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全部章節:第 11 章 - 第 20 章

36 章節

11. 숨겨진 뿌리 위에서, 사랑은 처음으로 떨기 시작했다

궁 안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아침의 첫 종이 울리고, 내관들이 뿔뿔이 흩어져각 전각에 불을 밝히고, 찬장 문을 열고, 하루를 준비하는 발소리를 남겼다.그러나 그날만큼은, 수라간으로 향하는 걸음들이 유난히 빠르고 조심스러웠다.“그 아이가… 반역 가문의 피라고?”소희는 하얀 치마를 입은 채 찬란한 정원의 정자 위에서 하녀의 보고를 들었다.“정확하진 않으나, 강화도 정씨 문중. 15년 전 정태선 대감의 역모 사건으로 일가가 몰살된 그 가문이옵니다. 아이만 살아남았고, 이후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이름과 나이, 행적이 일치한단 말이 돌고 있습니다.”“정채향… 정태선의 손녀란 말이지.”소희는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평소처럼 입꼬리를 올리진 않았다.대신 그녀의 눈동자는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이제야 확신이 들었다.그 아이는 결코 내 곁에 두어선 안 될 사람.그 시각, 세자 이현은 침전 서편에 놓인 작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그의 앞엔 수라 대신, 두루마리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정채향… 강화 정씨 문중, 맞느냐.”그는 중얼이다시피 말했다.그의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손끝은 여전히 고요했다.“하필… 왜 그런 이름으로 돌아온 것인가.”그녀를 탓하는 말이 아니었다.그저,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얽혀버린 현실이 원망스러웠다.‘나는 이제야 누군가의 숨결을 따뜻하다고 느끼는데, 세상은 그 숨을 멈추라 말한다.’그는 종이를 다시 말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났다.그날 저녁, 수라는 오지 않았다.정채향은 자신의 손으로 쑥국과 연근조림을 차렸지만,내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단 하나.“오늘은 수라를 드시지 않겠다는 전교이옵니다.”채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조용히 상을 들었다.그러나 손끝이, 분명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밤이 깊어가고, 달이 떠올랐다. 그녀는 수라간을 나서 뒤뜰에 섰다.뒷마당의 감초 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마른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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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언젠가 날개가 될 사랑

흰눈이 내렸다.수라간 창문에 얇게 덧씌워진 유리창 밖으로한 송이, 두 송이. 눈송이들이 궁의 기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정채향은 그 눈을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 숨결이 창에 닿자, 창에는 보이지 않던 무늬가 번졌다.그것은 오래 감추었던 자신의 흔적처럼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궁녀 정채향을 수라간에서 내보내십시오.”어전회의 중, 내관이 조용히 읽은 상소문 하나.서슬 퍼런 한 줄 문장이 궁 안 공기의 결을 바꾸어 놓았다.“역모 가문의 혈육이 궁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불안을 조장할 수 있사옵니다.수라간이라 하나, 세자 저하의 공간을 들락거리는 존재로선…부적절하다 하겠습니다.”그 말에 수많은 눈동자가 조용히 이현을 향해 쏠렸다.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정채향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그 말은 조용했지만 공기보다 무거웠다.“그녀는 수라를 만들었을 뿐, 정치도, 음모도, 역모도 모릅니다.다만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숨기고… 손을 바쳤을 뿐입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 사람을, 죄인으로 부르고 궁 밖으로 내쫓겠다면 그 궁의 정의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그 말 한마디가 찬 공기 속에 조용히 울렸다.소희는 조용히 손톱을 정리하고 있었다.옅은 홍화 기름을 바른 손끝이 곧고 곱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 숨은 날카로움은 감춰지지 않았다.“저하께선… 그 아이를 지키기로 하셨군요.”그녀는 작게 중얼이며 일어났다.“그렇다면, 나는 그 아이가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야겠지.”채향은 그날 수라간의 작은 골방에서 쪽지를 하나 발견했다.‘넌 절대 세자의 곁에 머물 수 없다. 버티는 건, 오래가지 않는다.’종이에는 이름이 없었다.그러나 필체는 익숙했다. 소희가 직접 쓴 것이 아닐지라도,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계략의 그림자임은 분명했다.채향은 그 종이를 들고 불을 피우지 않은 화로 앞에 앉았다.불이 없으니 태울 수도 없었다.그래서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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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랑은 다짐으로 굳어지고

햇살이 유난히 말갛게 내리던 날이었다.초겨울의 볕은 뜨겁지 않았으나, 살갗에 닿는 감촉은 유리처럼 투명했다.정채향은 수라간 마당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하얗게 뻗은 뿌리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뜯으며 어제의 말들을 되새겼다.“머물고 싶어 한다면, 나는 그곳을 지키겠소.”그 다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그녀는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그 다짐이 향하는 곳이 얼마나 거센 바람을 맞게 될지는 알고 있었다.“정채향이라는 아이, 단지 정씨 가문의 후손일 뿐이 아닙니다.”윤대익, 민소희의 외삼촌이며 조정 내 유력한 권신 중 한 사람.그는 상소문을 조용히 펼쳐 보이며 말했다.“역모 가문과 세자의 결탁, 그 하나로도 세자 자리를 재고해야 한다는 여론을 충분히 만들 수 있지요.”그의 말에 신하 몇이 눈빛을 교환했다.겉으로는 침묵했지만, 그 무게 있는 말 한 줄이 조정 안을 미세하게 뒤틀고 있었다.“지금 저하께선 ‘정채향’이라는 존재로 인해 왕세자의 신분을 위협받고 계십니다.”민소희는 그 말을 마치 슬퍼하듯 말했다.그러나 목소리는 결코 떨리지 않았다.그 무렵, 채향은 혼자 수라간의 헛간 쪽 찬장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오늘 하루,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지독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궁녀들이 눈을 피하고, 내관들이 속삭이며 등을 돌리고,심지어 몇몇 음식 재료는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들여오기 시작했다.그녀의 존재는 이제, ‘세자의 사람’이 아니라 ‘세자를 위태롭게 하는 자’로 분류되고 있었다.그날 오후, 세자 이현이 직접 수라간을 찾았다.모든 궁녀와 내관이 놀라 숨을 삼켰고,채향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대야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마루 끝으로 나아갔다.“저하… 어찌 이곳까지…”“이곳이 그대의 자리라면, 내가 그곳에 서야 하지 않겠소.”그 말에, 궁녀들 중 몇은 미세하게 몸을 움찔했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진 않았다.이현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가볍게 덮었다.“춥소.”그 말 하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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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정치보다 더 크고 무거운 고통

정오 무렵, 하늘에 엷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해는 떴으되, 따뜻하지 않았고궁의 마당은 알 수 없는 먹빛 기운으로 가라앉아 있었다.그날 수라간으로 전해진 명령은 단 한 줄이었다.“정채향, 궁을 나갈 준비를 하라.”그 문장이 적힌 문서를 받아든 순간, 채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종이를 천천히 접어, 손끝으로 눌렀다.종이의 질감이 피부를 스쳤고, 먹선은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말처럼 또렷했다.“퇴궁… 하신다구요?”어수선해진 수라간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 궁녀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채향 언니가… 왜요? 뭐 잘못했대요?”“그런 게 아니고… 그게…”그들 사이엔 정확한 말이 없었다.누구도 정확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채향이 너무 많은 것을 얻었고, 너무 깊이 세자의 마음 안에 들어섰다는 것을.세자 이현은 그 소식을 내관을 통해 전해 들었다.그 순간, 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종묘의 제향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으나눈빛은 피로하지 않았고, 되려, 고요한 분노로 가라앉아 있었다.“퇴궁 명령을 내린 이는 누구요.”그가 물었을 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이현은 알았다. 그것이 조정의 뜻이며, 더 정확히는 누군가의 기획 아래 움직인 결정임을.“명분이 약하니, 행정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이로군.”그는 조용히 중얼였다.“하지만… 나는 이제 아무것도 넘기지 않을 것이오.”그날 밤, 정채향은 수라간의 마루에 앉아 작은 꾸러미를 묶고 있었다.옷 몇 벌, 손수건 몇 장, 그리고 잘 다듬어 놓은 나무숟가락 하나.그것이 그녀가 이 궁에서 가진 전부였다.그리고 그녀가 ‘지우려 했던 이름’으로 살아온 몇 년의 흔적이기도 했다.문득 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기운이 마당을 감싸며, 종이 문짝이 덜컥거렸다.그 순간, 문이 조용히 열렸다.“그대가 물러난다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오.”이현이었다.채향은 놀란 기색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저하, 전하께서 위험해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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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의심은 사랑보다 먼저 스며든다

장독대 위에 눈이 얹히기 시작했다.밤새 찬 기운을 머금은 하늘 아래, 수라간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정채향은 그날 따라 일찍 눈을 떴다.한밤중에 깬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숨이 차도록 낯선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문밖엔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공기 속에 묻은 ‘누군가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마마, 수라간 쪽은 제가 살피겠습니다.”중궁전 내소에서 민소희 앞에 선 궁녀가 고개를 숙였다.“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작은 것 하나라도 내게 보고하도록.”“예, 마마.”“그 아이의 흔들림이, 곧 저하의 약점이 될 것이다.”그날 아침, 채향은 연잎에 싸인 쌀밥을 쪘다.따로 국을 내지 않고, 연잎의 은은한 향으로만 식욕을 돋우는 방식이었다.이현의 수라로 올릴 음식이었다.그러나 수라를 준비하던 그녀는 손이 닿지 않았을 작은 찬합 하나가누군가에 의해 옮겨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그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였다.하지만, 음식을 다루는 사람의 감각은 작은 ‘위치’ 하나로도 진실을 간파할 수 있었다.‘누군가… 이곳에 다녀갔다.’“요 며칠, 수라간 내에서 말이 많다지요.”세자빈을 지지하던 대신 하나가 식사 중 나직이 말을 건넸다.“그 아이를 몰아내지 못하면, 다음은 저하의 자리를 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그 말에, 이현은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러하겠지요.”대신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허나 그때도, 나는 그 아이를 택할 것입니다.”그 단호한 한 줄의 말은 차보다도 더 뜨거웠고, 궁 안 공기의 균형을 다시 흔들었다.그날 저녁, 채향은 장독대 옆에 작은 바가지 하나를 두었다.그 안엔 당귀와 감초, 산수유를 달인 물이 담겨 있었다.왕세자의 기력이 최근 부쩍 떨어졌다는 내관의 말을 듣고 그녀가 밤새 손수 다려낸 보양차였다.그러나 다음 날, 그 바가지는 사라지고 없었다.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이것은 단순한 실수나 오해가 아니며 누군가가 그녀의 손끝에 묻은 ‘사랑’을 뒤집어 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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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랑을 위해 무기가 되는 법

채향은 수라간의 창고에 홀로 앉아 있었다.불을 피우지 않은 화로 앞.손에는 흑단 상자의 쪽지를 꼭 쥐고 있었다.이제, 누군가가 자신을 철저히 도구로 보며 세자의 입에 독을 넣길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기대를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이제부터는… 그들이 내게 무엇을 주는지, 어떻게 건네는지, 누구를 통해 움직이는지를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그날 밤, 채향은 찬장을 정리하며 일부러 작은 실수를 하나 만들었다.약재 찬합을 일부러 열어두고, 연잎물 대신 잘못된 탕제를 바깥에 내어놓았다.그 실수를 본 누군가가 기회를 엿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그리고 예상대로였다.다음 날 아침, 그 찬합 안에 다른 손의 흔적이 있었다.연잎물 대신, 탐라에서 온 고급 감초가 정갈히 놓여 있었고,그 감초 사이에 하얀 가루가 든 작은 향첩 하나가 숨어 있었다.“정채향을 계속 수라간에 남겨둬야 합니까?”소희는 조용히 물었다.“이미 세자의 마음은 깊이 들어간 듯합니다. 그 아이가 몰래 무언가를 꾸민다 해도, 저하는 눈감아주겠지요.”“그렇기에 남겨두는 것이다.”그녀의 외삼촌, 윤대익은 단호히 말했다.“그 아이는 이미 우리 손에 들려 있다. 문제는… 얼마나 유용하게 이용하느냐이다.”“이용하고… 나면요?”그 질문에 대익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그땐, 스스로 사라지게 하면 되지.”채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자신이 지금 어떤 게임판 위에 놓였는지도,그들의 속내가 어디까지 내려가 있는지도.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조용히 움직였다.그날 그녀는 일부러 중궁전 소속 궁녀와 물품을 교환하겠다는 요청을 들고 중전전 마당으로 향했다.자연스러운 동선, 의심받지 않을 접근.그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가 누구와 눈빛을 주고받는지,어느 방향에서 감초 향이 묘하게 바뀌었는지를 자세히 살폈다.“그대는 더 이상 단순한 궁녀가 아니오.”왕세자 이현은 그날 밤, 채향과 단둘이 마주앉은 자리에서 말했다.“나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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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는 나의 칼이 되고, 나는 너의 방패가 된다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소리 내지 않고, 수라간 마당 위로 기척처럼 스며들었다.정채향은 짚단 위에 쪼그려 앉아 방금 다려낸 보리차를 식히고 있었다.무심한 듯 툭툭 떨어지는 보리 냄새.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차가 식는 속도보다 더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어디까지 흔들리는 걸까. 아니, 어디까지 흔들리게 두고 있는 걸까.”그녀는 누군가가 수라간 안에 더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자신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세자를 연결하는 고리를어디선가 ‘누군가’가 조용히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그날, 조용히 이현의 손에 건넨 것은 작은 장첩 하나였다.안에는 향첩 두 개와 초서로 적힌 쪽지 몇 장,그리고 중궁전 앞 마당에서 발견한 하얀색 섬유 조각 하나.이현은 그 장첩을 손에 들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그대 손이, 이제는 나보다 더 빠르군.”그 말에 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저하의 곁에 있으려면, 더 이상 느릴 수 없습니다.”“하지만… 나는 그대가, 이렇게 날을 세우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오.”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전하 덕분입니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제 생에서 처음이니까요.”수라간의 작은 광에는 사람의 기척이 자주 맴돌기 시작했다.낮에는 별일 없는 듯 보이던 궁녀들이 밤이면 창고 뒤로 무언가를 숨기듯 움직였고,간혹 사라진 재료들이 이튿날 다시 돌아왔다.그 변화는 느렸지만, 분명했다.그리고 그 안에서 채향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고상희. 수라간에서 오래 일하던 중전 소속 궁녀.조용했고, 항상 규율을 지켰으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의 말수가 줄었다.“상희 언니, 이 감초는 언제 들였나요?”그녀가 무심히 물었을 때, 상희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약재 바구니를 떨어뜨렸다.그 바구니 안에서 하얀 가루가 묻은 작은 장갑이 튀어나왔다.그 순간, 채향은 모든 퍼즐이 맞춰졌음을 느꼈다.이현은 곧장 상희를 소환하라는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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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궁의 법도 앞에 이름이 불린다는 것

궁중 연향. 하현달 열엿새, 궁의 내관과 궁녀들, 대신과 외척이 한자리에 모인 밤.이현은 그 자리에 수라간의 작은 찬합 하나를 직접 들고 나왔다.“이 음식은 내 마음이 향하는 자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모두가 숨을 삼켰다.“그녀의 이름은, 정채향.”그 한 마디가 내려앉자 모든 시선이 수라간 쪽을 향했다.그 자리에는 채향이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이미 누구보다 선명하게, 그 밤의 공기 위에 퍼져 있었다.“어찌 그리 경솔하십니까.”“혼사는 전하의 권한입니다.”“감정에 따라 궁의 체계를 흔드신다면…”대신들의 반발이 이어졌다.하지만 이현은 고요한 눈빛으로 단호히 말했다.“지금 내가 내리는 선택은 단지 마음의 일이 아닙니다.”“정채향은 어떤 외척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며이 궁의 숨결과 손길을 지닌 진정한 ‘중궁’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이입니다.”그 시각, 채향은 혼자 수라간 뒤뜰에 서 있었다.그녀의 손엔 작은 항아리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지금까지의 쪽지들과, 그녀가 감췄던 이름 없는 증거들이 담겨 있었다.“내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저하…”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였다.“…이제는, 저도 그 부름에 응할 차례입니다.”눈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은 멎었다.이현은 홀로 정전에 앉아 작은 향로 앞에 손을 모았다.“그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 모든 대가를 안고 나서겠다는 뜻이오.”그 말은 혼잣말이었지만, 기이하게도 바람이그 마지막 음절을 따라 조용히 기와 끝을 훑고 지나갔다.아침이 되자, 궁 전체가 조용히 웅성였다.밤새 쌓인 눈은 그리 깊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시선과 말은 유난히 무거웠다.“세자저하께서… 이름을 부르셨다지.”“그 이름이… 수라간 궁녀였다더라.”“그 아이, 정채향이라던가…”“이제 진짜 일이 커진 거지.”그 이름 하나가 마치 누군가의 피묻은 인장을 찍은 듯, 궁의 골목마다 낮게 번져갔다.“마마, 들으셨습니까? 세자저하께서 그 아이의 이름을… 궁중 연향에서”소희는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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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함께 서줬으면 하오

중전 민씨는 마침내 움직였다.“예비 세자빈으로 민소희 낭자를 책봉할 준비를 하라.”“명문가의 여식이며, 예절과 품행이 흠잡을 데 없다.”“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는 자가 궁을 어지럽히게 두지 말라.”그 말은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궁 전체를 울리는 북소리처럼 급속히 퍼져나갔다.수라간으로 돌아온 채향은내관 하나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었다.“중전 마마께서… 민 낭자를 예비 세자빈으로 지목하셨다고 합니다.”“…그리되면, 소란은 일단락될 터이니…”그 말 끝에 담긴 애매한 연민은 도리어 채향의 숨을 조이게 했다.이제 그녀는 누군가의 ‘혼란’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버려져야 할 표식이 되어버린 것이다.그날 밤, 소희는 손수 자수 놓인 화문석 위에 앉아 천연덕스럽게 물었다.“수라간에선 아직도 그 아이가 음식을 내리나?”“그래도 왕세자 저하께서… 미련이 있으신가 보지?”그녀의 눈빛은 웃고 있었지만 입꼬리는 독처럼 차가웠다.“하지만 그 아이는 잘 몰랐던 것 같아. 궁에선… 마음이 아니라 배경이 왕후를 만든다는 걸.”이현은 그 말을 들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중궁전과 내관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문들을 고요히 받아들였다.그리고 조용히 중전의 사저 앞에 홀로 섰다.“민소희 낭자에 대한 책봉 건, 아직 내 결재는 내리지 않았소.”그 한 마디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언이었다.중전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허나, 전하. 책봉이란 궁의 일이옵니다. 사사로운 정은 접어두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그 말에 이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궁의 일이기에, 더더욱 감정이 아닌 판단으로 움직이겠습니다.”그날 저녁, 채향은 수라간의 쌀통을 정리하다 작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붉은 밀봉 끈으로 묶인 그 안엔 정체 모를 가루와 이름 없는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이번엔 실수하지 마라. 이번 수라엔 반드시 넣어야 한다.”그 순간, 그녀는 알았다.이번에는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협박’이었다.그리고 이 독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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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비교는 때로 시험이 되지만, 품격은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내궁의 담장 너머로 아침 햇빛이 조용히 스며들던 시각.민소희는 꽃비단 당의를 곱게 걸치고 궁녀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그 걸음엔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었고,오히려 궁 안의 공기를 지배하려는 듯한 완벽히 계산된 자태가 담겨 있었다.“세자빈의 자리는 저절로 채워지는 법이 아니다.그 자리에 합당한 무게는 보는 이의 마음을 무릎 꿇게 만들어야지.”그녀의 말은 지나가는 궁녀들 사이에서 기이한 공기를 남겼다.그 무렵, 채향은 수라간 뒤뜰에서 고운 빛의 육수를 천천히 끓이고 있었다.기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맑은 국물,그 안엔 향과 기억, 의지와 기도를 담아 오랜 시간에 걸쳐 우러낸 정수가 들어 있었다.“온도는 낮되, 향은 짙어야 하옵니다.”“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그리울 맛이 되도록.”그녀의 말에 궁녀 하나가 숨죽이며 물었다.“왜 그리 조심스럽게 우리십니까?”채향은 대답 대신, 솥 위에 손을 얹고 잠시 눈을 감았다.“사람의 말보다, 이 맛이 먼저 저하께 닿기를 바라옵니다.”정오 무렵, 중전의 명으로 마련된 ‘예절 비교 연습’이 연꽃 정원에서 조용히 열렸다.그 자리에 소희는 뛰어난 예복을 갖춰 입고 등장했고,궁인들은 숨죽인 채 그 옆에 선 수라간 궁녀 정채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꽃을 꽂을 때, 어떤 생각으로 고르시옵니까?”궁예담당 상궁이 물었다.소희는 웃으며 말했다.“어느 것이 가장 돋보이는가를 봅니다. 세자빈의 자리란, 가장 눈부신 꽃이어야 하니까요.”그 말 뒤, 정채향에게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그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꽃은… 서로 어우러지게 꽂는 것이 맞다고 여깁니다.가장 향이 깊은 것과, 곁에서 그 향을 흩날릴 수 있는 것.그 조화가 한 송이를 완성하게 하옵니다.”궁녀들은 숨죽였고, 궁예 상궁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그날 밤, 중전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민소희는 빛났지만, 정채향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고도 그 자리를 채웠다.”“빛보다도, 무게를 가진 자가 있었단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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