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81 - Chapter 90

215 Chapters

81화 사흘에 한 번

문이 열린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내관이 등을 들고 서 있었다.벌을 내리러 온 자도 놓아 주러 온 자도 그런 얼굴을 하지는 않는다.아무 얼굴도 하지 않았다.물러가라는 분부라고 했다. 한경이 일어섰다.흙바닥에 앉아 있던 치맛단이 무릎에서 뻣뻣하게 접혔고, 쓸린 자리가 천에 붙어 떼는 데 시간이 걸렸다."폐하는요."내관이 등을 든 손을 조금 내렸다.등을 든 손만 조금 내려갔다."오늘 밤에 그거 드셨어요?"내관이 등을 든 손을 반 치 내렸다.등불이 내려가면서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소인이 아뢸 자리가 아닙니다.""드셨는지 안 드셨는지만요.""…""안 드셨네요."내관이 앞장섰다. 회랑을 나가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궁문 앞에서 가마를 부르는 것까지 하고 물러갔다.* * *같은 시각 침전에는 은쟁반이 그대로 있었다.어의가 세 번 아뢰었다.오늘은 도지신 것이니 반드시 진어하셔야 한다는 말, 거르셔서 이렇게 되신 것이라는 말, 열흘을 거르면 다음은 자리보전이라는 말.황제는 안석에 기대지 않고 앉아 있었다.무릎에 얹은 손을 소매 안으로 넣지 않았다.떨림이 그대로 보이는 자리에 두고 있었다."오늘 낮에 짐의 앞에 온 여인이 있었다."어의가 고개를 들었다.들었다가 곧 도로 내렸다."그 여인이 무어라 하더냐."아뢸 말이 없다는 대답이 왔다.무엄하여 끌어냈다는 말이 뒤에 붙었다."짐이 묻는 것은 무엄한지가 아니라 무어라 했느냐이다."어의가 대답하지 못했다.이마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들을 생각이 없었으니 못 들었겠지."황제가 손을 들어 은쟁반을 밀어 놓았다.미는 손이 떨려서 쟁반이 소반 위에서 한 번 긁혔다."물러가라."어의가 물러갔다. 물러가면서 문지방에서 한 번 돌아봤는데, 황제는 밀어 놓은 쟁반을 보고 있었다.* * *이튿날 아침 편전에 명이 내렸다.어공 물목 입회에 관한 종이였다.육가 안주인이 사흘에 한 번 드는 것을 매일로 고치라는 명이었고, 궁에 드는 시각과 나가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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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매일

그날부터 가마가 매일 아침 마당에 놓였다.초하가 새벽에 일어나 옷을 챙겼다.흰빛에 가까운 잿빛 저고리와 남색 치마, 사흘에 한 번은 옥색.궁에 드는 옷은 색이 튀면 안 된다는 것을 초하가 어디서 들어 왔다.한경은 매일 같은 자리에 섰다.태의원 마당 시렁 사이, 세 번째 궤짝 앞.당귀와 백출과 황기를 꺾어 소리를 듣고, 단면을 보고, 도로 놓았다.궁 사람들이 그 여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상중이던 여자라 했고, 다음에는 어공 낸 집 안주인이라 했고, 그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말이었다.나가는 시각은 매일 달랐다.어떤 날은 사시에 나갔고, 어떤 날은 해가 다 지고 나서였다.내관부에서 문을 열어 주는 시각이 그날그날 달랐다.* * *강목은 그 여자가 마당에 있는 동안 붓을 오래 들고 있었다.물목을 짚는 손이 전보다 느려졌다.느려진 것을 서리들이 알아챘고, 알아챈 것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닷새째 되는 날 강목이 물목 종이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부인. 어제는 몇 시에 나가셨습니까.""…해 지고요.""그제는.""사시에요."강목이 붓을 놓고 궤짝 뚜껑을 덮었다."부인. 궁에 드는 시각과 나가는 시각을 정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궁 안에 두고 싶을 때 두겠다는 뜻입니다.""물목이 많다잖아요.""물목은 사흘 치를 하루에 다 봐도 반나절입니다."한경이 뿌리를 하나 집어 들었다.집은 것을 코에 대지는 않았다."그럼 왜요."강목이 대답하지 못했다.대답하지 못하는 얼굴을 한경이 봤다.보고, 뿌리를 도로 놓았다."강 나리.""…예.""나리 요즘 얼굴이 더 안 좋아요.잠을 안 주무시죠."강목이 웃었다. 눈부터 웃는 그 웃음이었는데, 오래가지 않았다."…부인은 사람 얼굴을 참 잘 보십니다.""약재 보는 눈으로 보는 거예요.""…그 눈으로 저를 보시는군요."한경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을 했다.강목이 붓을 도로 들었다.* * *그 무렵 육가에서는 저녁상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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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사삿집

성 밖 사삿집을 찾은 것은 오어멈이었다.개천 건너 셋째 마을, 담이 낮고 마당이 넓은 집이라 했다.약재 궤짝이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이 여럿인데 약방 간판은 없다고 했다.밤에 사람 우는 소리가 난다는 말도 있었으나 그것은 확인된 것이 아니라 했다.한경이 그날로 나섰다.강목이 궁에서 나오는 시각을 기다리지 않았다.오어멈과 종 둘을 데리고 걸어서 갔고, 가마를 부르지 않았다.가는 길에 상복 대신 걸치고 나온 무명 배자의 끈이 두 번 풀렸다.두 번 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맸다.* * *대문이 열려 있었다.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약재가 널려 있었다.널린 것이 좋은 물건일 리가 없었다.뿌리가 두 번 캔 것이었고, 마르다 만 것을 뒤집지도 않고 널어 놓아 아래쪽이 상해 있었다.방이 넷이었다. 셋은 문이 열려 있고 하나는 닫혀 있었다.주인이 나왔다. 사십 줄의 사내였는데 손이 깨끗했다.약을 만지는 자의 손이 그렇게 깨끗할 수 없다.무슨 일로 오셨느냐는 물음을 한경이 지나쳤다.대신 마당을 가로질러 닫힌 방 앞으로 갔다.주인이 앞을 막았다.막는 팔이 반쯤만 올라갔다."거기는 병자 방입니다.""비켜요.""부인. 여기가 어디라고—"한경이 그 사내의 소매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밀리면서 사내가 두 걸음 물러났고, 물러나면서 제가 왜 물러났는지 몰라 하는 얼굴을 했다. 문을 열었다.* * *방 안에 아이가 넷 있었다.셋은 앉아 있었고 하나는 누워 있었다.누운 아이가 그 아이였다.앞니가 아직 안 갈린 아이였다.얼굴이 부어 눈이 반쯤 감겨 있었고, 입가에 마른 것이 붙어 있었다.이불이 없었고 짚만 깔려 있었다.한경이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눈꺼풀을 열었다."…며칠 됐어요."주인이 문 밖에서 발을 옮기지 못했다.문지방을 넘어오지도 않았다."며칠 됐냐고요.""…나흘입니다.""뭘 먹였어요.""…약을 먹였지요.그게 여기 하는 일이니."한경이 아이의 입을 벌려 잇몸을 봤다.검푸른 선은 없었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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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소금 아닌 것

아이는 서하당 곁방에 눕혔다.혀가 헐고 목이 부은 것은 오래 굶은 데다 상한 것을 먹은 탓이었다.죽을 묽게 쑤어 다섯 번에 나눠 먹이고, 소금물로 입을 헹기게 했다.사흘째 되는 날 아이가 앉았다.나머지 셋은 오어멈이 성 안 절에 데려다 두었다.절에서 아이를 받는 데는 값을 부르지 않았고, 대신 한경이 쌀 두 섬을 보냈다.아이 어미가 술청에서 왔다.와서 곁방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마당에 섰다."들어와요.""…부인. 소인이.""들어오라고요. 애가 엄마 찾았어요."여자가 문지방을 넘었다.아이가 어미를 보고 제일 먼저 한 말이 배가 고프다는 말이었다.사흘 만에 처음 낸 소리였다.여자가 울었다. 울면서, 애가 배고프다는데 왜 우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 얼굴이었다."…부인. 얘가 원래 밥을 이렇게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밝혀야 살아요.""…예.""대신 다 나으면 우리 집 쌀값은 물어내요."여자가 울다 웃음을 터뜨렸다.우는 것과 웃는 것이 한꺼번에 나와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문 앞에 섰던 초하도 따라 웃었다.* * *강목이 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성 밖 사삿집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마루에 앉지도 않고 서서 물었다."혼자 가셨습니까.""오어멈이랑 종 둘이랑요.""…부인.""애가 죽게 생겼는데 나리 퇴청하실 때까지 기다려요?"강목이 입을 다물고 마루에 앉았다.앉아서 한참 있다가 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접힌 것이었고 여러 번 접혀 있었다."성 밖 그 집 문서를 알아보았습니다.""벌써요.""…부인이 궁에 드신 낮에요."펴 놓은 종이에 이름이 셋 적혀 있었다.집을 산 자, 세를 받는 자, 그리고 그 세가 어디로 가는지.세 번째 칸에 상호가 하나 있었다.「남포(南浦) 조운」한경이 그 글자를 봤다.획이 굵고 반듯한 글씨였다."…조운이면 배요?""예. 성 남쪽 나루에서 소금을 나르는 배입니다."한경이 마루 기둥에 손을 짚었다.나무가 낮볕을 먹어 미지근했다."…심가 아저씨가 배를 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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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어전

육정이 편전에 든 것은 사시였다.부름의 명분은 어공이었다.가을 물목에 빠진 것이 있어 낸 집에 묻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것은 관가에서 서리를 보내 물으면 될 일이었다.관복을 입고 궁문을 지나면서 육정은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 걸었다.편전은 넓고 조용했다.승지 둘이 벽 쪽에 서 있었고, 발은 드리워 있지 않았다.황제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등을 기대지 않았다.검은 곤복이었고 금실이 깃과 소매 끝에만 들어가 있었다.육정이 그것을 보고 값을 매기려다 매기지 못했다.관가에서 물목을 스무 해 보아 온 눈이었다.비단의 결은 짚였고 금실의 산지도 짚였는데, 깃의 시침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났는지가 보이지 않았다.실밥이 한 올도 나와 있지 않았다.이런 옷은 짓는 사람이 여럿이고 그 여럿이 서로 얼굴을 모른다.값을 셈하려면 사람 수부터 세어야 했는데, 세다가 그만두었다.옥대 하나였다. 그 밖에 몸에 걸친 것이 없었다.없는데도 방 안의 균형이 그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육정은 절을 올리기 전에 제 관복 소매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붓을 놓은 자리에 종이가 한 장 있었다.글자가 다 쓰여 있었다.육정이 절을 올렸다.* * *어공 물목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빠진 것이 셋이라 했고, 남방 것으로 채우겠다는 대답에 그리하라는 말이 왔다.그것으로 부름의 명분은 끝났다.끝나고도 물러가라는 말이 오지 않았다."육 대인.""예, 폐하.""성 남쪽에 밭이 있다지."육정의 등이 굳었다.굳은 것이 어깨선에서 먼저 보였다."…있었사옵니다.""있었다.""…지난달에 넘겼사옵니다."무엇에 넘겼느냐는 물음이 오지 않았다.황제가 종이를 밀어 놓았다."남쪽 세 고을이 비어 있다.자사(刺史) 자리다."승지 둘이 고개를 들었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도로 내렸다."…폐하.""육가는 대대로 어공을 내온 집이고, 대인은 관가에서 물목을 보아 왔다.물건이 어디서 나고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이치에 맞는 말이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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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일찍 온 가마

가마가 낮에 중문에 닿았다.해가 아직 마당 한복판에 있었다.초하가 뛰어나와 주렴을 걷다가 시각을 보고 한 번 멈칫했다."부인. 벌써요?""내관부에서 나가라 그러던데.""물목은요.""세 짝 남았는데 내일 보래.""내일 보래요?""응.""궁에서요?""응."초하가 주렴을 든 채로 서 있었다.궁이라는 데가 내일 보자는 말을 하는 데인 줄 몰랐던 얼굴이었다."거기 사람들도 내일 보재요?"한경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인이 또 무얼 잘못 여쭈었습니까.""아니. 너 궁을 무슨 절간인 줄 아는구나.""절간은 아니고요, 소인이 아는 데가 없어서 그런데, 거기가 밥은 준대요?아씨 아침 안 드시고 가셨잖아요.물목을 세 짝이나 보시는데 밥도 안 주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아니 아씨, 밥은 드셨어요? 안 드셨죠. 얼굴이—""초하야.""예.""밥 얘기부터 했으면 내가 더 빨리 대답했지."한경이 가마에서 내렸다.내리면서 치맛단을 한 번 털었다.마루에 대부인이 나와 앉아 있었다.굳은 손을 무릎에 놓고, 며느리가 마당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일찍 왔구나.""예."대부인이 무어라 더 말하려다 말았다.말하려다 만 것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 *육정이 돌아온 것은 해가 기울고서였다.관복이 젖어 있었다.비가 오지 않았는데 등판이 젖어 있었고, 갈아입지 않고 사랑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저녁상을 물리고 한경이 사랑으로 갔다.문을 열자 그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관복을 그대로 입은 채였고, 갓끈을 풀지 않았다."오늘 궁에 드셨다면서요.""어공 물목 때문이오.""물목요.""…""물목이면 서리를 보내지, 왜 나리를 불러요."육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한경이 문을 닫고 들어와 앉았다."무슨 말 들으셨어요.""아무것도.""나리.""부인."육정이 갓끈을 풀었다.푸는 손이 두 번 어긋났다."오늘은 왜 일찍 오셨소.""내관부에서 나가라던데요.""어제는 해 지고 나오셨소.""오늘은 사시에 나가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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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돌아온 아이

자시 무렵 곁방 쪽에서 소리가 났다.아이가 자는 방이라 한경이 등을 들고 나갔다.아이는 자고 있었고 어미가 그 옆에 웅크려 있었다.소리는 곁방이 아니라 그 너머, 뒷문 쪽이었다.빗장이 안에서 걸려 있었다.걸린 빗장을 누가 밖에서 두 번 두드렸다.두드리는 소리가 크지 않았다.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한경이 등을 낮추고 문에 귀를 댔다. 나무가 차가웠다."부인." 빗장을 뺐다.* * *서란이 서 있었다. 한 달 만이었다.얼굴이 반쯤 상해 있었고 광대뼈 아래가 부어 있었다.옷은 이 집에서 입던 것이 아니었고, 어디서 얻어 입은 남자 옷이었다.발에 신이 한 짝뿐이었다.들어오라는 말을 하기 전에 서란이 문지방을 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부인. 소인이 돌아왔습니다."한경이 그 팔을 잡아 일으켰다.일으키는데 팔이 가벼웠다.곁방으로 데려가 앉히고 물을 먹였다.서란이 두 모금 마시고 사레가 들렸다.기침이 오래갔고, 기침 끝에 손등으로 입을 닦자 손등에 붉은 것이 묻었다.한경이 그 손을 잡아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어디 맞았어.""괜찮습니다.""어디 맞았냐고."서란이 대답하지 않자 한경이 그 옷깃을 벌리려 했고, 벌리려는 손을 서란이 막았다."부인. 그것보다.""…""들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서란이 한 달 동안 어디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한 것은 셋이었다. 첫째.심가 서재의 상자는 궁으로 들어갔다.명부 원본이 태후 처소 어딘가에 있다.둘째. 대부인께 선단을 보낸 비단 파는 여자는 태후 처소 상궁의 조카다.값을 안 받은 것은 값을 나중에 부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집에 넣기 위한 것이었다.셋째. 서란이 여기서 한 번 숨을 골랐다."…성 밖 사삿집 일로 부인을 걸려 하십니다."한경이 등불을 조금 당겼다.불빛이 서란의 얼굴까지 올라왔다."걸어요? 뭘로.""궁의 물건을 성 밖 사삿집에 쓰셨다고요.옥패를 보이시고 남의 집 문을 닫게 하셨으니, 그 일이 궁의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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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덫

사흘 뒤 아침, 궁문에서 가마가 멎었다.내관이 평소 가던 회랑으로 가지 않았다.태의원도 아니고 태후 처소도 아닌 쪽이었다.담이 높고 창이 작은 건물이었고, 마당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문 앞에서 내관이 물러났다.대신 상궁 하나가 나와 섰다.지난번 태후 처소에서 소반을 올리던 그 상궁이었다."안으로 드시지요."방이 좁아서 소반 하나와 자리 둘을 놓으니 남는 데가 없었고,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상궁이 마주 앉았다.앉으면서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폈다."성 밖 셋째 마을 일로 여쭐 것이 있습니다."한경이 무릎 위에 손을 겹쳐 놓았다. 오른손이 위였다."물으세요."* * *물음이 차례로 왔다.그날 그 집에 간 것이 맞느냐. 맞다.그 집 주인에게 문을 닫으라 한 것이 맞느냐. 맞다.그때 무엇을 보이었느냐.한경이 소매에서 옥패를 꺼내 소반 위에 놓았다.상궁이 그것을 보고도 집지 않았다.눈만 한 번 내렸다가 올렸다."이 물건을 어디에 쓰셨는지 아뢰라 하십니다.""애 넷 데리고 나오는 데 썼어요.""…그 아이들이 부인 댁 종이옵니까.""아니요.""부인 친정 사람입니까.""아니요.""그럼 남의 집 사람을 남의 집에서 데리고 나오신 것이군요.""저, 소인이 아뢰옵기로는 그 집이 남의 집이라 하기에는 우리 댁 어공 물목이 스물 몇 해 드나든 집이고, 드나든 집이면 아주 남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예로부터 물건이 오가면 사람도 오가는 법이라 하여—""총관.""…예, 부인.""내가 대답하고 있었어요.""…그렇게 되나요."상궁이 붓을 들어 적었다.적는 획이 곧았다."그 집이 궁과 무슨 상관이 있어 궁의 물건을 보이셨습니까."한경이 대답하지 않았고, 소반 위의 옥패를 손끝으로 반 바퀴 돌려 놓았다."부인.""그 집이 궁하고 무슨 상관인지는, 그쪽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붓이 멎었다. 상궁이 고개를 들었다.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십니까.""아는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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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명부에서 빠진 이름

방에 창이 하나 있었다. 높고 작았다.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에 있어서, 해가 어디쯤 갔는지는 벽에 드는 빛의 각도로만 알 수 있었다.빛이 벽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내려가서 바닥에 닿았다가, 좁아지다가, 없어졌다.물이 한 번 들어왔다.밥은 들어오지 않았다.한경은 벽에 기대앉아 무릎을 세웠다.세운 무릎 위에 팔을 얹고, 얹은 팔에 이마를 댔다.머릿속으로 하나씩 놓았다. 옥패를 준 날. 사삿집에 간 날.상궁이 붓을 멈춘 자리.그 자리에서 오늘 못 나가게 된 것.거기까지 놓고 나면 답은 하나였다.나갈 수 있는 날은 저쪽이 정한다.그러면 남는 일은 하나뿐이었다.나갈 때까지 몸을 상하지 않는 것.한경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벽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세웠다.물그릇을 들어 반만 마시고 반은 남겼다.* * *저녁에 내관부 앞에서 소란이 있었다. 육정이 왔다.관가에서 자라던 말은 전해졌고, 전해진 것을 듣고 왔다.관복을 입은 채였다.내관부 서리에게 명부를 보자 했고, 명부는 내관부 것이라 외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대답이 왔다."내 처가 오늘 궁에 들었소.""…예.""나온 사람 명부에 없다는 말을 들었소."서리가 명부를 두 손으로 말아 쥐었다.육정이 문 앞에 섰다.물러가라는 말을 듣고도 서 있었고, 해가 다 진 뒤에도 서 있었다.궁문이 닫혔다. 닫힌 문 앞에 그대로 섰다.밤바람이 관복 자락을 흔들었고, 흔들리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강목이 온 것은 자시 무렵이었다.삿갓에 이슬이 앉아 있었다."…대인.""…""돌아가시지요."육정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궁문 쪽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심약.""예.""저 안에서 사람이 하룻밤을 지내면, 이튿날 아침에 나오오?"강목이 대답하지 못했다.대답을 고르는 사이가 길었다."…나오는 사람도 있고, 안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육정이 그 대답을 듣고 처음으로 자세를 고쳤다.고치면서 갓끈을 다시 맸다."심약.""예.""내 처가 저 안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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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고개를 들라

이틀째 갇힌 방에서 빗장 소리에 잠이 깼다.잠이라 할 것도 없었다.벽에 기대앉은 채로 눈만 감고 있었고, 감은 동안에도 바깥 소리를 세고 있었다.순라가 네 번 지나갔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가 길었다.문이 열렸다. 밖에 사람이 없었다.문을 연 자가 물러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열어 놓고 비켰다.한경이 일어섰다. 다리가 저려 한 번 휘청했고, 벽을 짚었다.마당으로 나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마당이었고, 달이 담 위에 걸려 있었다.담 밖 회랑에 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한경으로 걸었다.걷는 동안 발이 두 번 미끄러졌다.이틀을 앉아만 있던 다리라 무릎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고, 치맛단 안쪽이 무릎에 붙어 있었다.붙은 자리가 쓸려 걸을 때마다 따가웠다.머리는 이틀째 풀린 채였다.은비녀는 계단 아래로 굴러간 뒤로 없었고, 흰 끈도 어디선가 빠졌다.어깨에서 등으로 흘러내린 머리가 걸음마다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옷깃이 한쪽 어긋나 있었다.손으로 여미면서 걸었다.* * *회랑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등을 든 자도 없었고 따르는 자도 없었다.기둥 곁에 혼자 서 있었고, 곤복을 걸치지 않았다.검은 겉옷 하나였고 관을 쓰지 않았다.머리를 묶기만 했다.한경이 걸음을 멈췄다.침향이 왔다. 멈춘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숙인 시야 안에 회랑 널과, 그 위를 밟은 검은 신코가 들어왔다."폐하."발소리가 왔다. 두 걸음을 왔다.두 걸음에서 멎었다.멎은 자리가 무릎 앞 한 자였다."다쳤느냐."낮은 목소리였다. 회랑이 비어 있어서 그 소리가 기둥에 한 번 부딪혔다가 왔다."…아니옵니다.""물은 마셨느냐.""예.""밥은."한경이 숙인 고개를 더 숙였다.옷자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그가 반 걸음 더 왔다.* * *"짐이 오늘 내보내라 하였다.""…""명부에 네 이름이 없더구나."숙인 채로 있었다.회랑 널의 결이 눈앞에 있었다.널 사이에 검은 흙이 얕게 끼어 있었고, 그 흙이 낮에 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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