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Chapter 11 - Chapter 20

115 Chapters

10. 핏자국과 쪽지, 감시

얼마 안 가 조용한 식사 자리. 엘로라는 어젯밤 받은 쪽지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칼리안을 미워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울리는 정적 속에서, 그녀는 수프를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때 상석에 앉아있던 칼리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피곤하면 먼저 쉬어도 돼.” 칼리안의 바로 옆에 어색하게 앉아있던 엘로라는 순간 숟가락을 멈췄다. “…네?”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정작 뱉은 자신도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동안 들었던 명령과 협박 사이에서,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괘, 괜찮습니다. 다 먹고 갈게요.” “…그래.” 어색한 정적이 다시 식탁 위를 메웠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남은 식사를 이어갔다. ‘방금 그거, 뭐였지.’ 엘로라는 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칼리안 역시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와인 글라스를 들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어색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엘로라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폐하, 어제 유모한테 쪽지가 왔어요.” 칼리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나저나 뭐라고 적혀 있었지.” “그냥, 저를 걱정하는 말이었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정확히는 진실의 절반만 말한 거짓말이었다. “그런가.” 칼리안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뒤, 엘로라는 다시 한번 그 쪽지를 꺼내 읽었다. 글씨는 분명 로웰의 것이었지만, 어딘가 평소와 다른 느낌이 났다. 글자 하나하나가 유독 힘겹게 눌러 쓴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문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엘로라는 황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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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빠진 상태

“…모르겠는데.” “진짜요?” “진짜야.” 그의 표정에서는 별다른 동요를 읽을 수 없었다. 엘로라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또 다른 감춤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럼 유모한테 직접 물어봐도 돼요?” “아직은 안 돼.” “왜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그때가 대체 언제인데요.” 칼리안은 대답 대신 쪽지를 그녀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그 말속에 담긴 묘한 확신이, 엘로라의 마음에 작은 의문 하나를 남겼다. * 다음 날부터 엘로라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방을 나설 때마다 회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정원을 걸을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욕실 앞에도 어김없이 경비가 배치되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엘로라가 조심스레 항의했지만 칼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널 지키기 위한 조치야.” “누구로부터요?” “안팎 둘 다. 도망가는 것도 막고, 누가 널 데려가려는 것도 막고.” “그럼 욕실 앞은요? 거기서 제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창문이 생각보다 넓어.” “그건 언제 재보신 거예요?” “설계도에 다 나와 있어.” 엘로라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잃었다. “…폐하는 진짜 철저하시네요.” “철저한 게 나쁜 건 아니지.” “나쁜 게 아니라 좀 무섭다는 거예요.” * 저녁이 되어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 시종장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황녀님, 지하 감옥 쪽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엘로라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무, 무슨 문제요?” 엘로라는 시종장의 팔을 붙잡을 듯이 다가섰다. “유모님이 편찮으시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어디가요? 얼마나요?” “그것까지는 저도…” 엘로라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칼리안을 찾아 뛰었다.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그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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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쪽지를 들키다

밤이 되어 침실에 누우면, 엘로라는 늘 같은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유모를 꺼낼 수 있을 거야.’ 그러던 어느 저녁, 칼리안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문득 그녀를 불렀다. “엘로라.” “네.” “내일지하로 사람을 보내 유모의 방을 옮기라고 했어.” 엘로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정말요?” “그래. 지상 쪽 볕이 드는 곳으로.” 기쁨이 벅차올랐다. 동시에 이상한 의문도 함께 스쳤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어요?” 엘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칼리안은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하다가 짧게 말했다. “네가 애쓰는 게 보였으니까.” “…제가요?” “요 며칠, 억지로 웃는 거 다 티 났어.” 엘로라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티, 티가 났다고요?” “많이.” “그럼 왜 모르는 척하셨어요.” “모르는 척한 적 없어. 그냥 지켜본 거지.” 그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엘로라는 그 안에 숨겨진 다른 뜻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럼, 유모는 언제쯤 볼 수 있어요?” “방을 옮기고 나면. 아마 며칠 안으로.” “지상으로 나오는 거면, 완전히 풀어주시는 건가요?” 칼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방을 옮길 뿐, 감시는 계속돼.” “…그래도요.” “그래도, 지하보다는 낫겠지.” 엘로라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 며칠 뒤, 정말로 로웰이 옮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엘로라는 허락을 받아 그 방을 찾아갔다. 문을 열자 창가에 앉아 있는 로웰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모!” 로웰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가씨…”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로웰의 얼굴은 야위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또렷했다. “많이 힘드셨죠, 유모.” “저는 괜찮아요. 아가씨야말로 괜찮으신가요?” “…버티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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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래된 펜던트와 익숙한 이름

쿵쿵- “…” 엘로라는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칼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줘봐.” “…아니에요, 그냥 유모가 준 낙서예요.” “낙서를 촛불에 비춰본다고?” 엘로라는 순간 머리를 굴렸다. “어릴 때 하던 놀이예요. 촛불에 비추면 무늬가 예쁘게 보이는 종이거든요.” “그런 놀이는 처음 듣는데.”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나 하는 거라 모르실 수도 있죠.” 칼리안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여줘.” “…이미 다 태워버릴 참이었어요. 놀이가 끝나면 태우는 게 규칙이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종이를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불이 붙기 직전, 종이는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칼리안은 한동안 그 잔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옮겼다. “…묘하게 다급해 보이는데.” “다급한 게 아니라, 놀이 규칙을 지키려던 거예요.” “규칙 한번 유별나군.” “어린애들 장난이 원래 다 그렇죠, 뭐.” 엘로라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칼리안은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더는 캐묻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심이 남아 있었다. * 그가 방을 나선 뒤에야 엘로라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어.’ 떨리는 손으로 재를 마저 정리하며, 그녀는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훨씬 더 조심해야겠어.’ 휘익- 그런데 그 순간, 창밖에서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궁 안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신호 같은 소리였다. ‘음, 뭐지?’ 엘로라는 창가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 한쪽, 나무 그늘 아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시녀 복장을 한 낯익은 체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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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악의적인 소문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귀족은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엘로라가 칼리안에게 다가가더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도망가는 거예요?” “내가 아는지 어떻게 아나.” 칼리안은 시치미를 뗐다. 허나 엘로라는 그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사람 쫓아내는 거, 이제 좀 그만하세요.” “내 눈빛이 뭐 어떤데.” “살벌하잖아요,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평소에도 살벌한 거 아세요?” “몰랐는데.” “그럼 이제라도 아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엘로라는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처음엔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조금씩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는 마차 안, 엘로라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폐하는 왜 그렇게 하세요? 제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못 견디시잖아요.” 칼리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것을 남이 함부로 건드리는 게 싫을 뿐이야.” “저는 물건이 아니에요.” “누가 물건이라고 했나.” “말투가 딱 그랬거든요.” 칼리안은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로라는 그 침묵 속에서 뭔가 복잡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 며칠 뒤 로웰이 심각한 얼굴로 엘로라를 찾아왔다. “아가씨,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해.” 로웰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궁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폐하와 아가씨 사이를 두고요.” “소문? 그게 뭔데?” “…근친이라는 소문이에요.” 순간 엘로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도 알아요, 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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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황가에 피바람이 불다

“저희는 그저 들은 이야기를 전했을 뿐입니다!” “들었으면 삼켰어야지.” 그 말에 회의장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엘로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기사 하나가 고개를 저어 막아섰다. 칼리안은 붙잡혀 온 귀족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말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든, 그것은 짐이 결정할 일이다. 감히 그것을 두고 함부로 입을 놀린 죄,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겠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칼리안이 차갑게 웃었다. “황실의 권위를 그렇게 짓밟아 놓고,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하는군.” 그는 더 이상 그들의 애원을 듣지 않았다. 엘로라는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날지 예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끌려온 귀족들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 정말 억울합니다! 대공가에 대해 캐묻고 다니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가 시킨 것뿐입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칼리안의 시선이 천천히 엘로라를 향했다. 회의가 끝난 뒤, 칼리안은 그 귀족을 따로 불러 짧게 심문했다. “대공가라니, 누가 그런 걸 캐묻더냐.” “이, 이름은 모릅니다. 그저 은회색 머리의 나이 든 분이었습니다.” 칼리안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알겠다. 물러가라.” 그는 더 캐묻지 않았지만, 그 짧은 대화가 엘로라의 마음에 새로운 의문을 심었다. 결국 소문을 퍼뜨린 핵심 인물들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황궁 앞 광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형이 집행되는 순간, 비명과 신음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엘로라는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정말 나 때문인 걸까.’ 그날 밤 칼리안이 침실로 돌아왔다. “오늘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지키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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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황좌의 무게

“…언제든 목이 잘릴 수 있는 자리가 황좌다.” 처음 듣는 그의 속내에 엘로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데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시는 거예요?”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그 대답에는 체념도 두려움도 아닌, 이상한 담담함이 배어 있었다. ‘그토록 커 보였던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리 작아 보이지…’ 엘로라는 문득 그런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금껏 그녀는 그를 그저 두려운 존재로만 여겨왔다.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그가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는 불안. 그러나 이 순간, 처음으로 그 두려움 뒤편에 있는 사람이 보이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검을 곁에 두고 잠드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얼굴이. ‘그 사람도… 무서운 걸까.’ 그녀는 그 생각을 애써 지워내려 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며칠 뒤, 대신들이 앞다투어 혼인을 청했다. “이제 슬슬 황후를 맞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심 없다.” 칼리안의 짧고 냉담한 대답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소식은 곧 엘로라의 귀에도 들어갔다. ‘벌써 결혼이라니.’ 벌써 스물넷이라는 나이를 떠올리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허나 그녀는 그 단어 하나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동시에, 문득 며칠 전 얼핏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대공가를 캐묻고 다니던 은회색 머리의 노인. 그 정체 모를 그림자가 어쩐지 이 모든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자꾸만 스쳤다. 그러나 지금 당장 매달려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며칠 뒤, 귀족 몇이 몰래 그녀를 찾아와 애원했다. “황녀님, 폐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은 전하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별 소득 없이 돌아갔지만, 엘로라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칼리안이 조금만 분노를 거둔다면,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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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끼이익— 로웰이 서둘러 방을 나선 직후,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 선 칼리안의 눈빛이 평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칼리안이 두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밤은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어.” 엘로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뭘 확인하시려고요.” 칼리안은 침대 곁에 걸터앉으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엘로라는 눈을 크게 떴다. “…네?” “질문이 어려운가.”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세요.” “궁금해서.” 엘로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대답했다. “없어요.” 칼리안은 그 대답에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런가.”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로라는 이상한 실망감을 느끼며 스스로 당황했다. ‘내가 왜 실망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 앞에 멈춰 선 칼리안이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 “그럼 나는.” “…?” “내가 좋아진다면, 그건 상관없나.” “…” 엘로라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칼리안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다음 날 저녁, 칼리안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장난스럽게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부탁을 들어주길 바란다면 딱 한 번, 뺨에 입을 맞추면 돼.”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내가 그런 걸로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그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이거 완전 억지인 거 아세요?” “억지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라고 해두지.” “어디가 정당해요.” 한참을 망설이던 엘로라는 결국 체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짓것, 한 번인데 뭐.’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의 뺨에 아주 짧게 입을 맞췄다. 닿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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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타는 진실

“그럼 이름은 못 부르겠어요.” “왜.” “그냥, 아직 그럴 자신이 없어서요.” 수틀리면 어디 감히 황제를 이름으로 부르냐고 뭐라 할지도 몰랐다. 아직 그 정도의 신뢰까지는 칼리안에게 없었다. “…” 칼리안은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엘로라는 왜 자신이 그렇게 대답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칼리안이 문득 등을 돌린 채로 낮게 물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그렇게까지 싫나.” 엘로라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의 좁아진 어깨를 바라보며, 목 끝까지 차오른 대답을 결국 삼켜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칼리안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럼 오라버니라고 불러.” “싫어요.” “왜.” “그냥 싫어요.” “그럼 오빠는.” “그것도 싫어요.” 두 사람은 별것 아닌 호칭 하나를 두고 유치한 실랑이를 이어갔다. 장난처럼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럽게 조금 진지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내가 그렇게까지 무서운가.” 칼리안이 불쑥 물었다. 엘로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 아직도 무서운 모양이군.”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엘로라는 차마 진심을 말하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끝내 대답을 삼킨 그녀를 보며 칼리안의 표정도 천천히 굳어졌다. “됐어, 대답 안 해도. 알겠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엘로라는 순간 그를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결국 손을 뻗지 못했다. 그때였다. 땡땡땡! 종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기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서 말했다. “폐하! 서고 쪽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칼리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서고라니.” “지금 당장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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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렴풋한 기억

“어렸을 때, 누군가 저에게 불러줬던 것 같아요. 그 노래에 이 이름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칼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누가 불러줬는지 기억나?” “아니요. 얼굴은 흐릿해요. 그냥 목소리만.” “로웰일지도 몰라요.” “유모가.” “네. 유모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돌봐줬으니까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가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유모를 찾아가야겠군.” “지금요?” “왜, 또 불만이야?” “아니요.” 엘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저도 빨리 가고 싶어요.”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칼리안이 픽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잔해 더미 아래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기사들이 즉시 그쪽으로 몰려갔다. 잔해를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그 아래에서 서고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그을음으로 뒤덮인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기사가 그를 부축했다. 서고지기가 힘겹게 눈을 떴다. “폐, 폐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나.” 칼리안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 불을 지르기 전에, 그레이스 대공가의 마지막 기록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말해줬나.”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협박에 못 이겨서, 죄, 죄송합니다.” “어디라고 말했지.” “비, 비밀 서고입니다. 황실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요.” 칼리안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지도를 그려.” 서고지기가 떨리는 손으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엘로라는 그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빨리… 빨리요.” “재촉하면 손이 더 떨리는데.” “지금 그런 농담할 때예요?” “농담 아니야, 진짜로.” 지도를 손에 쥔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지금 당장이요?” “놈들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면 안 돼.” 두 사람은 기사들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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