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Chapter 21 - Chapter 30

115 Chapters

19. 엘로라의 정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엘로라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게… 무슨.” “아가씨의 진짜 어머니는, 그레이스 대공가의 마지막 후계자셨습니다.” 로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자벨라 그레이스. 아가씨의 어머니의 성함입니다.” 엘로라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럼… 저는.” “아가씨께서는 뻐꾸기가 아니십니다.” 로웰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대공가의 정당한 후계자세요.” 칼리안이 그 곁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레이스 대공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근친이라는 소문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로웰이 단호하게 말했다. 칼리안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지금 그게 다행이라고요?” 엘로라가 눈물 젖은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안 다행이야?”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칼리안이 태연히 말했다. “근친이었으면 좀 곤란했을 뻔했잖아.” “곤란했을 뻔했다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엘로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안 중요해.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폐하는 가끔 진짜 이상한 데서 진지해지세요.” “칭찬으로 들을게.” “칭찬 아니거든요.”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로웰이 낮게 웃었다. “그럼, 아버지는요?” 엘로라가 문득 물었다. 로웰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오래전에,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엘로라는 그 말을 들으며 숨을 삼켰다.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귀족들의 견제였습니다. 대공가가 가진 힘을 두려워한 자들이, 아버님을 해쳤어요.” “그리고 어머님도, 아가씨를 지키다가…” “그만.” 엘로라가 손을 들어 로웰의 말을 막았다. 숨이 가빠졌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줘.” 칼리안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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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비상 회의 소집

“이 사실이 밝혀지면, 저는…” “걱정하지 마.” 칼리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가 지킬 거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일단, 이곳을 나가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해.” “그, 그 사람은요? 불을 지른 자들은요?” 엘로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찾아낼 거야.” 칼리안이 낮게 답했다. 로웰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를 가둔 건, 봉인이 파손됐던 그 무리들이었습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자꾸 대공가의 이름을 언급했어요.” 칼리안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목적이 뭐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로웰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아가씨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것 같았어요.” 엘로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를… 이용해요?” “걱정하지 마.” 칼리안이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런 말은 벌써 몇 번째 하시는지 아세요?” “몇 번을 해도 진심이니까 괜찮아.” “…뻔뻔하시긴.” “칭찬으로 들을게.” “아까도 그러셨잖아요.” “그럼 두 번 칭찬받은 거네.” 로웰은 궁 안, 가장 경비가 삼엄한 별채로 옮겨졌다. “여기라면 안전할 거야.” 칼리안이 말했다. “기사 열 명을 붙여두지.” “고맙습니다, 폐하.” 로웰이 고개를 숙였다. 엘로라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유모,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아가씨…” 로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죄송해요.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이유가 있었을 거잖아.” 엘로라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됐어.”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칼리안은 그런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제.” 한참 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봐야겠군.” “무슨 뜻이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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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넌 내 꺼야

칼리안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 그동안 떠돌던 근친의 소문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한 원로 귀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렇다면 황녀 전하는 대체 누구십니까?” “조사 중이다.” 칼리안이 대답하고서 이어 말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이 나라의 오래된 대공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대공가’라는 단어가 낯선 술렁임을 만들었다. 레이너드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말해라.” “증거도 없이 정체불명의 여인을 황실 곁에 두시는 겁니까?” 칼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증거는 곧 갖추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는요?” “그때까지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후작은 겉으로 물러섰지만, 속으로 다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엘로라는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조용히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이렇게 매번 숨어 있지 않을 거야.’ * 며칠 뒤, 두 번째 회의가 열렸다. 이번엔 엘로라가 직접 발언대에 섰다. “정말 할 건가?” 칼리안이 물었다. “네.” “떨리지 않나?” “당연히 떨리죠.” “그런데 왜 하는 거지?” “당연하죠.” 엘로라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폐하가 자꾸 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시니까, 저도 뭔가는 해야죠.” “…그거 방금 내가 한 말 그대로 돌려주는 거야?” “맞아요.” “치사하기는.” “에이, 배웠으니까 써먹는 거예요.” 칼리안이 낮게 웃었다. “그래, 해봐.” 엘로라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회의장 앞에 섰다. “여러분.” 그녀가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레이스 대공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완벽한 혈통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황실의 예법을 완벽히 따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제국을 사랑하는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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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청혼, 진짜로 하면 어쩔 거지?

회의장 뒤편, 사람들 틈에서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칼리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에녹이었다. “…네놈이 여긴 어떻게.” 칼리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에녹이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초대장 없이 온 건 아닙니다.” 그가 후작을 흘긋 바라보았다. “소개하지.” 칼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이자는, 선대 황제의 숨겨진 혈족이다.” 회의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에녹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형님께서, 벌써 이걸 밝히실 줄은 몰랐군요.” “숨길 이유가 없지.” 칼리안이 낮게 말했다. “네가 무슨 야심을 품고 있는지, 짐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야심이라니요. 저는 그저, 잊혀진 진실을 밝히고 싶을 뿐입니다.” “진실이라.” 칼리안이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진실이란, 결국 황위를 노리는 명분에 불과하지 않나.” “형님답게 냉정하시군요.” 에녹이 낮게 웃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고는 말씀 못 하시겠죠.” 그가 엘로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여인의 존재도, 형님께 아주 유용한 명분이 되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입 다물어라.” 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위협적으로 변했다. 엘로라는 그 대화를 들으며,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명분이라니.’ “폐하.”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칼리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는 명분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저는… 저 자신으로 여기 서 있는 거예요.” 에녹이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당당하시군요.” “당연하죠.” 엘로라가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저는 제가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할 거예요.”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에녹이 낮게 웃었다. “형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제 조금 알겠습니다.” 칼리안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여기서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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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쟁 발생

“무슨 일이지.” 칼리안이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섞여 있었다. “타이밍 진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 “아니야, 아무것도.” “국경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 이동이 포착되었습니다!” 기사가 보고했다. 칼리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누구의 병력이지.” “정확한 소속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레이너드 후작 가문의 사병으로 추정됩니다.” 엘로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설마.” “반란의 조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칼리안이 낮게 욕설을 삼켰다.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폐하.” “즉시 전군에 비상을 명한다.” 칼리안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그가 엘로라를 돌아보았다. “너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싫어요.” 엘로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함께 있을래요.” “위험해.” 칼리안이 말했다. “지금까지 계속 위험했어요.” 엘로라가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고집은.” “누구 닮았게요.” “…나 닮았나.” “맞아요.” 칼리안은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대신, 내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그건 원래도 그랬잖아요.” “이번엔 더 확실하게.” “얼마나 더요?” “죽어도 안 떨어질 만큼.” “그건 좀 무섭잖아요.” “그럼 다치지 않게 조심하든가.” “그건 제가 할 말이거든요?” 두 사람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성벽으로 향했다. 황궁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칼리안은 갑옷을 입은 채, 지도를 펼쳐 놓고 있었다. “후작의 병력이,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모양이군.” 칼리안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밖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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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뒤늦은 생일 선물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귀족 영애들. 그들은 하나같이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 붉은 머리의 영애가 유독 날카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지 않아 다과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아까 그들을 째려보았던 이 모임의 중심 백작 영애 에스텔이 먼저 말을 던졌다. “후후, 황녀 전하는 참 운이 좋으시네요. 폐하께서 직접 승마도 가르쳐주면서 막 챙겨주시고요.” 그것도 은근한 비아냥이었다. 그녀는 새빨간 장미같이 탐스러운 곱슬 머리를 옆으로 넘기면서 핀잔을 주었다. 엘로라가 억지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겉보기엔 칭찬이지만, 황제의 총애만 믿고 산다는 뜻이 담긴 말이군.’ 엘로라는 그 말이 별로 탐탁치 않았다. ‘근데 여기서 안 좋은 말을 꺼낼 수는 없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벅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 대신 엘로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응수했다. “…감사합니다, 영애.” 이제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별 일도 아닌 것 가지고.’ 엘로라는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이 자리도, 차려진 음식도, 자신을 감싸는 코르셋까지 다 불편했다. * 다과회가 끝난 그날 저녁. 이를 전해 들은 칼리안은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가문이 어디였지.” “폐하, 그 정도 말로 뭘 그러세요. 그냥 넘어가도 돼요.” “난 못 넘어가.” “왜요.” “내 사람을 건든 대가를 받아야지.” “그거 완전 무서운 발언인 거 아세요?” “맞잖아.” 칼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당 가문이 맡고 있던 황실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라 명령했다. 이유조차 듣지 못한 귀족들이 순식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 소식을 들은 엘로라는 곧장 집무실을 찾아갔다. “폐하, 이러시면 안 돼요. 저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건 원치 않아요.” “그럼 그냥 넘어가라는 건가.” “네, 부탁이에요.” 칼리안은 처음엔 못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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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렇게 좋아?

그가 갑자기 끼워넣은 자리는 바로 왼손 약지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했다. ”좋군, 결혼 반지 미리 받은 걸로 하겠다.“ ”설마 결혼식 때 그 반지 낄 건 아니죠?“ ”음, 글쎄.“ 엘로라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진짜 안돼요, 그러면! 그럴 거면 이리 내놓으세요!“ ”에이, 그건 안 되지. 생일선물 줬다 뺐는 게 어딨어?“ ”여기 있어요!“ 그들은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이긴 것은 이번에도 칼리안이었다. ”아하하!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끝까지 안 놓기는.“ 한 송이 꽃이 피듯 칼리안의 얼굴에도 꽃이 폈다. 엘로라에게 꽃반지를 선물받은 황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만 쳐다봐야 한다는 것도 잊고서 칼리안을 빤히 마주보았다. ‘참 잘생겼기도 하지.’ 그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 했다. 예전의 그는 무표정이거나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몰랐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예전보다 턱선이 굵어지면서 좀 더 늠름해진 상태였다. ‘뭔가 더 멋있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칼리안이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물었나?” “아니요.” “아니면 너무 잘생겨서?” “그건 더 아니거든요!” “시치미 떼기는.” 칼리안이 한두 번 해보더니 능숙한 손길로 꽃반지를 만들어 엘로라에게 줬다. “옛다, 너도 선물.” 그것도 엘로라의 약지였다. “여기다 끼우시면 어떡해요.” “뭐, 어때. 아직 결혼도 안했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칼리안은 꽃화관까지 만들어서 엘로라에게 씌워주었다. “어때, 마음에는 좀 드나?” “완전요!” “그럼 다행이고.” 엘로라도 엉성한 솜씨로 만들어 보았건만, 칼리안이 한 것보다는 못 했다. “너도 다 만들었으면 직접 나한테 씌워줘, 엘로라.”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칼리안은 그리 말했다. 대충 얼키설키 만든 새 둥지보다도 더 엉성한 꽃화관과 꽃반지. 그걸 다 쓰고 끼운 칼리안이 진심인 듯 입을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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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괴한의 공격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요.” 예전부터 자신에게 행복은 어울리지도 않았고, 이런 행복이 익숙하지도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젓고는 이리 말했다. “그런 말 말아. 앞으로는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물론 내 옆에 계속 이렇게 있는다는 조건 하에.” 역시 그의 모든 좋은 제안은 조건부였다. 그렇기에 엘로라는 여전히, 그리고 도저히 100% 안심이 되지가 않았다. 엘로라는 무섭기만 한 지난 날과는 달라진 칼리안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그가 주는 찰나의 애정에 익숙해져서는 안되겠어.‘ 그러면서도 정신을 전보다 더 바짝 차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칼리안의 마음이 사그라들기 전까지 완전히 마음을 놓는 건 절대 금물이다. 그렇게 엘로라가 굳게 다짐했다. * 며칠 후, 정원에서 칼리안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저 밖에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옮기는 건가?” 궁금해진 엘로라가 유모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로웰?” “황궁 앞 대광장에서 열리는 시장 축제가 열린대요.” 그 소식에, 창밖을 바라보던 엘로라가 잠시 넋을 잃었다. ”재밌겠다…“ 그 모습을 본 앞에서 지켜본 칼리안은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그렇게 가보고 싶나?” “어, 네…” “그럼 가지.” “정말 그래도 되나요?” 칼리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번의 끄덕임에 엘로라의 표정이 불 켜진 듯이 환해졌다. “그럼 좋아요!” “…나도.” *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마차 안. 두 사람은 평범한 귀족 남매처럼 소박한 옷차림으로 황궁을 빠져나갔다. 그때 칼리안이 엘로라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밖에서는 그냥 편하게 칼이라고 불러.” “저는 그럼 로라라고 부르세요.” “이러니까 무슨 첩보 작전같군.” “그래서 더 재밌어요.” 그렇게 도착한 축제 거리는 천막과 향긋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호위 기사들조차 멀찍이 거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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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봉인의 문양

도착한 침실. 엘로라는 방 안에서 홀로 자책했다. ‘나 때문에 벌어진 거야…‘ 그렇게 계속해서 죄책감에 짓눌렸다. 그래도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그날 밤. “오늘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칼리안이 그녀의 방을 찾아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짧은 위로가 엘로라의 굳게 닫힌 마음에 작은 균열을 남겼다. * 며칠간의 조사 끝에, 괴한이 특정 귀족 가문과 접촉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정보관은 단순히 황제가 아니라 엘로라를 황궁에서 몰아내려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칼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그는 곧바로 검을 들지 않았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 그냥 지켜만 보실 거예요?” “지켜보는 게 아니라, 함정을 파는 거지.”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위험하지. 그러니 넌 당분간 호위를 더 붙일 거야.” “호위 늘리는 거, 저 안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불편한 것보다 위험한 게 더 싫어.” 잠시 침묵하던 그는 낮게 덧붙였다. “네가 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단순한 보호 의무라기엔 너무도 개인적인 그 말에, 엘로라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그림자 기사들이 밤낮없이 귀족들의 동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 파손된 황실 봉인의 잔해를 살피던 칼리안은 낯선 문양 하나를 발견했다. 기록에 없는 그 문양은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는 서고지기에게 조사를 명했지만, 관련 기록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 그날 저녁, 엘로라는 로웰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유모, 혹시 오래된 가문 문양 같은 거 본 적 있어?” 로웰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아가씨?” “그냥, 궁금해서.”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로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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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도서실 데이트

“올해만큼은 백성들을 먼저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래.” 칼리안은 잠시 생각한 뒤 그녀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회의 후 대신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칼리안이었다면, 숫자와 원칙만 따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 늦은 밤, 두 사람은 집무실에 남아 마지막 서류를 정리했다. 동시에 같은 문서를 집으려던 손끝이 살짝 맞닿고, 둘 다 놀라 손을 멈췄다. 짧은 정적 끝에 칼리안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로라 역시 이번만큼은 먼저 손을 피하지 못했다. 방 안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보다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듯했다. “…이 손,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글쎄, 언제까지일까.” “대답을 안 하시네요.” “대답하면 재미없잖아.” “그 말버릇, 진짜 여전하시네요.” 칼리안은 짧게 웃으며 결국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서류를 정리하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의 손끝이 닿았던 그 감각을 잊지 못했다. * 그날 저녁, 로웰은 창가에 멍하니 앉은 엘로라를 발견하고 사정을 물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사람 마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늦게 깨닫는 법이랍니다.” 로웰은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한편 귀족 회의에서는 황실 혈통도 불분명한 황녀를 황제가 지나치게 감싸고 있다는 불만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었다. 훗날 황궁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의 전조가, 그렇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엘로라는 최근 로웰이 부쩍 말수가 줄고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눈빛을 보인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유를 물어도 로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길 뿐이었다. “유모, 요즘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그런가요? 그냥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봐요.” “그런 것치고는 눈빛이 너무 불안해 보이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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