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순간, 정적이 흘렀다.
도진의 시선이 서아의 드러난 목덜미와 쇄골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핏발이 선 이빨 자국과,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끊어지며 생긴 선명한 긁힌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서아는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가운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도진의 눈이 그것을 정확히 담아냈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서아야."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목에 그거, 다친 거야?"
"어? 아, 이거……."서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다."이게, 그게…… 갤러리 지하 수장고에 내려갔다가……."
"수장고에서?""다음 날 오전.전날 투자자 회의실에 난입한 권이안이 자료를 던지고 사라진 뒤, 갤러리 도아는 곧바로 긴급 후속 이사회를 소집했다.갤러리 VIP 응접실의 공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통제된 항온 항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꼈다.테이블 위에는 서아가 전날 이미 보았던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권이안이 제출한 작업실 출입 CCTV 캡처본과 문자 일부, 그리고 법무팀의 1차 검토 의견서였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갤러리 메인 스폰서, 최 회장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그 옆에 배석한 이사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평소라면 서아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 백 관장님" 하며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았을 인간들이었다. 서아가 입은 옷의 브랜드, 서아가 기획한 전시의 우아함, 그리고 무엇보다 '천재 작가 강도진의 완벽한 아내'라는 타이틀을 핥아대기 바빴던 자들이, 지금은 벌레를 보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최 회장님. 어제 투자자 회의에 이어 곧바로 이사회까지 소집하신 이유는 압니다. 하지만 권이안이 남긴 자료는 원본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백 관장."최 회장이 무겁게 서아의 말을 잘랐다."어제 투자자들 앞에서 제출된 자료를 법무팀이 1차 검토했습니다. 이제 감정적인 해명이 아니라, 이 기록들이 왜 존재하는지 공식적으로 설명해요.""변명할 생각 마요. 찌라시 도는 거 막느라 내가 쓴 돈이 얼마인지 압니까? 우리 갤러리 후원하는 사모님들 사이에서 벌써 백 관장 이름이 어떻게 오르내리는지 알아요?"최 회장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서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천재 작가의 고결한 뮤즈. 우아하고 기품 있는 갤러리 관장. 우리가 백 관장한테 투자한 건 백 관장 안목 때문이 아니야. 강도진이라는 브랜드와
느낌이 아주 좋아, 서아. 어쩌면 내 평생의 역작이 될지도 몰라."도진의 말에 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편의 성공은 아내로서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서아의 가슴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섬뜩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즘 도진이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서아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어떤... 내용인데요?"서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남편의 소설 내용에 크게 관여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왠지 모르게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도진은 차를 한 모금 천천히 넘기고는, 책상에 기대어 서아를 올려다보았다."한 여자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지.""...파멸이요?""응. 겉보기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야. 자상한 남편, 흠잡을 데 없는 지위, 안정적인 일상. 하지만 그녀는 그 완벽함 속에서 오히려 숨 막혀 해.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삶과는 정반대의 궤도에 있는 위태롭고 거친 남자에게 빠져들지."서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혀왔다.도진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했지만, 그 내용이 묘사하는 상황은 마치 자신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날카로운 단검 같았다."그... 남자는 어떤 사람인데요?"서아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물었다. 도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술가. 혹은 예술가인 척하는 허풍쟁이. 여자는 남자의 그 위태로운 열정에 자신이 구원받고 있다고 착각해. 자신이 그의 '뮤즈'가 되었다고 믿지. 육체적인 쾌락과 일탈이 주는 자극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포장하면서 말이야.""......""하지만 서아, 진정한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돼."도진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서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번쩍이는 광기를, 서아는 애써 외면해야 했다."여자는
타닥. 타다닥. 탁.타닥. 타닥. 타다다다닥. 탁.거대한 저택,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도진의 서재.무거운 암막 커튼이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한 그곳에는 오직 기계식 키보드의 파열음만이 서늘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것은 32인치 듀얼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백라이트뿐이었다.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도진의 얼굴은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창백했고, 턱 밑으로는 거뭇한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평소 언론과 대중 앞에서 보여주던 '완벽하고 단정한 지식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지금 이 서재 안의 도진은 철저한 괴물이었고, 동시에 완벽한 신(神)이었다."하하..."건조한 웃음소리가 키보드 소리 사이로 새어 나왔다.도진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모니터 화면을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왼쪽 모니터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흑백의 텍스트가, 오른쪽 모니터에는 잘게 분할된 폴더와 음성 파일, 그리고 수십 장의 사진들이 띄워져 있었다.그 사진들 속에는 그의 아내, 서아가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육체를 탐하는 젊은 화가, 이안의 모습도 함께."그래. 이 부분의 감정선이 조금 헐거웠어."도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오른쪽 모니터의 오디오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지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며칠 전 이안의 작업실에서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진이 서아의 숄더백 안감 깊숙한 곳에 심어둔 초소형 녹음기가 수집한 '생생한 날것'의 데이터였다.― "이안... 제발, 그만해. 우리 이러다 정말 큰일 나."― "큰일? 무슨 큰일. 남편한테 들킬까 봐 그래? 그 위선자 자식은 당신이 여기서 내 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상상도 못 해!"― "흐윽... 도진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나한테, 나한테 너무 과
제 육체와, 제 거친 붓 터치에서 풍기는 짐승 같은 날것의 냄새를 몹시 사랑하셨거든요. 관장님이 제 작업실에 오실 때마다 우리는 캔버스 앞에서 아주 깊고, 비밀스럽고, 끈적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고상한 세상의 시선 같은 건 다 벗어 던져버리고 말이죠."이안의 문장 하나하나가 예리한 송곳이 되어 서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직접적인 '불륜'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남녀 간의 짙은 육체적 관계를 은연중에 완벽하게 암시하는, 소름 끼치도록 천박하고 노골적인 폭로였다."권이안…… 제발…… 그만해……."서아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모기만 한 신음이 흘러나왔다.분노가 아니었다. 제발 멈춰달라는, 지독하게 비참한 구걸이었다.하지만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서아의 완벽한 붕괴를 즐기듯 눈을 번뜩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특히 관장님은 제 지하실의 그 퀴퀴한 냄새 속에서 입고 오신 명품 옷을 벗고…… 아, 아니지. 자신의 억눌린 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걸 즐기셨습니다. 제가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들면, 관장님은 제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온몸으로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시곤 했죠. 제 시선이 목덜미를 지나, 가슴을 거쳐, 다리 사이로 내려갈 때마다…… 관장님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헐떡이셨는지, 여기 계신 이사장님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그건 오직 저만의 특권이었으니까요.""이, 이 자식이 지금 신성한 회의실에서 무슨 추잡한 소릴 지껄이는 거야……!"정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며 핏대가 섰다.회의실 안의 투자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안의 노골적이고 은유적인 발언 속에서 완벽하게 진실을 캐치해 냈다.
"스토커라고? 그냥 단순한 스토커인데 그렇게 입에 담지도 못할 저속한 말을 지껄여? 우리 정보망에 따르면 그놈이 아주 구체적인 단어들을 썼다던데."투자자 중 한 명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날카롭게 물었다."망상증 환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고 제게 타격을 주기 위해 가장 자극적이고 추잡한 단어를 선택해 뱉어내는 거죠. 이미 저희 남편과 상의해서 법무법인을 통해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과 명예훼손 고소를 진행 중입니다. 남편도 이 자작극에 굉장히 분노하고 있어요. 법적 절차가 시작되면 조용해질 테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남편인 '천재 소설가 강도진'의 이름을 팔자, 투자자들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강도진이라는 이름이 가진 사회적 무게감과 그의 완벽한 이미지는 그만큼 강력한 방패였다.소 이사장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가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음…… 강 작가가 직접 나섰다면 아주 터무니없는 루머는 아니겠군. 강 작가 체면이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백 관장, 소문이라는 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한 번 번지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네. 당장 이번 달에 있을 대규모 투자 유치 건과 해외 유명 미술관과의 교류전이 코앞이야.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우리 지분도 무사하지 못해.""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장님. 제 모든 명예와 남편의 이름을 걸고 이번 주 내로 완벽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절대 투자자분들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제가 확실히……."철컥-.서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대회의실의 웅장한 원목 문이 유령처럼 부드럽게 열렸다."어라? 중요한 회의 중이셨나 보네. 내가 타이밍을 아주 기가 막히게 맞춰 왔어."방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문쪽으로 향했다.그곳
탁. 탁. 탁.서아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파우더 팩트를 화장대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우아하고 고결해 보였다. 목까지 단단히 채운 진주 단추의 실크 블라우스,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연출된 피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단발머리.하지만 그 번지르르한 껍데기 아래의 내용물은 이미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겉으로만 멀쩡할 뿐, 속은 이안이 남긴 끔찍한 오물과 수치심으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이었다."하아……."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한 시간 전이었다. 망원동의 그 음침하고 곰팡내 나는 지하실에서, 이안의 비틀린 욕망과 폭력성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것이.그의 더러운 손길이 닿았던 피부가 아직도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렵고 불쾌했다. 샤워를 두 번이나 하고 향수를 들이부었지만, 서아의 뇌리에는 이안의 땀 냄새와 싸구려 테레빈유 냄새가 각인되어 떠나지 않았다. 이안은 그녀를 유린하는 내내 귀에 대고 낄낄거리며 속삭였다.『오늘 오후에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야, 사모님. 늦지 않게 대기하고 있어.』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찰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관장님! 큰일 났어요!"김 실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결재용 태블릿 PC가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무슨 일이에요, 김 실장? 품위 없게 왜 이렇게 호들갑이에요?"서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갑게 다그쳤다. 속으로는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졌지만, 어떻게든 평소의 철두철미하고 우아한 관장의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직원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그게 아니라…&hel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