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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너무 위험한 여자: Chapter 21 - Chapter 30

36 Chapters

21. 침묵의 소음

그날 밤, 이우는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그는 책상에 놓인 유리의 출입기록과 개인 정보 서류를 펼쳤다.고등학교 졸업 이후 S대 법학과 수석 입학, 해외 어학연수 1년,현재 4학년 재학 중. 모든 정보는 정확하지만 너무 깔끔했다.그는 중얼거렸다.“글을 쓴다고??.. 자신이 완벽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기 쉬워지지.”반면, 유리는 자신의 아파트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그녀는 유진의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이우가 가장 마지막으로 본, 유진의 생전 모습과 가장 닮은 차림.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그러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중얼였다.“그 사람, 오늘 흔들렸어. 형이라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자리를…잠깐 비웠어.”그녀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유진의 마지막 음성파일이 다시 흘러나왔다.“…유리야. 그 사람, 네가 기억해줘야 해. 그 사람이…그날…”그 말이 끊어지던 부분, 유리는 거울을 바라보며 똑같이 속삭였다.“서이우.”다음날 아침, 이우는 유리를 회사 로비에서 마주쳤다.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서이우 이사님.”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좀 달라 보이시네요.”“오늘은 ‘그날’이니까요. 기억하시죠? 조유진 씨 기일.”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대신, 짧게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유리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아, 이사님. 참 묻고 싶었던 게 하나 있어요.”그는 멈췄다. 그러나 돌아보진 않았다.“그날, 언니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고 계세요?”이우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유리는 웃었다. 입꼬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정확히 그의 등 뒤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이우는 노트북 화면을 다시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조유리.S대 법학과 수석 입학. 현재 졸업반. 사법 고시 2차까지 패스. .이력은 흠잡을 데 없었다. 심지어 모범적이었다.너무 모범적이었다. SNS 없음. 학내 활동 없음.동문 간 커뮤니티 내 언급 없음.사진은 프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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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기억의 공백

그날 밤, 이우는 홀로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 들어가 오래된 USB 하나를 찾았다.거기엔 과거의 일정 캘린더, 지인 명단, 지워진 사진 폴더가 있었다.그는 ‘조유진’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그리고 하나의 사진.북카페, 창가. 앉아 있는 유진.그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얼굴은 흐릿했지만,그가 입은 셔츠는 분명 자신의 옷이었다.“…내가 거기 있었나?”그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서움에, USB를 서랍에 던져 넣었다.다음날, 유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으며 말했다.“기억은, 없다고 말해도 몸은 기억하거든요.”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북카페 사진을 하나 열었다.거기엔 유진의 뒷모습. 그 옆에서 고개를 약간 숙인 남자.그리고, 그림자처럼 비친 이우의 시계.‘그 사람, 이제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가고 있어.’이우는 사무실 안에서 USB를 재생하며 모니터에 띄워진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잠실 롯데백화점 북카페. 10층.창가 쪽, 조유진.그 옆에 앉은 남자 흐릿하지만, 소매에 달린 단추와 셔츠가 익숙했다.그는 말없이 캘린더를 넘겼다.2024년 2월 9일.그날, 자신의 일정은 ‘내부 회의’로만 기록돼 있었다.외부 행적은 빠져 있었다.“공백이 있군.”그는 짧게 중얼였다.확신하지 않는다.하지만, 부정도 할 수 없다.이우는 유리에게 연락했다.전화를 길게 잡지 않았다.“잠시 볼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한남동, 조용한 바.이우는 시간보다 5분 먼저 도착했고,유리가 나타났을 땐 이미 와인을 반쯤 비우고 있었다.“조유리 씨. 본인의 목적이 정확하다면, 지금쯤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겠죠.”유리는 자리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말씀하시는 방식이 변하셨네요.”“상대에 따라 접근 방식은 달라지니까요.”“전 ‘상대’입니까?”“지켜봐야죠.상대일지, 리스크일지.”유리는 와인을 들며 말했다.“기억이라는 건 참 묘해요. 잊힌 건지, 지운 건지. 당사자조차 구분 못 하니까요.”“보통은,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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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 이름 앞에 멈춘 심장

유리가 파일을 건넨다.A4 크기로 확대된 사진.카페 한구석, 앉아 있는 유진.그리고, 그의 옆자리.이우는 말없이 사진을 받았다.표정은 무표정. 입술의 곡선조차 바뀌지 않았다.“언니가 그날 무슨 기분이었을까요?”유리가 말했다.“커피는 마시지도 않았고, 책도 펼치지 않았어요. 3시간을 그냥 앉아 있었대요. 그 자리에.”“누구의 진술입니까?”“직원.그리고…감시 카메라.”이우는 잔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그날 저는, 저 자리에 잠시 앉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하지만 3시간을 함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결정적으로 기록도 없고, 대화 내용도 없습니다.”“이사님 시계는요? 사진 속 그 시계, 이사님 거 맞죠?”“네.맞습니다.”“그럼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사실이네요.”이우는 한 박자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잠시였는지, 한 시간 이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유리는 가방에서 또 하나의 사진을 꺼냈다.이번엔, 유진의 초음파 사진 옆에 놓인 티켓.영화 티켓. 2024년 2월 9일.오후 9시 30분.“이 티켓, 그날 언니의 가방에서 나왔어요. 같은 날, 같은 시간, 이사님 명의의 카드로 결제된 영화관 좌석과…"“그건 우연일 수도 있겠네요.”“우연이 반복되면, 그땐 선택이 되죠.”이우는 말없이 유리를 바라봤다.“그날, 언니가 당신을 만나러 갔던 겁니까?”“모르겠습니다.”“정말요?”“그날, 그 여자를 만났는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말할 기억은 없습니다.”유리는 작게 웃었다.“그 말은, ‘만났을 수도 있다’는 뜻이죠.”이우는 그 웃음을 보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자꾸 질문을 이어가면 당신이 원하지 않는 답을 들을 수도 있어요.”“그런 답은, 이미 언니가 다 남겼어요.”그날 밤, 이우는 자신의 방 안, 서랍을 뒤졌다.마침내, 오래된 종이 티켓 하나를 발견했다.2024년 2월 9일.9:30PM. 좌석 H14, H15 두자리.그 옆자리의 이름은 없었다.하지만 그는 알았다. 옆에 누가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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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침묵의 자백

이우는 시계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대신 유리의 얼굴을 바라봤다.“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내가 뭘 잃었는지 생각이 납니다.”“잃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버렸던 거죠.”침묵. 이번엔, 길었다. 긴 만큼 진실에 가까웠다.“이름을 묻겠습니다.”유리가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기억하는 그날 밤, 옆에 있던 그 사람의 이름은 뭐였습니까?”이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그러다, 아주 조용히, 진짜 심장을 겨눈 것처럼 말했다.“…유진.”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유리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그 사람이 죽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카페 안,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하지만 유리는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이우의 얼굴에 고정돼 있었고,그의 눈빛은 어딘가 멈춘 시계처럼 작은 틈 하나 없이 정지돼 있었다.“그 사람이 죽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유리의 질문은 공기 속으로 떨어졌고, 그 파문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번져갔다.이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정적은 흘렀고, 그건 곧 침묵이라는 이름의 자백이 되었다.“말 안 하셔도 돼요.”유리는 잔잔하게 웃었다.“이미 말했으니까요. 당신은 기억난다고 말했고, 그 기억을 덮고 싶다고도 했고.”“나는…”이우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당신은, 정확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어요.”“…”“그리고 그날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유리는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작은 USB 하나. 하얀 바디에 은색 띠가 둘러진, 낡은 물건.“이 안에 들어 있어요.”“무엇이죠.”“언니가 남긴 마지막 기록. 음성 파일과 영상 하나.그리고… 당일 오후 4시 18분, 신촌 근처 편의점 CCTV에서 당신과 언니가 나란히 들어가는 장면.”이우는 그 USB를 보며 물었다.“직접 보셨습니까?”“네. 하지만 아직, 경찰은 못 봤어요.”유리는 USB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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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지막 화살은 아직 당기지 않았다

이우는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흐릿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2024년 3월 12일. 정확히 1년 전, 유진은 사라졌고,그 자리를 떠났던 자신의 뒷모습만이 여전히 그의 기억 안에 살아 있었다.그날 밤 이후, 이우는 한 번도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다.하지만 유진을 죽인 건, 물리적인 폭력도, 직접적인 손도 아니었다.그는 알았다. 자신이 입을 다문 채, 누군가가 모든 걸 정리하도록 내버려뒀다는 걸.“이사님.”유리는 그날도 어김없이 조용히 나타났다.이번엔 사무실이 아닌, 비공식적인 공간.도심 외곽의 작은 호텔 라운지, 대화가 사라지고 고요만 남는 공간.“오늘은 어떤 목적으로 부르셨죠?”이우는 테이블 너머로 유리를 바라봤다.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조유리 씨. 당신이 원하는 건, 내 자백입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겁니까?”유리는 조용히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자백은 이미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끌어내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끌어내릴 사람 같거든요.”그 말에 이우는 입꼬리를 아주 작게 올렸다.하지만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묵인이었다.“그날, 언니가 죽은 건…”유리는 천천히 말했다.“당신이 보낸 메시지 때문이었죠?”“정확히는, 그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그녀를 처리하겠다고 했고 나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그 사람이 누굽니까?”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목소리보다 분명하게 누군가를 가리켰다.유리는 가방에서 마지막 사진 하나를 꺼냈다.그것은 유진의 휴대폰에서 복구한 대화 캡처본.사진 속엔 저장되지 않은 번호와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그만해. 입 다물면 우리 둘 다 살아.”발신 시각은 2024년 3월 12일, 새벽 3시 42분. “이 번호, 당신 번호죠.”이우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이현은, 이 모든 걸 몰랐습니다. 그는 연루되지 않았습니다.”“그 말, 진심이세요?”“그 아이는 감정을 다 믿는 사람입니다. 그걸 이용한 건… 나였고, 그걸 더럽힌 것도 나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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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위로 향한 그림자

“내가 책임지겠습니다.”“당신 혼자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유리는 자리를 일어섰다.“이건, 더 위로 올라갈 겁니다. 당신은 끝이 아니에요. 당신도,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장기말 중 하나였잖아요.”이우는 짧게 물었다.“그게 누군지 짐작됩니까?”유리는 미소도 없이 말했다.“네. 이제 그 사람에게 갑니다.”그날 밤, 유리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침대맡엔 복사된 USB와 이우의 고백이 담긴 녹음파일이 놓여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새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서이우 → 진술 확보]유진 사망 시점 전후 문자 전송 확인물리적 가담은 없음. 단, 지시 및 방조 인정실질적 결정권자의 존재 암시→ 그룹 회장 서인국, 또는 계열 법무팀 라인 조사 필요**유리는 마지막 줄에 굵게 밑줄을 그었다.[다음 목표: 서인국]이유를 모를 때 사람은 분노한다.그러나 이유를 알아버리면, 그 감정은 오히려 사라진다.그 자리에 남는 건 오직 냉정한 이해와, 끝내야 한다는 결론뿐.유리는 지금 그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그만해. 입 다물면 우리 둘 다 살아.”2024년 2월 9일, 새벽 3시 42분.언니의 죽음 이전, 유진의 휴대폰에 남겨진 마지막 메시지.그 문장을 바라보며 유리는 속으로 반복했다.그날 언니는, 살려달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대신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고, 대답 대신, 사라졌다.“이 번호, 당신 거죠.”유리가 프린트된 메시지 내역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서이우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맞습니다.”그는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감정 없는 어조, 불필요한 부정도 없었다.“왜 보낸 거죠?”“언질입니다.”유리는 눈을 들었다.“언질이 아니라, 협박처럼 들리던데요.”“그건 수신자의 판단이죠. 나는 정리할 시간을 준 겁니다.”“정리할 시간이라뇨?”“조유진 씨는 위험한 선택을 하고 있었고, 그 선택의 방향은 내가 아니라, 위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요.”유리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당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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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침묵의 균열

유리는 서인국의 비서였던 이인직의 사망 기록을 다시 들여다봤다.‘과로사’라는 정돈된 단어로 발표된 죽음.하지만 출근 전날 밤, 그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의 기록은 언니 유진이었다.발신자 : 조유진통화 시간 : 7분 26초내용 : 없음 (녹음 불가 구간)이우는 말했었다.“유진 씨는 내게 협박을 했습니다.”아니, 유진은 협박한 게 아니라 진실을 들고 있었던 거다.그리고 그 진실은, 그날 새벽 누군가에게 너무 큰 ‘변수’였던 거다.유리는 검찰 내부 포털에서 조용히 특정인을 검색했다.서인국 회장 그의 공직 기록, 세무 조작 의혹,공개된 것과 비공개된 자료 사이의 틈을 그녀는 조용히 읽었다.그리고 한 줄의 비공식 정보에 걸렸다.‘2023년 하반기 – 서인국 회장, 어떤 여인과 사적 만남 정황 / 확인 불가’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유리의 감은 정확했다.‘정황’이라는 말이 언니의 실명 없이 등장했다는 건 누군가 이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고, 감췄다는 뜻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사무실 책상 서랍을 열었다.언니의 다이어리. 가죽 표지에 금장으로 ‘Y.J’라고 새겨져 있는 그것은 지금까지의 복수보다 더 조용한 울림이었다.“그 사람은, 책임질 거라 했다.”“이현보단, 서인국이 내 아이에겐 안전한 우산일지도.”그 문장을 읽는 유리의 입가엔, 슬픔도 분노도 아닌 지독한 침묵 하나만이 남았다.그날 밤, 이우와 다시 마주한 자리.한적한 갤러리의 VIP 룸, 정물화처럼 단단한 고요 속에 두 사람은 말 없이 앉아 있었다.“회장님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계세요?”유리는 와인을 기울이며 물었다.이우는 한 박자 늦게 잔을 들었다.“공식적인 정보는 대부분 사실과 다릅니다.”“비공식적인 건요?”“거기엔 내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죠.”“그렇겠죠. 하지만, 말하지 않는 건…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이우는 시선을 그녀에게서 거두지 않았다.무표정. 하지만 그 안에서, 어딘가 이글거리는 것들이 천천히 타오르고 있었다.“전 그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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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언어의 예고

이우와의 만남은 그날 저녁, 뜻밖의 장소에서 이뤄졌다.갤러리 오프닝 행사. 검정 슈트를 입은 이우는 군중 속에서 유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녀가 다가가자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검찰 보고, 넣으셨다면서요.”“생각보다 정보가 빠르시네요.”“그만큼 관심 있는 분야라서요.”“회장님 얘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이 지워버린 여자에 대한?”이우는 웃지 않았다. 다만, 눈을 한 번 감고, 다시 떴다.“그 둘은…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죠.”전시된 작품 앞,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캔버스엔 반쯤 지워진 얼굴 하나.형체는 흐렸지만 눈만은 살아 있었다.“그 사람이 보낸 청첩장, 당신도 알고 있었죠.”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이우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 종이는, 입막음이었어요. 무언가 약속하겠다는 게 아니라, 말하지 말라는 방식의 포장.”“언니는 그걸 믿었던 걸까요?”“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죠. 당신 언니였으니까.”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그렇기에 오히려 그 안의 감정이 더 정확하게 느껴졌다.“당신은, 진짜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던 적 있나요?”“있었죠.”“지금은요?”“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복수의 대상이면, 그 감정은 애초에 불순물입니다.”유리는 가만히 시선을 돌려, 지워진 얼굴 속 눈을 다시 바라봤다.“불순물일수록…가장 먼저 끓죠.”진실이 가까워질수록, 그 진실을 감춘 자들은 더 단단하게 입을 다문다.그리고 유리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여는 법이 아닌 기록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이 자료, 공식 채널에 넘긴 건 아니죠?”강의실 뒤편, 서울법대 연구동 비공식 회의실.법조인 관찰실습 중이던 유리는 담당 변호사 겸 지도교수인 한태석에게 조용히 지적받았다.“검찰 수습도 아닌데, 이런 민감한 건 손대지 마요. 서인국이 누굽니까. 법조 라인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알고 있어서 건드리는 거예요.”유리는 나지막이 말했다.그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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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증언의 소멸

그건 독백이 아니었다. 그녀 안의 복수가 처음으로 감정이 아닌 행동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이우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유리는 예상했다.“그 사람이 움직였어요.”이우의 목소리는 낮았고, 늘 그렇듯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제보자를 건드렸다는 말이군요.”“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겁니다.”“그럼… 지금은?”“조용히 지워지는 중이죠. 사라진 파일, 떠돌던 익명 계정. 당신 말대로, 입이 아니라 기록이 먼저 죽는 겁니다.”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조용히 파일 하나를 생성했다.제목: [조유진 사건 관련 : 서인국 연계 정황 목록 v.1]파일을 열자, 첫 줄이 비어 있었다.그녀는 입력했다.병원 보호자 – 서 회장 비서클라우드 셀카 – ‘I.K.’ 문양회장 별장 CCTV 삭제 시점 = 유진 실종 시점 일치그리고, 덧붙였다.청첩장 샘플음성 녹음 파일이인직 사망 / 유서 없음 / 6개월 직속 비서 근무유리는 화면을 닫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아직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서인국.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건 복수가 아니라 전쟁이 될 테니까.하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정확하게, 조용히, 그리고 되돌릴 수 없이.“그 사람, 연락 안 받아요. 3일째예요.”한참을 붙잡고 있던 핸대폰을 내려놓으며 유리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자취방 옷장 속, 오래된 라디오에 연결해둔 녹음기. 그 녀석이 알려줬다.몇 주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세 번은 연락을 주고받던 내부 제보자, ‘J’가 사라졌다는 것을.“퇴직하고 나서도, 자기가 본 걸 잊지 못하겠다고 했었는데…”유리는 눈을 감았다. 지워졌다는 건, 그가 죽었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단지, 말을 멈췄다는 뜻. 더는 기록하지 않겠다는 뜻.“당신이 건드린 거예요?”그날 밤, 유리는 이우에게 물었다.형식은 차분했고, 어조는 평온했다.그러나 문장마다 피가 맺힌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아니요. 하지만 조용히 처리하라는 누군가의 말은 이제 실행 단계에 들어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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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진실을 꺼내면 누가 먼저 죽는가

낯선 남자. 40대 초반, 말라 있고 눈빛이 부서져 있었다.그가 말은 했지만, 그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톤처럼 들렸다.“J 씨 맞으시죠.”“들어오시죠.”방 안은 냉장고 소리만 들렸다.벽 한편엔 커튼도 없었고, 탁자 위엔 절반 남은 물컵과 구겨진 휴지 몇 장뿐이었다.“보여드릴 게 있어요.”그는 작게 숨을 내쉰 후, 책상 서랍에서 조심스럽게 외장 하드 하나를 꺼냈다.“이건… 제 백업이에요. 지웠던 자료들, 다 여기 남겨놨어요. 만약을 대비해서요.”“어떤 자료입니까.”“이인직 비서…그가 죽기 전, 제가 듣고 저장했던 통화 녹음입니다.저는…비서실에서 영상 보안팀으로 파견 나가 있었거든요.”유리는 파일을 받아 노트북에 연결했다.하드디스크는 낡았지만, 인식 속도는 빨랐다.파일 하나. [2024_02_05_call.wma]“…그 여자가 말을 안 들어요.”“임신이 사실이면,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감당 안 됩니다.”“그날 밤으로 하죠. 사고로 위장하는 쪽으로.”그리고 짧은 정적.“회장님도 들으셨죠.”“…그래. 처리해.”유리는 잠시 재생을 멈췄다.“이건…”“네. 그 목소리, 서 회장입니다.”공기에서 소리가 사라졌다.침묵이 아니라, 진실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이었다.유리는 그 파일을 복사했다.손이 떨렸지만,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J 씨. 이거, 넘긴다는 거 의미 아시죠?”“네. 알아요. 그래서 무서워요.”그는 컵을 들었다가, 입도 대지 않고 내려놓았다.“하지만 더는 못 숨겨요. 그 사람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그냥 살아남을 사람이라서요.”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웠고,유리는 버스정류장 앞 조형물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가방 안에 있는 복사본. 녹음 파일은 작았다.용량 1.3MB.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언니의 죽음 전부였다.유리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네가 지키지 못했던 걸 이제는 내가 꺼내겠다는 말, 이제 해도 될까.”진실이란 건 꺼내는 순간, 누군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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