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全部章節:第 21 章 - 第 30 章

36 章節

21. 심장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

담황색 꽃가루는 손끝에서 기묘하게 흩어졌다.향은 없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기분을 남겼다.정채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보다 중요한 건 이 흔적을 남긴 ‘의도’였기 때문이다.“다시, 내 손을 이용하려는 자가 있다.”그녀는 조용히 작은 기록첩을 펼쳤다.‘김지환’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 전, 수라간 출입 시간대가 적혀 있었다.예상보다 빠르게, 그리고 너무도 조용히 드나든 흔적.그가 함정으로 이끄는 유일한 손목이라는 직감이 들었다.그날 밤, 채향은 일부러 한 상차림을 망쳤다.멸치가 타고, 청포묵이 모양을 잃고, 국물은 지나치게 짰다.그 음식은 이현에게 올라가지 않았고, 대신 중전 쪽으로 이첩되었다.그로부터 이틀 뒤 수라간엔 전혀 모르는 하급 궁녀 하나가 새로 들었다.“지난번 실수를 바로잡겠다는 마마의 뜻이라 하더이다.”그녀는 말이 없었고, 무릎이 항상 땅보다 낮았으며, 수라간에서는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그러나 채향은 단박에 알아보았다.그 궁녀가 사용하는 찻잔의 문양이,김지환 내관이 자주 쓰던 상에 있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정채향.”그날 저녁, 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요즘 당신의 눈빛이 어딘가 멀어졌소.”그 말에 채향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웃었다.“아닙니다.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먼 곳부터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지금 무얼 보고 있소?”그녀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적의 손목을 보고 있습니다. 그 손목을 자르기 위해 심장보다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이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그의 사랑이, 이젠 하나의 결의로,그리고 날 선 실천으로 변하고 있음을 체감했다.채향은 그날 밤, 조용히 김지환 내관을 뒤따랐다.별채의 작은 마당. 그는 혼자서 무언가를 꺼내 태우고 있었다.작은 서찰. 그리고 한 줌의 붉은 가루.그 불빛은 짧았지만 채향의 눈에는 충분히 보였다.그가 그날, 수라간에서 가져간 봉투의 겉표지 무늬.다음 날, 채향은 수라간 큰 항아리 아래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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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숨소리마저도 계산되는 밤

“지금 물러서면, 그들은 다시 내 손에 독을 쥐게 할 것입니다.”채향의 속삭임은 마치 자신을 향한 맹세처럼 낮고 단단했다.그녀는 종이 위에 가늘고 또렷한 붓글씨로 하나의 문장을 써내려갔다.‘곧, 제 손으로 유인하겠습니다. 그림자를 드러내게 할 순간이 옵니다.’그 서찰은 비단 끈에 조심스럽게 말려 정전의 비밀 서랍에 다시 올려졌다.받는 자는 단 한 사람, 왕세자 이현.그날 밤, 채향은 일부러 수라간에서 향료를 하나 틀리게 섞었다.보통 세자전 상에는 ‘백합 향’을 미묘하게 깔아야 했지만,그녀는 일부러 ‘패랭이 향’을 올렸다.그 향은 자극적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기존 기록과 다른 선택이었다.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이는 김지환이었다.“이 향은… 틀리지 않았는가.”그는 상을 들어 옮기기 직전, 서랍을 열어 다시 확인했다.그 순간, 채향이 아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날의 향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 않습니까?”그 말은 겸손이 아니었다. 도전이었다.지환의 손끝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그리고 그날 밤, 지환은 몰래 내궁 뒤편 작은 창고로 향했다.그는 자신만이 알고 있던 비밀 통로를 지나, 누군가에게 짧은 문장을 건넸다.“그 아이가… 수라를 흔들려 합니다.”그 그림자 속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흘렀다.“정채향. 그 아이가 먼저 움직이는군요.”한편, 이현은 그날 새벽, 비밀히 서찰을 받았다.‘그가 움직였습니다. 이제, 단서를 남길 것입니다. 단지… 그 끝에 제가 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그 짧은 문장은 채향의 결심이자,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고독이었다.이현은 홀로 장계를 접고, 불빛을 껐다.그리고 조용히 중얼였다.“…내가 설 자리는 그대의 끝이 아니라, 그대 곁이오.”다음 날, 중전 민씨는 조용히 말했다.“정채향, 그 아이가 너무 조용히 움직인다.”“조용한 자는, 위험한 법이지요.”그녀는 찻잔을 들어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띄웠다.“기억하게 하세요. 국화는 늦게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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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가장 조용한 칼은 웃음 너머에서 날을 세운다

그날 오후, 채향은 일부러 내의원 찬약실로 들었다.겉보기엔 상한 진피를 교환하러 온 길.하지만 그녀의 눈은 서랍 안쪽, 사용된 필묵과 잉크병을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 하얀 융단 위에 살짝 묻어 있는 ‘담황색 꽃가루’를 다시 발견했다.“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일부러, 그 잉크병을 살짝 기울였다.약간의 묽은 액체가 쏟아졌고, 그 틈에서 다른 쪽지 하나가,병 아래 눌려 있던 흔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그 쪽지엔 글씨가 없었다.다만 붓 끝으로 눌린 작은 음각 하나‘민(珉)’ 그 글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민소희는 한가롭게 국화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리고 곁에 선 상궁이 조용히 말했다.“마마, 내의원 인사에 손이 가고 있다 합니다.”민소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그래서요? 내 손이 닿은 꽃잎 하나쯤, 그 아이가 지우겠답니까?”“그 아이가, 알아챈 모양입니다.”“그럼 더 빨리 지워야지요. 눈치 빠른 아이는 오래 궁에 못 남으니.”그날 밤, 이현은 조용히 채향을 불렀다.“그대의 손끝이 이젠 나보다 더 앞서가고 있소.”그 말에 채향은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두려운 것은, 그 손끝이 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게 되는 것이옵니다.”“그대는 그런 손을 가진 이가 아니오.”이현의 말은 확신이었고, 그 믿음은 더이상 감정이 아닌 하나의 결의처럼 단단했다.채향은 조용히 말했다.“이제, 증거는 찾았습니다. 이젠… 움직일 차례입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그대가 먼저 찾은 진실이니, 그대가 먼저 드러내주오. 내가 그 옆에서 증명이 되리다.”그리고 그날 새벽, 채향은 첫 보고서를 작성했다.내의원, 손준, 잉크, 그리고 민.그 모든 단어가 하나로 모아진 자리에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민소희.’그녀의 손이 닿은 독은 꽃잎보다 향기로웠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내의원 뒷마당. 약재 창고를 돌면,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그곳은 햇살도 쉽게 닿지 않는 음습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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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더는 숨지 않겠다

작은 불꽃이었지만, 기록첩 하나가 그 안에서 검게 타들어갔다.하필이면, 그날 채향이 손준에 대한 서술을 정리해둔 장이었다.이현은 손으로 불에 그을린 기록첩을 넘기며 말했다.“그대가 맞닿은 이 전쟁, 이젠 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채향은 불타버린 장 위에 다시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재는 남았지만, 기억은 타지 않았고 증거는 입을 다물었지만 진실은 더 크게 숨을 쉬고 있었다.불은 작았다. 그 불이 태운 것은 종이 몇 장,그리고 기억의 끝자락에 걸쳐 있던 기록 하나.그러나 채향은 알고 있었다.그 불이 노렸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증명,그리고 그 증명이 곧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그날 새벽, 수라간은 더 조용했다.궁녀들 사이엔 말이 줄었고, 시선은 섞이지 않았다.누가 그 불을 질렀는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리고 모두가 침묵했다.채향은 타버린 기록 위에 붓을 들고 다시 글씨를 적었다.기억이 바라는 한, 사라진 것은 없었다.그리고 그날 오후, 그녀는 뜻밖의 장소로 호출된다.사옹원(司饔院). 평소 수라간과 구분된 독립적인 부서였고,세자의 어람 음식이나 대례차를 준비할 때만 한시적으로 협조하는 곳이었다.“이 아이가 정채향인가?”그곳에서 그녀를 맞은 인물은 사옹원 부감정 서한결, 조용한 눈빛의 사내였다.“이 불 혼자 피운 불이 아니라는 것, 이미 다 알고 있소.”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나는 민씨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도는 압니다.”“그리고 당신, 곧 칼날 위를 걷게 될 거요.”채향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무엇을 원하십니까.”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단, 함정의 경계에 선 이의 태도였다.그러나 서한결은 잠시 웃고는 서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이건 손준 의원이 태우지 못한 목록 중 하나요. 민소희가 자주 요구한 ‘복약 기록’.그 안엔 세자께 올라간 음식 재료와 함께, ‘향 분류’가 별도로 적혀 있소.”채향은 천천히 종이를 받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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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선 안에 발을 들인 자는, 이제 그림자에도 대답해야 한다

“정채향, 오늘부로 세자빈 교육을 시작하시오.”그날 아침, 궁중 예법을 담당하는 장의녀가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을 때 순간, 전각 안 공기는 뜨겁게 데워졌다가 다시 싸늘하게 식었다.그곳엔 민소희도 있었다.예정된 세자빈. 조선의 첫째 미색.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주인’이라 믿는 여인.그 눈빛은 이미 말하고 있었다.‘너는, 발을 잘못 들였다.’채향은 조용히 인사했다.반듯한 동작, 흔들림 없는 시선,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절.그 절을 본 민소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그것은… 궁녀가 아닌 사람의 태도였다.“저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소희가 묻자, 곁의 상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정채향이라 하옵니다, 마마.”“채향? 향기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그녀는 웃었다.“이제는 얼굴도 곱대? 세자저하의 취향은 원래 이랬던가.”그 말은 누가 들어도 인신공격에 가까운 조롱이었지만, 채향은 눈길 하나 떨지 않고 말했다.“저는, 음식으로 배웠고 향으로 길들었으며, 이름은… 그저 저의 일부일 뿐입니다.”그 말에 장의녀가 고개를 들었다.“그렇다면 오늘부터는 그 이름 대신 ‘빈 후보’로 불러드리리다.”그 순간, 공기 속에서 민소희의 숨소리가 확실히 뻐근해졌다.수업은 엄격했다. 손끝 하나, 시선 하나, 발의 간격, 고개 숙이는 각도까지.“빈의 걸음은 남보다 반 보 늦어야 하되, 존재는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무릇 빈의 말은 부드러워야 하되, 그 안에 반드시 명확한 ‘뜻’이 있어야 하지요.”채향은 외웠다. 익혔다. 그리고 곱씹었다.수라간에서 배운 맛과 냄새처럼,이제는 ‘품위’라는 이름의 격식도 자신의 감각에 새기기 시작했다.그날 수업이 끝날 무렵, 소희가 일부러 채향에게 다가왔다.“하루 만에 꽤나 태가 잡혔군. 하지만 걱정 마,빈 자리라는 건, 빈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그 말은 비수였다. 하지만 채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그 빈틈을 메우는 것이 제가 오늘부터 배우는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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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어머니 곁에 있었던 향

세자빈 교육 넷째 날.그날은 예외적으로 정전 어라하당의 특별 관람이 포함된 일정이었다.“빈의 덕목은 궁 안의 역사와 숨을 같이 해야 하니, 앞선 왕비들의 자취를 배우는 것도 덕목 중 하나요.”장의녀의 말은 엄숙했지만, 그 속엔 뭔가 조심스러운 여백이 있었다.채향은 그 여백의 침묵이, 오히려 무엇보다 뚜렷한 신호처럼 느껴졌다.어라하당은 폐비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전각이었다.지금은 문이 닫히고, 마루는 비어 있었으며, 담쟁이 넝쿨만이 오래된 기억처럼 벽을 덮고 있었다.채향은 조심스레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발끝에 스친 공기. 곰팡이가 섞인 차향.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코끝을 찌른 건 낯익은 기묘한 향기였다.그 향은… 바로 그녀가 소희의 독 정황을 쫓으며 맡았던 향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이건… 같은 계열의 향이다.’그녀는 천천히, 전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닳아버린 문설주. 덜컥거리는 서랍.그리고 구석에 놓인 작은 향로 하나.그 안엔 이미 오래 전에 타버린 잿더미가 있었고,그 속엔 무언가 타다 남은 붉은씨앗 같은 가루가 있었다.그 순간, 곁에 서 있던 궁녀 하나가 작은 소리로 중얼였다.“저 향로… 예전에 폐비께서 매일 밤 태우시던 향입니다. 잠이 잘 오지 않으셔서…”채향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잠을 청하기 위해 피운 향…그 향이, 혹시그녀는 조용히 향로에서 가루를 조금 떼어냈다.손끝이 닿자, 분명히 쌀겨가 섞인 흔적이 있었다.그리고 그 안에 희미하게나마 패랭이꽃 가루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그것은 바로 얼마 전 세자전 상에서 발견했던 독과 거의 동일한 계열이었다. 그날 저녁, 채향은 향로의 가루를 곱게 봉하여 세자 이현에게 가져갔다.“이것이 무엇인지… 한 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이현은 그 가루를 손바닥 위에 올려 조심스레 문질렀다.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썹이 떨렸다.“…이 냄새는 내 어머니 곁에 늘 있었던 향이오.”그 말에 채향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혹시, 폐비께서 드시던 약재나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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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말하지 않는 자가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채향은 오래된 명부를 들여다보았다.폐비가 세자빈 시절을 거쳐 중전으로 즉위했던 해부터,그의 마지막 날까지. 음식, 약재, 그리고 옆을 지켰던 상궁과 궁녀들의 명단.그러나 이상했다.그날의 마지막 수라를 올린 자의 이름이 명부에 없었다.“마지막 날… 수라는 누가 올렸던 것이옵니까.”채향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녀 곁에서 명부를 함께 살펴보던 장의녀는잠시 말이 없었다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기록에서 사라진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그녀의 이름은 홍진화. 예전엔 폐비의 수라를 준비하던 궁녀였고,지금은 이름도 없이 외진 약초창고에서 약재를 다듬는 노궁녀로 남아 있었다.“지금은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폐비께서 승하하신 날 이후로…”채향은 그날 오후, 작은 등잔 하나를 들고 궁 깊은 곳, 외진 창고의 문을 열었다.그 안엔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굽은 어깨, 조용히 들썩이는 숨결 하나가 있었다.“홍… 진화마마 되시옵니까.”그 말에, 노궁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빛은 희미했고, 동공은 흔들렸지만 그 속엔 ‘기억’이라는 것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그날… 마지막 수라, 어떤 음식이었는지… 기억하시옵니까.”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홍진화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송…화죽…”“…예?”“송화죽이었다. 그분이 좋아하셨지… 어릴 적에도 늘…”그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그 말이 내뱉어진 순간 채향은 손끝이 저릿해졌다.송화죽 그건 민소희가 가장 자주 이현에게 대접했던 음식이기도 했다.“그 죽에… 향은…?”“향이… 조금 독했지… 익숙한 냄새였는데, 그날은 유독… 오래 남았어…”진화의 말은 뚝뚝 끊겼지만, 그녀의 손은 기억을 더듬듯, 서랍 안쪽을 가리켰다.그곳엔 오래된 향첩이 하나 있었다.노랗게 바랜 봉투.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가루패랭이꽃과 송화가 섞인… 바로 그 조합이었다.그 순간, 채향은 손끝을 살짝 다쳤다.향첩의 끄트머리가 날카로웠고, 그 끝에 박힌 작은 조각 하나가 피를 묻히며 모습을 드러냈다.얇은 금박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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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검은 향이 피어오를 때, 하얀 진실은 피로 물든다

숨이 막히는 순간, 입가에 낯선 냄새가 번졌다.미약(迷藥)이었다.그러나 채향은 그 순간, 팔을 뒤로 꺾으며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작은 숯가루 주머니를 터뜨렸다.펑~잔연한 탄내가 부엌을 가득 메웠고, 그 냄새에 짐승처럼 반응한 그림자가 뒷걸음질쳤다.같은 시각, 세자전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은 이현이 칼을 빼들고 내달렸다.“채향!”그는 숨을 헐떡이며 부엌 문을 열었고,그 안에서 흙 묻은 발자국과, 채향의 흩어진 옷자락,그리고 탁자 위로 쏟아진 밤죽을 보았다.“저하…”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이현은 곧장 그녀를 끌어안았다.“몸은, 다친 데 없소?”“예…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그의 품 안에서, 채향의 손은 여전히 작은 숯가루 자루의 조각을 쥐고 있었다.그날 새벽, 이현은 수라간 전체를 봉쇄했다.그리고 익명의 침입 흔적과, 부엌 쪽 뒷문에 남은 구두 자국을 수색하게 했다.“명분 없이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논리보다 공포를 선택했다는 증거오.”이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그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대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이오.”채향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처음으로… 음식이 아니라, 제가 타깃이 되었군요.”“그건 불쾌하지만 확실한 신호이기도 하옵니다.”그날 밤, 채향은 처음으로 자신의 침전에 자물쇠를 달았다.그리고 자그마한 창가에 앉아 불 꺼진 수라간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검게 잠긴 그곳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조리장이 아니었다.그곳은 살아 있는 전장, 그리고 그녀가 지켜야 할 자리였다.그날 아침, 종묘사직의 종이 세 번 울렸다.뜻밖의 시각이었다.왕이 아닌, 세자의 요청으로 올린 종소리.조정이 술렁였고, 대신들은 서둘러 조정에 모였다.그들의 얼굴엔 각기 다른 표정 놀람, 경계, 혹은 오래 준비된 침묵.“세자 저하께서 긴급히 어전을 청하셨다.”내관의 외침 뒤, 이현은 검은 곤룡포 차림으로 천천히 대전에 입장했다.그 얼굴은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눈빛은 단단히 여며져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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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맛과 향, 그리고 기억의 진실

채향의 말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속엔 목숨을 담보로 한 선택의 무게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이현은 그런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 싶었던 사람,그리고 지금, 세자라는 무게와 함께 감당하게 된 인연.그날 밤, 궁 안에 감찰이 시작되었다.누구도 크고 소리 내지 않았고, 누구도 먼저 웃지 않았다.칼날은 아직 빼들지 않았으나,누구보다 먼저 기척과 향으로 서로를 겨누는 전장이 열리고 있었다.감찰이 시작된 지 사흘째. 세자빈 교육은 일시 중단되었고,수라간도 ‘비상 정비’라는 명목 하에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었다.채향은 세자전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이제 궁중 어디서나은밀히, 그러나 뚜렷이 언급되는 정치적 단어가 되었다.“그 아이… 원래 중전 마마 쪽이 아니라, 의정부 판서의 첩 딸이었다지요?”“첩 딸이라니…!”“그것도 정식 족보에조차 들지 못한, 기록 없는 여인이라 합니다.”조정 내 사대부 가문들 사이에서 ‘정채향’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그녀의 능력도, 미모도, 심지어 폐비의 독살을 파헤치는 행보도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그녀의 피’였다.세자빈은 왕실의 안살림을 맡고, 왕후의 어좌를 이어야 하는 자.출신이 불분명하다면, 궁 안의 정통성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그날, 채향은 궁 내 법고실로 불려갔다.궁녀 신분에서 세자빈 후보로 전환된 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신원 검증’을 받는 자리였다.법고실의 중책은 백발이 희끗한 관리였다.“정채향. 그대는… 출생에 대한 서류가 없다 하였소. 누구의 딸이오?”채향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렸지만, 그 눈빛은 흐려지지 않았다.“…돌아가신 어머니께선 저를 가채향이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따로 성을 주지 않으셨습니다.”“…그 말은, 아버지께서 성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오?”“예. 저는 어머니 품에서 자랐고, 세 살 무렵 버려졌습니다.”그 말에, 법고실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버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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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당신이 국모가 될 자격은, 맛으로 입증하라 하더이다

그날 아침, 조정에 모인 대신들의 얼굴은 더없이 단호했다.“신분 미비한 자를 국혼 후보로 인정한 전례가 있던가?”“없습니다. 심지어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첩녀의 혈통이라 합니다.”“그런 이를 세자빈으로 들인다면, 사대부 혼인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왕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 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끝까지 앉아 있었다.그는 말이 없었지만, 말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자신의 신념을 대신하고 있었다.“허나, 그녀는 세자빈으로 지목되기 전부터 폐비의 독살 의혹을 가장 명확히 추적해낸 인물입니다.”한 명의 젊은 대신이 조심스레 나섰다.“그녀의 출신보다, 그녀의 기지와 민첩함, 그리고 왕실에 대한 충심이 더 귀한 것이 아닙니까.”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날카롭게 맞받았다.“그녀가 국모가 되면, 왕실은 더 이상 ‘혈통’이 아닌 ‘재능’을 우선하는 전례 없는 혼란에 직면할 것입니다.”왕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세자빈 자격은 오로지 조정의 평가에 따르겠다. 그러니 그 자리에 걸맞은 증거를 스스로 내어보이라.”그날 저녁, 세자전에서 돌아온 이현은 채향에게 말했다.“그대에게 시간이 주어졌소. 단 하루. 내일 정오, 대전 앞에서 그대는 국모로서의 자격을 증명해야 하오.”채향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럼,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국혼의 맛을 보여드리겠사옵니다.”그녀는 다시 수라간으로 돌아갔다.오래된 조리대, 많은 손들이 닿았던 칼,그리고 불의 온도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솥.그 모든 것을, 그녀는 다시 한 번 제 손 안에 담아냈다.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그녀는 수백 번을 냄새를 맡고, 수십 번을 맛을 보았다.그러다 마침내 하얀 기운 속에 떠오르는 국 하나.그것은 단지 음식이 아니라, 그녀의 살아온 생애이자 왕실에 바치는 서약이 되었다.다음 날 정오. 대전 앞.온 조정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가운데,채향은 하얀 자수저고리에 짙은 남색 치마를 입고 솥을 들었다.“이 음식은, 가장 많은 신분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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