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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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담담하지 않으면 무너질 테니까

왕은 국을 비운 후, 한참 동안 침묵했다.그 침묵은 긴 회랑을 타고, 조정 각처로 퍼졌고, 궁인들은 그 여운을 숨죽이며 기다렸다.그리고 이내, 왕의 입에서 짧은 명이 떨어졌다.“정채향, 그 손이 만든 맛으로 자격을 인정한다.”이현은 그제야 마른 숨을 내쉬었다.채향은 고개를 깊이 숙였고, 그 순간 왕은 단 한 마디를 덧붙였다.“그러나… 혼례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내 뜻이 아닌 조정의 뜻이 먼저니라.”그 말은 곧, 승인되었으되 정해진 바는 없다는 것.그리고 그 틈을 중전은 놓치지 않았다.다음 날, 세자전으로 온 조선 최고의 재봉 상궁이채향이 아닌, 민소희의 처소로 향했다.수묵색 비단을 자르고, 은실로 봉황을 수놓기 시작한 그 자리엔누가 봐도 ‘예비 세자빈’을 향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세자 저하께선 어릴 적부터 민소희 아씨와 정혼 이야기가 있었지요.”“그렇다 하더군요. 왕비 마마의 오라버니가 민 대감이지 않습니까. 혼례를 성사시키면… 왕비 권력도 견고해지지요.”그 소문은 이현의 귀에도 닿았다.“이제와 민소희 아씨를 다시 전면에…?”그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약탕을 가만히 저었다.“저하, 이 약은 속을 편히 해줍니다. 요 며칠... 속이 많이 상하셨을 테니.”그녀는 변명도, 투정도,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만도 말하지 않았다.다만 여전히, 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굴었다.그러나 이현은 그저 바라보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그대는 어째서, 이리도 담담하오.”“담담하지 않으면, 속이 무너질 테니까요.”그녀의 눈동자는 맑았으나 그 안엔 깊은 내면의 흔들림이 숨어 있었다.같은 시각, 중전은 소희를 불러 단둘이 앉았다.“넌, 채향보다 예쁘다. 넌, 채향보다 고귀하다. 그리고 넌 그 아이보다 ‘정해진 운명’에 어울린다.”민소희는 조심스레 웃었다.“어머니, 저는 세자빈이 아니라 왕후가 되려 합니다.”그 말에, 중전의 입꼬리도 천천히 올라갔다.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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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당신이 품은 여인의 과거가…

세자전의 아침은 유난히 맑고 고요했다.그 고요는 마치 폭풍 전의 바다처럼 불안한 평온이었다.그리고 그 평온을 깨는 이는 은은한 향수를 뿌린,붉은 연지보다도 진한 눈빛의 여인이었다.“소희 아씨를… 들이시옵니까?”내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현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멈췄다.잠시의 침묵. 그리고 이내, 짧은 대답.“들이라 하라.”소희는 금사로 수놓인 연분홍 치마를 입고 세자전으로 들어섰다.그 발걸음은 도도했고, 눈빛은 매끄러운 유약 위로 선 뾰족한 칼날 같았다.“저하, 오랜만에 뵙사옵니다.”“무슨 일이오.”이현의 태도는 냉담했다.그러나 민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서며 말했다.“어릴 적부터 저하께선 저를 ‘소희야’라고 부르셨지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지금은… 세자와 사대부 규수로 만난 것이니, 그 이름을 다시 부를 이유는 없소.”그녀는 웃지 않았다.대신 손에 감싸쥔 붉은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이건… 정채향이라는 여인의 어머니에 관한 기록입니다.기방에 잠시 몸을 담았던 이였고, 사내에게 버림받아 여관에 떠돌던 무명인.”이현의 시선이 봉투를 향해 잠시 멈췄다.그러나 그는 열지 않았다.“그대는 그 아이를 넘기 위해 그 어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오?”“저하… 궁은 피의 연장으로 움직입니다.그 아이가 어떤 향을 낸다 해도, 그 근원이 뿌리째 흔들린다면 국혼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그녀의 말은 단정했고, 어쩌면 정론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그 말 끝에 담긴 것은 조선의 품격이 아닌, 사적인 질투였다.“그대는… 그 아이가 만들어낸 맛 앞에서 한 점의 두려움도 없소?”이현의 물음에 민소희는 대답 대신 책상 위의 봉투를 손끝으로 밀었다.“저는 그 아이의 손맛이 아니라, 그 피의 맛을 경계합니다.”그날 오후, 채향은 궁녀 하나를 통해 민소희가 세자전을 찾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손에 들고 있던 죽간이 부들부들 떨렸다.“…기록을 들춰냈다 하더이다. 어머님의 과거를.”궁녀의 낮은 속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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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릇 위에 놓인 것은, 수라가 아니라 자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수라간에 다시 들어섰다.이번엔 아무도 묻지 않았다.왜 다시 여기에 왔느냐고, 무엇을 만들 것이냐고.대답이 필요 없을 만큼, 그녀의 발걸음에는 선택의 무게가 실려 있었으므로.“기억 속의 수라를 다시 지어보겠습니다.”채향은 그렇게 말하고, 단 하나의 재료, 단 하나의 냄비를 꺼내 들었다.그 재료는 버려진 쌀겨에서 건져낸 맑은 쌀,양지머리 한 토막, 그리고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아주 맑고도 소박한 떡국.그녀는 그것을 ‘왕의 수라’로 바꿀 생각이었다.“귀하지 않으나, 정직하고 화려하진 않으나, 진실된 맛 그것이 어머니의 맛이었습니다.”그녀는 마치 기도하듯 솥 안의 국을 젓고, 불을 다독이고, 대파 한 뿌리를 송송 썰었다.“국은 기억을 품고 있사옵니다. 그리움도, 상처도, 심지어는 부끄러움조차도요.”하루 뒤, 왕이 있는 대전에 작은 바리때 하나가 도착했다.어느 궁녀의 손이 아닌, 세자의 이름으로 직접 전달된 수라.왕은 잠시 눈을 좁혔다.“이건… 그 아일 대신해 네가 전한 것이냐.”“그 아이가 끓였습니다. 다만, 저의 마음도 함께 담았습니다.”이현은 고개를 숙였다.“그 수라는 어머니를 잊히지 않게 하려는 딸의 정성이며그 어머니를 모욕당한 채도 고개를 들고 살아가려는 한 여인의 싸움입니다.”왕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하얗고 소박한 떡국. 그러나 그 안엔,버섯의 단맛과 양지의 깊은 기름기,그 위를 감싸는 고운 계란지단 한 조각.그릇을 들자 맑고 따뜻한 향기가 은은히 코끝을 간질였다.한 숟가락. 그리고 또 한 숟가락.왕은 그 수라를 묵묵히 삼켰다.“처음 먹은 맛이로다. 그러나 낯설지 않다. 그리움 같은 맛이로다.”잠시 뒤, 왕은 조용히 말했다.“정채향. 그 아이는… 이 나라의 기와도, 가문도 아니나 사람의 마음을 아는 손을 가졌도다.”그 말은 왕실의 품격에 대한 인식 변화,그리고 그녀의 수라가 단순한 ‘입맛’이 아니라정치와 혈통을 넘어서는 설득의 언어가 되었다는 의미였다.중전은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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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입은 정채향의 그릇에 머무는구나

이어 채향의 상이 들어왔다.두부선, 송이버섯볶음, 그리고 맑은 배추된장국.‘소박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숟가락을 든 왕의 눈빛이 바뀌었다.된장국은 깊고 은은했다.하루를 고아낸 육수에 된장을 세 번 걸러 넣어,쓴맛과 짠맛 사이에 한 줌의 단맛을 스며들게 했다.왕은 아무 말 없이 소희의 요리를 다시 맛보았고, 이내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눈은 민소희의 상에 끌리지만, 입은 정채향의 그릇에 머무르는구나.”그 한마디에 마당의 공기가 바뀌었다.민소희는 고개를 숙였지만, 그 눈빛은 피처럼 붉게 일그러져 있었다.“사람을 먹게 하는 건 화려한 것이 아니라, 속이 비지 않은 맛이다.”왕은 그렇게 말하며 채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밤, 채향은 수라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이현이 그녀를 세자전으로 불러 직접 손에 차를 쥐여주며 말했다.“그대는… 말이 아니라 맛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소.”채향은 대답 대신 잔을 들었다.그 잔 속엔 차가 식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데워지고 있었다.그러나 그 시각, 중전은 민소희를 따로 불러 달빛 아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수라로 안 된다면, 다른 수를 써야겠지.”“어머니…”“이젠… 그 계집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자는 너뿐이다.”소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이 싸움은 이제 칼 없는 전쟁에서, 그녀의 손으로 쥔 결정적인 한 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밤이 깊었다. 세자전의 등불은 다 꺼졌지만,이현은 침상에 들지 못하고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그의 손에는 한 장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그 위에는 단 세 글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정 운 종]이름조차 낯설지만,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묵은 피 같고, 오래된 곰팡이 같았다.“그대의 부친 말이오.”소희가 그날 대전 뒤편에서 그에게 조용히 건넨 말이었다.“기방 여인의 딸이라 하여 측은히 여겼으나…그녀의 아비는 *‘의금부에서 추방된 죄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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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나는 저 여인을 버릴 수 없사옵니다. 

조정의 아침은 유난히 무거웠다.대신들의 걸음은 느렸고, 각 관청의 상소문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왕에게 쏟아지고 있었다.그 파도 한가운데엔 딱 한 줄의 문장이 자리하고 있었다.'왕세자빈 후보 정채향은 죄인의 혈육이므로, 그 자격이 부당하다는 탄핵 상소'왕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짧지 않았고,대신들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만 깊이 숙였다.그리고 이현이, 천천히 한 발 앞으로 나섰다.“아바마마,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왕은 고개를 끄덕였다.이현은 곧은 허리로 섰고,그 시선은 단 하나의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대신도, 중전도 아닌 채향을 향해.“정채향은 수라로 조정을 설득하였고, 진심으로 백성을 살필 줄 아는 여인이옵니다.”“허나 세자, 그 아이는 죄인의 자식이다. 궁의 법도는 피를 가르지 않느냐.”왕의 말에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러하옵니다. 그러나 피보다 무서운 건 사람의 진심을 오해하는 눈이옵니다.”그 순간, 대전은 조용해졌다.“만약 조정이 한 사람의 과거만으로 그 미래를 저울질하시겠다면…”이현은 숨을 고르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저는… 저하라는 이 이름을 내려놓을 것입니다.”“세자!”왕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그러나 이현은 물러서지 않았다.“저는 그녀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이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하신다면 저는 이 자리를 버리겠습니다.”말이 떨어지자 조정은 숨조차 멈춘 듯 고요해졌다.중전은 말없이 부채를 쥐고 있었고, 소희는 입술을 물었다.그토록 원하던 순간, 세자의 곁에 서고자 했던 그 욕망이지금 이 순간 한 여인의 진심 앞에 조각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한 여인을 위해 조선을 잃을 수 있느냐.”왕은 낮게 물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조용히, 채향의 손을 맞잡았다.그 순간, 모두가 보았다.왕세자가 궁녀의 손을 잡은 채 한 나라의 군주를 향해 버티고 선 모습을.그리고… 왕이 피식 웃었다.“이것이 그대가 원하는 맛이더냐.”그 말은 명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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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먹지 마십시오, 저하

이현은 그 밤, 수라를 입에 대려다 멈췄다.채향이 그의 앞에서 그릇을 덥석 빼앗은 것이었다.“먹지 마십시오.”“왜 그러는 것이오?”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대답했다.“제가 만든 수라가 아닐 수 있사옵니다.”이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그릇을 옆에 내려놓았다.“그대의 손을 의심하게 만든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내가 가만두지 않겠소.”그 말에 채향은 눈을 감고 조용히 속삭였다.“저하, 사람의 손끝은 마음을 담기도 하지만, 마음을 배반하기도 하옵니다.”그날 밤, 금향은 수라간의 뒤편 장독대 근처에서 조용히 붙잡혔다.그리고… 그녀의 옷 속에 숨겨져 있던 소량의 백화사(白花蛇) 독약병이 발견되었다.중전은 보고를 받고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한 번의 칼이 실패했으면, 이제 남은 건 불이겠지.”그녀는 부채를 덮으며 중얼거렸다.“혼례날… 그 계집이 궁에 불을 일으킬 테니.”새벽, 수라간. 금향이 사라진 빈자리 위로 해묵은 숯 냄새와 불완전한 재가 흩어지고 있었다.채향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오래도록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그녀의 두 손은 여전히 음식 재료를 다듬는 자세였으나, 그 손끝에는 더 이상 칼이 없었다.대신 두려움이라는 감각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그 아이, 끝내 독을 쥐고 있었답니까.”이현의 물음에 채향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 손이 멈췄습니다.그건, 제가 감화시킨 게 아니옵니다. 그 아이의… 양심이었을 뿐.”이현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아 잔 불이 꺼진 아궁이를 바라보았다.“모든 불은 칼보다 무섭소. 보이지 않는 연기를 품고, 사람을 안에서부터 태우니까.”그 말에 채향은 고개를 돌려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저하께선… 무섭지 않으십니까? 제가 품고 있는 것들이.”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안을 ‘맛’이 아닌, ‘두려움’과 ‘의심’으로 내보였다.이현은 웃지 않았다.대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두렵소. 하지만, 그래서 그대와 함께 걷고 싶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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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세자빈의 자리는, 사랑이 아니라 국서로 낙인찍히는 것이옵니까

조정에 낯선 깃발이 들어섰다.붉은 봉황이 수놓인 하늘빛 휘장,그 아래 말에서 내린 이는 오래전 국혼을 약속했던 강호국 사신단,그리고 그 안에서, 고개를 높이 치켜든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소신, 강호국 명의에 따라 조선 왕세자 이현 저하의 비가 되기로 이미 3년 전 서약을 받은 자, ‘서화령’이라 하옵니다.”그 이름이 불린 순간, 대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중전은 잔을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그러나 그 눈빛은 처형을 선고받는 승리자의 것이었다.이현은 묵묵히 서화령을 바라보았다.“소녀, 명을 받고 돌아왔사온데, 궁에 새로운 여인이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사옵니다.”그 말에는 비아냥이 아닌 선언,즉 ‘정채향이 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전략적 명분의 압박이 담겨 있었다.이현이 말없이 손을 움켜쥔 그 순간, 채향은 조용히 나아가 모두의 시선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정채향, 소신… 그 어떤 서약도 어긴 바 없으나, 그 어떤 자격도 내세울 바 없사옵니다.”그 말은 사퇴가 아닌 선언이었다.정식으로 싸움의 자리에 나서겠다는 각오였다.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럼 어찌할 것이냐, 세자야. 한쪽은 외국의 국서이고, 한쪽은 조선의 여인이니라.”이현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단호하게 대답했다.“국서로 정해진 인연이라면, 그 국서가 아직 내 손에 들리지 않았으니 내 마음의 서약이 더 먼저이옵니다.”조정은 술렁였다. 그러나 왕은 말없이 손을 들었다.“강호국의 예는 예대로 논하고, 조선의 혼례는 그리대로 치르겠다.”그날 밤, 채향은 세자전으로 불려들었다.“그 여인, 서화령이라 하였소.”이현이 묻자, 채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뵙는 얼굴이지만, 그 눈빛은 마치… 제가 이미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아는 듯했사옵니다.”이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정략의 손은 사람의 감정보다 늘 빠르오. 그대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이제 단순한 사랑의 자리만이 아니오.”채향은 웃지 않았다.다만, 작고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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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칼이 없는 자는 맛으로 싸우고…

그러던 셋째 날, 중궁전에서 소환장이 왔다.“중전마마께서 부르신다.”채향은 묵묵히 옷깃을 여몄다.그곳에 서화령이 있을 것을,그리고 오늘이 그녀와의 첫 전장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중궁전의 마루, 햇살은 밝았지만 그늘진 구석이 더 많았다.그 가운데, 서화령은 잔잔한 비취색 치마를 입고 앉아 있었다.매끄러운 윤기,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고결한 교양.“정채향이라 하였습니까?”첫인사는 공손했으나, 그 안에 깔린 것은 궁금함이 아니라 평가였다.“소신, 수라간 궁녀 출신이옵니다.”“궁녀에서 곧 세자빈이라… 조선은 참, 인재를 발굴하는 데 능하군요.”그 말에 중전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채향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 안에 지지 않으려는 단단함이 숨겨져 있었다.“사신단을 위해 수라를 준비하고 있다 들었습니다.”“예, 조선의 맛으로 강호의 입맛을 섬기려 합니다.”“섬기려 한다…”서화령은 숟가락을 가볍게 뒤집으며 웃었다.“그대는 음식을 ‘섬김’이라 여기는 것이군요.”“예. 섬김 없는 음식은 먹는 이에게 오래 남지 않사옵니다.”“허나… 세자빈의 자리는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요?”그 말에 채향은 시선만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제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혀끝에서 시작되는 향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옵니다.”화령은 고개를 갸웃했다.“허나, 나는 그의 이름 위에 국서 도장을 얹은 몸입니다.그대는 마음으로 그를 잡고 있다지만, 나는 조선과 강호의 국경을 쥐고 있지요.”그 순간, 중전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그녀는 이미 이 두 여인의 싸움이 궁의 중심을 어떻게 흔들지를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채향은 미소 짓지 않았다.“그러하오나, 국서로는 저하의 배를 데울 수 없사옵니다.”“…….”“하오니, 국혼으로 저하의 마음을 앗아가시려거든 먼저 그분의 위장을 사로잡으시길.”그 말에 화령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는 처음으로 채향이 단지 궁녀 출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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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진심을 오래 씹고 싶은 사람

“무슨 말이냐.”왕이 물었다.서화령은 숟가락을 들어 채향의 수라에서 한 입을 떴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몸을 따뜻하게 하고, 속을 편하게 하는 약재.팔미지황과 진피, 유자. 즉, 강호에서 귀족들이 병 후에 회복식으로 먹는 조리법이지요.”그녀는 웃었다.“정채향 낭자는 저하의 위장을 편하게 해주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허나… 세자의 빈이 될 이는 편안함보다 야망을 지녀야 하지 않겠습니까.”그 말에 대신들이 웅성였다.허나 그 순간 이현이 입을 열었다.“나는 야망보다, 진심을 오래 씹고 싶은 사람이오.”화령의 눈빛이 흔들렸다.왕은 눈을 감았고, 중전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그날 연회는 끝맺음 없는 침묵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수라간으로 돌아온 채향은 식은 조리대 앞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정치가 입맛을 정하는 세상이 아니라,입맛이 정치까지 움직일 수 있는 날을… 저는 기다려야 하겠지요.”그 말에 옆에 있던 상궁이 고개를 숙였다.“허니 그날이 오면, 낭자는 수라간 궁녀가 아니라 궁을 뒤집는 여인이 되실 것입니다.”그리고 그날 밤, 이현은 그녀를 조용히 불러 손끝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내 안의 모든 야망을 다 접더라도 그대만은 꼭, 내 곁에 두겠소.”채향은 조용히 웃었다.“저하의 곁이라면, 저는… 칼보다 더 단단한 국물로 살아남겠습니다.”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대전의 문은 유독 일찍 열렸다.강호 사신단의 수석 사신인 조유위가 왕 앞에 직접 나서 고개를 숙였다.“폐하, 어젯밤 수라는… 저희 강호의 귀족들도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절제된 조화였사옵니다.”그 말에 조정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흔들렸다.모두가 조유위가 화령의 손을 들어줄 줄 알았기 때문이다.“그렇다 하여도, 조선의 혼례 문제에 관여하실 수는 없지 않소.”왕이 조심스레 선을 긋자, 조유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허나, 폐하. ‘음식’이란 입맛의 전유물이 아니오라 결국 ‘문화’의 향방이 아니겠사옵니까.정채향이란 여인의 솜씨가 곧 조선의 정체성을 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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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저의 피가 음식을 더럽힌다면

그녀는 오늘 유난히 손끝이 시렸다.마치 누군가, 자신이 다듬는 이 재료를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처럼.“채향아.”뒤에서 조용히 상궁이 다가왔다.“중전마마께서 낭자의 출신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하셨다고 하옵니다.”채향은 잠시 칼을 멈췄다.“아비가 누구든, 어미가 누구든 제 손끝에서 나간 음식은 제 것이 아니었사옵니까.”그녀는 다시 칼을 들었다.“이제, 그들이 내 피를 말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내 피로 만든 수라 한 그릇으로 그 말을 거두게 만들겠습니다.”그날 밤, 이현은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궁이 들썩이고 있소. 왕은 혼례를 다시 유예하겠다는 뜻을… 중전에게 흘렸소.”채향은 고개를 들었다.“혼례는 의식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의식 없이도 이어질 수 있사옵니다.”그 말에 이현은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그대가 혼례 없이 내 곁에 있어도, 나는 이미 그대를 내 빈이라 부르겠소.”그러나 그 밤, 궁 한구석에서는 정체불명의 손이 채향의 생모가 살던 고향 마을로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그 속엔 단 한 줄, 이렇게 적혀 있었다.그 여인의 딸이, 이제 세자의 곁에 있다.저의 피가 음식을 더럽힌다면…소문은 물처럼 흘렀다.문도 없고 입도 없는 그 흐름은 정확히 채향이 밟는 땅마다 작은 균열을 남기고 지나갔다.“장돌림 딸이라지?”“허나 폐하의 이복 동생이라면…”“그럼 그 아이, 궁 안의 피요? 하늘의 피요?”처음엔 수라간 뒷전에서 조용히 속삭이던 말들이 이제는 궐 앞 문지방 너머까지 번졌다.침묵하던 대신들조차 회의석상에서 물었다.“전하, 그 계집아이의 출신이 어찌 나라의 수라를 책임지리까.”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대신, 정채향을 불렀다.“정채향. 이리 들라.”그날, 채향은 단정한 소복에 머리를 낮게 틀어 왕 앞에 섰다.왕은 오래도록 그녀를 보았다.한참을 말이 없더니, 천천히 물었다.“너는 누구의 딸이냐.”채향은 그 질문 앞에서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그 물음이 단순한 혈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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