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귀한 대군의 후회: Chapter 11 - Chapter 20

231 Chapters

[11화] 지옥의 문이 열리다(1)

 끼이익!타이어가 주차장 바닥을 날카롭게 긁으며 거칠게 멈춰 섰다.태경은 차 문을 발로 차듯 열어젖히고 승강기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문 열어! 당장 열어!”펜트하우스 전용 승강기 버튼을 부서져라 내리쳤다.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층수가 올라가는 붉은색 숫자가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태경의 시야를 찔러댔다.띵동.문이 열리자마자 태경은 거실로 뛰쳐 들어갔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테라스 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대표님! 그게, 저희가 다가가려 했지만 사모님께서……!”태경은 경호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테라스를 향해 내달렸다.활짝 열린 통유리창 너머로 매서운 고층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그리고 그 끄트머리.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아찔한 난간 위에, 지안이 서 있었다.“송지안.”태경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가 입고 있는 낡은 흰 셔츠 자락이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고 있었다.한 발자국만 뒤로 디디면 까마득한 허공이었다.태경의 핏발 선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거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와.”“…….”“내려오라고 했어! 송지안!”태경이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지안의 발끝이 허공을 향해 반 뼘 뒤로 물러났다.“움직이지 마.”바람에 흩날리는 옅은 목소리였지만, 태경의 발걸음을 바닥에 못 박기에는 충분했다.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경을 내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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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끝없는 추락, 그리고 이질적인 각성(1)

 빛이 들지 않는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사방에 나뒹구는 고급 양주병들이 발끝에 채이며 탁한 소리를 냈다.태경은 카펫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었다.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헝클어진 지 오래였고, 날카롭던 턱선에는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있었다.대한민국 최고의 승소율을 자랑하며 법정을 호령하던 에이스 변호사 차태경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핏발 선 시선은 오직 두 손에 쥐여진 낡은 종이 한 장에 고정되어 있었다.끝부분이 검붉게 말라붙은 유서.지안의 피가 묻은 종이였다.‘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너 같은 악마와 얽히지 않기를.’‘네가 평생, 내 피를 뒤집어쓰고 지옥에 살기를.’종이를 쥔 태경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잘게 떨렸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녀의 짙은 피비린내가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지안아…….”갈라진 목소리가 텅 빈 거실의 허공을 맴돌았다.대답은 없었다.태경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어둠 속 저편에서, 낡은 하얀 셔츠를 입은 지안이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환각이 보였다.태경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떨리는 손을 뻗었다. 닿을 것만 같았다.“지안아,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하지만 허공을 가른 손끝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흩어질 뿐이었다.환각이 사라진 자리엔 끝없는 적막만이 남았다.그녀가 없는 세상.어떤 완벽한 승소 판결문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임료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저 심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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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끝없는 추락, 그리고 이질적인 각성(2)

 옥체에 아직 열이…….”“전부 다 나가라고 했다.”태경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법정에서 상대를 짓누르던 특유의 서늘한 기백.그 압도적인 살기에 눌린 자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방 안에는 다시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태경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짚었다.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뇌리에 강제로 꽂혀 들어왔다.‘진안대군 이헌.’가상 조선의 실세. 현 국왕의 이복동생.병권을 틀어쥐고 조정의 생사여탈권을 쥔 무소불위의 권력자.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숙청으로 정적들을 베어 넘긴 폭군 중의 폭군.현대의 변호사 차태경의 논리적인 두뇌가, 이헌의 기억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하며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죽지 않았다.아니, 차태경의 육신은 바닥에 부딪혀 죽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이 낯선 시대, 낯선 권력자의 몸에 완벽하게 안착했다.태경은 침상에서 내려와 맨발로 방 안을 걸었다.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며 이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임을 증명했다.방 한쪽에 놓인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거울 속에는 흉터가 희미하게 남은 턱선,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분명 차태경의 지독한 절망과 독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째서…….’태경의 주먹이 서서히 쥐어졌다.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져 마땅한 죄인이었다.그녀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그런데 왜 형벌 대신 이토록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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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형조 옥사의 그림자, 다시 열린 지옥(1)

 옥방 안, 횃불의 희미한 빛이 쓰러진 여인의 얼굴을 비추었다.산발이 된 머리카락,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창백한 뺨.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눈동자.쿵.이헌의 심장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무섭게 곤두박질쳤다.숨이 턱 막히고, 전신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송지안.’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고문으로 찢긴 저 처참한 몰골은, 며칠 전 펜트하우스 베란다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투신하던 지안의 마지막 모습과 완벽하게 겹쳐졌다.같은 얼굴. 같은 눈빛.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그 지독한 절망까지.“문 열어.”이헌의 목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깔렸다.형조판서가 기겁하며 막아섰다.“자, 자가! 아니 되옵니다! 저 계집은 내일 참수형을 받을 대역 죄인이옵니다! 대군의 옥체에 부정한 기운이……!”“당장 열어라!!”이헌의 핏발 선 사자후가 옥사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그 압도적인 살기에 옥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황급히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끼이익.무거운 옥문이 열리자마자 이헌은 미친 듯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는 짚더미 위에 쓰러진 서연의 곁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값비싼 곤룡포가 더러운 흙바닥에 끌리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지안아…… 지안아…….”이헌의 커다란 두 손이 허공에서 벌벌 떨렸다.감히 그녀의 피투성이가 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그는 서연의 얼굴 주위를 허우적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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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율법을 비트는 폭군(1)

 서늘한 아침 안개가 형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한양 도성 밖, 서소문 형장.거친 모래바닥 위로 무릎이 꿇린 서연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피와 오물로 엉망이 된 소복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모진 고문으로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빠지고, 살갗은 불에 지져져 감각조차 희미했다.하지만 서연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빨리 끝났으면.’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형조 옥사에 끌려온 뒤 줄곧 바라왔던 것처럼, 어서 이 끔찍한 숨통이 끊어지기만을 바랐다.“죄인 서연은 들으라!”단상 위에 앉은 판관이 근엄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너는 옛 역모 사건의 잔당으로 몰린 죄인으로서, 국법에 따라 참수형에 처한다!”구경꾼들의 야유와 침 뱉는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망나니가 비릿한 막걸리를 입에 머금고 번쩍이는 대도의 칼날 위로 뿜어냈다.푸우우-!허연 막걸리 거품이 칼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자, 간다!”망나니가 기괴한 춤을 추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서연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목덜미로 쏟아져 내리려는 찰나였다.“멈춰라!!!”형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동시에,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구경꾼들을 거칠게 밀치며 형장 한가운데로 난입했다.히이잉-!거대한 흑마가 앞발을 치켜들며 모래바람을 일으켰다.말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사내의 모습에, 형장의 모든 사람의 숨이 멎었다.짙은 붉은색의 곤룡포.어깨와 가슴에 수놓아진 거대한 금빛 용 문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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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율법을 비트는 폭군(2)

 매일매일 죽음보다 못한 능욕과 고통을 맛보게 할 것이다. 그것이 저 계집에게 내릴 수 있는, 율법이 허락한 가장 무겁고 잔혹한 형벌이다!”형장 안이 찬 물을 끼얹은 듯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대군의 사노비로 끌려가 평생을 고문당하며 유린당하는 삶.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형벌이라는 사실에 구경꾼들조차 숨을 죽였다.“하지만 자가! 이미 어명으로 결재가 난 사안이옵니다! 판결을 뒤집는 것은 절차상…….”판관이 마지막으로 율법의 절차를 방패 삼아 저항하려 했다.하지만 그것은 이헌이 가장 완벽하게 요리할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절차?”이헌이 판관의 얼굴 앞까지 다가가 서늘하게 속삭였다.“좋다. 절차를 따져보지. 네놈들이 어명을 빙자하여 대명률의 감형 조항을 고의로 은폐하고, 자의적인 법령 해석으로 사형을 강행한 죄. 직무 유기와 율법 오독(誤讀)으로 당장 사헌부를 움직여 네놈들의 모가지를 날려줄까?”“히익!”“아니면, 역적의 잔당을 철저히 짓밟으려는 나의 충심을 가로막고, 저 계집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려 하는 네놈들이 역적의 내통자인지 의금부에 하옥시켜 조사해 볼까.”빈틈 하나 없는 완벽한 궤변이자, 숨통을 조이는 법적 협박이었다.대군의 무소불위 권력과 흠잡을 데 없는 법적 논리 앞에 판관들의 이성은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이 판결을 강행했다간, 억지 논리에 휩쓸려 자신들의 구족이 멸해질 것이 자명했다.“마, 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결국 판관이 흙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대군 자가의 혜안이 지당하시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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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화려한 고문실과 무릎 꿇은 짐승(1)

 대군저의 육중한 대문이 굉음을 내며 열려젖혀졌다.가솔들은 기겁하며 마당 한쪽으로 물러섰다.피 냄새가 진동했다.시뻘겋게 피로 물든 곤룡포를 입은 진안대군 이헌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여인을 품에 안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당장 내의원 어의들을 모두 끌고 와라!”이헌의 사자후가 대군저의 고요를 찢었다.흑위대 무사들이 황급히 말을 타고 궐을 향해 질주했다.이헌은 서연을 자신의 침소인 안채로 곧장 데려갔다.최고급 명주 이불 위에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눕히는 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궐내 최고의 어의 세 명이 혼비백산하여 끌려왔다.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어의들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뭐 하고 있느냐! 당장 이 여인을 살려내라!”“대, 대군 자가. 하오나 이 자는 국문을 받은 대역 죄인이옵니다. 어찌 옥체에 쓰이는 귀한 약재를 역적의 핏줄에게…….”어의 하나가 덜덜 떨며 국법의 관례를 입에 올렸다.그 순간, 이헌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어 어의의 목덜미에 서늘하게 겨누었다.“역적의 핏줄?”이헌의 목소리가 지옥 밑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 낮고 차갑게 울렸다.“이 계집은 오늘부로 참수형을 면하고 내 사유 재산인 사노비로 강등되었다. 국법이 인정한 내 소유물이란 뜻이다.”“히익!”“의관(醫官)의 본분은 병자를 구휼하는 것. 네놈들이 신분을 핑계로 치료를 거부하여 내 재산에 손실을 입힌다면, 이는 명백한 국법 기만이자 직무 유기다.”현대의 변호사 시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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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끓어오르는 독배(毒杯)(1)

 “흐윽……!”서연이 질겁하며 제 목을 감싸 쥐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언제라도 이 끔찍한 사내가 다가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짐승처럼 찢어발길 것이라는 확신에 찬 방어 기제였다.이헌의 걸음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그는 서연의 피투성이가 된 맨발과, 공포로 점철된 작은 어깨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 여자는 더 끔찍한 지옥을 맛보게 된다.나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가장 잔인한 고문이다.“…….”이헌은 굳게 다물린 턱을 미세하게 떨었다.그는 더 이상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대신, 닫힌 방문의 문지방 바로 바깥쪽.서연의 시선이 닿는 그 서늘한 마루 위에 멈춰 섰다.스윽.무거운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이헌의 거대한 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침상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서연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조선의 실질적인 지배자.수만 명의 생사를 쥐고 흔드는 진안대군이, 천민으로 강등된 역적의 노비 방 문턱 너머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이헌은 고개를 숙인 채, 서연이 있는 방 안을 향해 두 손을 바닥에 가지런히 모았다.그의 넓은 어깨가 눈에 띄게 수축되어 있었다.가장 낮고 비참한 자세.그것은 권력자의 조롱도, 위선도 아니었다.오직 자신이 곁에 다가가는 것조차 공포가 될 그녀를 위한, 철저하고도 맹목적인 복종이었다.“……떨지 마라.”이헌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평소의 그 서늘하고 위압적인 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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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끓어오르는 독배(毒杯)(2)

 이 끔찍한 사내가 자신을 대군저로 끌고 온 진짜 이유.서연의 머릿속에 공포로 점철된 논리가 완성되어 갔다.살려두겠다고 한 것은 만인 앞에서의 명분이었을 뿐이다.그는 이 밀실에서, 누구도 모르게 자신을 독살하려는 것이다.아니면, 저 검은 물을 마시고 평생 이성이 끊어진 채 방구석을 기어 다니는 인형으로 만들 작정인지도 모른다.“치워…….”서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치우십시오! 당장!”“서, 서연아…….”이헌이 당황하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 부름은 서연의 공포를 더욱 맹렬하게 부추길 뿐이었다.“가까이 오지 마! 내가, 내가 그걸 왜 마셔! 저리 치워!”서연은 숨을 헐떡이며 베개를 집어 문 쪽으로 집어 던졌다.베개는 이헌의 무릎 앞에 맥없이 떨어졌다.서연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고, 방어적으로 웅크린 무릎 사이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이헌은 굳은 얼굴로 허공을 맴도는 서연의 시선을 응시했다.그녀의 눈빛은 자신을 향한 증오를 넘어, 생존을 위협받는 짐승의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탕약을 바라보는 저 질린 눈빛.‘……독이라고 생각하는군.’이헌의 가슴 한가운데가 날카로운 창에 꿰뚫린 듯한 통증이 일었다.내가 주는 것은 물 한 모금조차 독약으로 여길 만큼, 이 여자는 나를 지독한 악귀로 보고 있다.자신이 전생에 쌓아 올린 업보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참혹한 것인지, 그 서늘한 진실이 이헌의 이성을 타격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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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칼날(1)

 서연은 숨을 죽인 채 문틈으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아침부터 대군저의 마당이 요란했다.검은 관복을 차려입은 사헌부의 관료 수십 명이 병사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친 것이다.사헌부 대사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풍지를 뚫고 서연의 귓가에 꽂혔다.“대군 자가! 어서 그 역적의 핏줄을 내놓으시옵소서! 전하께서 내리신 참수형을 자의적으로 감형하시다니, 이는 명백한 국법의 유린이옵니다!”서연의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졌다.자신을 당장 끌어내어 목을 치겠다는 맹렬한 압박.어제 옥사에서 형 집행을 막아선 이헌의 행동이 조정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결국, 죽는 건가.’서연은 붕대 감긴 손으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아무리 대군이라도, 사헌부의 공식적인 감찰과 탄핵 요구를 무력으로 막아설 수는 없다.만약 이 미치광이가 자신을 내어준다면, 결국 망나니의 칼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때였다.안채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이헌이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어젯밤, 서연의 방문턱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그 비참하고 가여운 사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화려한 곤룡포를 휘날리며 선 이헌의 뒷모습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적들을 도륙 낼 듯한 포식자의 기백 그 자체였다.“사헌부가 언제부터 남의 사가(私家)에 허락 없이 군사를 끌고 들이닥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지?”이헌의 서늘한 음성이 마당을 얼어붙게 만들었다.대사헌이 흠칫 놀라면서도 꼿꼿하게 맞섰다.“이것은 국법을 바로잡기 위함이옵니다! 자가께서 어제 형장에서 행하신 감형은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된 불법이오니, 즉각 죄인을 형조로 다시 인계하시옵소서!”“불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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