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절단의 얼굴엔 긴장과 경계가 겹쳐 있었고, 그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즉 ‘조선의 힘을 가늠하러 온’ 눈을 가지고 있었다.첫 수라가 나가고, 매생이죽을 한 숟갈 머금은 청국 사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이 맛은… 우리의 젓갈보다도 깊고, 그러면서도 입 안에서 스르르 풀리누나.”“…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중하다.”그에 맞춰 하서국의 수신사도 송화버섯 장국을 입에 댔다.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이 국엔… 향신이 없는 듯하되, 우리의 뿌리와 맞닿아 있소.”“…이것은 입으로만 맞춘 국이 아니오.”“…마음을 담은 국이구려.”그 순간, 외빈 수라상은 조용해졌다.말보다 먼저, 국이 그들의 심장을 설득했다.수라를 마친 뒤 사신단은 입을 모아 말했다.“이 국 하나면 조선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소이다.”그 말은 채향의 손끝이 국경을 넘어섰다는 뜻이었다.하지만 그때, 전각 뒤편에서는 고운령의 심복이 작은 약단지를 하나 들고 있었다.그 약은 ‘국의 냄새를 조금씩 바꾸는 향초’.‘외빈 수라’가 아닌, ‘내명부의 수라’에 섞여 들어갈 계획이었다.고운령은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손길은 사람의 입보다 빠르게 정채향의 맛을 무너뜨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는 사이, 채향은 다시 수라간으로 돌아와 솥뚜껑을 열며 혼잣말을 흘렸다.“국은 바깥의 말보다 안의 말에 더 쉽게 흔들리옵니다.”“…그러하니 더 조용히, 더 조심히 지어야 하옵지요.”그리고 그녀는 다시 불을 낮추며, 사람이 무너질 틈을 국이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을 안고 눈을 감았다.궁 안의 낮은 바람에 무언가 묻혀 있었다.사람의 발걸음도, 침묵도,그 안에 감춰진 미묘한 ‘이질감’처럼 채향의 옷깃을 건드렸다.그날의 첫 징조는 작은 국 한 그릇이었다.내명부 상궁 한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국그릇을 밀어냈다.“이 국, 뭔가… 냄새가 묘하옵니다.”“…익숙하되 낯설고, 맑으되 텁텁하옵니다.”채향은 숟가락을 들어 조용히 국을 입에 대었다.맛은 맑았다.
궁궐의 새벽은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새로 세워진 세자빈이 첫 대수라를 책임지는 날.그 책임은 ‘반가운 자리’라기보단 시험의 무게에 가까웠다.정사각으로 빼곡히 깔린 뜰을 지나 채향은 수라간의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섰다.그곳엔 내명부의 수십 명 상궁과 궁녀들,수라간 도감과 수라상궁들까지 일제히 그녀의 발소리에 눈길을 주었다.그 눈빛엔 복종도 있었고, 의심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다.그러나 채향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맨 앞에 선 수라상궁에게 인사했다.“오늘의 수라를 맡게 된, 세자빈 정채향이옵니다.”“…저는 이름도, 혈통도 많지 않사오나—”“…국 하나로 여기까지 왔사옵니다.”그 말에 수라상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빈궁께선… 아니, 세자빈마마께선 그간 개인 국만 올려오셨사온데, 궁 전체의 수라를 직접 구성하신 경험은…”그 말은, ‘무리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경계였다.채향은 작게 웃었다.“허나 국이란, 사람 수에 따라 달라지지 않사옵니다.”“…진심이 늘 같다면, 솥이 크고 작음은 차이가 되지 않사오니.”그녀는 소매를 걷었다.비단은 불길 가까이에서 살짝 눅눅해졌고,손끝은 다시, 한때 궁녀로 있을 때처럼 익숙하게 움직였다.그날의 주제는 ‘가을 초입의 입맛을 살리는 수라’.궁의 모든 이들이 여름의 습기를 걷어내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몸을 위한 상차림이었다.채향은 제일 먼저 말린 황태와 무를 고아 국을 짓기 시작했다.무는 얇게 썰되 결을 따라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칼을 대었고,황태는 찬물에 담가 소금기만 살짝 빼 향은 유지하도록 했다.“국은… 가을의 냄새를 머금어야 하옵니다.”그녀의 중얼거림은 어느새 수라간의 궁녀들에게로 번졌다.“무가 단맛을 올릴 즈음, 청주를 세 방울만.”“…더 넣으면 국이 흐려지옵니다.”시간이 흐르고, 궁궐 곳곳으로 가을국의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채향은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고사리볶음의 간을 점검하고, 마른 새우와 들기름으로 향을 살린 나물 반찬을 다듬었다.그녀는
그녀는 찬합을 열었다.그 속엔 흔한 듯 흔하지 않은 들깻잎 어묵탕이 담겨 있었다.맑은 국물 위로 얇게 부친 어묵과 들깻잎이 겹겹이 떠 있었고,그 사이엔 무조차 얇게 썰어 조용한 단맛을 더하고 있었다.그녀는 한 그릇을 떠 가장 앞에 앉은 노령의 대신 앞에 내밀었다.“말로는 설득하지 못할 마음이 있사옵니다.”“…그러나 이 국은 마음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그저 그 마음이 쓰리고 아플 때 덜 쓰리게 하려는 마음을 담은 것이옵니다.”노 대신은 그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 국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다,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이 국은…”“…내가 처음 벼슬에 올랐을 때, 어머니가 새벽마다 끓여주시던 그 맛과 비슷하구나.”그의 눈가엔 오래된 회한이 맺혔다.“그때 나는 나라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었지.”“…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이 국이 더 깊게 스며든다.”그 순간, 조정의 기류가 달라졌다.운령은 서찰을 쥔 채, 손끝을 조용히 떨고 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말보다 빠른 온기. 그것이 가장 먼저 사람의 입에 닿는다는 것을.그녀의 손끝이 봉투를 뜯으려던 그 순간, 또 다른 대신이 국을 입에 댔다.“…나는 이 국을 먹고도 그 서찰을 열 수는 없겠소이다.”“…내 입엔 이미, 이 나라의 온기가 들어왔으니.”봉투는 결국, 열리지 못한 채 상소함 위에서 조용히 식어갔다.이현은 채향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대의 국은 서찰보다 먼저 진실을 보여주었소.”“…이 조선은 이제, 글씨가 아닌 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소이다.”해가 뉘엿뉘엿 지고, 采香堂엔 고요한 저녁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들깻잎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채향은 묵묵히 손질한 재료들을 다듬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엔 주저함이 없었지만, 마음속으론 분명 작은 떨림이 있었다.바로 그때, 내관 하나가 황급히 문을 두드렸다.“빈궁마마, 운령 대비마마께서…조정 대신들 앞에서 마마의 출신을 문제삼으셨사옵니다.”채향
조정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낮의 바람보다 더 빠르게 방향을 틀고 있었다.사람들은 말을 아꼈다.하지만 눈빛은 이현을 향했고,빈궁 정채향의 손끝에서 나오는 국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사실은 더 이상 숨겨질 수 없는 진실이었다.고운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그녀는 방 안 깊숙한 찬장 속, 오래도록 봉인되어 있던 작은 서찰 상자를 꺼냈다.그 상자 안에는, 삼십여 년 전의 붉은 인장이 찍힌 한 장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그 봉투는 ‘열지 말 것’이라 적혀 있었고, 누군가의 피와 함께 묻혀 있었다.“…이제야, 그 마지막 맛을 꺼내야 할 때로구나.”그녀는 서찰을 천천히 꺼냈다.그 속에는, 한 명의 이름과, 왕실의 피줄을 의심케 하는 출생 기록이 붓글씨로 또렷이 남겨져 있었다.고운령은 손끝을 떨며 그 서찰을 덮었다.“이 글씨 하나면, 이현도, 채향도, 모두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사람의 국이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피로 쓰인 글씨 앞에선 차가울 수밖에 없지.”그녀는 사가의 안마당을 걷기 시작했다.그 걸음은 조용했고, 그 얼굴에는 오랜 세월 감추어온분노와 애증이 섞인 독기가 서려 있었다.한편, 궁 안의 采香堂. 채향은 다시 국을 끓이고 있었다.오늘의 국은 미역과 두부,그리고 소금 한 줌으로만 맛을 낸 속을 달래는 국이었다.“사람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 국을 찾는다 했사옵니다.”“…오늘은 왠지, 그 말이 떠오르옵니다.”그녀의 옆에서 이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은 생각이오.”그는 찬합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고운령이 움직였소.”“…이번엔, 피를 쥐고.”채향은 눈을 들었다.“피…라 하시면…”“왕실의 오래된 기록을 손에 넣었소.”“…그 기록이 열리면,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그 말에 채향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녀는 오래 생각하듯 말없이 솥을 저었다.그리고 국을 작은 그릇에 담아, 이현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속이 쓰릴 때는, 기
그 빛은 불처럼 타오르지 않고, 솥 안의 온기처럼 천천히 고였으며,창호지를 타고 두 사람의 어깨에 나란히 내려앉았다.채향은 눈을 떴다. 곁엔 이현이 있었다.그는 의자에 기대어 잠든 채였고, 그 손엔 아직도 채향이 밤새 덮어준 홑이불 끝자락이 쥐어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한밤중 내내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조용한 맹세 같았다.채향은 그의 손끝을 조심스레 쓸었다.“…이현.”그 이름은 처음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이현은 눈을 떴다.“벌써 새벽이오?”“아니옵니다. 이제 아침이 옵니다.”“…하지만 이 아침은 처음으로 그대 곁에서 맞이한 아침이옵니다.”이현은 조용히 웃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이제는 내 아침이 그대의 국으로 시작되기를 바라오.”그 짧은 대화는 어떤 서약보다 고요하고 강했다.그러나 그 순간, 采香堂 문 앞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닿았다.소윤 상궁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세자저하… 아닙니다, 폐하. 궁 밖 외궁에서 사가의 정계와 일부 대신들이‘책봉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준비 중이라 하옵니다.”이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외궁… 고운령이 드디어 마지막 칼을 빼들었군.”채향은 문득 멈칫했다.“…폐하의 자리를, 다시 뒤흔들려는 것이옵니까?”“그렇소.”“…이번엔 그대가 아닌, 나를 무너뜨려 궁의 기반 자체를 흔들 생각이겠지.”이현은 조용히 일어섰다.“하지만, 이번엔 국도 정무도, 그대와 함께 감당하겠소.”그날 오후, 운령의 사가와 관련된 외궁 대신들의 모임이 비밀리에 열린다는 소식이 입수됐다.이현은 채향에게 조용히 말했다.“采香堂에서 국을 차리시오.”“…허나 이번엔, 궁 안이 아닌 밖에서 먹일 국이오.”채향은 눈을 크게 떴다.“밖이라니… 사가의 문을 열고 나간다는 말씀이시옵니까?”“조선의 국이, 조선 궁 안에만 머물 수는 없소.”“…그대의 국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번엔—조선을 살릴 수 있지 않겠소?”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
기름지지 않은데 고소하고, 향이 없는 듯 깊은 이 국이 어디선가 본인도 모르게 입 안 가득 퍼져 있었다.그는 찬합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입이 거절하지 않았소.”“…그것은 이국의 음식이 아니라, 몸이 기억한 맛이었소.”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이 국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누구의 몸에든 스미기를 바란 국이옵니다.”그 순간, 연회의 공기는 달라졌다.사신은 찬합을 비우고 난 후, 정중히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이 빈궁은 조선의 입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이해하는 솥을 가졌소이다.”그 말은 연회장을 채운 모든 대신에게 하나의 외교적 선언과도 같았다.이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사람의 국은 국경을 넘을 수 있소.”그날 오후, 운령은 자신이 준비한 상소를 찢었다.그 속엔 ‘빈궁의 무능’이라는 글귀가 사라지지 않는 붓으로 씌어 있었지만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采香堂엔 저녁 볕이 들었다.채향은 다시 찬방 앞에 앉아 천천히 들깨를 볶았다.그 고소한 향은 오늘만큼은, 조선을 넘어 사람의 마음 속까지 퍼지고 있었다.采香堂엔 깊은 밤이 깃들고 있었다.궁 전체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북만국의 사신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찬방 앞, 채향은 망설이다가 남은 들깻국을 다시 데우고 있었다.그 국은 더 이상 조정을 움직일 일도 없고, 누군가의 검증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다만, 오늘 하루 자신이 살아 있음에 작은 위안을 삼기 위한 국일 뿐.그때,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하지만 오늘의 이현은 세자의 품계도, 왕세자전의 위엄도 없었다.그는 연회 때 입었던 흰 옷 그대로,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오늘은… 무엇을 데우고 계시오?”채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대답했다.“식은 국이옵니다.”“…하지만 식었어도, 속을 데울 수 있는 밤이 있사오니”“…그 밤을 위하여, 다시 데우고 있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