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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문밖에서 무너지는 숨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6 20:05:40

수련장에는 아직 아침 햇빛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

도진은 대나무 검을 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몸은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걸음 하나, 휘두름 하나마다 어딘가 균형이 흐트러진 느낌.

'왜 이리 마음이 흔들리는가…'

그는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어젯밤 이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검 끝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수련장 끝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도진은 검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장 무사였다.

그의 얼굴은 안색이 변해 있었고 숨까지 거칠었다.

나쁜 소식임을 말하기도 전에 느낄 수 있는 얼굴이었다.

“도진…”

그 한마디만으로도 도진의 심장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인가.”

장 무사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안에 담긴 무게는 너무 컸다.

“빈마마께서… 대비전으로 들라 하셨다오.”

그 말은 천둥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뼛속에서 울리는 벼락과 같았다.

도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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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40. 문밖에서 무너지는 숨

    수련장에는 아직 아침 햇빛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도진은 대나무 검을 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몸은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걸음 하나, 휘두름 하나마다 어딘가 균형이 흐트러진 느낌.'왜 이리 마음이 흔들리는가…'그는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어젯밤 이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검 끝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수련장 끝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걸음이 들렸다.도진은 검을 멈추고 돌아보았다.장 무사였다.그의 얼굴은 안색이 변해 있었고 숨까지 거칠었다.나쁜 소식임을 말하기도 전에 느낄 수 있는 얼굴이었다.“도진…”그 한마디만으로도 도진의 심장이 먼저 움츠러들었다.“…무슨 일인가.”장 무사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고 가까이 다가왔다.목소리는 낮았으나 안에 담긴 무게는 너무 컸다.“빈마마께서… 대비전으로 들라 하셨다오.”그 말은 천둥처럼 크지는 않았지만뼛속에서 울리는 벼락과 같았다.도진의 손끝이 아주 조용히 떨렸다.“…대비전으로.”“그래. 게다가 중전전에서도 동시에 부름이 내려왔다 하오.”도진의 숨이 흐트러졌다.“곧바로 두 전각에서 모두? 빈마마에게?”장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하오.”그 말의 의미는 너무 선명했다.대비와 중전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한 사람을 불러들이는 일은 궁에서 거의 없었다.그것은 이미 사건이었다.도진은 검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그러나 들여온 숨이 폐끝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또다시 어딘가에서 가로막혔다.심장이 아주 얇게 찢어지는 듯한 통증.도진은 그 통증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이수…그녀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불쑥 떠오르자 가슴이 더 아려왔다.'왜? 왜 그녀가 두 전각에서 불려가는 것이 이토록 견디기 어렵나.'도진은 스스로를 탓하듯 이를 천천히 악물었다.“…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대비전에서 빈마마를 부르시는가.”장 무사는 고개를 숙였다.“빈마마께 무슨 문

  • 천년의 기억   39. 시선의 가시화

    대비전의 문이 천천히 열릴 때,그 안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마치 다른 계절처럼 차갑고 정적이었다.이수는 문턱 앞에서 한 번 숨을 고르고 천천히 발을 들였다.대비전 안은 향 냄새도, 사람 냄새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오직 정제된 침묵만이 공간의 주인이었다.대비는 하얀 비단 방석 위에 가만히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묵주를 굴리고 있었다.머리맡에 걸린 매화 자수가 그녀의 권위를 드러내듯 고요하게 빛났다.이수는 예를 갖춰 무릎을 꿇고 상반신을 깊게 숙였다.“빈, 이수… 대비마마께 인사 올리옵니다.”그 말이 끝나자 대비전의 공기는 더 깊게 가라앉았다.대비가 바로 답하지 않은 시간이 이수의 마음을 천천히 압박했다.잠시 후, 대비가 입을 열었다.“고개를 들라.”이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대비의 표정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그저 모든 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아주 깊은 눈이었다.“빈.”그 한마디가 가벼운 호칭이 아니라 심문을 여는 첫 문장처럼 들렸다.“너를 부른 이유를 아느냐.”이수는 심장이 한 번 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마마의 명을 받고 서둘러 들었을 뿐이옵니다. 사유는… 알지 못하옵니다.”대비는 천천히 묵주를 굴렸다.“그러하겠지. 궁은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이니.”그녀는 잠시 이수를 바라보다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어젯밤, 너의 처소 앞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보아라.”이수는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벌써 그 이야기까지 도달했구나.'그러나 표정 하나 흔들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이수는 침착하게 말했다.“어젯밤… 달이 밝아 잠시 회랑을 거닐었사옵니다. 그뿐이옵니다.”대비는 눈썹을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그뿐이라 하였다.”이수는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대비는 가만히 말했다.“그러면… 그 자리에 세자 저하가 계셨다는 것도 모르느냐.”이수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세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몸으로, 기척으로, 공기로

  • 천년의 기억   38. 두 전각에서 내려온 부름

    오전 해가 머물던 마루 끝으로 갑작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처소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궁녀 두 명이 들어왔다.둘 다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오늘의 표정은 낯설었다.고개를 깊이 숙인 채, 그들은 동시에 말했다.“빈마마… 대비마마께서…즉시 들라 하옵니다.”이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잔 위 매화 잎 그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대비마마께서… 나를?”궁녀들은 고개만 숙인 채 대답했다.“예, 마마. 지체 없이 들라 하옵니다.”이수는 천천히 일어났다.그러나 발끝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대비전에서 부름을 받는 일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즉시’라는 말. 그리고 두 궁녀의 굳은 표정.그 모든 것이 단순한 예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궁녀가 외투를 걸어드리려 다가오는 순간,또 다른 발걸음이 급하게 처소를 향해 다가왔다.문이 조심스레 열렸다.이번에는 중전전에서 온 궁녀였다.그녀는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빈마마… 중전마마께서도… 즉시 들라 하옵니다.”처소 안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이수를 모시던 궁녀 둘이 돌아보았고, 중전전 궁녀도 순간 멈칫했다.두 전각에서 동시에 내려온 부름. 이수는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대비전과… 중전전에서?”궁녀들은 누구도 먼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마침내 중전전 궁녀가 조심스레 말했다.“부름이 겹쳤사옵니다, 마마… 어느 전각을 먼저 들라 해야 하는지… 저희도 감히 판단키 어렵사옵니다.”‘감히’라는 말이 이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궁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빈마마, 아무래도… 대비마마의 부름을 먼저 받드시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그러자 중전전 궁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허나… 중전마마께서도 지체 없이 들라 명하셨사옵니다. 두 전각의 처분을 동시에 어길 수는 없어…저 또한… 어찌해야 할지…”그들은 두려움에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 순간, 궁녀들은 단순

  • 천년의 기억   37. 지체 없는 개입

    한낮의 해는 밝았지만 궁의 위쪽 전각들은 햇빛보다 더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대비전 앞뜰의 매화는 조용히 피어 있었으나,그 고요는 어딘가 불길한 예고처럼 느껴졌다.평소라면 상궁들과 궁녀들은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전각을 살뜰히 챙겼을 터였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군거림이 없었다.걸음은 더 조심스러웠고, 목소리는 더 작은 속삭임으로 바뀌었고,아무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한 공기였다.그러다 마침내 그 공기의 중심이 대비전으로 흘러들었다.대비의 측근 상궁이 문 앞에서 발끝을 끌며 조심스레 들어왔다.그녀는 대비가 손에 들고 있는 불경을 방해하지 않으려 허리를 깊게 굽힌 채 한참을 기다렸다.그러나 대비는 이미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무슨 일인가.”상궁은 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더 숙였다.“마마, 전각에… 소문이 하나 퍼지고 있습니다.”대비의 손이 불경을 덮는 동작은 조급하지 않았으나 침착함 속에 묵직한 무게를 띠고 있었다.“…말하라.”상궁은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말했다.“세자 저하의… 최근 행보에 대해 궁인들이 우려를 품는 기류가 있어옵니다.”대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가늘어졌다.“우려라.”“예, 마마. 부부 사이의 정은 당연한 것이나 요사이 저하께서 빈마마를 대하시는 모습이 평소 전하셨던 예법과 다르다 하여… 전각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사옵니다.”대비는 손끝으로 상을 한 번 두드렸다.그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전각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할 만큼 명확했다.“다르다 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상궁은 숨을 한 번 더 고르고 말을 이었다.“어젯밤… 저하께서 정해진 시각도 아니었음에도 홀로 빈마마의 처소 근처를 한참 머무르셨다 하옵니다.”대비전 안의 공기가 슬며시 움직였다.궁녀들이 바늘을 들던 손을 멈추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상궁은 말을 이어야 했으나 그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떨렸다.“빈마마께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은 아니오나…

  • 천년의 기억   36. 검은 아직 무겁지 않았다.

    아침 수련이 막 끝나갈 무렵, 도진은 검집을 천천히 닫고 있었다.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흐르고, 잘린 잎사귀들이 흩날리며 날카로운 공기 속에서 맴돌았다.아침 햇살은 맑았지만 궁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탁했다.그는 처음엔 그것이 단지 자신의 기분 탓이라 생각했다.하지만 곧, 수련장 주변을 스치며 지나가는 궁인들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감지했다.그들은 도진에게 인사할 때 머리를 너무 깊이 숙였다.그리고 너무 빨리 자리를 떠났다.피하는 것처럼. 숨기려는 것처럼. 도진은 눈썹을 미세하게 좁혔다.'…무슨 기류가 달라진 것인가.'그 순간, 뒤편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도진은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누가 오는지 발걸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무사 우두머리인 장 무사였다.그는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마른 얼굴로 한참을 말을 망설였다.“도진.”도진은 묵묵히 검을 닦던 손을 멈췄다.“무엇이오.”장 무사는 주변을 두 번이나 돌아보았다.그리고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문이 돌고 있다.”도진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것이오.”장 무사는 한 번 더 주저했다.그 주저함이 더욱 불길했다.“…세자 저하와… 빈마마 사이의 일입니다.”그 말은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아침 공기 속에서 돌처럼 떨어졌다.도진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 검집 위 천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저하와… 빈마마 사이의 일이라니.”장 무사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어젯밤… 저하께서 빈마마의 처소 근처를 한참 거닐었다고… 궁인들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커졌다 하옵니다.”도진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했다.마치 누군가 뼈 속 깊은 곳을 천천히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것이 어찌 소문이 되는가.”그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 담긴 불안은 숨길 수 없었다.장 무사는 고개를 떨구었다.“궁이란 곳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사옵니다.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아 이야기를 만들지요.”

  • 천년의 기억   35. 명명할 수 없는 파동

    점심이 가까워오는 시각.햇빛은 조금 더 강해졌지만 궁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이수는 처소 안 회랑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지만,그 가벼움 아래에 미묘한 불안이 실려 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궁녀들의 움직임은 오늘따라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그들은 대답은 평소처럼 공손하게 했지만,눈길은 이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바닥이나 손끝만 자꾸 바라보았다.이수가 걸음을 멈추면 궁녀들은 동시에 숨을 삼켰고,이수가 말을 건넬 때면 익숙한 말투에도 작은 떨림이 스며들었다.이수는 그 모든 미묘한 변화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무언가가 있다.말로 하지 않아도 궁이라는 장소는'기류'라는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의 전조를 알려주는 곳이다.이수는 조용히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다들… 무슨 일이 있느냐.”궁녀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수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묻는 것이 두렵느냐.”그 말에서 꾸짖음의 결은 없었지만 궁녀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그녀들 중 한 명이 마침내 입술을 눌러 떼었다.“…빈마마, 그게…”그녀는 말하다 멈췄다.다른 궁녀들이 눈으로 말렸다.이수의 눈은 그들의 떨리는 손끝뿐 아니라숨을 죽이듯 움직이는 기척까지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아주 조용히 다가갔다.그리고, 궁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렸다.“괜찮다. 무슨 말이든 하여라.”그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궁녀는 결국 시선을 들었다.그 눈에는 불안이 잔뜩 들어 있었다.“…소문이 하나… 돌고 있사옵니다, 마마.”이수의 가슴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소문이라니. 나에 관한 것이냐.”궁녀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이수는 호흡을 곧게 유지했다.“무슨 소문인지 말해보아라.”궁녀는 주변을 확인하듯 둘러본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세자 저하께서… 요사이… 빈마마를 유독…살피신다 하옵니다.”그 말은 조용했지만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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