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61 - Chapter 70

231 Chapters

60화 둘이서

그 소리가 다 끊기기도 전에 한경은 뒷창을 넘었고, 맨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이미 뛰고 있었다.이 다리가 처음 뛴 것은 지난 삶의 그믐밤이었다는 기억이, 뛰는 사이에도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었다.서재 문틈으로 남편과 저 여자를 보고 제 방으로 달아나던 밤이었는데, 지금은 그 둘이 있는 방 쪽으로 뛰었다.뒤뜰의 잔돌이 얇은 발바닥을 찔렀고, 지난 삶에 죽은 자리인 뒷광 앞을 지날 때도 무릎은 꺾이지 않았으니, 꺾일 틈조차 없었다.반쯤 열린 협문 너머로 후원 처마의 붉은 등 하나가 흔들렸다.매향이 문설주를 붙들고 서 있었으며, 그 어깨 너머 바닥에 육정이 있었다.한경은 무릎을 꿇기도 전에 습관처럼 먼저 읽었다.온몸이 널빤지처럼 뻗었다가 풀리면서 잘게 떨었고, 입술이 푸르렀다.눈은 떠 있었지만 눈동자가 구멍처럼 벌어져, 등불이 들어가도 줄지 않았다.뺨에 손등을 대 보니 불덩이인데, 땀은 한 방울도 없었다.목에 손끝을 얹자, 셀 수 없이 빠르게 달리던 맥이 반 박자 걸리며 하나가 늦게 왔다.병실에서의 마지막 날 제 곁의 기계 소리가 꼭 그렇게 걸렸었으니, 한경은 그 박자를 알았다.서란은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풀린 머리가 어깨에 걸렸고 낯이 종이처럼 희었으며, 발치에 깨진 잔이 있었다.이 여자가 짠 밤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경은 단숨에 알아차렸다.이 여자의 차는 사내를 날뛰게 하다가 재우니, 그대로였다면 그는 지금쯤 잠들어 있어야 했다.저 여자의 것 위에 한경의 것이 얹혀 있었다.맞서면 잠이 이길 줄 알았는데, 둘은 맞서지 않고 한길로 들어 숨과 맥을 같이 치고 있었다.내가 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죽어 가는 것은 십칠 년 동안 쥐로도 기록으로도 수없이 보았지만, 제 손이 넣은 것으로 죽어 가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숨을 한 번 쉬는 동안, 한경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두면 죽는다. 죽으면 밤마다 손목에 향낭을 묶던 손이 없어지고, 지난 삶에 광 안의 독 가장자리에서 「내가.」 하고 말을 끊고 돌아선 사내도 없어진다.초사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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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주독

의원은 육정의 손목에 세 손가락을 얹은 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동이 튼 후원 방이었고, 간밤에 게운 자리는 이미 말끔히 닦여 있었는데, 그것을 닦은 손은 서란의 것이었다.의원이 대문을 넘기 전에 그 여자는 탕관을 헹궈 맹물에 찻잎을 띄워 두었고, 젖은 수건을 한경에게 내밀며 낮게 말했다."손 이리 줘요, 언니.손톱 밑에 숯이 꼈어요."유월에 「손을 이리 다오」 하고 이 여자의 갈라진 손을 먼저 쥔 것은 한경이었다.그 말이 이렇게 돌아와 있었다.지금 한경은 벽 쪽 걸상에 조용히 앉아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었고, 맨발에는 뒤뜰 흙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의원의 손가락이 그의 손목에 머무는 동안, 소매 속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 자리를 따라 짚으려 들었다.새벽까지 그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이었지만, 인형은 남편의 손목을 짚을 줄 모르는 물건이었으므로 그녀는 손을 소매 깊이 묻었다.밤에 걷는 병이 있는 정실이 걷다가 여기까지 든 것이라고, 서란이 문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고,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밤에 걷는다는 소문이 처음으로 쓸모 있는 거짓이 되어 주었다.간밤의 비명에 서하당 문간을 비우고 뛴 것은 장복이었다.부인이 그 틈에 걸어 나왔다는 말에, 그는 문간에 꿇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노부인은 문 안쪽에 서 있었다.이 노인이 후원 문턱을 넘는 것을 한경은 처음 보았고, 그 사실 하나로 이 일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짐작했다.이윽고 의원이 눈을 뜨더니, 노부인 쪽으로 몸을 돌려 무겁게 입을 열었다."주독이 심장을 쳤습니다."노부인의 손목에서 염주가 멎었고, 방 안의 긴장이 한꺼번에 굳었다.이 집 가주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을, 부엌의 종들까지 다 알았다.의원은 제가 모르는 것에 제가 아는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한경은 그 틀린 이름이 잠깐 고마웠다.모르는 이름보다 아는 이름이 사람을 덜 파고드는 법이었으니까.그러나 염주가 멎은 것을 보면, 이 노인은 그 이름을 받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물러가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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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매듭

가주는 그날 낮에 내원 곁방으로 옮겨졌다.한 번 눈을 떴다가 물 한 모금을 넘기고 다시 잠들었다는 말을, 초하가 부엌에서 들어 왔다.그날 밤 서하당에 먼저 닿은 것은 그의 발소리가 아니었다.회랑 끝에서부터 염주 알 부딪는 소리가 다가왔다."네 서방이 누웠으니 내가 한다."노부인은 침상 가에 앉지 않고 선 채로 한경의 소매에서 향낭을 꺼냈으며, 이어 품에서 검은 칠합을 꺼냈다.어제 저녁볕 속에서 아들의 품에 있던 것이었다.밤마다 그가 열던 뚜껑이, 이제는 검버섯 앉은 엄지 밑에서 딸깍 열렸다.노부인이 집어 올린 한 꼬집은 그의 것보다 눈에 띄게 굵었으니, 피에 닿으면 트는 씨였다.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넣었지만, 이 손은 알고 넣었다.같은 칠합에서 나온 같은 씨인데도, 넣는 손이 바뀌자 한 꼬집의 무게가 달랐다.한경은 그 차이를 손목의 감각으로 먼저 알았다.까닭은 묻지 말고 밤마다 자네 손으로 넣으라고, 친정아버지는 사위에게 그렇게 써 보냈었다.그 손이 누운 첫날 밤에, 칠합은 망설임 없이 어미의 손으로 건너가 있었다."간밤 그 차에 손댄 것이 초하 말고 또 있느냐."노부인의 마른 손가락이 끈을 감으려고 한경의 손목을 뒤집어 쥐었고, 그 눈이 처음으로 손목이 아닌 얼굴로 올라왔다.호첩을 적던 날부터, 이 노인은 가끔 며느리의 얼굴을 보았다.숨이 흔들리는지, 눈이 비키는지, 무릎 위의 손이 무엇을 쥐는지를 보는 눈이었다.한경은 짧은 순간에 셈을 끝냈다.초하라고 대면 초하가 끝나고, 아무도 없다고 대면 노부인이 직접 파기 시작할 것이었다.지금 내밀 수 있는 이름은 오늘 낮에 초하가 봉지를 놓고 온 그 자리 하나뿐이었다.한경은 긴장을 숨 밑으로 누르며 넷에 들이쉬고 여섯에 내쉬었다.무릎 위의 손은 펴 둔 채로, 인형의 느린 눈으로 그 눈을 마주 받았다."…약방 사람이… 어제 찻물을 길어다 주었습니다."인형은 거짓말을 못 하는 물건이었다.이 집이 십 년을 그렇게 알았고, 그 십 년이 지금 한경의 편에 서 있었다.염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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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뒷광

오 어멈은 뒷광 앞에 등잔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말했다."죽었습니다, 부인.약방이 죽었습니다."어제 노부인은 광에 가두라고만 했고, 이 집에서 비어 있는 광은 뒷광 하나뿐이었다.미는 문이라 자물쇠가 없어서, 장정들이 밖에서 빗장 하나를 질러 두었다고 했다.새벽 화덕에 불을 넣으러 나온 오 어멈은 문틈에 등잔을 대 보았다가 떠 있는 발을 보았고, 누구를 깨우기도 전에 서하당 뒷창부터 두드렸다.유월에 제 남편의 주검을 읽어 준 사람이 부인이었기 때문이다.새벽 이슬이 맨발에 차게 감겼다.한경은 빗장에 손을 얹고도 한참 동안 밀지 못했다.유월에 종의 옷을 입고 뒤뜰을 건너던 날, 이 문 앞에서 무릎이 꺾였었다는 기억이 살갗에 먼저 돌아왔다.지난 삶에 이 몸이 끌려 들어간 문이었고, 그 뒤로 그녀는 뒤뜰을 건널 때마다 이 문을 보지 않고 걸었다.숨을 한 번 고른 뒤 그녀가 끝내 문을 밀자, 묵은 겨 냄새가 확 끼쳐 오면서 목이 먼저 조였다.종아리가 치마 속에서 저절로 오그라들었다.저쪽 벽에 사람 키만 한 독이 엎어져 있었지만, 한경은 끝내 그쪽으로는 등잔을 들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들보는 지난 삶에 이 몸이 독 안에서 둥근 구멍 너머로 끝까지 올려다보던 바로 그 들보였고, 거기에 사람이 달려 있었다.어제 아침 마당을 가로질러 끌려간 사내였다.가주의 찻물에 재우는 약을 탔다는 죄였는데, 그 봉지를 그의 자리 밑에 넣게 한 것은 한경이었다.그녀는 등잔을 들어 올리고, 십칠 년 동안 해 온 습관 그대로 발부터 읽었다.발끝은 흙바닥에서 한 뼘 떠 있었고, 그 밑에는 엎어진 걸상도 포대 하나도 없었다.딛고 설 만한 것은 저쪽 벽의 독뿐인데, 그것은 들보에서 여섯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다음은 목이었는데, 줄은 포대를 묶는 삼노끈이었고 자국이 둘이었다.하나는 턱 밑에서 귀 뒤로 비스듬히 올라간, 매달린 줄이 낸 자국이었다.다른 하나는 그 아래에서 목을 반듯하게 한 바퀴 돌았는데, 더 깊고 검붉었으니 산 사람의 살갗에 난 것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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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견본

열쇠 고리를 쥐고 뒤뜰로 나서자, 초하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부인, 거긴 왜 가세요.거기는 약방 아저씨가…아니, 그 아저씨는 이제 거기 없지만요.""문 앞에 있어. 누가 오면 기침해."약방은 뒤뜰에서 장독들과 뒷광 사이에 있었다.한낮인데도 문을 열자 마른 것들의 쓴 냄새가 서늘하게 밀려 나왔다.작두 곁에는 썰다 만 뿌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못에 걸린 앞치마에는 약재 물이 누렇게 배어 있었다.열두 해를 이 방에서 산 사람의 것이었지만, 한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끝내 알지 못했다.서랍이 벽 한 면을 빈틈없이 덮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접시 둘 달린 작은 저울이 놓여 있었다.명주의 손은 저울을 몰랐지만, 한경은 십칠 년 동안 저울보다 정직한 것을 만져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왼 접시에 추를 얹고 오른 접시를 비워 둔 채, 서랍을 하나씩 열어 나갔다.가운데 줄은 구리 고리가 유난히 닳아 있었는데, 서랍 여섯에 붙은 글자가 저마다 비싼 약재의 이름이면서도 속에 든 것은 한 가지였다.뿌리 하나를 꺾자 누런 단면에서 아린 냄새가 올라왔고, 머리보다 코가 먼저 시약장을 기억해 냈다.약재 골목에서 한 줌에 서 푼 하던, 시약장의 검은 환에서 나던 바로 그 뿌리였다.이름과 속이 다른 서랍 여섯 칸이, 북으로 간 궤짝에 무엇이 들어갔는지를 말없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맨 아래 줄 끝의 서랍 하나에만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고리에 꿴 작은 열쇠가 거기에 맞았다.안에는 끈으로 묶은 종이 다발 하나와, 그 밑에 따로 싼 작은 것 하나가 들어 있었다.다발의 맨 윗장을 넘기자 날짜와 돈의 셈이 줄지어 있었다.지난겨울부터 시작된 셈은 줄마다 커졌고, 줄 끝마다 붉은 엄지 자국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문밖에서 초하의 기침 소리가 났지만, 그보다 문이 먼저 거칠게 열렸고, 한경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언니, 그거 내 거예요."회랑에서 한경의 팔을 붙들던 육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턱에 걸고 서 있었다."…어머님이 쥐고 있으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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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한 사람 품

노부인의 매듭은 닷새째 틈이 없었다.비녀 끝은 오늘 밤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빼지 못한 씨를 손목에 단 채 누운 몸은 밤마다 조금씩 무거워졌다.갈비 밑의 것은 그 무게를 반기는 듯 이따금 묵직하게 당겼다.가주는 그사이 눈을 떴다고 했다.눈을 뜨자마자 서하당 소식부터 물었는데, 노부인이 아직 누워 있으라며 곁방 문을 닫았다는 말을 초하가 부엌에서 주워 왔다.그가 일어나야 이 매듭이 풀린다는 셈과, 그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같은 밤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한경은 어느 쪽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이경을 알리는 나무판 소리가 지나고 나서, 뒷창 너머로 그 소리가 다시 났다.삐걱, 하고 물을 미는 소리였다.한경은 침상 널 밑에서 작은 종이 봉지를 꺼냈다.중원 밤에 반쯤 내뱉고 만 「다음엔」의 값으로, 화로의 숯을 곱게 빻아 꿀에 굴려 둔 환 열 알이었다.장복은 늘 그렇듯 서하당 앞문에 서 있을 것이었다.그녀는 신을 신지 않고 뒷창을 넘어, 이번에는 뒷문의 빗장을 안에서 뽑았다.문을 열자 섬돌 위에 그가 서 있었고, 그 사실 하나에 가슴이 먼저 뛰었다.등 없는 배는 돌계단 맨 아랫단에 닿아 있었고, 그는 오늘은 미끄러지지 않았다."약조를 받으러 왔소.""약조가 아니라 처방이에요. 손 줘 보세요."그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한경은 그 손을 받아 손바닥이 위로 오게 뒤집고, 등불 대신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종이 한 겹 너머로만 보던 손이었다.손끝은 여전히 가늘게 떨렸지만 손톱 밑의 푸른 기가 골목에서보다 옅었고, 손바닥은 생각보다 따뜻했다."이번엔 하루도 거르지 않았소.게우는 것 말이오.댁이 짚어 준 자리를 눌러서.""그래서 입술이 나았네요."그녀는 봉지를 그의 손에 쥐여 주며 낮게 일렀다."알을 삼키기 전에 이걸 두 알 먼저 넘기세요. 숯이에요.녹은 것이 피로 덜 가요.그래도 게우는 건 거르지 말고요."그는 봉지를 펴지도 않고 오래 쥐고 있었다.그 손이 그녀의 손을 아직 놓지 않았다는 것을, 한경은 그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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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상

태후는 아들의 상을 늘 제 손으로 골랐다.팔월 초하루 아침, 궁의 부엌인 어선방에서 올린 것이 스무 가지였고, 그 가운데 태후전 탁자에 남는 것은 여섯이었다.약지와 새끼손가락의 손톱에 씌운 호갑이 접시를 하나씩 짚어 나갔다.손톱보다 두 마디는 긴 금 덮개가 사기에 닿을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났고, 그때마다 궁녀가 그 접시를 들어냈다."가지는 성질이 차오.황상은 어려서부터 속이 찼지.다섯 살에 이것을 먹고 사흘을 앓은 것을 애가는 잊지 않았소.저 생선도 치워라, 가시가 잘다."맞은편에 앉은 황제는 조용히 그 손을 보았다.얼굴이라면 보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다.열두 해 전 그가 보위에 오르던 날에도 오늘 아침에도, 어미는 스무 살의 얼굴이었다.열두 해 동안 어미 나이의 여자라면 입지 않는 은홍 비단만 입었고, 분이 뜨지 않는 살결에 눈가에는 주름 한 줄 없었다.다만 손은 달라서, 금이 덮지 못한 마디마다 살이 꺼지고 검버섯이 앉아 있었으니, 일흔 먹은 손이 스무 살 얼굴 밑에서 그의 먹을 것을 고르는 것이었다.그는 열두 해 동안 이 탁자에서 이 손이 남긴 것만 먹고 컸으니, 그 사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어머님께서 골라 주시는 덕에 속이 편합니다."입꼬리만 올리고 눈은 그대로 두는 그 웃음을, 그는 열한 살에 익혔다.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습관이었다.그때 상궁 하나가 태후의 귀에 무어라 아뢰었는데, 단왕부에서 연옥화를 또 청했다는 말이 황제의 귀에도 들렸다."주어라. 그이는 늘 모자라다 하지."태후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이번에는 눈도 함께 웃었다.황숙의 이름 앞에서만 어미가 저렇게 웃는다는 것을, 황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아들의 상 앞에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마지막으로 궁녀가 작은 종지 하나를 그의 앞에 놓았다.옥체를 맑힌다는 붉은 알 하나가 들어 있었다.네 해째, 이 손이 고른 상의 끝에는 늘 이것이 놓였다.종지를 드는 황제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태후가 보았고, 그는 그 눈앞에서 알을 입에 넣고 물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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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글씨

견본은 그날 저녁 도로 종이에 싸서, 접혀 있던 금 그대로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누군가 보라고 둔 것이라면, 볼 사람이 와서 제자리에 없는 것부터 볼 것이었다.견본이라면 견줄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무엇과 견주는지는 사흘이 지나도록 알 수 없었다.그사이 가주는 여전히 내원 곁방에 누워 있었고, 노부인의 매듭은 밤마다 틈 없이 조여졌다.그 사흘째 되는 날 오후, 초하가 먹을 갈다 말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부인, 후원 그 사람 왔어요.저 사람 손에 먹 묻히지 마세요.묻은 데로 또 무슨 말을 퍼뜨릴지 몰라요."매향의 입에 제 이름이 오르내린 뒤로, 초하는 후원 쪽 사람이라면 그림자만 보아도 이를 갈았다.한경은 대답 대신 벼루를 끌어당겼다.이윽고 서란이 서하당 탁자에 한경과 나란히 앉아 붓을 주먹으로 쥐었다.첩이 된 지 이레 만에 옷은 무명에서 비단으로 바뀌고 부름은 부인에서 언니로 바뀌었지만, 첩은 붉은빛을 입지 못했으니 빛은 여전히 옥색이었고 은비녀 곁에도 금붙이는 하나 없었다.칠월 보름 물가에서 이 여자가 청한 것이 있었다.제 이름 쓰는 법 말고, 부인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다들 나가 있어.언니가 부끄러워하셔."서란이 웃으며 시녀들을 물렸고, 문이 닫히자 한경은 말끝을 바꿨다."시늉이야, 참이야. 그 주먹.""참이에요. 시약장에서는 붓을 안 쥐여 줘요. 엄지만 찍죠."한경은 그 주먹을 위에서 가만히 덮어 잡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붓대에 다시 얹어 주었다.엄지 바닥의 흰 금이 그녀의 손가락 밑으로 지나갔다.지난 삶에 명주가 이 손등을 꼭 이렇게 잡았었다.그때 이 손은 끝이 갈라져 있었고 잡은 쪽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둘 다 알았다.한경의 손가락이 서란의 손등 위에 있었고, 서란의 숨이 한경의 귀 옆에 있었다.둘 다 남의 몸을 읽는 사람이었으니, 손을 포갠 것은 서로의 목에 손을 얹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이레 전 새벽에 누가 먼저 죽이나 보자던 두 여자가, 지금은 한 붓을 같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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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무엇이오

그믐을 이틀 앞둔 문안 자리에서, 주씨는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북변에서 인편에 온 그 편지는, 유월 초닷새에 군약 궤짝을 호송해 떠난 남편 육준의 글씨였다."배는 닿았답니다, 어머님.닿았는데 포대 절반이 모래였답니다.그리고 여기요, 금창약을 바른 사람들이요, 상처가 아물지 않고 썩는답니다.그이가 이렇게 썼어요.형님, 이 약이 우리 집 것이 맞습니까."목소리가 거기서 꺾였고, 육설의 손가락에서 쉬지 않고 돌던 반지가 멎었다."태워라."노부인의 염주는 멎지 않았다.주씨는 편지를 접어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그 위를 눌렀다."못 태웁니다, 어머님.그이 글씨입니다."염주가 한 알 넘어갔고, 노부인은 더 다그치지 않았다."…그럼 네 방에 두어라.문밖에는 내지 말고."여태 이 사람이 문안 자리에 옮겨 온 것은 절에서 주워 온 남의 소문뿐이었으니, 제 말로 노부인의 말을 막는 것을 한경은 처음 보았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육설은 끝내 편지 쪽을 보지 않았다.멎었던 반지가 다시 돌기 시작했는데,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한경은 인형의 눈으로 그 접힌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북에 가시거든 궤를 열 때마다 맛을 보시라고, 유월 초닷새 마당에서 그녀가 시동생에게 일렀었다.그는 맛을 보았고, 그래서 이 편지가 왔다는 것을 한경은 알았다.소매 안에는 약방 열쇠가 들어 있었다.가운데 줄 서랍 여섯에 든 서 푼짜리 뿌리와 금창약 자리에 든 밀가루가, 지금 북변에서 군졸들의 상처를 썩히고 있었다.그것을 바꿔 넣은 손은 엿새 전에 광에서 목이 졸렸고, 그 사람을 광에 넣은 것은 한경의 한마디였다.그러나 궤짝은 그보다 한 달 반이나 먼저 떠났다.사람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되돌아오는 궤짝은 없었다.---어젯밤 끈을 감던 노부인은, 내일은 네 서방이 온다는 한마디를 처음으로 보탰다.아흐레째 매듭은 그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틈 없이 조여졌다.칠월 그믐밤이었고, 달이 없었다.회랑에서 들려온 그의 발소리는 한경이 알던 것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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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미끼

스무날 아침, 진 어멈이 향낭을 갈러 서하당에 들었을 때, 화로 재 위에서 종이 귀퉁이 하나가 오그라들며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한경은 화로 앞 걸상에 앉아 부젓가락으로 그것을 재 속에 묻었다.진 어멈의 코가 먼저 움찔했다."소인은 향낭만 갈러… 아니, 부인. 무얼 태우십니까?종이 타는 냄새가 회랑까지 나던데요.""봉지. 궤에 남아 있던 거 다."한경이 부젓가락으로 재를 한 번 더 뒤적였다.타다 만 종이 귀가 재 위로 잠깐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았다."둬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잖아.보는 사람마다 그날 밤 얘기나 하고.""어이구,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어요.소인이 요전에 여쭌 것도 그래서…."진 어멈의 눈이 화로 재 위에 한참 머물렀다.손가락 두 개가 소매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갔고, 헌 향낭을 서랍에 넣는 손이 오늘은 굼떴다.손톱 끝이 서랍 고리를 두 번 헛짚었다.진 어멈은 여느 날보다 서둘러 나갔다.진 어멈의 발소리가 회랑 끝으로 멀어지자 한경은 궤 맨 아래 칸을 열었다.끈에 묶인 봉지 묶음 다섯은 그대로 거기 있었다.화로에서 탄 것은 새벽에 한경이 제 손으로 봉지 모양을 내어 접어 둔 빈 종이 넉 장이었다.---그날 문안이 파하고 주씨와 육설이 먼저 나갔다.한경은 일어서지 않았다.창으로 든 볕이 노부인의 무릎께까지 와 있었다.노부인이 그 볕에서 눈을 들었다."할 말이 있느냐."한경은 무릎 위에서 손을 고쳐 쥐었다."요즘 제 소매에서 향이 나요, 어머님.전에는 아무 냄새도 안 났는데요."노부인의 손에서 염주가 알 하나 위에 멎었다가 다시 돌았다."대답은 스무사흘에 정청에서 듣겠다. 가 보아라."오후에 서하당에 들른 주씨는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물었다."형님, 그 봉지들은 다 어쩌셨어요?저 같으면 무서워서 방에 한시도 못 두겠던데.그런 건 두면 밤마다 꿈에 나온다잖아요.""친정에 보냈어요.아버지가 맡아 두신대요.""어머, 친정에요?잘하셨네, 잘하셨어.사돈 어른이 맡아 주시면야 누가 뭐라겠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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