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큼은 백성들을 먼저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래.” 칼리안은 잠시 생각한 뒤 그녀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회의 후 대신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칼리안이었다면, 숫자와 원칙만 따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 늦은 밤, 두 사람은 집무실에 남아 마지막 서류를 정리했다. 동시에 같은 문서를 집으려던 손끝이 살짝 맞닿고, 둘 다 놀라 손을 멈췄다. 짧은 정적 끝에 칼리안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로라 역시 이번만큼은 먼저 손을 피하지 못했다. 방 안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보다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듯했다. “…이 손,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글쎄, 언제까지일까.” “대답을 안 하시네요.” “대답하면 재미없잖아.” “그 말버릇, 진짜 여전하시네요.” 칼리안은 짧게 웃으며 결국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서류를 정리하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의 손끝이 닿았던 그 감각을 잊지 못했다. * 그날 저녁, 로웰은 창가에 멍하니 앉은 엘로라를 발견하고 사정을 물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사람 마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늦게 깨닫는 법이랍니다.” 로웰은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한편 귀족 회의에서는 황실 혈통도 불분명한 황녀를 황제가 지나치게 감싸고 있다는 불만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었다. 훗날 황궁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의 전조가, 그렇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엘로라는 최근 로웰이 부쩍 말수가 줄고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눈빛을 보인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유를 물어도 로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길 뿐이었다. “유모, 요즘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그런가요? 그냥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봐요.” “그런 것치고는 눈빛이 너무 불안해 보이는데.”
Last Updated : 2026-07-1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