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291 - Chapter 300

420 Chapters

291화. 여섯 번째 도시의 제안

한 달 뒤의 밤이 지나고 며칠 뒤. 다시 회사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제안이 올라왔다. 로마. 처음 보고서 제목을 봤을 때부터 무슨 내용인지 짐작했다. [유럽 총괄실 산하 디자인 연구센터 설립 검토안] 현재 다섯 도시의 구조와는 조금 달랐다. 프라하와 바르샤바가 운영과 생산. 파리가 브랜드와 시장. 뮌헨이 기술. 스톡홀름이 지속가능성과 북유럽 사업의 중심이라면. 로마에는 제품과 공간, 브랜드 경험을 함께 연구하는 디자인 센터를 두자는 제안이었다. 규모도 크지 않았다. 초기 인력 스물여덟 명. 본격적인 지사도 아니었다. 독립적인 영업 조직을 만들 필요도 없고. 운영 부담도 다른 도시보다 훨씬 적었다. 재무팀 검토도 나쁘지 않았다. 현지 지원 정책까지 붙으면 초기 비용의 상당 부분을 줄일 수 있었다. 회의 자료만 보면. 거절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두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예린이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초기 투자 규모는 예상보다 크지 않습니다. 로마시 쪽 지원 조건까지 반영하면 첫 2년은—” 나는 첫 장을 넘겼다. 두 번째 장에는 현지 인력 확보 가능성. 세 번째 장에는 예상 비용. 그다음은 후보 건물이었다. 나는 한 장만 제대로 보고 자료를 덮었다. “안 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한예린이 말을 멈췄고. 카렐도 나를 봤다. 뮌헨에서 연결된 화면까지 잠잠해졌다. 카렐이 가장 먼저 물었다. “검토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까?” “네.” “자료를 아직 다 안 보셨습니다.” “알아요.” “사업성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카렐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내가 먼저 웃었다. “오늘은 반대 안 해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역시.” 카렐이 자료를 앞으로 당겼다. “적어도 이유는 듣고 싶습니다.” “지금 다섯 도시도 충분해요.” 그 말 뒤로 또 잠깐 조용해졌다. 한예린이 물었다. “인력 문제 때문에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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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화. 멈추기로 한 회사

로마 프로젝트를 거절한 뒤. 이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성장률 목표’를 낮췄다. 숫자만 보면 꽤 큰 변화였다. 예전에는 매년 다음 도시를 검토했고. 다음 시장을 찾았고. 매출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신규 프로젝트를 계속 넣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향이 달랐다. 매출보다 직원 유지율. 신규 도시보다 기존 도시의 안정성. 외형 성장보다 운영 지속성. 보고서를 처음 본 몇몇 이사들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장률 목표를 이 정도로 낮추겠다는 겁니까?” “네.” “투자자 반응을 고려한 겁니까?” “고려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자료를 넘겼다. “지난 2년 동안 도시가 늘었고.” “네.” “조직도 계속 커졌습니다.” “그게 회사 성장 아닙니까?” “맞아요.” “그럼 왜 지금 멈춥니까?”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회의실 벽면 화면에는 다섯 도시의 숫자가 떠 있었다. 프라하. 바르샤바. 뮌헨. 파리. 스톡홀름. 전부 조금씩 달랐다. 매출도. 인력 규모도. 이직률도. 운영 안정성도. 겉으로는 하나의 유럽 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조직을 동시에 끌고 가는 구조였다. “지금까지는 늘리는 데 집중했어요.” 내가 말했다. “이제는 유지하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한 이사가 바로 물었다. “정체를 선택하는 겁니까?” 나는 그를 봤다. “지속을 선택하는 겁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정체와 지속은 다릅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성장을 멈추겠다는 게 아니라.” “그럼요?” “성장의 기준을 바꾸겠다는 겁니다.”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직원 유지율이 나왔다. “올해부터 유럽 지역 주요 성과지표에 직원 유지율을 더 크게 넣겠습니다.” 다음 장. “도시별 초과근무.” 다음. “중간관리자 교체율.” 다음. “총괄 승인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의사결정 비율.” 카렐이 옆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한번 쳐다봤다. “이것도 넣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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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화. 아무도 안 떠난 분기

세 달 뒤. 숫자가 나왔다. 예상대로 매출 성장률은 낮아졌다. 전년 동기 대비 증가 폭은 이전 분기보다 작았고, 외부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수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숫자가 있었다. 핵심 직원 퇴사자. 0명. 처음이었다. 나는 보고서를 한참 봤다. “진짜 0이에요?” 한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휴직자는?” “있어요. 퇴사는 아니고.” “이직 예정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사람 없습니다.” 카렐이 옆에서 태블릿을 넘겼다. “핵심 인력뿐 아니라 전체 자발적 퇴사율도 낮아졌습니다.” “얼마나?” “작년 동기 대비 31%.” 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 매출 숫자였다면 바로 반응했을 것이다. 잘했네. 더 올릴 수 있겠네. 다음 목표는 얼마. 예전의 나는 항상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0명. 아무도 떠나지 않은 분기. 그 숫자가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다. 월간 운영회의에는 처음으로 직원대표도 참석했다. 새로운 성장 목표를 평가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도시별 책임자. 재무. 인사. 운영. 직원대표까지. 나는 일부러 보고서를 먼저 설명하지 않았다. “어땠어요?” 직원대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확실히 덜 지칩니다.” “구체적으로?” “승인 대기 시간이 줄었고요.” “네.” “갑자기 추가되는 신규 프로젝트가 거의 없었습니다.” 카렐이 바로 끼어들었다. “거의가 아니라 없었습니다.” 직원대표가 웃었다. “맞습니다.” “또요?” “중간관리자들이 예전보다 휴가를 실제로 씁니다.” 나는 인사 자료를 봤다. 정말이었다. 휴가 사용률도 올라가 있었다. “이게 다 성장률 낮춘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한예린이 말했다. “전부는 아니겠죠.” 카렐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 개선 영향도 있습니다.” 직원대표가 덧붙였다. “그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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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화. 모른다는 명령

집에 돌아온 밤. 도현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새로운 명령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소파에 기대 앉은 채 그를 봤다. “갑자기?” “네.” “번호는?” “없습니다.” 나는 웃었다. “다행이네.” “왜요?” “또 13, 14 이런 거 붙이기 시작할까 봐.” 도현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번호는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왜 묻습니까?” “혹시 몰라서.”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내용은?” 그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십시오.” 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웃었다. “그게 무슨 명령.” “당신에게 가장 어렵습니다.” 웃음이 조금 줄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한테만?” “아닙니다.” “주인님도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럼 공동 명령?” “그 표현도 나쁘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내리고 주인님도 지키는 명령?” “네.” 나는 팔짱을 꼈다. “이상한데.” “무엇이?” “예전에는 명령하면 내가 지키는 거였잖아요.” “지금도 기본은 그렇습니다.” “근데 이건 같이.” “이건.” 도현이 천천히 말했다. “제가 지키지 않으면 당신에게 요구할 수 없는 내용이니까.” 그 말은 마음에 들었다. “그럼 카드 써요?” 내가 일부러 물었다. 도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왜?” “카드는 태웠으니까.” “[12]는 남겼잖아요.” “그건 시작점이고.” “이건?” “그냥 오늘부터 말로 기억하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이런 문장은 카드가 됐을지도 몰랐다. 글씨로 적고. 확인하고. 서랍에 넣고. 나중에 다시 꺼내 봤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한 문장.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시험해 볼까요?” 도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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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화. 카렐의 결혼식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것. 그 번호 없는 명령이 생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렐에게서 청첩장이 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내 행사 초대인 줄 알았다. 메일 제목도 평범했다. [개인 일정 관련 초대] 나는 별생각 없이 열었다가 화면을 한참 봤다. “뭐야.” 한예린이 맞은편에서 물었다. “왜?” “카렐 결혼한대.” “드디어 말했네?”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었어요?” “재무팀에서는 몇 명 알았어.” “나는 왜 몰랐지?” 한예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총괄님한테 연애 보고까지 해야 돼?” 말문이 막혔다. “…그건 아니지.” “그렇지.” “그래도 부대표잖아.” “그래서 결혼식은 초대했잖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청첩장을 다시 봤다. 장소는 프라하 외곽의 작은 예식장이었다. 신부 이름은 익숙했다. 몇 번 현장 보고서에서 본 이름. 프라하 현장 엔지니어였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 사람 혹시…” “알아?” “예전에 창고 동선 수정안 냈던 사람 아닌가?” 한예린이 웃었다. “맞아.” “카렐이 그때 엄청 칭찬했는데.” “그래서 눈치챘어야지.” “업무 칭찬이었잖아.” “업무 칭찬만 했겠지. 회사에서는.” 나는 괜히 청첩장을 다시 읽었다. 카렐이 회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직설적인 성격이지만 자기 사생활은 의외로 철저했다. 결혼까지 준비하면서도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니. 조금 놀라웠다. 그날 저녁 도현에게 말했다. “카렐 결혼해요.” 도현이 책에서 눈을 들었다. “그렇습니까?” “놀랍지 않아요?” “조금.” “그게 다?” “제가 많이 놀라야 합니까?” 나는 그를 빤히 봤다. 도현이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봅니까?” “이제 질투 안 해도 되겠다 생각 안 했어요?”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결혼한다고 질투할 이유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아직도?” “감정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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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화. 다시 입는 드레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웨딩드레스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아직 보관 중인데, 장기 보관을 계속할지 아니면 처분할지 결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메일을 한참 보다가 업체에 드레스를 보내 달라고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날 오후. 커다란 드레스 박스가 집으로 도착했다. 뚜껑을 열자 익숙한 천이 보였다. 결혼식 당일보다 조금 차분해 보였다. 조명도 없고. 꽃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그냥 한 벌의 드레스 같았다. 나는 한참 내려다보다가 결국 꺼냈다. 그리고 입어봤다. 지퍼를 올리고 거울 앞에 섰다. “아직 맞네.” 조금 놀라웠다. 결혼식 날 이후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 그날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반지를 끼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도현 손을 잡고. 서약하고. 사진 찍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거울 속 나와 드레스뿐이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한번 정리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도현이었다. “서윤, 혹시—” 말이 멈췄다. 나는 거울로 그의 얼굴을 봤다. 정말 그대로 굳어 있었다. “왜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왜 입었습니까?” “맞나 보려고.” 도현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지금도.” 그가 말을 멈췄다. 나는 일부러 기다렸다. “지금도 뭐?” 도현이 나를 바라봤다. “아름답습니다.” 너무 단순한 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조금 더 길게 말했을 사람. 왜 좋은지. 어디가 달라 보이는지. 그런 설명이 붙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냥. 아름답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좋았다. 나는 웃었다. “말이 그것뿐이에요?” “네.” “왜?” “더 말하면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어떻게?” 도현은 잠시 나를 봤다. “지금은 그냥 보는 게 좋습니다.” 나는 거울을 다시 봤다. “결혼식 때보다 지금이 더 어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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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화. 드레스 없는 기념일

웨딩드레스는 집에서 사라졌지만. 결혼기념일은 예정대로 찾아왔다. 큰 행사는 없었다. 파티도. 호텔 예약도. 꽃으로 가득한 방도 없었다. 도현은 검은 정장을 입었고. 나는 평범한 원피스를 골랐다.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하고 있는데 도현이 뒤에서 물었다. “그걸 입습니까?” 나는 거울로 그를 봤다. “왜요?” “아닙니다.” “별로예요?” “아름답습니다.” 나는 웃었다. “웨딩드레스보다?” 도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비교해야 합니까?” “대답하기 싫구나.” “둘 다 좋습니다.” “안전한 답 골랐네.” “정확한 답입니다.” 나는 작은 가방을 들었다. “근데 어디 가요?” 도현은 끝까지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멀지 않습니다.” “호텔?” “아닙니다.” “예약 어려운 데?” “아닙니다.” “또 비싼 데 잡았어요?” “아닙니다.” 차가 멈춘 곳을 보고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익숙한 동네였다. 결혼 전. 우리가 처음 함께 살기 시작했던 집 근처. 그리고 그때 몇 번 갔던 작은 식당. 지금도 그대로 있었다. 간판만 조금 낡아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도현을 봤다. “여기?” “네.” “결혼기념일인데?” “네.” “진짜?” “왜 계속 확인합니까?” “너무 평범하잖아요.” 도현은 먼저 식당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평범하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앉았던 자리는 아니었다. 그때는 창가였고. 오늘은 안쪽 작은 테이블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거의 같았다. 나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웃었다. “여기 아직도 이거 있네.” “무엇이?” “그때 도현 씨가 맛없다고 했던 거.” 그가 메뉴를 봤다. “제가 그랬습니까?” “응.” “기억 안 납니다.” “나는 기억하는데.” “그럼 주문합시다.” “맛없다며.” “지금은 입맛이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주문했다. 먹어보더니 도현이 말했다. “여전히 제 취향은 아닙니다.” 나는 웃었다. “그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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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화. 세 번째 물건

빈 상자의 세 번째 물건은 예상 밖이었다. 처음에는 도현이 뭔가 작은 걸 꺼낼 줄 알았다. 아버지의 시계를 수리할 때 바꿨던 오래된 줄 조각. 혹은 편지 봉투 일부. 그런 것. 그런데 도현이 서재에서 돌아왔을 때 손에 들고 있는 건 시계 자체였다. 나는 바로 알아봤다. “이걸 넣어요?” 도현은 손바닥 위의 시계를 잠시 내려다봤다. “네.” “매일 차는 물건 아니었어요?” “그랬습니다.” “근데 갑자기?”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왼쪽 손목을 봤다. 늘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상했다. 오랫동안 도현의 손목과 한 몸처럼 붙어 있던 물건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사람이 조금 달라 보였다. “안 차도 괜찮아요?” 내가 묻자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계의 초침을 한번 봤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제 충분히 움직이는 걸 봤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수리하고 나서.” 그는 천천히 말했다. “처음에는 계속 확인했습니다.” 나는 기억했다. 4시 17분. 멈춰 있던 시간. 아버지가 죽은 날. 도현이 전화를 받고도 회의를 끝낸 뒤에야 병원으로 갔던 시간. 그 시계를 처음 수리했을 때. 도현은 4시 17분을 지나 4시 18분이 되는 순간을 오래 바라봤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매일 찬 것도 그거 때문이었어요?” 내가 물었다. “일부는.” “나머지는?” “아버지 물건이라서.” 도현은 시계 뒷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처음에는 몸에 차고 있어야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응.” “안 차면.” 그가 잠시 멈췄다. “그날도 같이 놓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은?” 도현은 손에 든 시계를 한참 바라봤다. “멈춘 시간을 계속 몸에 차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도현은 상자를 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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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화. 마지막이 없는 상자

상자는 생각보다 빨리 찼다. 처음에는 리스본 엽서와 검은 단추뿐이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의 시계. 제주의 노을 사진. 차명희의 바다 그림을 찍은 작은 인화본. 그리고 어느 날에는 내가 제주에서 가져온 작은 돌 하나가 들어갔다. 또 다른 날에는 도현이 오래된 콘서트 티켓을 넣었다. “이건 뭐예요?” “대학 때 갔던 공연.” “갑자기?” “차도현이라는 사람 이야기할 때 말했잖습니까.” “옛날 록 음악 좋아했다고?” “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도현이 잠시 티켓을 내려다봤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상자에?” “여기 들어가도 될 것 같아서.” 나는 웃었다. “상자 기준 진짜 없어졌네.” “그게 좋지 않습니까?” “응.” 상자에는 점점 서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이 쌓였다. 회사의 기록도 아니었고. 결혼의 기록만 모은 것도 아니었다. 성공한 순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패. 멈춤. 떠남. 돌아옴. 누군가를 새롭게 알게 된 날. 자기 자신을 조금 다르게 본 순간. 그런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도현이 상자를 열어보다가 물었다. “반쯤 찼습니다.” 나는 옆에서 책을 읽다가 대충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요.” “가득 차면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요?” “더 넣을 자리가 없어지면.”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더 큰 거 사요.” 도현이 나를 봤다. “끝내지 않고?” “응.” “첫 번째 상자는 완성됐다고 두고 새 상자를 시작하는 건?” “그것도 괜찮고.” “그럼 기준은?” “없어요.” 도현의 표정이 조금 답답해졌다. 나는 웃었다. “왜.” “기준이 없으면 선택지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거잖아요.” 그는 다시 상자를 내려다봤다. “물건이 너무 많아지면?” “버릴 거 고르고.” “버릴 때 기준은?” “그때 생각하고.” “또 그때.” “응.” 도현이 결국 웃었다. “우리 관계와 비슷하군요.” 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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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화. 다음 장

유럽 총괄 취임 3년 차 첫날.다섯 도시의 화면이 동시에 켜졌다.프라하.바르샤바.파리.스톡홀름.서울.사람들이 각각 자기 자리에서 보고했다.나는 예전처럼 모든 내용을 직접 수정하지 않았다.틀린 부분은 질문했고.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회의 마지막에 카렐이 물었다.“올해 확장 계획은 없습니까?”“없어요.”“정말요?”“일단은.”한예린이 웃었다.“총괄님이 성장 안 하겠다고 말하는 날도 오는군요.”“사람은 변해요.”회의가 끝났다.집으로 돌아오자 도현은 먼저 와 있었다.검은 단추도 없고.카드도 없고.책상 위에는 작은 상자만 있었다.“오늘 뭐 넣어요?”내가 묻자 도현이 말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빈칸?”“네.”“싫지 않아요?”예전의 도현이라면 빈칸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계획하고.붙잡고.정하고.확인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상자 뚜껑을 닫지 않았다.“괜찮습니다.”“왜?”“앞으로 생길 테니까.”나는 그의 앞에 섰다.“오늘은 뭘 원해요?”도현이 먼저 묻지 않았다.이번에는 내가 물었다.그는 잠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 뒤 말했다.“당신.”“그건 너무 포괄적인데.”“그럼 구체적으로.”도현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오늘 하루 끝에 제게 오는 당신.”나는 그 손을 바라봤다.잡아야 할 의무는 없었다.이미 결혼했고.같은 집에 살고.수없이 돌아왔다고 해서 오늘도 당연히 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그래서 몇 초 더 기다렸다.도현도 기다렸다.“불안해요?”내가 물었다.“조금.”“그래도 안 잡아요?”“당신이 먼저 선택해야 하니까.”나는 결국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손가락이 천천히 닫혔다.“오늘도?”도현이 물었다.“네.”“내일은?”나는 웃었다.“내일 다시 물어요.”그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알겠습니다.”“그럼 지금은요?”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지금은 제가 물어도 됩니까?”“물어봐요.”그의 손이 허리에 닿기 직전 멈췄다.“가까이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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