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71 - Chapter 80

231 Chapters

70화 물러남

서하당에서 정청으로 가는 길에 한경은 마당 서쪽 끝을 한 번 보았다.곳간을 뜯어 방을 들인 자리의 문이 닫혀 있었고, 문 앞 섬돌에 마른 잎이 쌓여 있었다.그 앞을 지나는 발자국은 하나도 없었다.정청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문 밖 계단 앞까지 하방 사람들이 목을 빼고 서 있었다.기운 해가 정청 바닥의 전돌을 반쯤 물들였다.부엌에서 나온 오 어멈은 밀가루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다 말고 섰고, 초하는 계단 맨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아 쥐고 있었다.노부인은 정청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 곁에 육정이 뒷짐을 지고 섰다.주씨와 육설이 한쪽 걸상에 나란히 앉았고, 서란은 그 뒤 걸상에 얇은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매향이 그 곁에 붙어 서서 이불 끝을 자꾸 여며 주었다.한경이 정청에 들어서자 계단 앞의 수군거림이 한 번에 잦아들었다.서란이 이불을 걷고 일어서려 하자 노부인이 손끝을 들어 앉혔다.한경은 흰 명주 겹옷에 남색 명주 치마를 입었고, 틀어 올린 머리에는 혼인 때 받은 백옥 비녀 하나만 꽂혀 있었다.걸음마다 치마 끝이 전돌을 쓸었다."초이레 밤 뒤로 이 집에 말이 많았다. 말해 보아라."노부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계단 앞까지 조용해졌다."편원을 쓸게요. 내일 옮기려고요."편원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가자 손끝이 식었다.한경은 포갠 손에 힘을 주었다.정청 안이 술렁였다.주씨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어머, 형님! 편원이면 곳간을 뜯어 방을 들인 데잖아요.해도 안 들고 겨울엔 바닥이 얼음장이라던데, 거길 형님이 왜….어쩜, 형님도 참.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시니 제가 다 송구해서 얼굴을 못 들겠네요.그럼 서하당은 어떻게 하시게요?""비워 둬도 안 썩어요.편원엔 화로 하나면 되고요."주씨가 노부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어머님, 형님 좀 말려 보세요."노부인은 대꾸하지 않았다.육설이 한경을 빤히 올려다보았다."언니, 거기 가서 뭘 하시게요?창도 하나뿐이고, 쥐가 들끓는다던데.""쥐는 말을 안 옮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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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편원

편원 문의 빗장은 녹이 슬어 있었다.하방 사내 하나가 주먹으로 두 번을 내리치고서야 빗장이 벗겨졌고, 문짝이 안으로 밀리자 묵은 곡식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섬돌에 쌓였던 마른 잎이 문바람에 쓸려 한경의 신코에 와 걸렸다.빗장 고리는 문 바깥쪽에만 박혀 있었다.초하가 비를 들고 먼저 뛰어 들어갔다가, 금세 도로 튀어나와 두 팔을 비볐다."아가씨, 안이 바깥보다 더 추워요!이게 방이에요, 광이지.하방에서들 그러는데 이 캉에 불 넣어 본 게 몇 해 전이 마지막이래요.쥐구멍도 봤어요, 벽 밑에 셋이나요. 셋이요!"한경은 문지방을 넘었다.넘자마자 발이 문지방 안쪽 한 뼘 되는 자리에서 저 혼자 멎었다.발밑을 내려다보았으나 전돌 한 장이 다른 것들처럼 차갑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종아리로 한기가 기어올랐다.창은 북쪽 벽에 하나뿐이었다.창지 너머로 담이 비스듬히 걸렸고, 그 위에 흐린 하늘이 띠처럼 얹혀 있었다.캉 위에 손을 얹자 문 쪽 가장자리만 미지근하고 안쪽으로 갈수록 돌처럼 찼다.벽 아래쪽 종이는 무릎 높이까지 들떠 있었다.손끝으로 누르자 종이 밑에서 겨 부스러기가 바스락거렸다.약재 두기엔 딱이네.마당 건너 부엌 앞에서는 오 어멈이 국자를 든 채 편원 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그때 편원 문간에서 쿵, 소리가 났다.하방 사내 둘이 멜대에 꿴 큰 옷궤를 문으로 들이밀다가 모서리를 문설주에 박았다.비스듬히 기울여 한 번 더 밀었더니 이번에는 궤 위쪽이 문틀에 걸렸다."아이고, 부인, 안 들어갑니다!곳간 문짝을 그대로 달아 놔서 문이 좁습니다.문설주를 뜯기 전에는 어림도….""뜯지 마. 서하당에 도로 갖다 둬."사내들이 멜대를 도로 어깨에 올렸고, 마당에 줄지어 기다리던 옷궤 둘도 그 자리에서 방향을 틀었다.한경은 앞선 사내들을 불러 세우고 첫째 옷궤의 맨 아래 서랍을 당겼다.서랍은 두 번을 버티다가 빠져나왔는데, 헌 향낭이 서랍 턱까지 차 있었다."이 서랍만 빼서 들여."초하가 서랍을 받아 안다가 코를 찡그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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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약장

약방 서랍은 초하가 세 번에 나누어 날랐다.한 번에 넷씩 포개 안고 마당을 건넜는데, 세 번째에는 맨 위의 서랍이 턱을 밀어 올려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편원 문지방에 발끝이 걸리자 서랍 하나가 품에서 미끄러져 전돌 위에 엎어졌다."어머, 이걸 어째!아가씨, 이거 비싼 거예요? 안 비싼 거죠?안 비싼 거라고 해 주세요!"엎어진 서랍 둘레로 마른 뿌리 조각이 흩어지자, 한경은 쪼그려 앉아 한 조각을 주워 앞니로 끊었다.혀뿌리가 떫게 오그라들어 마른침이 넘어갔다."비싼 거야."초하가 남은 서랍을 안은 채 그 자리에 굳었다."이름만."초하가 굳은 채로 눈만 끔벅이다가, 뒤늦게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거렸다.한경은 흩어진 조각을 서랍에 도로 쓸어 담고, 서랍 앞에 붙은 이름 딱지를 손톱으로 떼어 냈다.한경은 서랍들을 벽 아래 들뜬 종이 앞에 한 줄씩 괴어 올렸다.서랍마다 한 줌씩 덜어 흰 사발에 담고 물을 붓자, 사발 여섯의 물빛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천천히 우러났다.누런 것, 불그죽죽한 것, 맹물처럼 맑은 것.사발이 비면 초하가 우물에서 새 물을 떠 왔고, 그러는 동안 문틈으로 든 볕이 전돌을 타고 옆으로 옮겨 갔다.허리를 펴려다 벽을 짚은 한경의 손끝이 어느새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저녁때 벽 아래 약장에는 이름 딱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떼어 낸 딱지는 서랍마다 바닥에 도로 붙었고, 서랍 앞에는 먹으로 찍은 표만 있었다.점 하나, 점 둘, 짧게 그은 가로줄.어떤 서랍에는 아무 표도 없었다.초하가 약장 앞에 쪼그려 앉아 점과 줄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아가씨, 약방에선 맨 윗줄이던 게 여기선 맨 밑에 가 있어요.글자도 하나도 없고요.그럼 나중에 누가 약 찾으러 오면 어떡해요?소인은 까막눈이라 글자가 있어도 못 읽지만, 약방지기 아저씨는 그래도 글자 보고 찾던데요.""그러니까 나 말고는 못 찾아."---옷궤에서 빼 온 서랍은 캉 발치에 놓여 있었다.위쪽에 쌓인 것들은 유월부터 한경이 아침마다 알갱이를 골라낸 향낭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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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씨

북쪽 창지가 바람에 부풀었다 꺼질 때마다 화로 불이 몸을 낮췄다.초하가 들여온 저녁 쟁반에서 탕 그릇이 김을 올리고 있었고, 한경은 그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 모금을 넘겼다.뜨거운 것이 목을 긁으며 내려갔지만 도로 올라오지는 않았다."아가씨, 오늘은 탕을 안 식히고 드시네요?전에는 후후 불어서 다 식은 다음에야 겨우 드셨잖아요.부엌에서들 그러는데 편원 물이 아가씨 몸에 맞나 보대요.물이야 다 한 우물에서 길어 오는 건데, 그쵸?아, 그리고요, 허 노인이 그러는데 초하루에 남방 배 짐이 곳간에 든대요.곳간 열쇠는 아가씨가 쥐셨으니 아가씨가 나오셔야 한대요. 이 추위에요!""나갈게."한경은 그릇을 내려놓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축인 자리가 한참 뒤에야 말랐다.초하가 등잔을 탁자 끝으로 옮기자 한경의 눈이 불빛을 따라갔는데, 닿기까지 조금 늦었다.반 박자 늦던 눈이 이제는 그 반쯤 늦었다.등잔 곁에 내놓은 손등에는 푸른 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초하가 쟁반을 물려 나가자 한경은 약장 빈 서랍에서 종지를 꺼냈다.흰 종이를 펴고 알갱이 하나를 올려 약칼 끝으로 지그시 눌렀다.껍질이 톡 갈라지면서 속이 드러났다.희고 기름진 속살이 껍질 안을 꽉 채웠고, 그 한쪽 끝에 눈썹만 한 것이 가늘게 휘어 누워 있었다.싹이 틀 자리였다.한경은 궤에서 종이 봉지를 꺼냈는데, 약재 골목에서 한 줌 사 온 옥빛 꽃잎이 넉 달 넘게 그대로 들어 있었다.꽃잎을 헤집자 바닥에 꽃받침째 마른 송이가 둘 섞여 있었다.송이 가운데 부푼 씨방을 손톱으로 쪼개자, 좁쌀보다 작은 알갱이가 종이 위로 굴러 나왔다.두 알갱이를 나란히 놓고 약칼로 하나씩 갈랐다.속살의 빛깔도, 눈썹처럼 휜 것의 모양도 같았다.종지에 모인 것은 전부 이 꽃의 씨였다.한경은 흰 사발에 물을 붓고 꽃잎 한 줌과 씨 몇 알을 함께 떨어뜨렸다.꽃잎은 물 위에 떠서 사발 가장자리로 모여들었고, 씨는 꽃잎 사이를 하나씩 빠져나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위에서 내려다보면 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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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별품

곳간 앞마당에 남방 배에서 부린 궤짝들이 줄지어 있었다.궤짝마다 겉에 붉은 흙이 말라붙었고, 새끼줄 매듭 사이로 강바람의 비린내가 배어 나왔다.허 노인이 나무판을 가슴에 안고 한경 곁에 섰다."노야께서는 아침부터 강에 나가 계십니다.오늘 태의원에서 심약(審藥)이 나온다 합니다.궁에 드는 약재를 골라 살피는 사람입지요.해마다 이맘때면 와서 별품이며 어공이며 궤짝을 하나하나 다 엽니다.곳간 열쇠를 쥐신 분이 곁에 서 계셔야 합니다."초하가 한경의 등 뒤에서 목을 쭉 뺐다."어머, 심약이면 궁에서 폐하 드실 약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이래요!아가씨, 소인은 태의원 사람 난생처음 봐요.눈이 셋 달렸으면 어떡해요?""…눈은 둘입지요."허 노인이 어두운 눈을 끔벅이며 대답하자, 초하의 어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한경이 허리의 열쇠 꾸러미에서 곳간 열쇠를 골라 자물통에 꽂고 돌리자, 곳간의 찬 기운이 문간으로 밀려 나왔다.하방 사내들이 마당의 궤짝을 하나씩 들어 문간 안쪽에 부렸다.중문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온 사내 하나가 곳간 문지방 두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키가 커서, 허 노인의 굽은 등 너머로 어깨가 한참 올라가 있었다.짙은 남색 관복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는데, 드러난 팔뚝이 목덜미와 같은 볕 빛깔이었다.흙 묻은 신코에서 관복 자락까지 약재 냄새와 볕 냄새가 한데 섞여 풍겼다.눈매가 길었다. 굵은 눈썹 사이에 세로 주름이 하나 깊게 패어 있었고, 높은 콧등에는 흰 흉이 한 줄 가로놓여 있었다.허 노인이 먼저 굽은 허리를 한 번 더 굽혔다."아이고, 대인. 올해도 오셨습니다.""올해는 배가 열흘 늦었습니다.노인장 눈은 좀 어떠십니까."사내가 허 노인에게 묻고 나서, 문지방 너머 한경에게 허리를 굽혔다."태의원 심약 강목입니다.강에 나가는 사람이라 다들 강 강(江) 자로 아는데, 생강 강(姜) 자를 씁니다.""약이네요, 생강도."강목이 허리를 펴다 말고 한경을 보았다."아…. 예, 약입니다.뿌리로 치면 생강도 어엿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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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붉은 줄

노부인 방 문이 한 뼘쯤 열려 있어서, 문안 자리에 앉은 한경의 눈에 마당이 가늘게 걸렸다.문간 밖에는 강목이 서 있었는데, 별품 문서를 노부인께 올린다고 아침부터 와서 허 노인이 안에 아뢰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방 안에는 화로가 들어와 있었는데도 노부인은 회색 명주 위에 한 겹을 더 껴입고 있었다.주씨와 육설이 걸상을 나란히 했고, 서란은 문지방 곁 걸상에서 앞에 모은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탁자 위에는 미음 그릇과 붉은 옻칠 함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육설이 함 뚜껑의 금빛 걸쇠를 풀었다.함 안에 흰 옥합이 하나 더 들어 있었고, 옥합 뚜껑을 열자 앵두만 한 붉은 알들이 기름을 먹인 듯 번들거렸다.육설이 그중 하나를 사기 숟가락에 올리고 꿀물을 부었다."어머님, 오늘 것 드세요.이거 드시고부터 얼굴이 훤해지셨다고 다들 그래요.이거 하나 구하려고 아는 분이 얼마나 애를 쓰셨는데요."주씨가 대추 쥔 손을 무릎에 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어머님.제가 절에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스님이 복 받으신 거라고, 궁에서 드시는 걸 집에서 드시는 댁이 어디 흔하냐고요.그 말씀을 듣고 제가 향을 두 대나 더 올렸다니까요."노부인이 숟가락을 받아 들었는데, 입으로 가는 도중에 숟가락이 한 번 기울어 꿀물이 턱으로 흘렀다.노부인이 다시 들어 올리려는데 손가락이 숟가락을 놓쳤다.사기 숟가락이 전돌에 떨어져 두 동강이 났다.노부인의 몸이 오른쪽으로 천천히 기울었고, 손안에서 미끄러진 염주가 무릎 아래로 흘러내렸다.입이 벌어진 채로 어, 어, 하는 소리만 목에서 새어 나왔다."어머님!"육설과 주씨가 한꺼번에 소리쳤다.부채 든 시녀가 부채를 떨어뜨렸다.육설이 노부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는데, 흔들 때마다 늙은 목이 힘없이 따라 흔들렸다."누가 의원 좀 불러요! 의원!"주씨가 문 쪽에 대고 외치는 사이 한경은 걸상을 밀고 일어섰다."흔들지 마요."한경이 육설의 손목을 잡아 떼어 내고 부채 든 시녀를 돌아보았다."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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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값이 된 아이

시전 서편 골목에서 오어멈이 헐레벌떡 왔다.장을 보러 나갔다가 사람을 봤다고 했다.여름에 시약장 앞에서 부인께 절하던 그 여자, 맨발로 가마를 따라오던 그 여자를 봤다는 것이었다."애는요.""…없었습니다."한경이 하던 일을 놓고 일어섰다.* * *여자는 시전 뒷골목 술청 앞에 앉아 있었다.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았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였다.한경을 알아보고 일어서려다 주저앉았다.일어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어서면 안 될 것 같아서 주저앉는 몸짓이었다.한경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그 애 지금 어디 있어요."여자가 대답하지 않았다."은자는요.""…빚쟁이가 먼저 왔습니다."한경이 여자의 손목을 잡아 소매를 걷었다.팔 안쪽에 새 멍이 있었다.손가락 자국이었다."애를 어디로 넘겼어요.""…부인.""어디로."여자가 울기 시작했다.우는 소리가 크지 않았다.오래 울어 본 사람의 울음은 소리가 작다.성 밖 어느 집에 열이레 값으로 넘겼다는 말이 나왔다.시약장이 아니라 사삿집 이라고 했다.사삿집에서 무엇을 먹여 보는지는 묻지 못했다고 했다.* * *한경이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치맛단을 털지 않았다.술청 앞의 사람들이 부인을 보고 있었고, 술청 안쪽에서 주인이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이 집에 방 하나 있어요?""…예?""이 사람 오늘 밤 여기서 재우고, 밥 먹여요.값은 내가 물어요."주인이 여자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이런 사람은 재우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려는 참이었다.한경이 그 앞으로 한 발 갔다.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높이지 않았는데 술청 앞의 소리가 죽었다."방금 뭐라고 하려고 했어요?""…아, 아닙니다.""이 사람이 어제까지 뭐였는지는 나도 몰라요.근데 오늘 이 사람 애가 어디 팔려 갔는지 아는 사람은 이 사람뿐이에요.그러니까 이 사람은 오늘 이 성에서 제일 귀한 사람이에요."주인이 손을 앞으로 모았다."밥 먹이고 재워요.내일 아침에 내가 와요."한경이 소매에서 은자를 꺼내 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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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밭

대부인이 그것을 안 것은 소작인 하나가 안채까지 찾아오면서였다.남쪽 밭에 새 사람이 들어와 도지를 두 배로 부른다는 하소연이었다.대부인이 누구 밭이냐고 물었고, 소작인이 대답을 못 했다.그날 저녁 대부인이 아들을 불렀다.굳은 손으로는 문서를 들 수 없어서, 오어멈이 대신 들어 읽었다.읽는 소리가 방에 오래 남았다.육정은 무릎을 꿇은 채였다."…어느 놈에게 주었느냐."관가 낭관이라는 대답이 나왔다.무엇을 사고 주었느냐는 물음에는 대답이 늦었다."닷새를 샀습니다.""…닷새.""…밭이 나간 것은 지난달이고, 나간 것을 내가 안 것은 그제이며, 그제 알고도 어머니께 아뢰지 못한 것은 아뢰면 문중이 알고 문중이 알면 관가가 아는 까닭이었소.하여 내가 값을 치렀소.어공 올리는 날을 초닷새에서 초열흘로."대부인의 눈이 며느리 쪽으로 갔다.문지방 밖에 한경이 서 있었다."…네 처가 아느냐.""…모릅니다."한경이 문지방을 넘었다.아무도 들어오라 하지 않은 방이었다."알아요."* * *사랑에 두 사람만 남은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육정이 문을 닫고 서 있었다.앉으라는 말에도 서 있었고, 서 있는 동안 두 손을 뒤로 모았다가 앞으로 놓았다가 했다."왜 말 안 하셨어요.""…말할 것이 아니오.""밭 판 걸요, 아니면 닷새 산 걸요."대답이 오지 않았다.한경이 그의 앞으로 갔다.이번에는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눈꼬리도 접지 않았고 목소리도 낮추지 않았다."나 그날 궁에 갔으면 죽었어요?""…""닷새 늦춰서 뭐 하셨는데요."육정이 고개를 들었다.등불이 아래에서 들어 눈이 그늘 안에 있었다.닷새 동안 그가 한 일이 하나씩 나왔다.관가에 아는 사람을 넷 만난 것, 태의원 서리에게 술을 산 것, 어공 문서에서 안주인 함자를 지우는 법이 있는지를 알아본 것.없다는 것을 닷새째에 알았다는 것."…없더이다.""그래서요.""…그래서 못 지웠소."닷새째 밤에 그가 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성 남쪽 밭 문서를 들고 나가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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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향

밤중에 궁문이 열렸다.가마가 태의원 쪽으로 가지 않았다.회랑이 왼쪽으로 갈라지는 자리에서 내관이 왼쪽으로 갔고, 그 끝에서 무겁고 단 향이 왔다.한경이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태후 처소 앞에서 내관이 물러났다.상궁이 문을 열었고, 발이 걷혀 있었다.걷혀 있는 것이 지난번과 달랐다.황태후는 아랫목에 앉아 있었다.흰머리를 한 올도 흘리지 않고 틀어 올렸고, 무릎에 이불을 덮고 있었다. 방이 더웠다.한경이 절을 하고 앉았다.앉으면서 두 손을 겹쳤다.이 방에 들어오면 늘 손이 먼저 차가워졌다.향 때문이라고 여기기로 했다."밤중에 불러 미안하구나.""…아니옵니다.""내가 요즘 잠을 못 잔다."* * *맥을 짚으라는 말이 나왔다.상궁이 손목을 걷어 소반 위에 올려 주었다.늙은 손목이었고 살가죽이 얇았다.한경이 손끝을 얹었다.맥이 고르고 힘이 있었다.예순을 넘긴 사람의 맥이 이만하면 좋다.눈꺼풀을 보고, 혀를 보고, 잇몸을 봤다.잇몸에 아무것도 없었다."…어떠하냐.""편찮으신 데가 없으십니다.""잠을 못 자는데도.""잠은 몸이 아니라 다른 데서 못 잘 때도 있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상궁의 손이 소반 위에서 굳었다.황태후가 웃었다. 웃는데 눈매가 움직이지 않았다."…네 입이 여전하구나."한경이 손을 거두고 물러앉았다. 그때 향이 왔다.화로에서 오른 것은 아니었다.방 한쪽 구석의 향로에서 나는 것이었고, 연기가 곧게 오르지 않고 바닥으로 눕고 있었다.한경의 눈이 그리로 갔다.* * *대부인 방에 든 향은 안식향이었다.거기까지는 지난번에도 맡았다.오늘은 그 아래에 다른 것이 있었다.단내였다. 아주 얕았고, 태우는 향에서는 그런 단내가 나지 않는다.뜨거워진 쇠에서 나는 단내에 가까웠다.한경이 숨을 한 번 더 들이켰다.목 안쪽에 그 단맛이 얕게 붙었다.머릿속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 옆에 놓였다.붉은 알을 불에 올리면 오르는 것.그것을 굳이 삼키게 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방을 덥게 하고, 창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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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엎지른 것

궁에서 나온 것이 새벽이었다.가마가 육가 중문에 닿을 때까지 한경은 주렴을 걷지 않았다.무릎 위에 손을 겹쳐 놓고, 겹친 손등을 다른 손으로 몇 번 눌렀다.서하당에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앉았다.창이 밝아 오는 것을 보다가 초하를 불렀다."강 심약 나리께 사람 보내.오늘 안에 오시라고.""…무어라 전할까요.""약재 물을 게 있다고."* * *강목이 온 것은 낮이 기울어서였다.마루에 앉자마자 한경이 물었다.태의원에서 궁의 향을 대느냐고, 향도 약재로 쳐서 도장을 받느냐고.강목이 잠깐 부인을 봤다.향은 내섬시에서 대고 태의원은 손대지 않는다는 대답이 왔다.다만 약을 넣어 태우는 향은 약으로 쳐서 태의원 도장을 받는다는 말이 뒤에 붙었다."침전 향은요.""…침향입니다.""바뀌었으면요."강목이 물그릇을 내려놓았다."부인.""예.""지금 무엇을 물으시는지 아십니까.""알아요.""…아시면 안 됩니다."한경이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접힌 것을 펴자 안에 회색 가루가 조금 있었다.태후 처소 향로 곁 바닥에서 손끝으로 쓸어 온 것이었다.강목이 그것을 봤다.보고,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았다."…부인. 이걸 어디서.""태우고 남은 거예요.""어디서 태운 것을."한경이 대답하지 않았다.강목이 손수건을 접어 부인으로 밀어 놓았다."가져가지 않겠습니다.""…강 나리.""소신이 이걸 태의원에 들이면, 사흘 안에 소신 방에서 또 무엇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리고 이번에는 문서가 아닐 것입니다."강목이 일어섰다. 일어서다 도로 앉았다.앉아서, 삿갓 테를 두 번 만졌다."…소신이 어디서 났는지 묻지 않고 태울 방법을 하나 압니다."* * *그날 밤 궁에서 향로 하나가 엎어졌다.침전 곁방에서 향을 갈던 나인이 소반을 들다 발을 헛디뎠고, 향로가 넘어가 재가 방바닥에 쏟아졌다.불티가 깔개에 붙어 한 뼘쯤 탔다.사람이 뛰었고, 물이 왔고, 금방 꺼졌다.내관이 나인을 끌어내렸다.곤장 스물이라는 말이 나왔다.그 자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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