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066화 익숙해진 배덕감(3)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6 11:01:55
두 시간 후.

작업실 안에는 짙은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서아의 실크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스타킹이 물감 묻은 헝겊들과 뒤엉켜 널브러져 있었다.

서아는 이안의 좁은 침대에 누워 홑이불로 몸을 가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나른했다.

창틀에 걸터앉은 이안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회색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서아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을 느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늘 그렇듯 짙은 허무함과 공포였다.

'내가 또 무슨 짓을.'

습관처럼 밀려오는 죄책감.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죄책감의 농도가 예전만큼 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이안과 선을 넘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며 며칠 밤을 잠을 못 이뤘다. 도진의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몸에 남아 있는 이안의 흔적을 씻어내고, 다시 단정한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

그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218화 완벽한 폐허, 그리고 축포(1)

    쏴아아아-.거침없이 쏟아지는 폭우 소리가 대저택의 두꺼운 방음 유리를 뚫고 희미하게 스며들었다."후우."강도진은 마스터 욕실의 거대한 욕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른 하얀 수증기가 그의 탄탄한 상반신을 감쌌다. 최고급 히노끼 나무의 은은한 향이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동작으로 수건을 집어 들어 젖은 머리칼을 닦아냈다.방금 전까지 이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지르고,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결국 미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도망쳐 나간 그 모든 소동은 마치 다른 세계의 일인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정말이지… 수고했어, 서아 여보."도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극히 부드러웠으나, 눈동자에는 파충류 같은 서늘한 이채가 번뜩이고 있었다.욕실을 나온 그는 짙은 네이비색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향했다."……."안방 문을 여는 순간, 도진의 발걸음이 멈췄다.침실은 처참했다.수천만 원짜리 페르시안 카펫 위에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고, 아내가 아끼던 화장대 위는 온통 난장판이었다.그리고 도진의 시선이 화장대 거울에 가닿았다.[희수]시뻘건 립스틱으로 짓이기듯 써 내려간 두 글자.글씨의 끝자락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액체와 섞여 섬뜩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도진은 천천히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하하."거울에 적힌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던 도진의 입에서, 결국 참지 못한 낭랑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기대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217화 도망친 쥐새끼의 무덤(3)

    '포르쉐.'문득 자신이 타고 있는 차의 엠블럼이 눈에 들어왔다.강도진의 돈으로 산 포르쉐. 이 차에 달려 있는 GPS가, 강도진의 서재 모니터에 자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이 차도 안 돼… 버려야 해…."서아는 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와 톨게이트를 지났다.비가 쏟아지는 경기도 외곽의 어느 한적한 국도변.서아는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 포르쉐를 거칠게 세웠다.시동도 끄지 않은 채, 그녀는 크로스백 하나만 달랑 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폭우가 서아의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검은색 트레이닝복이 순식간에 젖어 살에 들러붙었고, 깊게 눌러쓴 캡모자 창 위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냥 강도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이 들리지 않는 아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고 싶었다.얼마나 걸었을까.칠흑 같은 국도를 따라 한 시간 넘게 빗속을 헤매던 서아의 눈앞에, 녹슨 간판 하나가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청수 여관 - 숙박 30,000원]간판의 불빛은 반쯤 나가 '청 여 '라고만 기괴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 주변에는 버려진 폐타이어와 쓰레기봉투들이 뒹굴고 있었다.평소의 백서아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끔찍한 빈민가 여관.하지만 지금의 서아에게는 그곳이 유일한 도피처였다.서아는 물귀신처럼 젖은 몸을 이끌고 여관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끼기긱-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지독한 곰팡내와 담배 찌든 내가 훅 끼쳐왔다.카운터에는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216화 도망친 쥐새끼의 무덤(2)

    그때였다.지잉- 지잉-!조수석에 던져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발신자는 갤러리의 최 부관장이었다.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여, 여보세요."[관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돼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 부관장의 목소리는 평소의 깍듯함은 온데간데없고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무슨 일이야. 한밤중에."서아는 애써 침착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아직, 아직은 모를 수도 있다. 그저 갤러리에 급한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다음 순간, 서아의 헛된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무슨 일이냐고요?! 관장님 지금 인터넷 안 보셨어요?! 난리가 났다고요!!]"인터넷…? 뭐, 뭔데."[강 작가님 신작이요! 거기 나오는 여자 주인공 '희수' 직업이 갤러리 관장인 건 아시죠? 근데 그 여자가 불륜을 저지르는 묘사들이… 우리 갤러리 상황이랑 너무 똑같잖아요! 심지어 소설 속 전시회 일정, 작품명, 거래처 이름까지 전부 다 관장님 스케줄이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고요!]"……."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지금 미술계 커뮤니티랑 SNS 다 뒤집어졌어요. 강 작가님이 자기 아내 불륜 사실을 소설로 까발린 거 아니냐고. 심지어 소설 속에 나오는 '류'라는 젊은 화가… 그거 지난번에 손 다쳐서 은퇴한 그 '이안' 작가 아니냐고 벌써 실명까지 다 털렸다고요!!]최 부관장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차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관장님! 이거 사실입니까?! 관장님이 정말 그 어린 작가랑… 하아, 미치겠네 진짜. 지금 주요 VIP 클라이언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215화 도망친 쥐새끼의 무덤(1)

    "하하하하! 하하하하하!"거울 앞에서 미친 듯이 웃어대던 서아의 웃음소리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끊겼다.허공을 찢던 기괴한 폭소가 멈추자, 텅 빈 안방에는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만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서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온몸은 피와 진물로 엉망이었고, 입가에는 시뻘건 립스틱이 광대뼈까지 번져 있었다. 그 위로 붉은 립스틱으로 갈겨쓴 '희수'라는 두 글자가 흉측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이대로 있으면.'서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이 집에 계속 있으면, 난 정말 희수가 돼버릴 거야.'소설 속 희수의 결말은 '완벽한 위선자로 다시 태어나 남편의 옆에 기생하는 것'이었다. 껍데기뿐인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 강도진이라는 괴물의 쇼윈도 마네킹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싫어…."서아는 고개를 저었다."그 새끼 무대 위에서 평생 광대 노릇 하라고? 그 새끼가 던져주는 대본대로 살라고? 미쳤어. 내가 왜."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완전히 타버린 줄 알았던 서아의 이성을 간신히 깨웠다.도망쳐야 한다.강도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의 활자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서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바닥에 박혀 있던 미세한 유리 조각들이 살을 파고들며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드레스룸으로 달려간 서아는 미친 듯이 캐리어를 끌어내렸다.우당탕!수백만 원짜리 에르메스, 샤넬 백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서아는 반사적으로 그 가방들을 주워 담으려다 멈칫했다."이거 다… 강도진 돈으로 산 거잖아."가방뿐만이 아니었다.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214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3)

    "아니야! 안 났어! 냄새 안 났다고! 나는 쾌락에 젖은 게 아니야!!"벅벅, 벅벅![희수는 류의 밑에서 자신의 남편을 떠올리며 가학적인 쾌감을 느꼈다.]"닥쳐! 닥치라고!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마! 내 생각은 내 거야! 내 감정은 내 거라고!!"서아는 비명을 지르며 샤워 타월을 바닥에 내던졌다.그리고 양손의 손톱을 세워 자신의 팔목을 득득 긁기 시작했다. 피가 맺히고 생채기가 깊게 파였다.아무리 씻어내도, 아무리 피를 흘려도 더러움이 씻겨나가지 않았다.자신의 영혼부터 육체까지 뼛속 깊은 곳까지 강도진의 활자가 박혀 있었다. 자신은 백서아가 아니라, 강도진이 잉크로 빚어낸 괴물, '희수' 그 자체였다."하아… 하아…."서아는 핏물이 섞인 물을 뒤집어쓴 채 욕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젖은 몸의 떨림이 좀처럼 멎지 않았다.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자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삭제되어 버렸다는 그 끔찍한 공허함 때문이었다."나는… 누구지…?"서아는 멍한 눈으로 욕실 벽면의 타일을 바라보았다.자신은 갤러리 관장 백서아였다.우아하고, 교양 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완벽한 예술가의 아내.하지만 뒤로는 젊은 남자의 몸을 탐하며 위선을 떠는 타락한 여자.그 모든 정체성이 한순간에 박살 났다.관장 백서아도, 불륜녀 백서아도 없었다.오직 천재 작가 강도진의 베스트셀러 소설 속 여자 주인공 '희수'의 껍데기만이 이 욕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아…."서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이끌고 욕실을 나와 2층 침실로 향했다.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213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2)

    "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나만 사랑한다고. 그 새끼는 껍데기뿐이라고."이안이 타버린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오, 오지 마… 이안아….""왜 나를 속였어요? 왜 나를 스토커로 만들었어요? 결국 관장님도 그 새끼랑 똑같은 괴물이잖아요.""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서아는 바닥을 기며 뒷걸음질을 쳤다."도진이가… 강도진이 시킨 거야! 강도진이 널 질투하게 만들려고 조작한 거라고! 불도 그 새끼가 지른 거야! 난 몰랐어… 난 정말 몰랐어!""몰랐으면 죄가 없나요?"이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관장님은 불타는 내 작업실 뉴스를 보면서 웃었잖아요. 안도했잖아요. 내 손이 타버린 것보다, 당신의 더러운 비밀이 덮인 걸 기뻐했잖아요. 안 그래요?""아… 아아악-!""넌 그냥 쓰레기야, 백서아. 강도진의 장난감.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면서, 남의 인생만 망쳐놓는 텅 빈 인형."이안의 형상이 연기처럼 흩어져 내렸다.서아는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휘저었다."이안아! 이안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살려줘… 제발 나 좀 이 지옥에서 꺼내줘…!"하지만 이안은 없었다.거실에는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하하… 흐흐흑…."서아는 바닥에 엎드린 채 실성한 듯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자신의 밑바닥이 이렇게까지 추악하다는 사실을, 환각 속의 이안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그래. 강도진의 말이 맞았다.자신은 완벽한 '희수'였다.이기적이고 천박하며,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제2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2)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