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그는 그 말을 끝으로 기자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아….""……."취재진 사이에서 짧은 탄식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어떤 기자는 그 우아하고도 처절한 태도에 압도되어 들고 있던 수첩을 내리기까지 했다. 아내의 추악한 불륜 스캔들 앞에서도, 남편이자 작가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강도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성역처럼 보였다.도진은 쏟아지는 플래시를 뒤로하고,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 로비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멍청한 것들. 저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다니.'도진의 입안에서 차가운 조소가 맴돌았다.그는 방금 자신이 던진 말이 내일 아침 포털 사이트 메인에 어떤 헤드라인으로 걸릴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강도진, 아내 스캔들에도 잃지 않은 품위… "개인의 아픔은 나의 십자가"]대중은 이런 비극적인 서사에 열광하는 법이다.출간 기념 행사 시작 삼십 분 전, 도진은 대기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맸다. 홍보팀 직원이 예상 질문 목록을 건넸다.신작의 집필 계기. 전작과 달라진 문체. 작품 속 ‘여자’의 모델. 아내의 최근 부재.마지막 항목에 도진의 손이 멈췄다."이 질문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답변은 준비하신 대로 가시죠. 사생활과 작품은 별개라고."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기념행사가 열리는 다이너스티 홀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황금빛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원형 테이블에는 대한민국 문학계의 거장들, 평론가들, 그리고 대형 출판사 관계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아, 강 작가님! 오셨습니까!"김 편집장이
"넥타이는… 블랙이 낫겠어."드레스룸의 거대한 전신 거울 앞.도진은 수십 개의 최고급 실크 넥타이 중, 가장 광택이 없고 차분한 무광 블랙 타이를 골라잡았다.평소 공식 행사라면 화려한 샴페인 골드나 딥 버건디 컬러를 매치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그가 연기해야 할 배역은 '최고의 영예를 안았음에도, 아내의 스캔들로 인해 깊은 슬픔과 고뇌에 빠진 비운의 천재 작가'였다.사각, 사각.빳빳한 흰 셔츠 깃 사이로 블랙 타이를 조여 매는 도진의 손길은 정교하고 우아했다.거울 속에 비친 사내는 완벽했다.흠잡을 데 없이 빗어 넘긴 머리,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이목구비, 은은하게 풍기는 톰 포드의 우디 향수까지.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가, 이내 슬픔에 잠긴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 표정 연습을 반복했다."조금 더… 수척해 보여야 하나."도진은 혀를 차며 서랍에서 아내가 쓰던 창백한 톤의 파우더를 꺼냈다. 눈 밑에 얇게 펴 바르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묘한 다크서클이 만들어졌다.지잉, 지잉-!그때, 화장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화면에 뜬 이름은 '문학정신 김 편집장'이었다."네, 편집장님. 강도진입니다."도진은 목소리를 한 톤 낮추고, 짐짓 피곤한 듯한 기색을 섞어 전화를 받았다.[작, 작가님! 아유,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시네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겁니까?]"네… 뭐.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수화기 너머로 김 편집장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게… 저도 방금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요. 백서아 관장님 말입니다&he
도진은 두 팔을 벌려 텅 빈 거실을 향해 천천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하하… 하하하하하!!"기쁨과 환희에 찬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그는 부서진 샹들리에의 조각을 밟고 서서, 마치 무대 위에서 기립 박수를 받는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허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나에게 완벽한 영감을 준 나의 더러운 창녀에게 바칩니다."아무도 없는 집.대답 없는 허공을 향해 던진 조롱 섞인 공식 연설이었다.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고 미친 듯한 웃음을 서서히 멈추었을 때.도진의 귓가에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아내가 떠난 집은 너무나도 컸다.평소라면 서아가 또각또각 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소리, 그녀가 클래식을 틀어놓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소리, 가끔 신경질적으로 가정부를 부르는 소리가 집안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이 거대한 저택에는 오직 강도진 한 사람의 숨소리만이 존재했다.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마저 차단된 완벽한 방음의 세계.그것은 마치 진공 상태의 무덤 같았다."…뭐야. 갑자기 공기가 왜 이렇게 무거워."도진은 실크 가운의 깃을 여미며 미간을 찌푸렸다.자신은 모든 것을 가졌다.적을 완벽하게 파멸시켰고, 권력과 명예의 정점에 섰다.그런데 왜, 명치끝에서부터 알 수 없는 싸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도진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착각이야. 나는 승리자다. 저 쓰레기 같은 여자를 치워버렸으니, 이제 내 인생은 완벽하게 무균 상태의 평온을 되찾은 거야.'그는 애써
[호텔과 방송 장비는 이미 출간 기자 간담회 때 계약해 둔 곳을 그대로 쓰면 됩니다. 지금 같은 화제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게 대표님 판단입니다.]김 편집장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런데 작가님. 축하드릴 일과 별개로, 혹시 인터넷 여론 보셨습니까?]"여론이요? 아니요. 저는 작업이 끝나면 한동안 활자를 멀리하는 편이라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소설이 워낙 생생하다 보니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설 속 갤러리 관장 희수가 백서아 관장님을 모티브로 한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불륜 상대인 젊은 화가가 최근 은퇴한 권이안 작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고요.]도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출판사가 허구라는 공식 입장을 내 불길을 끈다면, 서아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던진 폭탄의 위력이 줄어들 터였다."편집장님. 입장문은 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네? 하지만 관장님 명예도 있고…….]"소문은 억지로 막을수록 더 크게 번집니다. 독자들이 제 소설에서 현실을 겹쳐 본다는 건 그만큼 세계가 생생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제 아내는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루머에 흔들릴 여자가 아닙니다. 무대응으로 일관해 주십시오."[아아…… 역시 강 작가님이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기념행사 준비 내용은 아침에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작가님!]뚝.통화가 끝났다."크하하하…!"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져버린 도진은 고개를 젖히고 폭소를 터뜨렸다.웃음소리가 텅 빈 거실 벽을 타고 찌렁찌렁하게 울렸다."굳건한 믿음? 하하하! 미치겠군, 정말."도진은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배를 부여잡았다.
쏴아아아-.거침없이 쏟아지는 폭우 소리가 대저택의 두꺼운 방음 유리를 뚫고 희미하게 스며들었다."후우."강도진은 마스터 욕실의 거대한 욕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른 하얀 수증기가 그의 탄탄한 상반신을 감쌌다. 최고급 히노끼 나무의 은은한 향이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동작으로 수건을 집어 들어 젖은 머리칼을 닦아냈다.방금 전까지 이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지르고,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결국 미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도망쳐 나간 그 모든 소동은 마치 다른 세계의 일인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정말이지… 수고했어, 서아 여보."도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극히 부드러웠으나, 눈동자에는 파충류 같은 서늘한 이채가 번뜩이고 있었다.욕실을 나온 그는 짙은 네이비색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향했다."……."안방 문을 여는 순간, 도진의 발걸음이 멈췄다.침실은 처참했다.수천만 원짜리 페르시안 카펫 위에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고, 아내가 아끼던 화장대 위는 온통 난장판이었다.그리고 도진의 시선이 화장대 거울에 가닿았다.[희수]시뻘건 립스틱으로 짓이기듯 써 내려간 두 글자.글씨의 끝자락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액체와 섞여 섬뜩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도진은 천천히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하하."거울에 적힌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던 도진의 입에서, 결국 참지 못한 낭랑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기대
'포르쉐.'문득 자신이 타고 있는 차의 엠블럼이 눈에 들어왔다.강도진의 돈으로 산 포르쉐. 이 차에 달려 있는 GPS가, 강도진의 서재 모니터에 자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이 차도 안 돼… 버려야 해…."서아는 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와 톨게이트를 지났다.비가 쏟아지는 경기도 외곽의 어느 한적한 국도변.서아는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 포르쉐를 거칠게 세웠다.시동도 끄지 않은 채, 그녀는 크로스백 하나만 달랑 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폭우가 서아의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검은색 트레이닝복이 순식간에 젖어 살에 들러붙었고, 깊게 눌러쓴 캡모자 창 위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냥 강도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이 들리지 않는 아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고 싶었다.얼마나 걸었을까.칠흑 같은 국도를 따라 한 시간 넘게 빗속을 헤매던 서아의 눈앞에, 녹슨 간판 하나가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청수 여관 - 숙박 30,000원]간판의 불빛은 반쯤 나가 '청 여 '라고만 기괴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 주변에는 버려진 폐타이어와 쓰레기봉투들이 뒹굴고 있었다.평소의 백서아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끔찍한 빈민가 여관.하지만 지금의 서아에게는 그곳이 유일한 도피처였다.서아는 물귀신처럼 젖은 몸을 이끌고 여관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끼기긱-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지독한 곰팡내와 담배 찌든 내가 훅 끼쳐왔다.카운터에는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