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궁의 낮은 그날따라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햇빛은 마당의 돌 위에 머물렀지만,그 빛이 닿는 곳마다 따뜻함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집요함이 먼저 느껴졌다.이수는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가마의 휘장이 살짝 들릴 때마다 궁의 얼굴들이 스쳤다.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고,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더 고립시켰다.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아무도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그 침묵은 이미 판결이 내려진 뒤의 침묵과 닮아 있었다.대비전의 문이 열렸을 때, 공기는 한층 더 단단해졌다.향 냄새가 짙었고, 그 향 아래에는 오래된 분노와 눌러두었던 의심이 섞여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고개를 깊이 숙였으나 등은 굽히지 않았다.“빈이옵니다.”대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숨소리만이 미세하게 겹쳐졌다.“고개를 들라.”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그 눈빛을 보는 순간, 대비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요즘 궁이 시끄럽다.”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이미 사실로 굳어진 말을 다시 확인하는 어조였다.“시끄럽다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빈은 알고 있느냐.”이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짐작은 하고 있사옵니다.”“짐작?” 대비가 웃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짐작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더 이상 숨을 허락하지 않는 밀도로 조여들었다.“빈의 처소에 무사가 드나들었다는 말이 있다.”이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이미 올 말을 충분히 기다려왔기 때문이다.“그 무사는 저하의 호위무사이옵니다.”“그래서 더 문제다.”대비의 음성이 낮아졌다.“빈은 그 경계가 어디까지 허락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이냐.”이수는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이 질문은 답을 듣기 위해 던진 것이 아니었다.이미 죄목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확인이었다.“저는 경계를 넘은 적이 없사옵니다.”“네
변방의 아침은 짧았다.해는 떠올랐으나 온기가 오래 머물지 못했고, 차가운 공기는 낮에도 풀리지 않았다.도진은 말 위에 올라 있었다.이곳에 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히 헤아리지 않았다.날짜를 세는 순간, 그가 떠나온 곳의 얼굴들이 너무 선명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말굽이 흙을 밟을 때마다 몸 안 어딘가가 함께 울렸다.그 울림은 통증도, 기쁨도 아니었다.마치 오래전에 약속된 무언가가 천천히 시간을 맞추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그는 이유 없이 한 번 더 궁의 방향을 돌아보았다.보일 리 없는 곳이었다.그러나 시선은 그곳에 머물렀다.그 시각, 궁에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속도를 숨기지 않는 움직임.이미 결정된 일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태도였다.이수는 아침이 밝기도 전에 상궁의 손길로 단장을 마쳤다.거울 속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다만 눈동자만이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마마, 오늘은…”상궁이 말을 잇지 못했다.이수는 그 시선을 막듯 고개를 들었다.“괜찮다. 오늘은 어떤 날인지 이미 알고 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 차분함은 스스로를 다잡는 방식이었다.불안에 흔들리는 사람은 궁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그 사실을 그녀는 너무 일찍 배웠다.밖에서는 내명부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그들의 표정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질문하지 않는 얼굴.듣고 싶은 답이 정해진 얼굴.이수는 문득 생각했다.도진 경이 여기 있었다면, 이 장면은 조금 달랐을까.그러나 그 생각은 곧 스스로 지웠다.그가 곁에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이 더 빨리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그의 존재는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다.현은 그날 아침, 침전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나오지 않았다는 말 역시 정확하지 않았다.그는 이미 궁 전체를 자신의 시선 안에 두고 있었다.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았고,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았다.그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빈은
변방의 밤은 궁보다 훨씬 깊었다.불빛은 적었고, 적은 불빛은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도진은 초소 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검을 벽에 기대어 두지 않았다.여기서는 필요 없었고, 필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했다.그는 잠들지 않았다.잠들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눈을 감으면 낯선 소리들이 들려왔다.바람이 천막을 스치는 소리, 말의 숨결,그리고, 기억 속에 없는 장면들이 갑자기 끼어들었다.붉은 천. 차가운 바닥.누군가의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감각.도진은 눈을 떴다.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이곳은 변방이었고, 그는 멀쩡히 앉아 있었다.그러나 방금 스친 장면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했다.“아직… 이르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무엇이 이르다는 것인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지금 이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확신만은 분명했다.그 시각, 궁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바빠졌다.바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대비전에서 내려온 지시는 단정했고, 그 단정함은 더 이상 미룰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소식을 상궁에게서 들었다.상궁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마다 조심이 묻어 있었다.“마마, 내일이면 내명부 쪽에서 처소 점검이 있을 듯하옵니다.”점검. 그 말은 이미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확인, 정리, 조사. 이수는 그 단어들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지웠다.“알겠다.”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묻는 순간, 자신이 아직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었기 때문이다.흔들리는 사람은 결정권을 잃는다.이수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상궁이 나가고, 이수는 홀로 남았다.방 안은 고요했고, 그 고요가 오히려 귀를 아프게 했다.그녀는 천천히 침상 옆에 앉았다.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는데, 손끝이 차가웠다.이제는, 그녀는 생각했다.되돌릴 수 있는 선택은 없다.궁은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다만, 선택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뿐이다.이수는 창을 열었다
변방으로 향하는 길은 길지 않았다.그러나 도진에게 그 길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성질의 시간으로 느껴졌다.땅은 같았고, 하늘도 같았으나 그가 딛는 매 순간마다 궁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말의 숨결이 고르지 않았다.말보다 먼저 숨이 가쁜 것은 도진 자신의 가슴이었다.그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이유를 묻는 순간,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변방의 초소는 궁보다 훨씬 소박했다.장식도, 기척도, 불필요한 말도 없었다.이곳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기보다 외부를 경계하는 데 익숙했다.도진은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나으리 오셨습니까.”초소의 책임자가 고개를 숙였다.도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을 보고하라.”보고는 간결했다.변방은 조용했고, 조용함이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있었다.그 평온함 속에서 도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궁의 긴장은 외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보고가 끝난 뒤, 도진은 홀로 초소 바깥에 섰다.밤공기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머리를 맑게 했다.그러나 맑아진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보지 않으려 했던 얼굴.부르지 않으려 했던 이름.그는 손을 움켜쥐었다.손바닥 안쪽에 아직 검을 쥔 감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그 감각은 실제가 아니라 기억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였다.‘청명.’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가 가슴 안에서 울렸다.도진은 순간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변방이었다.궁도, 검도, 모두 멀리 있었다.그 시각, 궁 안은 더욱 조용해지고 있었다.조용함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했고, 늦춰진 발걸음은 눈치를 키웠다.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밖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녀는 그 어둠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바람이 차옵니다.”“괜찮다.”이수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차가운 것이 오히
전갈은 종잇장 하나에 불과했으나, 그 무게는 사람 하나를 궁 밖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도진은 전각을 나서며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했다.발걸음은 담담했으나, 마음은 담담하지 않았다.멀어진다는 선택이 지킨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덜 비겁하게 만들었지만,조금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지켜야 할 것이 분명할수록 손에서 놓는 것도 분명해지는 법이었다.궁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뒤돌아보는 순간, 결심은 감정으로 변하고 감정은 다시 죄가 된다.그러나 궁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시선들이 따라왔다.말을 하지 않는 입술들,묻지 않는 눈동자들.그 시선의 끝에는 늘 같은 결론이 놓여 있었다.그가 떠나야 조용해진다.그 시각, 이수의 처소는 조용했으나그 조용함은 평온이 아니었다.상궁은 이수의 손짓에 따라 방 안의 창을 반쯤만 열어두었다.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은 이수의 숨결을 조금 흔들었다.“떠난다 하더냐.”이수의 물음은 낮았다.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예, 마마. 변방 순찰이라 하옵니다. 기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사옵니다.”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올 날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잠시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하늘은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잔인했다.“그가 떠난다면,”이수가 천천히 말했다.“궁은 정말 조용해질까.”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조용해진다는 말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곳에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웃지 않았다.대신, 아주 작은 숨을 내쉬었다.그 숨은 체념이 아니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호흡에 가까웠다.“상궁.”그녀가 말했다.“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말도, 소식도.”“마마”“지금
새벽은 오지 않았고, 밤은 여전히 궁을 붙잡고 있었다.그러나 공기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보이지 않는 문들이, 하나씩.도진은 동이 트기 전 군영을 나섰다.잠들지 못한 밤의 잔여가 어깨에 남아 있었고, 그 잔여는 피로가 아니라 경계였다.그는 의도적으로 빈의 처소 쪽을 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발이 움직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궁 안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았다.전갈은 간결해졌고, 시선은 노골적이었다.어제까지 ‘우연’으로 처리되던 일들이 오늘은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기록은 언제나 결론을 요구한다.도진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서 근위 하나가 다가왔다.말을 꺼내기 전, 그 근위는 주위를 훑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으리, 대비전에서… 오늘 중으로 인원이 바뀐답니다.”바뀐다는 말은, 정리된다는 뜻이었다.정리된다는 말은, 누군가 빠진다는 뜻이었다.“누가 나간다더냐.”“아직은”근위는 말을 흐렸다.“이름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빈의 처소 쪽 기록이 갑자기 두터워지고 있다는 말이…”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두터워지는 기록은 누군가의 손길이 겹겹이 덧대어졌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 손길의 방향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그만 말해라.”도진이 낮게 말했다.“오늘은 더 묻지 않겠다.”근위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도진의 마음은 오히려 더 조여들었다.묻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그 시각, 이수는 상궁과 마주 앉아 있었다.아침이 오기 전의 시간, 궁에서 가장 많은 결정이 내려지는 때였다.상궁의 손에는 얇은 장부 하나가 들려 있었다.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이수는 알았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대비마마께서 마마의 처소를 한 차례 둘러보실 수도 있다 하옵니다.”“둘러본다.”이수는 그 말을 되뇌었다.“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