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변방의 밤은 궁보다 훨씬 깊었다.불빛은 적었고, 적은 불빛은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도진은 초소 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검을 벽에 기대어 두지 않았다.여기서는 필요 없었고, 필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했다.그는 잠들지 않았다.잠들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눈을 감으면 낯선 소리들이 들려왔다.바람이 천막을 스치는 소리, 말의 숨결,그리고, 기억 속에 없는 장면들이 갑자기 끼어들었다.붉은 천. 차가운 바닥.누군가의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감각.도진은 눈을 떴다.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이곳은 변방이었고, 그는 멀쩡히 앉아 있었다.그러나 방금 스친 장면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했다.“아직… 이르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무엇이 이르다는 것인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지금 이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확신만은 분명했다.그 시각, 궁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바빠졌다.바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대비전에서 내려온 지시는 단정했고, 그 단정함은 더 이상 미룰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소식을 상궁에게서 들었다.상궁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마다 조심이 묻어 있었다.“마마, 내일이면 내명부 쪽에서 처소 점검이 있을 듯하옵니다.”점검. 그 말은 이미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확인, 정리, 조사. 이수는 그 단어들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지웠다.“알겠다.”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묻는 순간, 자신이 아직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었기 때문이다.흔들리는 사람은 결정권을 잃는다.이수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상궁이 나가고, 이수는 홀로 남았다.방 안은 고요했고, 그 고요가 오히려 귀를 아프게 했다.그녀는 천천히 침상 옆에 앉았다.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는데, 손끝이 차가웠다.이제는, 그녀는 생각했다.되돌릴 수 있는 선택은 없다.궁은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다만, 선택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뿐이다.이수는 창을 열었다
변방으로 향하는 길은 길지 않았다.그러나 도진에게 그 길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성질의 시간으로 느껴졌다.땅은 같았고, 하늘도 같았으나 그가 딛는 매 순간마다 궁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말의 숨결이 고르지 않았다.말보다 먼저 숨이 가쁜 것은 도진 자신의 가슴이었다.그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이유를 묻는 순간,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변방의 초소는 궁보다 훨씬 소박했다.장식도, 기척도, 불필요한 말도 없었다.이곳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기보다 외부를 경계하는 데 익숙했다.도진은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나으리 오셨습니까.”초소의 책임자가 고개를 숙였다.도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을 보고하라.”보고는 간결했다.변방은 조용했고, 조용함이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있었다.그 평온함 속에서 도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궁의 긴장은 외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보고가 끝난 뒤, 도진은 홀로 초소 바깥에 섰다.밤공기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머리를 맑게 했다.그러나 맑아진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보지 않으려 했던 얼굴.부르지 않으려 했던 이름.그는 손을 움켜쥐었다.손바닥 안쪽에 아직 검을 쥔 감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그 감각은 실제가 아니라 기억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였다.‘청명.’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가 가슴 안에서 울렸다.도진은 순간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변방이었다.궁도, 검도, 모두 멀리 있었다.그 시각, 궁 안은 더욱 조용해지고 있었다.조용함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했고, 늦춰진 발걸음은 눈치를 키웠다.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밖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녀는 그 어둠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바람이 차옵니다.”“괜찮다.”이수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차가운 것이 오히
전갈은 종잇장 하나에 불과했으나, 그 무게는 사람 하나를 궁 밖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도진은 전각을 나서며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했다.발걸음은 담담했으나, 마음은 담담하지 않았다.멀어진다는 선택이 지킨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덜 비겁하게 만들었지만,조금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지켜야 할 것이 분명할수록 손에서 놓는 것도 분명해지는 법이었다.궁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뒤돌아보는 순간, 결심은 감정으로 변하고 감정은 다시 죄가 된다.그러나 궁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시선들이 따라왔다.말을 하지 않는 입술들,묻지 않는 눈동자들.그 시선의 끝에는 늘 같은 결론이 놓여 있었다.그가 떠나야 조용해진다.그 시각, 이수의 처소는 조용했으나그 조용함은 평온이 아니었다.상궁은 이수의 손짓에 따라 방 안의 창을 반쯤만 열어두었다.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은 이수의 숨결을 조금 흔들었다.“떠난다 하더냐.”이수의 물음은 낮았다.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예, 마마. 변방 순찰이라 하옵니다. 기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사옵니다.”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올 날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잠시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하늘은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잔인했다.“그가 떠난다면,”이수가 천천히 말했다.“궁은 정말 조용해질까.”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조용해진다는 말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곳에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웃지 않았다.대신, 아주 작은 숨을 내쉬었다.그 숨은 체념이 아니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호흡에 가까웠다.“상궁.”그녀가 말했다.“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말도, 소식도.”“마마”“지금
새벽은 오지 않았고, 밤은 여전히 궁을 붙잡고 있었다.그러나 공기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보이지 않는 문들이, 하나씩.도진은 동이 트기 전 군영을 나섰다.잠들지 못한 밤의 잔여가 어깨에 남아 있었고, 그 잔여는 피로가 아니라 경계였다.그는 의도적으로 빈의 처소 쪽을 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발이 움직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궁 안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았다.전갈은 간결해졌고, 시선은 노골적이었다.어제까지 ‘우연’으로 처리되던 일들이 오늘은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기록은 언제나 결론을 요구한다.도진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서 근위 하나가 다가왔다.말을 꺼내기 전, 그 근위는 주위를 훑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으리, 대비전에서… 오늘 중으로 인원이 바뀐답니다.”바뀐다는 말은, 정리된다는 뜻이었다.정리된다는 말은, 누군가 빠진다는 뜻이었다.“누가 나간다더냐.”“아직은”근위는 말을 흐렸다.“이름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빈의 처소 쪽 기록이 갑자기 두터워지고 있다는 말이…”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두터워지는 기록은 누군가의 손길이 겹겹이 덧대어졌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 손길의 방향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그만 말해라.”도진이 낮게 말했다.“오늘은 더 묻지 않겠다.”근위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도진의 마음은 오히려 더 조여들었다.묻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그 시각, 이수는 상궁과 마주 앉아 있었다.아침이 오기 전의 시간, 궁에서 가장 많은 결정이 내려지는 때였다.상궁의 손에는 얇은 장부 하나가 들려 있었다.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이수는 알았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대비마마께서 마마의 처소를 한 차례 둘러보실 수도 있다 하옵니다.”“둘러본다.”이수는 그 말을 되뇌었다.“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밤은 이미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어둠은 여전했으나, 그 어둠 속에 섞인 공기는 더 이상 이전의 것이 아니었다.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몸은 침상 곁에 앉아 있었으나 의식은 이미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방 안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오래된 연못의 수면처럼 언제든 작은 돌 하나에 산산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지금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체면인지, 가문의 명맥인지, 아니면 누구의 마음인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했다.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문밖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발소리라 하기에는 너무 가벼웠고, 바람이라 하기에는 의도가 느껴졌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그 기척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것을.잠시 후, 그 소리는 멀어졌다.마치 일부러 들리게 한 뒤 물러나는 것처럼.이수의 손이 천천히 옷자락을 움켜쥐었다.손끝이 차가웠다.그러나 마음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시험이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그 시험은 공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그리고 반응이 없을수록 다음 수는 더 노골적이 될 것이다.그 시각, 도진은 더 이상 군영에 있지 않았다.그러나 빈의 처소로 향하지도 않았다.그는 그 중간 어딘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회랑 끝에 서 있었다.그곳은 궁의 구조상 어느 쪽으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자리였다.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공기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무사의 감각은 이럴 때 가장 또렷해졌다.소리보다 먼저, 기척보다 먼저 위험의 방향을 알아채는 감각.그리고 지금, 그 감각은 한쪽으로만 쏠려 있었다.빈의 처소에 그는 발을 내딛지 않았다.명령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지금 자신이 움직이면, 그
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어둠은 궁의 지붕과 회랑을 따라 눌러앉아, 사람들의 숨결마저 낮추게 만들고 있었다.이수는 문에 얹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신호였다.누군가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이수는 한 발 물러나 방 안으로 돌아왔다.촛불을 다시 켜지 않았다.밝음은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밝히는 순간, 드러나는 것은 상대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될 테니까.잠시 후, 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척으로만 자신을 알렸다.“마마…”아주 낮은 목소리였다.“문밖의 발소리는 이미 멀어졌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멀어졌다는 말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지금은 물러났을 뿐,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상궁.”이수가 낮게 불렀다.“지금부터는 이 처소의 모든 문을 평소보다 일찍 잠그도록 하라.”“예, 마마.”“그리고,”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누가 묻거든 내가 몸이 불편하여 사람을 받지 않는다 전하거라.”상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그러나 곧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상궁이 물러나고,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이수는 그 고요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지금 나는, 두려운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를 흔들지는 못했다.이미 너무 많은 밤을 이와 비슷한 긴장 속에서 견뎌왔기 때문이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을 나와 천천히 궁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세자의 말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은 분명했다.‘빈의 처소와 거리를 두라.’그는 그 말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마음은 명령을 받지 않았다.도진은 걸음을 멈추었다.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빈의 처소 쪽 등불을 잠시 바라보았다.불빛은 여전히 약했고, 그 약함이 오히려 그의 시선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