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처형에 서명한 공작과 계약 결혼했다: Chapter 61 - Chapter 70

319 Chapters

61. 말은 사라지지만 서명은 남는다

“내일부터 방 앞의 경비를 두 배로 늘릴 거다.”헬레나가 말했다.“창문도 못을 박아 닫도록 하마.”“불이 나면 어떻게 합니까?”세레나의 질문에 오르센이 미세하게 움찔했다.헬레나는 눈을 내리깔았다.“시녀들이 열어 줄 거다.”“별관에도 누군가 문을 열어 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마리엘이 포크를 내려놓았다.“언니.”부드러운 부름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만두라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세레나는 마리엘을 보지 않았다.“헬레나 베일런 부인.”이름과 지위를 정확히 부르자 헬레나의 손가락이 찻잔 위에서 멈췄다.“저를 방에 가두기 위해 창문까지 막으시겠다면 서면 명령을 주십시오. 화재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자도 함께 적어 주시고요.”“네가 문서를 좋아하게 됐구나.”“말은 사라지지만 서명은 남으니까요.”처형 승인서 아래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세레나는 손을 말아 쥐지 않았다.헬레나는 잠시 세레나를 바라보다가 부채를 집어 들었다.“필요하다면 적어 주지.”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계획이 있다는 뜻이었다.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하인이 들어와 밖에 도착한 손님을 알렸다.“드레이크 후작님의 대리인이 오셨습니다.”오르센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헬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응접실로 모셔라.”세레나도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저도 가겠습니다.”“네가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제 혼인에 관한 대리인이라면 제가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헬레나는 막지 않았다.오히려 세레나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먼저 응접실로 향했다.드레이크 후작의 대리인은 마흔 살쯤 된 법률가였다.회색 예복의 단추는 목 끝까지 잠겨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한 문서 상자와 두꺼운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세레나가 들어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보다 서류를 확인하는 눈이 더 오래 머물렀다.“세레나 베일런 영애를 뵙습니다.”“제 혼인과 관련된 문서를 가져오셨습니까?”대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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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내가 선택한 곳으로 갑니다

“후작 각하께서는 영애께 충분한 기회를 드렸습니다.”“직접 만난 적도 없습니다.”세레나가 말했다.“그런데 무엇을 보고 저와 혼인하려는 겁니까?”“베일런 가문의 명예와 영애의 평판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광산 지분이 아니라요?”그레고리의 입술이 굳었다.헬레나는 세레나의 말을 막지 않았다.세레나가 분노하고, 가족과 사용인들이 거리로 쫓겨날 수 있다는 책임을 눈앞에서 확인한 뒤 결국 서명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세레나는 두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답변 기한은 언제입니까?”“내일 정오입니다.”식탁에서 들었던 시험 마감과 같은 시간이었다.성전 예비 시험 접수 마감도 내일 정오.드레이크 후작의 약혼 의향서 서명 기한도 내일 정오.세레나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원래 무도회에서 논의할 일이 아니었습니까?”“후작 각하께서 일정을 앞당기셨습니다.”“오늘 아침에요?”그레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성전이 시험 일정을 앞당긴 뒤, 드레이크 후작도 약혼 서명 기한을 같은 시간으로 옮겼다. 누군가 세레나가 어느 문을 택하든 같은 시각에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헬레나는 펜을 세레나 앞으로 밀었다.“내일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서명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저택과 사용인들을 잃게 해도?”“그 책임은 빚을 만든 사람에게 있습니다.”오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세레나, 네 어머니의 광산도 이 집도 모두 사라질 수 있다.”세레나는 아버지를 바라봤다.“어머니의 광산은 이미 장부에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오르센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뜻이냐?”“아버지께서 서명한 문서부터 확인하세요. 제 서명을 받아 오기 전에요.”세레나는 응접실 문으로 향했다.헬레나의 목소리가 등을 붙잡았다.“내일 정오까지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다.”세레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봤다.“그렇다면 내일 정오까지 저를 지키셔야겠군요.”“무슨 뜻이지?”“제가 사라지면 곤란하실 테니까요.”헬레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굳었다.세레나는 문을 열고 응접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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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문밖의 이름

양탄자 아래 드러난 철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물건처럼 보였다.표면에는 붉은 녹이 얼룩져 있었고, 손잡이 주변에는 석탄 가루가 기름때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세레나는 촛대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손바닥으로 문 가장자리를 훑었다. 못을 박아 닫은 창문 밖에서는 경비의 등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오갔고, 방문 앞에 자리한 시녀들이 의자를 끄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지금 문을 열다가 큰 소리가 나면, 별채 전체가 잠들기 전에 탈출 계획부터 끝날 수 있었다.에마가 붕대 감은 오른손을 몸 가까이 붙인 채 무릎을 굽혔다.“벤 아저씨는 손잡이를 두 번 들었다가 아래로 밀면 열린다고 했어요.”세레나는 손잡이 아래의 잠금 홈을 살폈다.“그분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이 언제입니까?”“십오 년 전쯤이라고 했어요. 석탄을 지하 저장고로 옮기던 길이었는데, 새 보일러실을 만든 뒤에는 막았다고요.”십오 년 동안 방치된 통로라면 지도대로 이어져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천장이 내려앉았거나, 물이 차 있거나, 반대쪽 출구가 벽으로 막혔을 가능성도 있었다.그러나 세레나에게 남은 시간은 내일 정오까지가 아니었다.헬레나가 창문에 못을 박고 경비를 늘린 순간부터, 다음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새벽까지 기다리다 방을 수색당하면 세리스 베인의 서류와 어머니의 연구서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에마.”세레나는 손잡이를 잡기 전에 그녀를 불렀다.“지금이라도 방에 남아도 됩니다.”에마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철문을 열기 직전까지 오셔서 또 물으시네요.”“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통로 상태를 모릅니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그래도 저는 여기 남을 생각입니다.”세레나가 시선을 들었다.에마는 세레나를 따라 저택을 떠나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아가씨가 나가신 뒤에도 누군가는 이 방에 있어야 해요. 아침에 시녀들이 문을 열 때까지 시간을 벌고, 벤 아저씨와 미나가 의심받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요.”“에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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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위치를 알릴 의무는 없다

“공작님께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으실 건가요?”세레나의 손이 계단 첫 칸 위에서 멈췄다.테오도르가 보낸 편지는 약제함 안쪽에 들어 있었다.성전이 어머니의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는 경고, 시험장에 가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는 문장, 판단에 필요한 사실만 전달한다는 말. 이전의 테오도르라면 직접 찾아오거나 공작가의 마차를 보내 세레나를 옮기려 했을 것이다.이번에는 문밖에서 기다리지도 않았다.그가 남겨 준 거리만큼 세레나도 자신의 선택을 지킬 수 있었다.“공작님께서 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그래도 아가씨가 사라지면 걱정하실 텐데요.”“걱정은 공작님께서 감당하실 몫입니다.”세레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제가 그분을 안심시키기 위해 위치를 알릴 의무는 없어요.”에마는 더 묻지 않았다.세레나가 철문 아래로 내려간 뒤, 에마가 마지막으로 촛대를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열린 문과 검은 계단이 놓였다.“문을 닫으면 혼자 다시 열 수 있겠습니까?”세레나가 물었다.“벤 아저씨가 남긴 쇠막대를 걸어 두면 돼요. 아침에 경비가 들어오기 전에는 침대에 누워 있을게요.”“불이 나거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시간을 벌지 말고 바로 나오세요.”“아가씨도 위험하면 시험을 포기하세요.”세레나는 대답하기 전에 한 박자 쉬었다.“살아서 다음 기회를 찾겠습니다.”에마가 철문을 닫기 시작했다.좁아지는 틈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가세요, 아가씨.”세레나는 계단 아래로 몸을 돌렸다.철문이 닫히며 빛 한 줄기가 사라졌다. 이제 손에 든 촛불만이 세레나의 얼굴과 통로의 벽을 희미하게 밝혔다.등 뒤에서 잠금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전생에는 테오도르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수없이 문을 나섰다.이번에는 자신의 삶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저택을 떠나고 있었다.석탄 통로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벽에는 검은 가루가 두껍게 내려앉았고, 천장 곳곳에서 떨어진 흙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세레나는 촛불을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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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세레나는 집게 손잡이를 천천히 눌렀다.젖은 나무가 안쪽에서 조금씩 벌어졌다. 첫 번째 고정못이 빠질 때 금속이 울리려 했지만, 철망을 감싼 붕대가 진동을 먹었다.두 번째 고정못까지 빼내자 철망 아래가 손바닥 하나만큼 들렸다.세레나는 약제함을 먼저 밀어 넣은 뒤 바닥에 엎드려 몸을 통과시켰다. 치맛자락이 철망 모서리에 걸렸지만, 억지로 당기지 않고 작은 칼로 안감 일부만 잘라 냈다.바깥으로 빠져나온 순간 하역장 반대편에서 등불이 나타났다.세레나는 빈 석탄 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경비 둘이 등불을 들고 하역장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바닥을 살폈고, 다른 사람은 세탁물 수레의 덮개를 들춰 봤다.“통로가 있다면 이 근처일 텐데.”“오래전에 막았다고 들었습니다.”“부인의 명령이야. 직접 확인해.”세레나는 숨을 얕게 줄이지 않았다. 천천히 코로 들이마시고, 더 천천히 내쉬었다. 급한 호흡은 가슴과 어깨를 크게 움직이게 했고, 좁은 곳에서는 옷감 스치는 소리까지 키웠다.경비가 석탄 상자 쪽으로 다가왔다.그 순간 하역장 바깥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세탁물을 막아 두면 아침 식탁보는 누가 준비하라는 겁니까?”미나였다.그녀는 커다란 빨랫감 수레를 밀며 경비에게 다가왔다. 평소처럼 투덜거리는 목소리였고, 세레나가 근처에 있다는 기색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부인의 명령으로 하역장을 확인하고 있다.”“그 명령 때문에 부인 식탁에 얼룩 묻은 식탁보를 올리게 되면 두 분 이름을 말씀드려도 되겠네요.”경비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미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레를 하역장 가운데에 세웠다. 젖은 천 냄새가 퍼졌고, 수레 바퀴 하나가 석탄 상자 가까이까지 들어왔다.세레나는 수레 아래에 접혀 있던 검은 천을 발견했다.약속된 신호는 아니었다.미나는 세레나가 어느 출구를 사용할지 몰랐다. 다만 하역장에 경비가 붙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세탁 수레를 가져와 우연처럼 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세레나는 경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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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제가 남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처음 말한 이름이었다.낯선 소리였지만 혀끝에서 흔들리지는 않았다.세레나의 방이 비었다는 사실은 아침 식사 한 시간 전에 드러났다.시녀들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자 자물쇠를 열었다.침대 위에는 사람의 몸처럼 이불이 부풀어 있었지만,안에는 베개와 접은 담요만 들어 있었다.창문에는 못이 그대로 박혀 있었고 문도 밤새 열리지 않았다.양탄자 아래의 철문이 발견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헬레나는 열린 통로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르센은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채 방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리엘은 문가에 서 있었고, 에마는 침대 옆에서 시녀 둘에게 붙잡힌 상태였다.“어디로 갔지?”헬레나가 물었다.에마는 창백했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모릅니다.”“네가 몰래 문을 열어 줬겠지.”“철문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완전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세레나가 어떤 길로 빠져나와 어디로 향했는지는 정말 알지 못했다.헬레나는 에마에게 다가가 붕대 감긴 손을 잡았다.상처를 누르지는 않았다.오히려 손목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붕대 상태를 살폈다. 그 조심스러운 행동 때문에 에마의 얼굴이 더 굳었다.“세레나가 치료해 준 손이구나.”“라울 의원님께서 봉합하셨습니다.”“그 아이가 곁에서 도왔겠지.”헬레나는 에마의 손을 놓았다.“주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으니 충성심은 칭찬할 만하구나. 하지만 그 주인이 너를 남겨 두고 혼자 떠났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거다.”에마는 다친 손을 가슴 가까이로 가져왔다.“제가 남기로 했습니다.”헬레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네가 선택했다고?”에마는 대답하지 않았다.세레나가 저택 사람들에게 퍼뜨린 가장 위험한 것은 탈출 계획이 아니었다.자신에게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헬레나는 모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성전 시험장과 남부 성문에 사람을 보내. 세레나의 이름뿐 아니라 엘레노라와 관련된 가명도 전부 확인해.”마리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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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선택한 길을 막지 않는다

“하지만 영애는 아직 베일런가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보호를 이유로 창문에 못을 박았다는 보고를 받았다.”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지만, 전령은 더 말하지 못했다.“납치나 생명 위협의 증거가 생기면 다시 연락하라고 해. 그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전령이 물러난 뒤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성전 시험장으로 가셨을 가능성이 큽니다.”“알고 있다.”“대신관 쪽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영애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테오도르는 책상 위에 펼쳐 둔 성전 공고를 바라봤다.그 역시 세레나가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했다. 시험장 주변을 봉쇄하거나, 기사들을 민간인으로 위장해 붙이는 방법도 있었다.그러나 세레나가 그것을 알아차리면 보호가 아니라 감시로 느낄 것이다.“평소 순찰은 유지해.”“그 이상은 하지 않으시겠습니까?”테오도르는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제도 남부로 이어지는 지붕들 위로 아침빛이 퍼지고 있었다. 수많은 마차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리에서 세레나를 찾으려 한다면 찾을 수 있었다.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세레나가 선택한 길을 내가 막지는 않는다.”로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테오도르는 창틀에 손을 올렸다가 천천히 거뒀다. 붙잡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손을 멈추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거리가 있었다.“다만 성전이 시험 응시자를 불법으로 구금하거나 신분 확인 없이 데려가면 즉시 보고해.”“베일런 영애만이 아니라 모든 응시자를 대상으로 확인하라는 말씀이십니까?”“그래.”특정한 한 사람을 위한 병력은 그녀를 드러내게 만들 수 있었다.대신 누구든 부당하게 끌려가지 못하도록 길을 열어 두는 것.지금의 테오도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그는 세레나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서랍에 넣지 않았다.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위치를 묻지도 않았다.그래도 그녀가 살아서 자신의 이름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랐다.루멘 성전 외곽 진료소 앞에는 정오가 되기 전부터 지원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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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진단 없이 힘부터 넣지 마라

“성력부터 넣지 마세요.”사제가 고개를 들었다.“당신은 누구지?”“27번 지원자입니다.”세레나는 남자 옆에 무릎을 꿇되 바로 몸에 손대지 않았다.“경련이 있습니까?”옆에 있던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갑자기 숨을 크게 쉬더니 쓰러졌어요.”세레나는 남자의 입술과 동공, 손에 쥔 작은 유리병을 확인했다. 병 바닥에는 흰 침전물이 남아 있었고, 마개에서는 금속성 냄새가 났다.성력 증폭제와 각성제를 섞은 물질이었다.맥을 확인해도 되는지 묻기에는 의식이 없었고, 생명 위험이 우선이었다. 세레나는 손목을 짚었다.성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막힌 곳은 없었다. 가슴으로 몰린 흐름이 지나치게 강해졌고, 호흡은 빨랐으나 기도가 닫힌 상태도 아니었다. 성력을 추가하면 심장 부담만 늘어날 수 있었다.“창문을 열어 주세요.”세레나가 주변 지원자들에게 말했다.“한 분은 기록관을 부르고, 다른 분은 이 사람이 마신 병을 그대로 보관하세요. 물을 억지로 먹이지 마시고요.”사람들은 그녀가 지목한 뒤에야 움직였다.세레나는 남자의 목깃을 느슨하게 풀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토할 경우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한 뒤 호흡 횟수를 세었다.성전 보조 사제가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왜 성력을 쓰지 않는 거지?”“독성 물질 때문에 심장이 과하게 뛰고 있습니다. 성력으로 순환을 더 빠르게 만들면 상태가 악화될 수 있어요.”“치료는 성력을 공급하는 일이다.”“진단 없이 힘부터 넣는 것은 치료가 아닙니다.”주변이 조용해졌다.보조 사제의 얼굴이 굳었지만, 쓰러진 남자가 기침하며 몸을 움직이자 반박하지 못했다. 세레나는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뒤 그에게 마신 약의 양과 시간을 물었다.남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헛구역질만 했다.“시험을 잘 보려고 두 병을 섞었어요.”그와 함께 온 여성이 말했다.“성력 측정 전에 마시면 수치가 오른다고 해서…….”세레나는 유리병을 빛에 비춰 봤다.바닥에 남은 흰 가루 사이로 은빛 입자가 섞여 있었다. 정제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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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검은 태양의 시험

“당신을 기다린 분이 계십니다.”검은 띠를 두른 사제가 문을 완전히 열었다.일반 시험실에서 들려오던 지원자들의 기침과 종이 넘기는 소리는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끊겼다. 안쪽에는 창문이 없었고, 천장 가까이에 매달린 백휘석 등잔 두 개만이 희고 차가운 빛을 내리고 있었다. 벽에는 루멘 성전의 태양 문양 대신 광선이 검게 칠해진 낯선 상징이 걸려 있었으며, 방 중앙의 침상에는 한 남자가 두꺼운 천에 덮인 채 누워 있었다.사제는 세레나가 들어오자 문을 닫았다.잠금쇠가 걸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문 바깥에 사람 둘이 자리를 잡는 기척이 느껴졌다.세레나는 방 한가운데로 곧장 들어가지 않았다.침상 옆에는 은제 대야와 성수병, 백휘석 조각이 놓여 있었고, 작은 탁자에는 봉합 도구와 약초 가루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환자를 위한 준비라기에는 물건의 종류가 지나치게 많았다. 치료사가 무엇부터 집는지 지켜보기 위해 일부러 선택지를 늘어놓은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약제함의 가죽끈을 어깨에서 내리며 물었다.“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시험입니다.”중년 사제는 침상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우리는 증상만 제공합니다. 지원자는 진단과 치료법을 제시하면 됩니다.”“환자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까?”“필요하다면.”“동의는 받으셨습니까?”사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무슨 동의를 말하는 겁니까?”“시험에 실제 환자를 사용하는 데 동의했는지 묻는 겁니다. 의식이 있다면 진찰과 처치에 대해서도 본인에게 먼저 물어야 하고요.”사제는 잠시 침묵하다 침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말할 수 있겠나?”천 아래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할 수 있습니다.”남자는 의식이 있었다.세레나는 침상 가까이 다가가되 손을 뻗기 전에 얼굴부터 확인했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고, 입술은 말라 있었으며 눈동자는 빛에 지나치게 느리게 반응했다. 목 아래에는 땀이 맺혔지만 손끝은 차가웠다.“세리스 베인입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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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지연된 책임까지 질 수는 없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손끝이 피부에 닿자 성맥의 흐름이 펼쳐졌다.불규칙하게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손목에서 팔꿈치,가슴으로 이어지는 길은 살아 있었으나 지나치게 빠르고 탁했다. 성맥 사이에는 흰 가루 같은 빛이 달라붙어 있었고, 신장 쪽으로 향하는 흐름은 붓기 시작한 조직에 눌려 가늘어지고 있었다.성력을 사용해 탁한 흐름을 밀어내는 일은 가능했다.하지만 독성 물질이 몸 안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흐름만 빠르게 만들면, 잠시 증상이 나아진 뒤 더 깊은 손상이 온다.세레나는 손을 뗐다.“작업장에서 사용한 광석을 가져왔습니까?”중년 사제가 탁자 위의 백휘석을 가리켰다.“이것이다.”세레나는 조각을 맨손으로 들지 않았다.약제함에서 집게를 꺼내 표면을 살핀 뒤, 깨끗한 유리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정제된 백휘석은 빛을 받을 때 안쪽에서 일정하게 반짝이지만, 탁자 위 조각은 한쪽 면에 잿빛 점이 몰려 있었다. 불순물이 고르게 제거되지 않은 불량 정제석이었다.“이것을 치료에 사용하라고 준비하신 겁니까?”“환자의 성맥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지금 사용하면 안 됩니다.”사제의 표정이 굳었다.“백휘석은 치료사의 부담을 줄이고 환자의 회복을 돕는 성물이다.”“정상적으로 정제됐을 때 이야기입니다.”세레나는 유리 접시 아래 흰 천을 받쳤다.“이 조각은 불순물이 남아 있고 표면이 균일하지 않습니다. 이 환자는 같은 광석을 자르고 가루를 마신 뒤 증상이 시작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원인으로 의심되는 물질을 다시 몸 가까이 두는 것은 치료가 아니에요.”“그렇다면 신성력을 직접 사용하겠다는 건가?”“아닙니다.”“성수도, 백휘석도, 신성력도 쓰지 않으면 무엇으로 치료할 생각이지?”세레나는 환자의 젖은 작업복이 침상 아래에 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천 가장자리에는 흰 가루가 붙어 있었고, 땀에 젖은 부분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환자가 이 방으로 옮겨진 뒤에도 오염된 옷을 갈아입히지 않은 것이다.시험을 위해 일부러 남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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