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카시안은 턱을 악다물었다. 그는 피 묻은 검을 거칠게 거두었다.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굴욕이었다. 원수의 자비를 입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이 순간이 그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왔다.“르세인, 잊지 마라. 네가 내게 준 이 치욕이 언젠가 네 제국을 무너뜨리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니.”르세인은 대답도 없이 눈썹을 들썩이며 우아하게 길을 터주었다. 카시안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르세인은 그가 사라진 빈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침대 위에 널브러진 헤이브릭을 향해 마지막 경멸을 담아 입을 열었다.“잘 가십시오, 폐하. 당신이 망쳐 놓은 제국은 이제 내가 가장 아름답고 잔혹하게 고쳐놓겠습니다.”잠시 뒤, 복도 끝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고요를 깼다.르세인은 바닥에 떨어진 카르노스의 문양이 새겨진 검을 발로 걷어 차, 침대 밑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그리고 천천히 소매에 묻은 헤이브릭의 피를 손가락으로 훑었다.“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금위대장과 함께 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이 마주한 풍경은 지옥의 한 조각이었다. 침대 위에는 제국의 태양이었던 헤이브릭이 숨을 거둔 채 널브러졌고, 그 곁에는 황태자 르세인이 피 묻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늦었군.”르세인의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떨리고 있었다. 슬픔이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억누르는 떨림에 가까웠다.“침입자가… 폐하를 시해했다. 누군가 감히 제국의 태양을 건드렸어.”르세인은 고개를 돌려 바델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이제 막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쥔 자의 서늘한 환희가 서려 있었다.바델은 그 눈빛에 압도되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그때,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엘라엔이 나타났다. 그녀는 르세인의 옷에 묻은 선혈과 침대 위의 처참한 광경을 번갈아 보았다.엘라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르세인이 어젯밤부터 황제의 약재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직접적인 죽음의 현장은 그녀의 계산보다 훨씬
“카… 카시, 카시안. 내 말을 들어….”“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지. 내 손으로 당신의 숨통을 끊어낼 날을 말이야.”냉기가 가득 서린 얼굴이 뭔가를 곱씹는 듯, 말없이 골몰하고 있는 그가 치켜든 칼날이 촛불을 받아 반짝이며 빛을 냈다.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웃음 짓는 카시안의 표정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당신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아. 죽어서 내 어머니를 뵙거든 꼭 사죄하길 바랍니다.”카시안의 검이 황제의 심장을 가차 없이 꿰뚫었다. 푸욱!“…! 카, 카시…, 하아…!”황제의 몸이 경련했고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와 비단 이불을 적셨다. 황제는 카시안을 응시하며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끝내 감지 못한 눈동자에는 절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카시안은 황제의 시신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 끝에 어린 붉은 피가 촛불 아래에서 기묘하게 빛났다. 그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복수를 완성한 것이다.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르세인이었다.그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듯 검을 든 상태였다. 르세인은 헤이브릭과 카시안을 번갈아 보았다.카시안은 르세인을 향해 검을 겨눴다. 다음은 그의 차례였다.하지만 르세인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헤이브릭의 차게 식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나 또한 황제를 죽이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었지. 아니, 반역을 꾀한 황제라는 칭호를 원하지 않았다는 게 맞을지도. 네놈이 내 고민을 해결해 주다니.”르세인은 검을 내리고 카시안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적의 대신 기이한 동맹의 빛이 서려 있었다.“원하는 걸 말해봐. 카르노스의 온전한 독립 보장? 아, 아. 당장 곡식부터 풀어줘야 하나.”르세인은 이 상황이 진정 우스워 죽겠다는 듯 큰 웃음을 내며 웃기 시작했다.침소 안에 울려 퍼지는 르세인의 웃음소리는 죽은 헤이브릭의 고요함을 비웃듯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카시안은 검을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눈앞의 남자는 제 아
“르세인은 내가 굶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니면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제국의 속령이 되겠노라 구걸하기를 바라거나.”카시안은 화로 위에 놓인 지도를 검 끝으로 그었다.“하지만 그는 모른다. 굶주림은 인간을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장 원초적인 폭력성을 깨우기도 한다는 것을. 내 병사들은 이제 식량이 아니라 제국의 그 비단 같은 살점을 뜯어 먹기 위해 이를 갈고 있지.”카시안은 품 안에서 빛바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묻었다. 엘라엔.그녀는 지금쯤 따뜻한 황궁에서 르세인이 하사한 보석을 두르고 있을까, 아니면… 그 품에서 억지로 신음하고 있을까.그 생각을 할 때마다 카시안의 가슴속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분노가 솟구쳤다.“엘라엔…. 당신이 밟고 있는 그 화려한 대리석 바닥을 피로 적실 때…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제국이 무너질 때… 당신은 결국 누구의 손을 잡게 될까.”카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갑주를 챙겨 입었다.“옌스, 전군에 명하라. 내일 새벽 철혈의 요새를 우회하여 황궁의 지하 수로로 연결되는 길을 연다. 황제가 보낸 밀서는 우리가 국경을 넘을 면죄부가 될 것이다.”카시안은 황제 헤이브릭이 보낸 밀서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제 아들을 막기 위해 버린 자식을 부르는 비겁한 아비의 손짓.카시안은 그 밀서를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황제 폐하, 기대하십시오. 당신이 부른 이 유령이 당신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얼마나 오래 이를 갈았는지 당신은 모르겠죠.”카르노스의 군대는 고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굶주림으로 인해 육체는 쇠약해졌을지 모르나, 그들의 정신력은 오직 약탈과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날카롭게 갈아져 있었다.*** 엘레니르 제국, 에르디엔 황궁의 지하 수로는 제국의 화려함 아래 감춰진 거대하고 습기 찬 무덤이었다. 카시안은 이끼 낀 석조 벽을 타고 흐르는 오수를 소리 없이 지나쳤다.그의 검은 사냥복은 어둠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었고, 굶주림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가벼웠다.카시안의 숨소리는 지하 적막에 묻혔다
카르노스의 바람은 더욱 날카로웠다. 제국의 황실이 온실 속의 장미처럼 화려한 연회에 취해 있을 때, 카르노스의 왕세손 카시안은 살점이 찢겨 나가는 듯한 혹한 속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그의 탄탄한 등 근육 위로 길게 늘어진 상처들은 제국에서 추방당할 때 새겨진 낙인이자, 그가 살아남아 카르노스의 왕좌를 찬탈하며 얻은 훈장이었다.챙! 챙!카시안의 검이 훈련용 철퇴를 단숨에 토막 냈다. 흩날리는 불꽃 사이로 보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예전의 유순했던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굶주린 늑대를 닮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깊은 복수심의 심연이었다.“전하,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벌써 사흘째 쉬지 않고 연무장에 계시지 않습니까.”카르노스의 충직한 기사 옌스가 망토를 들고 다가왔다. 카시안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검을 꽂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은 북방의 냉기와 만나 몽환적인 안개를 만들어냈다.“쉬면… 그 목소리가 들려, 옌스.”카시안이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말을 내뱉었다.그의 손에는 작고 해진 손수건 한 장이 쥐여 있었다. 엘라엔이 주었던 유일한 온기….이제는 그녀의 향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카시안은 매일 밤 그 천 조각을 쥐며 엘라엔을 그리워했다.그녀의 곁에는 르세인이 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광산과 맞바꾼 그의 품에서 엘라엔은 제국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엘라엔…….”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 끝이 저릿하게 타올랐다. 이 통각은 그리움과 동시에 그녀를 차지한 르세인을 향한 살의였고, 자신을 버린 제국을 향한 증오였다.카시안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르세인을 선택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야망 때문임을.그렇기에 그는 더욱 강해져야 했다. 르세인이 깔아놓은 판을 통째로 뒤엎고, 그녀가 올라탄 그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려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만 했다.“제국 황실의 밀서는 도착했나.”“예, 전하. 황제 헤이브릭이 비밀리에 보낸 서신입니다. 르세인의 폭주를 막
르세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황홀했지만 이전과 같은 가학적인 날카로움은 무뎌져 있었다.“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그 압도적인 힘이 낭비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거라 해두죠. 전하께서 제 목을 조르는 데 힘을 쓸 게 아니라, 천하를 쥐락펴락해야 하니까요.”엘라엔은 르세인의 흐트러진 셔츠 깃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르세인은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평생을 타인의 두려움만 먹고 자란 그에게, 자신의 광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쓸모를 논하는 여자는 엘라엔이 유일했다.“좋습니다. 당신의 그 조율 기꺼이 허락하죠.”르세인은 엘라엔을 안아 들어 책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서 엘라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내일 사교계의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포할 겁니다. 남부 행정권뿐만 아니라 제국 국고의 열쇠인 금사의 인장을 당신에게 넘기겠다고. 이제 제국에서 내 명령 다음으로 무거운 것은 황제의 명이 아니라 당신의 날인이 될 것입니다.”엘라엔의 눈동자가 깊게 파동 했다. 그건 그녀가 원하던 실질적인 제국의 절반이었다. 르세인은 단순히 보석을 선물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권력을 그녀에게 떼어주고 있었다.“전하의 결단에 오점이 남지 않게 하겠습니다. 카르노스의 광산이 제국의 창고를 채우고, 남부의 곡창지대가 전하의 군대를 먹일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완벽한 제국을 가질 거예요.”엘라엔의 말에 르세인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이 멍 자국이 사라질 때쯤 당신의 목에는 가장 화려한 목걸이가 걸릴 겁니다. 그때는 오직 나의 정비로서 그 무게를 견뎌주길 바랍니다.”르세인은 다시금 엘라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달큼한 체취를 들이켰다.여전히 지독하고, 제멋대로인 남자였지만 엘라엔은 그의 떨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연무장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전하를 즉시 배알하기를 원하십니다.”말리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훈련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르세인이었다.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셔츠는 그의 단단한 골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번뜩이는 녹색 동공은 지독하게 위험했다.“인장은 손에 익었습니까, 황태자비.”르세인은 다가와 엘라엔의 책상을 두 손으로 짚고 그녀를 가두듯 몸을 숙였다. 거친 숨소리가 엘라엔의 이마에 닿았다.“전하께서 제 손발을 풀어주셨으니 당연히 제 몫을 다해야지요. 남부의 세수는 이미 안정권에 접어들었습니다.”“정무 이야기는 이쯤하지.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건조한 것 따위가 아니니.”르세인은 엘라엔의 얼굴 곳곳을 세밀하게, 아주 면밀히 들여다보았다.그녀의 살결을 스치는 감촉은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예전에 목을 조르던 그 짐승과 같은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걸까. 증오도, 분노도 아닌… 마치 내가 죽어있는 조각상이라도 되는 것처럼.”르세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처음으로 내비치는 갈증이었다.그는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남자였지만, 정작 제 품 안에 든 여자의 마음 한 자락을 얻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전하께서 그렇게 만드셨죠. 전하의 논리 안에 감정이라는 오차는 허용되지 않지 않습니까.”“……내 논리가….”“…….”“틀렸다면?”르세인이 자조하듯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묵직한 그의 체중이 전해졌다.제국의 차기 태양이라 불리는 남자는 오직 엘라엔 앞에서만 자신의 거대한 몸을 꺾으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엘라엔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려다가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것을 느낀 순간 손을 멈췄다.르세인의 심장은 정말 곧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통제할 수 없는 욕망과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엘라엔. 나를 경멸해도 좋아. 내 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