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관평현의 잔칫쌀은 집집마다 밥그릇에서 한 숟갈씩 걷은 것이었다.현령은 황실 예관이 보낸 분담표를 내놓았다. 땅 한 마지기마다 쌀 한 말, 소 없는 집은 닭 두 마리, 닭도 없는 집은 장작 한 단. 잃었던 황자가 돌아오는 경사이니 가난한 자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붉은 주가 붙었다.가난할수록 더 내어 경사를 증명해야 하는 셈이었다.온보요가 물었다."거두기 시작한 것이 언제입니까.""닷새 전입니다. 거부한 집은 역모를 의심하라 하여…… 소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봄갈이를 앞둔 종자벼까지 퍼낸 집이 많았다. 지금 한 끼를 굶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들에 뿌릴 씨가 사라져 가을의 밥도 없어질 판이었다.소월백은 환영전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성문 아래 터진 쌀자루 곁에 앉아 낟알을 한 줌 집었다. 윤이 도는 좋은 쌀 사이로 볍씨가 섞여 있었다."이것이 나를 위한 것입니까."예관이 답했다."황실의 체면을 위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초라한 고을을 지나셨다는 말이 돌면—""내 체면이 백성의 씨앗보다 무겁습니까.""전하의 체면은 곧 나라의 체면입니다.""굶은 사람이 든 잔칫상도 나라의 낯이오."소월백은 잔치에 들인 물건을 적은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 금실 휘장 열두 폭, 은 술잔 스물넷, 향 백 근, 흰 말 여덟 필의 먹이까지 관평현 몫으로 적혀 있었다. 황실은 선물 하나 내지 않고 고을의 쌀로 황자를 맞으려 했다."전부 돌려주시오."현령이 놀라 무릎을 꿇었다."이미 황실 창고에 넣어 봉했습니다. 소관이 열면 목이 달아납니다.""내 잔치라 하지 않았소. 내가 취소하오.""책봉 전에는 황실 창고를 열 권한이 없으십니다."예관의 말에 소월백이 제 발목의 사슬을 들어 보였다."황자 권한은 없고 황자 잔치만 있군. 참 편리한 핏줄입니다."진묵이 성문 기둥에 기대 웃었다."이제야 궁이 어떤 데인지 배우네. 먹을 때만 아들이고 명할 때는 죄수야."소월백은 잠시 생각하다 빈 황실 가마를 가리켰다."저것은 누구 것입니까.""전하께 내린 어가입
황실 가마는 빈 채로 호송대 뒤를 따랐다.금실로 수놓은 휘장, 흰 말 여덟 필, 예관과 악공 열둘. 죄수를 맞는 행렬이 아니라 돌아온 황자를 온 나라에 보이기 위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주인인 소월백은 거름 냄새가 밴 문서 수레에 앉아 있었다.황실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 백성은 누구를 향해 절해야 할지 몰랐다. 빈 금빛 가마에 먼저 엎드렸다가 뒤의 문서 수레에서 월백을 발견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소월백은 그때마다 수레에서 내려 절하지 말라 했고, 행렬은 자꾸 늦어졌다.예관은 마침내 월백에게 가마에 한 번만 앉아 달라 청했다."경성에 전할 모양이 필요하옵니다.""살아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잘 꾸민 모양이 필요합니까.""백성은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그래서 저 수레를 타는 것이오. 내가 무엇을 지고 왔는지 보이게."문서 수레에는 관인과 증언, 풀린 사슬이 있었다. 금실 휘장보다 볼 것이 많았다.진묵은 그 꼴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왕이 되더니 좋은 가마가 생겼군.""삭왕 전하께 빌려 드릴까요.""싫어. 내 부인 가마가 더 좋아."그는 온보요의 가마 발을 걷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자리가 좁아 어깨가 붙었다. 보요가 밖의 눈을 의식해 밀어내자 도리어 다리를 길게 뻗고 눕듯 앉았다."예관이 봅니다.""보라고 타는 거야. 황실 가마가 와도 부군 자리는 안 비운다고.""가마가 그것과 무슨 상관입니까.""다 상관있어."대꾸는 억지였으나 보요의 발 아래에 제 겉옷을 접어 놓는 손은 꼼꼼했다. 아침부터 오래 앉아 발목이 붓는 것을 먼저 알아본 것이다.그는 수레가 돌을 넘을 때마다 팔로 보요의 등을 받쳤다. 겉으로는 제 자리임을 드러내는 듯 굴었으나, 실제로는 흔들림 하나가 그녀 몸에 닿는 것부터 막고 있었다.소월백이 수레에서 말했다."제 가마를 거절하신 이유가 왕비마마 옆이 좁아서입니까.""황제 동생 됐으면 남의 부인 그만 쳐다봐.""수레가 앞을 향해 있어 저절로 보입니다.""뒤로 앉아."보요가 진
금테를 두른 교지함 안에는 열쇠가 먼저 들어 있었다.소월백의 손목 쇠사슬을 여는 열쇠였다.황실 예관은 장터 바닥에 무릎을 댄 채 교지를 펼쳤다. 선황의 기록, 온 대인이 보관한 족보, 북강에서 드러난 백옥 인장과 친필을 대조한바 소월백을 선황의 둘째 아들로 볼 근거가 충분하다. 황제는 잃었던 아우가 살아 돌아옴을 기뻐한다.그 한 줄이 읽히자 서령현 사람들이 소월백을 보았다.어제까지 사칭범이라 적힌 죄수였다. 오늘은 같은 황제의 글에서 아우가 되었다. 달라진 것은 피가 아니라 글을 쓴 쪽의 필요였다.예순넷 가운데 한 사내가 제 아내에게 속삭였다."그럼 우릴 가둔 건 잘못이었나?"아내는 답하지 못했다. 황자가 참이면 그를 보았다는 죄로 가둔 일이 틀렸고, 거짓이면 오늘 교지가 틀렸다. 어느 쪽이든 옥에 갇힌 백성에게 사과하는 문장은 없었다.온보요는 그 빈자리를 기억해 두었다. 황실은 사람 하나의 이름은 되돌렸으나, 그 이름 때문에 다친 사람들의 날까지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예관이 열쇠를 들고 다가왔다."전하, 손을 내어 주십시오."소월백은 손을 내지 않았다."뒤를 읽으시오."예관의 눈이 흔들렸다.나머지 요구는 작은 글씨로 이어졌다. 소월백은 다섯째 고을에서 호송대와 갈라져 황실 가마로 갈아탈 것. 선황의 친필과 어새는 예관에게 맡길 것. 삭왕 부부와 동행한 백성은 제 고을로 돌아갈 것. 이를 따르면 앞선 사칭의 죄는 묻지 않는다.진묵이 낮게 웃었다."아우 찾은 게 아니라 짐꾼 찾았네. 증거 들고 혼자 오라고."예관이 낯을 굳혔다."황명을 가벼이 말씀하지 마십시오.""가볍게 쓴 걸 가볍다 하지 무겁다 하나."온보요가 진묵의 소매를 잡았다. 그는 입은 다물었으나 눈은 예관의 목을 벨 듯 남았다.소월백이 물었다."내가 황자라는 인정은 값입니까, 사실입니까.""사실이옵니다.""그럼 내가 저들과 함께 가도 내 피가 바뀌지는 않겠군요.""폐하께서는 궁중의 법도를—""법도는 경성에서 배우겠습니다. 길에서 벗을 버리는 법부터 배우
서령현 관인은 예순넷의 손도장 가운데 찍혔다.현령은 장터 좌판 위에 밤새 작성한 구금 기록을 펼쳤다. 잡힌 때, 먹지 못한 끼니, 맞은 자리, 풀려난 때. 형방 서리는 붓을 쥐지 못해 곁에서 한 줄씩 읽어 주었다."이 문서에 관인을 찍으면 벼슬을 잃으실 겁니다."온보요가 말했다.현령은 부은 눈으로 웃었다."이미 옥 안에서 잃었습니다. 아직 품에 남은 도장까지 빼앗기기 전에 쓸 곳이 생겨 다행입니다."그는 먼저 소월백의 책임 문서에 관인을 찍었다. 이어 온보요와 진묵이 함께 수결한 글, 장문도가 구금 장부 없이 예순넷을 가둔 기록에도 붉은 네모를 남겼다.마지막은 선황의 친필과 어새를 서령현이 보았다고 수결한 글이었다.현령이 인장을 내려놓자 예순넷이 차례로 엄지를 인주에 묻혔다. 글을 모르는 자도 자기가 갇혔고 살아 나왔다는 사실은 제 손으로 남겼다. 여덟 살 아이의 손도장이 가장 작았다.소월백은 인주 묻은 아이 손을 천으로 닦아 주었다."아저씨는 이제 왕이에요?""아직은 아니란다.""그럼 언제 돼요?""네가 다시는 이유 없이 옥에 갇히지 않게 할 수 있을 때."아이는 어려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장터의 어른들은 들었다.정오가 되자 파직패가 도착했다. 예상보다 빨랐다. 장문도가 성밖 역참에서 제 패를 먼저 날린 것이었다. 관복을 벗기고 관인을 회수하라는 형부 명이 적혀 있었다.예순넷의 가족들이 현령 앞에 무릎을 꿇으려 하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내가 더 일찍 열었어야 했습니다. 절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마마 일행이 오지 않았으면 현령도 안에서 죽었을 겁니다."형방 서리가 입 대신 며느리의 손을 빌려 말했다. 현령은 대답하지 못하고 관모 끈만 오래 만졌다. 벼슬을 잃는 순간에도 자기가 살린 사람보다 늦게 살린 사람을 세고 있었다.현령은 기다렸다는 듯 관모를 내려놓았다. 관복 띠도 풀었다. 다만 관인은 내놓지 않고 온보요에게 건넸다."회수하러 온 관리가 직접 받아 가게 하십시오. 그전까지는 이 문서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온보요는 서령현 객사 문이 닫히자마자 물었다.진묵은 낮에 군졸의 발목을 잡다 찢어진 손바닥을 물에 씻고 있었다. 대야의 물이 옅게 붉었다. 그는 대답 대신 마른 무명을 내밀었다."닦아 줘.""왕야.""손 아파."소월백이 같은 방 탁자에 앉아 있었다. 진묵은 그것을 알면서도 멀쩡한 왼손까지 내밀었다. 보요가 기가 막혀 바라보자 눈썹을 한 번 들었다. 부군 수발을 들라는, 아주 뻔뻔한 낯이었다.보요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아 물기를 닦았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무명천을 감는 동안 진묵은 소월백 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붕대를 묶은 보요의 손가락은 놓지 않았다."부군이신 것은 충분히 알겠습니다."소월백이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알면 나가.""제 혈통을 왜 먼저 조사하셨는지 듣고 나가겠습니다."진묵의 입매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보요가 왕부에 오기 전부터 누군가 온가 주변에 옛 동궁 사람을 심었어. 혼인을 깨려는 게 아니라 성사시키려는 손이었지. 내게 여자를 보내는 놈은 많았어도, 혼처를 지켜 주는 놈은 처음이었다."그는 북강에서 온 대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선황의 둘째 아들은 정말 죽었는가. 시신을 본 자는 누구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질문을 보낸 사람 둘이 경성에서 사라졌다."월백을 찾으신 겁니까.""아니. 널 노리는 손을 찾았어. 그 끝에 황자가 있었고.""진짜 황자였으면요.""먼저 잡았겠지."소월백이 물었다."죽이려고요?""보요한테 위험하면."망설임 없는 답이었다. 소월백은 헛웃음을 흘렸다."가짜여도 죽고 진짜여도 죽을 수 있었군요.""지금은 안 죽이잖아. 고마워해."온보요가 붕대를 조금 세게 당겼다. 진묵의 손가락이 움찔했다."아픕니까.""아니.""거짓말하실 때 더 퉁명스러우십니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보요가 매듭을 지은 뒤에야 손을 풀어 주었다."말했으면 넌 황자를 찾기도 전에 네가 미끼라고 생각했을 거야. 온가로 돌아가 혼인을 깨고 혼자 파고들었겠지."정
서령현령이 관인을 찍기 전, 경성에서 온 파발이 장터로 들어섰다.이번 말에는 푸른 봉투가 세 개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서령현 관아, 하나는 삭왕, 하나는 선황의 둘째 아들이라 자칭하는 죄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온보요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현령이 첫 봉투를 열었다. 형부가 전국 관아에 돌린 온 대인의 첫 문초 초본이었다. 사위와 딸, 소월백을 갈라놓으려는 질문만 뽑아 크게 베낀 글이었다.온보요는 장터 등불 아래에서 소리 내 읽었다."온 대인은 선황의 둘째 아들이 살아 있음을 언제 알았는가."답은 짧았다.삭왕이 먼저 물은 뒤에야 알았다.보요의 시선이 종이에서 멎었다. 소월백도 진묵을 보았다.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삭왕은 언제 물었는가."왕비와 혼인하기 전, 북강에서 사람을 보내 둘째 황자의 시신을 누가 보았는지 물었다.장터가 술렁였다. 진묵은 보요와 혼인하기 전부터 소월백이 살아 있을 수 있음을 따로 캐고 있었다. 온보요조차 모른 일이었다.세 번째 질문."삭왕이 가짜 황자를 세우려 했는가."모른다. 그는 시신이 없다는 사실만 찾았다. 소월백이라는 이름을 내게 처음 댄 사람은 내 딸이다.아버지는 진묵이 조사한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이 공모했다는 고리는 끊었다.그 답에는 아버지가 지킨 선이 분명했다. 진묵은 시신이 없음을 물었을 뿐 황자를 세우라 하지 않았고, 온보요는 뒤늦게 월백을 알아보았을 뿐 혼인을 미끼로 삼지 않았다. 형부가 셋의 시간을 한날로 꿰려 하자 아버지는 오른손을 잃으면서도 순서를 바로 놓았다.보요는 진묵을 보았다. 그가 먼저 찾은 것이 사실이라면 월백과 마주친 뒤 놀라지 않았던 까닭, 선황 어새를 제 병부 주머니에 넣어 지켜 온 까닭도 달리 읽혔다. 우연히 휘말린 사내의 침착함이 아니었다.진묵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해명하지 않겠다는 듯 턱을 아주 조금 들었다. 보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네 번째 질문에는 핏자국이 번졌다는 주가 붙었다."온보요는 황자 사칭을 알고 삭왕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