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Bab 11 - Bab 20

214 Bab

10. 은빛

보관실 안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은빛은 잦아들었지만 여운은 촛불마다 남아, 불꽃 끝이 희미하게 푸르스름했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빛났군." 정적을 깬 건 칼리안이었다. 그는 보석으로 다가가 그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 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다 사그라졌다. 누구의 눈에도 더는 띄지 않게 덮어 버리는 손짓이었다. "폐, 폐하. 하오나 색이……." "레이너드." "그레이스의 심장은 붉게 빛나야……." "레이너드." 두 번째는 조금 더 낮았다. 레이너드가 입을 다물었다. "반응했지." "……예." "그레이스의 피가 아니면 꿈쩍도 않는 돌이라며." "그, 그렇습니다만." "그럼 끝났네." 칼리안이 손을 털었다. "색깔이 마음에 안 들면 초대 황제 무덤에 가서 따지든가." 그가 몸을 돌려 좌중을 훑었다. 붉은 눈이 닿는 곳마다 고개가 꺾였다. "오늘 여기서 본 걸 밖에서 떠드는 놈이 있으면." "……." "혀를 잘라 이 받침대에 올려 두지. 보석이랑 잘 어울리겠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따라 웃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틈에 에녹이 엘로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피 맺힌 검지에 손수건을 감았다. 매듭을 짓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다행이야, 엘로라. 정말로." "에녹 경……." "이제 누가 감히 너를 반푼이라 부르겠어." "……그럴까요." "그럼. 후작 얼굴 봤어? 식초를 한 사발 들이켠 사람 같던데." 엘로라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풀렸다. 에녹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갈색 눈이 그녀의 손가락이 아니라, 받침대 위의 보석에 잠깐 머물렀다. 은빛 잔광이 아직 가시지 않은 그 표면에. 기둥 그늘에서는 이반이 서류철 위로 펜을 바삐 놀리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빠져나가는 발소리에 묻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엘로라는 그 어느 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텅 빈 보관실 한가운데 홀로 남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08
Baca selengkapnya

11. 협박이라는 이름의 자비

회랑 끝에서 저녁 종이 울렸다. 뎅, 하고 터진 소리가 돌벽을 타고 길게 번졌다. 여섯 번을 다 울릴 때까지 엘로라는 기둥에 등을 붙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요." "오래전부터." "근데 왜 아무 말도……."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 "넌 오늘 아침에도 반푼이였고, 지금도 반푼이야. 돌멩이가 좀 희한한 색으로 빛났을 뿐이지." 목소리는 덤덤했다. 눈은 그렇지 않았다. 기둥을 짚은 그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럼 저는 누구예요." "……." "누구 딸이냐고요."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목소리는 그녀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았다. "그걸 아는 날, 널 죽이려는 놈이 지금의 열 배가 될 거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간밤에 자객의 칼끝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던 세드릭의 건조한 보고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게 시작일 뿐이었다니. '누군가 알아. 내가 뭔지.' 회의실에, 보관실에, 다과회 자리에. 오늘 마주친 얼굴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드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폐하는요." "뭐." "다 아시면서, 저는 왜 아직 살려 두세요." 칼리안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엘로라는 그것을 보았다. 폭군의 얼굴에 대답을 고르는 빛이 스치는 것을. "그건 아직 답 안 해." "또요?" "또." "치사하시네요." "이제 알았어?" 그가 기둥에 나머지 한 손마저 짚었다. 두 팔 사이에 그녀가 갇혔다. 옷깃에서 서늘한 철과 가죽 냄새가 났다. "대신 조건을 걸지." "조건이요?" "입 다물고 내 옆에 있어." "……그게 다예요?" "침실에선 같이 자고. 집무실에선 내 무릎. 회의실에선 내 옆자리." "지금이랑 하나도 안 다르잖아요." "그럼 쉽겠네." "그래서 저는 뭘 받는데요." "네 유모." 엘로라의 입술이 굳었다. "내일, 볕 드는 방으로 옮겨 주지." "……그게 자비예요, 협박이에요?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08
Baca selengkapnya

12. 쪽지를 들키다

촛불을 조금 더 가까이 댔다. 열기가 닿는 자리마다 은빛 획이 한 줄씩 살아났다. 얼음장 밑에서 물고기 등이 비치듯, 희미하다가 또렷해지는 글씨였다. 엘로라는 무릎을 꿇은 채 종이에 코가 닿을 만큼 몸을 숙였다. 촛농이 손등에 떨어져 굳는 것도 몰랐다. 획 끝이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장 보러 갈 목록을 적어 주던 그 손글씨였다. “그분은 이웃 나라 로이센의 둘째 왕녀셨습니다. 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하셨지요. 언니 되시는 분과 크게 다투신 끝에 나라를 버리고, 이 제국의 숲에 숨어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숲에서 아가씨의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왕녀. 엘로라는 그 두 글자를 손가락으로 덮었다가 다시 떼었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항구 술집 여자의 딸. 하녀가 몰래 낳은 딸. 이십 년 동안 등 뒤에 붙어 다니던 말들이 손톱만 한 은빛 글씨 앞에서 맥없이 바스러졌다. 기뻐야 하는 건지 무서워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무릎 밑 마룻바닥이 한 겹씩 꺼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버님이 누구신지는 여기 적을 수 없습니다. 이 궁에서는 입에 올리기만 해도 목이 날아가는 이름이니까요. 펜던트는 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 두었습니다. 때가 되면 그것이 아가씨가 누구신지 말해 줄 겁니다.” 맨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급하게 쓴 듯 획이 흐트러져 있었다. “부디 살아남으세요. 그분께서 그토록 바라셨듯이.” 그분. 로웰은 어머니를 마마라고도, 아씨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분이라고만 했다. 엘로라는 그 짧은 호칭을 읽고 또 읽었다. 열이 펄펄 끓던 밤 젖은 수건을 갈아 주던 손. 품에 빵을 숨겨 오느라 늘 밀가루가 묻어 있던 손. 그 손이 이십 년 내내 이 비밀을 함께 쥐고 있었다.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엘로라가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 화제를 돌리느라 괜히 찻물부터 올리던 사람이었다. 아가씨는 별걸 다 아시네요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08
Baca selengkapnya

13. 거짓말의 대가

벽난로에는 잔불만 남아 있었다. 숯이 식으며 내는 틱, 틱 소리가 정적을 갉았다. 창밖 하늘은 잉크를 엎지른 듯 짙은 남색이었고, 정원수들이 그 아래 검게 웅크려 있었다. 엘로라는 이불 밖으로 눈만 내밀었다. "……편지 쓰다가요." "편지." "유모한테요. 볕 드는 방으로 옮긴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축하한다고 쓰다가 망쳤어요. 글씨가 엉망이라." "그래서 태웠고." "……네." 칼리안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손목을 집어 들었다. 아프게 쥐지는 않았다.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았다. 손끝에 검댕이 묻어 있었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축하 편지가 손을 무네." "손이 둔해서요." "그래. 둔하지." 그가 엄지로 검댕을 문질러 닦았다. 데인 자리만은 비켜 갔다. 엘로라는 그 엄지가 지나가는 길을 숨죽여 따라갔다. 캐물을 것이다. 자객의 발소리를 잠결에도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손끝의 그을음 하나를 놓칠 리 없었다. 칼리안은 묻지 않았다. 협탁 서랍을 열어 작은 사기 단지를 꺼냈을 뿐이었다. 뚜껑을 열자 박하 냄새가 확 끼쳤다. 그가 연고를 손가락에 덜어 데인 자리에 얹었다. 화끈거리던 살갗 위로 차가운 기운이 스몄다. "아파?" "……아니요." "거짓말은 하나만 해. 두 개씩 하면 티 나." 엘로라는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손가락이 데인 자리 가장자리를 한 번 더 꾹 눌렀다. "폐하." "뭐." "왜 안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대답할 건가." "……아니요." "그럼 됐네." 그가 단지 뚜껑을 닫았다. 그녀의 손을 이불 안으로 밀어 넣고,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누웠다. 가운데 쌓인 베개 성벽은 오늘도 그대로였다. 묻지 않는 쪽이 더 무거웠다. 지금 받지 않은 값은 언젠가 이자까지 쳐서 받을 사람이었다. * 엘로라는 새벽녘까지 눈을 붙이지 못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께의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베개 너머의 등은 미동도 없었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11
Baca selengkapnya

14. 사라진 펜던트

정원은 가을의 끝물에 걸려 있었다. 단풍나무가 마지막 잎을 태우듯 붉게 떨구었고, 산책로마다 낙엽이 발목까지 쌓였다. 분수대 물줄기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코끝이 시릴 만큼 공기가 찼다. 어디선가 정원사가 낙엽을 긁어모으는 갈퀴 소리가 쓱쓱 들려왔다. 엘로라는 혼자 걸었다. 세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기사 둘을 빼면. 칼리안이 아침에 붙여 준 기사들이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녀가 서면 서고, 걸으면 걸었다. 감시라고 생각했다. 아까 회랑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시종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기 전까지는.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새에 그녀 앞을 막아섰다. 창끝이 시종이 아니라 그녀 쪽을 등지고 있었다. 시종은 사색이 되어 엎어지듯 물러났다. 그 뒤로는 등 뒤의 발소리가 조금 덜 거슬렸다. '누가 가져갔지.' 로웰이 감옥에 끌려간 그 밤 이후였다. 기사들, 세드릭, 하녀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 손가락을 꼽다가 그만두었다. 꼽을수록 손이 차가워졌다. "엘로라." 단풍나무 아래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 검은 외투 어깨에 붉은 잎 한 장이 얹혀 있었다. "에녹 경." "혼자 산책이야? 기사를 둘이나 달고." "폐하께서 붙여 주셨어요." "붙여 준 게 아니라 붙여 둔 거겠지." 에녹이 웃으며 그녀 옆에 걸음을 맞췄다. 기사들이 한 발 다가섰다. 에녹이 손을 들어 보이자 그들은 머뭇거리다 멈췄다. 칭호는 빼앗겼어도 그는 여전히 선황의 피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외투에서 은은한 사향 냄새가 났다. 어릴 때부터 맡아 온 냄새였다. "얼굴이 핼쑥해. 잠은 자?" "그럭저럭요." "폐하 옆에서?" "……." "아, 미안. 대답 안 해도 돼. 네가 고른 게 아니잖아." 그가 발치의 낙엽 하나를 주워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렸다. 길고 흰 손가락이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검을 쥐어 본 적 없는 손. "에녹 경은요? 폐하 즉위하시고 나서……." "나?" 에녹이 어깨를 으쓱했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11
Baca selengkapnya

15. 무릎 위의 질투

집무실 창밖으로 잿빛 구름이 낮게 내려앉았다. 첫눈이 오려는지 공기가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벽난로만 혼자 신이 나서 장작을 탁탁 터뜨렸다. 엘로라는 오늘도 그 불 앞, 황제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탑처럼 쌓였고, 잉크 냄새와 장작 냄새가 뒤섞여 코끝에 눌어붙었다. 칼리안의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그녀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났다. 어제 분수대 앞에서 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펜던트요? 에녹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하녀들 사이에 그런 말이 돌더라며 가볍게 넘겼다. 그럴 수도 있었다. 이 궁의 벽은 전부 귀였으니까. 그래도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던 낙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늘은 서류를 안 구기네." 칼리안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떨어졌다. "얌전히 있으라면서요." "얌전한 거랑 넋 나간 건 다르지." "넋 안 나갔어요." "그래. 정원 산책은 재밌었고?" 등이 굳었다. 그의 가슴에 기대 있으니 그 굳음이 고스란히 넘어갔을 것이다. "……기사들이 일렀군요." "안 일러도 알아. 네 외투에 단풍잎이 붙어 있었어." "그게 왜요." "동쪽 정원 단풍은 다 졌어. 남은 건 서쪽 산책로뿐이고." "폐하는 단풍잎까지 세세요?" "너한테 붙은 건." "그럼 지금 제 머리에 붙은 것도 세셨어요?" "없어." "있어요. 아까 바람 불 때." 칼리안이 그녀의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은발 사이에서 손톱만 한 잎 조각을 집어냈다. 손끝으로 한 번 비비더니 그대로 벽난로에 던졌다. 불꽃이 혀를 날름 내밀어 그것을 삼켰다. "이제 없어." "태우실 것까진 없잖아요." "에녹이랑 걷다 붙은 거잖아." 엘로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남자가 지금 낙엽한테 성을 내고 있었다. "폐하." "왜." "낙엽은 죄가 없어요." "붙은 게 죄야." "그럼 저도 태우시게요? 저도 에녹 경 옆에 있었는데." "넌 안 태워." "왜요." "내 거니까." 너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08
Baca selengkapnya

16. 펜던트의 문장

장작이 무너지며 불티가 튀었다. 그 작은 소리에도 엘로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책상 위의 펜던트는 촛불 아래서 얌전히 빛났다. 제 주인이 손을 뻗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창유리에 바람이 부딪혀 얇게 떨었다. 엘로라는 무릎 위에서 내려오지도, 손을 뻗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그게 왜 폐하한테……." "북쪽 탑 계단 밑, 돌 틈." "네?" "네 유모가 숨긴 데. 남이 먼저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았지." "언제요." "네가 지하 통로로 기어 나가기 사흘 전." 사흘 전. 그때부터 이 사람은 로웰을, 이 펜던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유모가 거기 숨긴 건 어떻게……." "밤마다 북쪽 탑에 가더라고. 세탁실 간다면서." "그걸 다 보셨어요?" "기사들이 봤지. 걸음이 수상하다고 올라왔어." "그래서요." "궁금했지. 누굴 지키려는 걸음인지." 칼리안이 펜던트를 손바닥에 올렸다. 은빛이 손금 사이로 물처럼 고였다. "반역 증거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달랑 이거 하나더군." "그럼 그냥 두시지." "그냥 뒀으면 지금쯤 딴 놈 손에 있어." "돌려주세요." "싫어." "유모 거예요. 아니, 제 거예요." "그러니까 싫다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요." "돼. 네 거니까 네 목에 걸면 안 되는 거야." "……왜요." "보면 알아." 그가 사슬을 집어 그녀 눈앞에 늘어뜨렸다. 펜던트가 시계추처럼 흔들리다 멎었다. 은판 뒷면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날개였다. 한쪽 날개만 남은 새. 나머지 날개 자리는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지운 자국투성이였다. "이거 알아보는 사람이 이 궁에 몇이나 될 것 같아." "……모르겠어요." "나도 몰라. 근데 그 몇이 전부, 이걸 쥔 사람 목을 노릴 거란 건 알지." 그가 펜던트를 다시 주먹 안에 감췄다.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어. 이 궁에서 제일 안전한 데가 내 손이야." "폐하를 어떻게 믿어요." "믿지 마. 대신 딴 놈들은 더 믿지 마." 엘로라는 입술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23
Baca selengkapnya

17. 마녀의 딸

대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신과 귀족, 흰 법의를 입은 사제들까지. 높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바닥에 핏빛과 보랏빛 얼룩을 흩뿌렸다. 향로에서 피어오른 유향 냄새가 목구멍에 텁텁하게 걸렸다. 그 얼룩 한가운데 엘로라가 혼자 서 있었다. 옥좌에는 칼리안이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었다. 대전 문 앞에서 그가 한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개 숙이지 마. 엘로라는 그 말을 이 사이에 문 채 버티고 있었다.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떨리는 손은 치맛자락 속에 숨기고, 턱만은 들었다. 귀족들 틈에 에녹의 얼굴이 보였다. 미간을 모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곁에 갈색 곱슬머리의 서기관이 서류철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그레이스의 심장은." 레이너드가 한 걸음 나섰다. 목소리가 대전 천장을 때리고 되돌아왔다. "이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은빛을 낸 적이 없소." "옳소." "그럼 그 빛은 뭐란 말이오?"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레이너드 곁에 선 대신관이 두꺼운 고서를 펼쳤다. 누렇게 바랜 책장이 바스락 넘어갔다. "은빛은 마력의 색이옵니다." "그것도 아무 마력이 아니지." 레이너드가 말을 낚아챘다. "로이센 왕가의 마법사들에게서만 나오는 색이오. 이십 년 전 광장에서 탄 그 마녀도 은발이었소. 여기 원로들은 기억하실 테지." 대전이 술렁였다. 누군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앞줄의 백작 부인이 엘로라의 은발을 보고 치맛자락을 끌며 뒷걸음질 쳤다. '마녀.' 본 적도 없는 불이 발바닥 밑에서 치고 올라왔다.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었다고, 이 천장이 울리도록 소리치고 싶었다. 그 순간 어머니가 누구인지 자백하는 꼴이 된다. 엘로라는 혀끝을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렇다면 저 은발은 선황의 피가 아니라 마녀의 피."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후작." "지나쳐? 선황께서 마녀의 딸을 황녀로 둔갑시켜 황실을 기만하셨다면……." 흰 법의의 사제 하나가 앞으로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27
Baca selengkapnya

18. 에인젤의 증언

대전의 공기가 끝까지 당긴 활시위 같았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 누군가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 스테인드글라스 너머에서 바람이 가늘게 울었다. "……제가 낳은 딸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장 보러 간 하녀에게 오늘 생선 값을 묻는 것처럼. 그 담담함에 대전 전체가 얼어붙었다. 레이너드의 입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굳었다. "마, 마마. 하오나 은발은……." "내 머리를 보게, 후작." 에인젤이 제 백발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열여섯에 이미 하얗게 셌네. 외가 여인들이 다 그랬지." "하오나……." "내 딸이 은발로 태어난 게 그리 괴이한가?" "그레이스의 심장이……." "이천 년 동안 은빛을 낸 적이 없다지." "그, 그렇습니다." "그레이스의 딸이 내 외가 피까지 받은 적이 없었다는 뜻이겠지." 에인젤이 고개를 틀어 대신관을 보았다. 대신관은 고서를 끌어안은 채 눈만 굴렸다. "대신관. 그 책에 아니라고 적혀 있나?" "그, 그런 기록은 없사오나……." "그럼 됐네." 대전 뒤편에서 킥, 하고 웃음이 샜다.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대신관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엘로라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식은 차 한 잔 외엔 아무것도 내주지 않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대전 한가운데서 그녀를 위해 혀를 칼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엘로라는 옥좌 쪽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칼리안은 여전히 턱을 괸 채였다. 입꼬리 한쪽만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재미있는 연극을 맨 앞줄에서 구경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에인젤의 자줏빛 눈이 다시 레이너드에게 꽂혔다. "선황 폐하 살아 계실 땐 내 딸 출생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던 자가." "마마, 소신은……." "폐하 관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내 앞에서 마녀 타령이군. 그게 후작의 품위인가." 이번 술렁임은 레이너드를 향했다. 몇몇 대신이 슬그머니 그에게서 반 걸음씩 떨어져 섰다. "그만." 칼리안이 옥좌에서 일어섰다. 망토 자락이 계단을 쓸었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21
Baca selengkapnya

19. 빚

폐후궁전으로 가는 회랑은 해가 지자 금세 어두워졌다. 벽을 따라 늘어선 촛대에는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창밖의 시든 장미 덩굴이 바람에 유리를 긁어,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마른 소리를 냈다. 에인젤의 검은 드레스가 그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멀어졌다. "어머니, 잠깐만요!" 엘로라는 치맛자락을 걷어쥐고 뒤를 쫓았다. "제 어머니를 아세요?" "……." "진짜 어머니요. 빚이라니, 무슨 빚인데요." "……." "그분이랑 무슨 사이셨어요?" 폐후궁전 문 앞에서 에인젤이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처음으로, 정면으로. "더 묻지 마라." "왜요." "묻는 순간, 오늘 대전에서 한 내 거짓말이 헛것이 된다." "그럼 거짓말인 건 맞네요." 에인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화가 난 건지, 놀란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줏빛 눈이 엘로라의 얼굴을 더듬었다. 은발을, 푸른 눈을, 턱선을. 그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찾는 눈이었다. 선황이 그랬던 것처럼. "너는 그 여자를 너무 닮았다." "……." "그래서 나는 너를 볼 수가 없어." 문이 엘로라의 코앞에서 닫혔다. 빗장 걸리는 소리가 회랑 끝까지 길게 굴러갔다. 엘로라는 닫힌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문짝에 박힌 놋쇠 장식이 손끝처럼 차가웠다. 식은 차.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던 다과회. 미움이라고만 믿었던 것들이 하나씩 다른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누군가가 떠올라서 고개를 돌린 거라면. 그건 미움보다 더 오래 아픈 것일지도 몰랐다. 돌아오는 길, 회랑 끝 창가에 칼리안이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창틀에 등을 기대고. 기다린 사람의 자세였다. "쫓겨났네." "……보셨어요?" "저 문은 원래 잘 안 열려. 나한테도." "폐하한테도요?" "나한텐 더 안 열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 옆에 걸음을 맞췄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텅 빈 회랑을 나란히 울렸다. 그의 보폭이 평소보다 반 뼘쯤 짧았다. "안 물어보세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7-23
Baca selengkapnya
Sebelumnya
123456
...
22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