떨림은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가벼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전날 밤 회랑에서 마주했던 도진의 모습이 어딘가에서 느리게 흔들렸다.'그의 눈빛이… 왜 아직도 떠오르는가.'그 이유를 스스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수는 더 괴로웠다.조금 흔들린 마음을 다잡으며 세자의 처소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내관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빈마마를 들이라 하셨나이다.”문이 열리고, 이수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아침 햇빛에 비친 그의 옆얼굴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침착했다.그러나 이수는 그의 침착함 아래 알 수 없는 기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이수는 예를 올렸다.“전하, 평안하셨사옵니까.”현은 고개를 들었다.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이전과 달랐다.조금 더 깊었고, 조금 더 조용했으며,조금 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빈은 어제… 밤에 잘 들었소?.”평범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평범하지 않았다.이수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 떨림을 숨기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네, 전하. 밤공기가 차가워 잠시 회랑을 거닐었사오나…이내 잘 들었사옵니다.”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진실 모두는 아니었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수의 얼굴을 향해 오랫동안 머물렀다.오늘따라 그 눈빛이 지나치게 깊어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현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빈은 어찌하여 밤중에 혼자 거닐었느냐.”그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말의 결이 분명히 달랐다.이수는 놀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 마음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을 궁녀 하나가 스쳐보았다.이수는 그 시선을 읽었고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가볍게 조여들었다.궁이란, 사람의 마음보다 빠르게 소문이 움직이는 곳이다.한 번의 시선, 한 번의 떨림 그 작은 파문이 내일이면 어떤 모양이 되어 퍼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이수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그러나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끝을 자신도 숨기기 어려웠다.같은 시간, 궁의 다른 한쪽에서는 세자 현이 홀로 마루에 앉아 있었다.그의 앞에는 이미 술 한 잔이 놓여 있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조금 전 세자가 앉았던 자리에는 아직도 작은 열기만 남아 있었다.그 열기가, 마음의 한 구석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창호 앞으로 걸어갔다.밤바람이 가볍게 창호지를 흔들었다.손끝으로 창호를 스치자, 바람이 흘러드는 틈이 살짝 떨리는 듯했다.바람이 차가운데 왜 내 마음은 이렇게 뜨겁게 뛰는 걸까.그녀는 눈을 감았다.도진이 무릎을 꿇고 있던 모습,현이 그 자리를 바라보던 눈빛,그리고 자신이 이름을 불러버린 그 순간의 긴장모든 것이 다시 또렷하게 떠올랐다.이수는 자신의 입술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