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163 챕터

51화: 방주의 선장 1

​[부산 사령부] ​지난밤은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내가 레비아탄의 [심해 감지]로 찾아낸 남중국해의 좌표. 그냥 던져본 게 아니었다. 사령부에서 위성을 돌리고 중국 측에 교차 검증을 요청한 결과, 그곳 해저 화산 지대에서 초거대 마력 반응이 실존한다는 게 확인됐다.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최첨단 레이더로도 못 찾던 걸, 부산에 앉아서 찾아냈으니까. 국방부와 청와대는 밤새 회의를 소집했고, 결론은 하나로 모였다고 한다. ​'하태수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네, 진짜 길드로 안 갈 건가? 화이트 타이거에서 백지수표에 강남 빌딩까지 불렀다던데." ​국방부 장관이 헬기까지 타고 내려와서 묻는 첫마디가 이거였다. 그 옆에는 합참의장이, 뒤에는 사령관님이 굳은 표정으로 서 계셨다. ​"관심 없습니다. 제 주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레비아탄이 있어야 Z급이지, 없으면 전 그냥 동네 '빙신'인걸요. 제가 길드로 간다면, 국방부에서 레비아탄 내어주실 건가요?" ​내 직설적인 물음에 장관과 합참의장이 말문이 막힌 듯 서로를 쳐다봤다. ​"아니잖습니까. 국가 전략 자산인 기체를 사기업에 줄 리가 없죠. 깡통 로봇 없는 파일럿이 가서 뭐 합니까? 설거지나 하겠죠." ​나는 씩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거기 가면 우리 하숙집 이모님 밥 못 먹어서 힘 못 씁니다. 전 여기가 편합니다." ​장관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이군. 진짜 괴짜야, 괴짜." ​하지만 그의 눈빛은 안도감과 감동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알고, 돈보다 의리와 밥심을 택한 영웅. 정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다루기 편하면서도 믿음직한 병사가 없을 거다. ​"좋아. 자네가 군에 남겠다면, 우리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지. 어젯밤 대통령님 긴급 재가가 떨어졌네." ​장관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1
더 보기

52화: 방주의 선장 2

배달 오토바이 5대. 동네 치킨집 메뉴를 종류별로 싹쓸이했다. [갓 튀긴 후라이드], [마늘 간장], [매운 양념]... 치킨 박스가 거실에 탑을 쌓았다. ​"우와아아!! 치킨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희선이와 히나가 가방을 던지고 달려들었다. 퇴근한 하루 씨와 미혜 누나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오늘 무슨 날이에요? 옷이..." ​하루 씨가 내 정복 차림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잘 어울리네. 제복 입으니까... 좀 멋있다?" ​미혜 누나가 내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은근슬쩍 가슴팍을 쓸었다. 어제 영상 통화 사건 이후로 누나의 스킨십이 과감해졌다. 소피아를 의식하는 게 분명하다. ​"자자, 묵자! 식는다!"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치킨을 뜯었다. 바삭한 튀김옷 소리, 달달한 양념 냄새, 그리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형님. 닭다리 뼈 발라내는 솜씨가 예술인데? 데이터 저장 중.] ​레비아탄도 스마트워치 화면 속에서 침을 흘리며 구경했다. 어제 군주의 심장을 먹고 업그레이드된 덕분인지, 녀석의 홀로그램 화질이 4K급으로 좋아졌다. ​나는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식구들을 바라봤다. 맛있게 먹는 할머니, 내 계급장을 만지작거리는 성배 아저씨, 닭다리 가지고 싸우는 희선이와 히나. 이 평범하고 소란스러운 풍경. ​내가 지켜야 할 것은 거창한 세계 평화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저녁 식탁의 온기였다. 이 웃음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중국해든 지옥 끝이든 갈 수 있다. ​'이제 나는 단순한 병사가 아니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작은 하숙집이라는 방주(Ark)를 지키는 선장이다. ​지잉- ​그때, 내 스마트워치로 화상 통신이 들어왔다. 발신자: [리 웨이 (중국)]. 어제 보낸 좌표에 대한 답신이 온 모양이다. ​분위기가 깨질까 봐 나는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갔다. ​"통신 연결." * ​옥상 평상. 홀로그램 화면에 리 웨이의 얼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1
더 보기

53화: 준위님의 무릉도원 1

​"으음..." ​눈을 떴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오늘은 토요일이다. 군인에게 11시 기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허억! 점호! 당직사관님 죄송합...!" ​...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내 방. 하숙집 천장. 그리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정복과, 그 어깨에서 번쩍이는 황금색 다이아몬드 계급장. ​[준위 (Warrant Officer)] ​"아... 맞다. 나 준위지. 어제 진급했지." ​나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행복했다. 이불 밖은 위험하고, 이불 안은 천국이다. 어제 국방부 장관이 달아준 저 계급장이 이렇게 달달할 줄이야. 장군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기술직의 신. 출근?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어차피 내 업무는 '지구 지키기'니까, 지구가 안 위험하면 쉴 자격이 있는 거다. ​[형님. 일어났어?] ​손목에 둔 스마트워치에서 레비아탄이 말을 걸었다. ​[나 심심해. 여기 와이파이 너무 느려. 부대 서버 해킹해서 게임이나 다운로드할까?] "쓰읍. 국방부 인트라넷 건드리지 마라. 영창 간다." [형님 이제 준위라며? 영창 안 간다며?] "준위 할아버지라도 보안 위반은 잡혀가요. 그냥 뉴튜브나 봐." ​나는 녀석에게 핀잔을 주고, 느릿느릿 1층으로 내려갔다. ​"일났나! 팔자도 좋다!" ​부엌에서 최 여사님이 콩나물을 다듬다 말고 소리치셨다. ​"남들은 새벽같이 나가서 돈 버는데, 나라 지키는 군인 양반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자나!" "이모. 저 이제 그냥 군인 아닙니다. 준위입니다, 준위. 도사님이라고요." "도사 같은 소리 하네! 밥이나 묵어라!" ​여사님은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밥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셨다. 오늘 메뉴는 시원한 콩나물 김치국에 두툼한 계란말이. 해장과 영양 보충을 동시에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1
더 보기

54화: 준위님의 무릉도원 2

내 레비아탄을 포함해 현존하는 모든 대 괴수 병기의 원천 기술을 보유한 곳이다. 본사는 서울에 있지만, 핵심 연구 시설은 부산에 있다. ​"오... 목표가 높네. 너 이과였냐?" "공대생 무시하냐? 나 수석 졸업이다." ​철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니가 지구 구하는 동안, 나는 내 인생 구하려고 지난주 내내 방에 콕 박혀서 자소서만 썼다. 삼천 그룹 연구직... 내년엔 꼭 명찰 단다." ​짠했다. 그리고 멋있었다. 나는 Z급이 되어서 떵떵거리고 있지만, 내 친구는 부모 빽 없이 맨땅에 헤딩하며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많이 묵어라. 밥심으로 하는 거지." ​나는 내 계란말이 두 개를 철수 밥그릇에 올려줬다. ​"고맙다... 너밖에 없다..." ​철수가 울먹이며 계란말이를 씹었다. 친구야, 힘내라. 내가 남중국해 가서 몹 잡을 때, 너는 토익 잡아라. 언젠가 네가 만든 부품으로 내가 싸우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는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충성!" ​하숙집 골목 입구에 설치된 검문소. 완전 무장한 헌병들이 나를 보더니 각 잡고 경례를 붙였다. ​"어, 그래. 고생한다. 밥은 먹었냐?" "예! 먹었습니다! 하 준위님도 편안한 휴식 되십시오!" ​나는 대충 손을 들어 답례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하숙집이 있는 골목 안쪽은 '통제구역'이라 조용했지만, 검문소 밖으로 나오자 남포동 특유의 활기찬 소음이 들려왔다. ​"저 총각이 그 Z급이라며?" "아이고, 평소엔 그냥 동네 백수 같더만."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나는 어색하게 목례를 하며 걸었다. 목적지는 통제구역 경계선 바로 바깥에 위치한, 나의 안식처 [별다방]이었다.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별다방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통제구역 바로 옆이라 장사가 안 될 줄 알았는데, 오히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1
더 보기

55화: 준위님의 무릉도원 3

-[아, 하 병장님! 아니, 이제 하 준위님이시죠?] ​수화기 너머로 소피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 들었습니다. 전략 부대 '아크' 창설과 준위 임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연합 본부에서도 난리예요. Z급에 걸맞은 대우라고.] ​"아, 감사합니다. 소피아 씨 덕분에 잘 풀린 것 같네요." ​공적인 축하 전화였다. 미혜 누나와 하루 씨도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당연히 축하드려야죠. 저의 구원자이신데.] ​소피아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그런데 준위님... 지금 혹시 혼자 계신가요?] "예? 뭐... 커피 마시고 있습니다만." -[흐음... 주변이 좀 소란스럽네요. 혹시... 그 여자분들 가게인가요?] ​귀신같은 여자. 하와이에서 부산까지 레이더를 돌리고 있나. ​"아, 예. 단골이라서요." -[그렇군요. 휴식을 즐기는 건 좋지만... 너무 풀어지시면 안 됩니다.] ​소피아의 목소리에 뼈가 있었다. ​-[제 축복... 잊지 않으셨죠? 다음 작전 때는 제가 꼭 옆에 있을 겁니다. 틈주지 않을 거예요.] ​통화 소리가 컸는지, 옆에 있던 미혜 누나와 하루 씨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카페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 하하... 예. 걱정 마십쇼.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미혜 누나가 행주를 꽉 짜며 웃었다. 눈은 안 웃었다. ​"축하 전화인가 봐? 목소리가 아주... 꿀이 떨어지네?" "아니요! 그냥 업무 연락! 국제 업무!"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커피를 원샷했다. 전쟁터보다 여기가 더 위험한 것 같았다. 이놈의 인기란. ​* ​일주일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남중국해로 떠나기 전까지 주어진 7일간의 휴가. 나는 그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알차게 낭비했다. ​희선이, 히나와 함께 PC방을 점령했다. Z급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로 FPS 게임을 휩쓸었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1
더 보기

56화: 남중국해의 쌍둥이 1

​[남중국해 상공] ​슈우우웅-! ​레비아탄이 구름을 뚫고 강하했다. 고도계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지만, 나는 계기판을 볼 필요도 없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만으로도 우리가 지옥 입구에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와... 이거 실화냐?" ​콕핏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가관이었다. 바다 색깔이 시커멓다 못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저기서 거대한 수증기 기둥이 간헐천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수면 위에는 떼죽음 당한 물고기들이 하얗게 익어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여기선 매운탕이 아니라 지리가 자동으로 되네. 사우나가 따로 없다." ​[형님. 농담할 때가 아니야. 외부 온도 80도 돌파. 내 냉각수 끓기 직전이라고.] ​레비아탄이 투덜거렸다. 해저 화산이 폭발해서 바다 전체를 끓이고 있다니. 군주급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스케일이 무식하다. ​[아군 식별 신호 감지: 중국 남해 함대] ​저 멀리, 하얀 증기 속에 떠 있는 거대한 함대가 보였다. 중국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항공모함 [산둥함]을 필두로 수십 척의 구축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특이한 건, 함대 주변으로 반투명한 푸른 막이 쳐져 있다는 거였다. ​"결계인가?" ​수백 명의 마법사들이 갑판에 나와 필사적으로 [냉각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거 없었으면 배들이 진작에 찜통이 돼서 병사들이 쪄 죽었겠지. ​쿠우웅-! ​레비아탄이 산둥함의 갑판에 착지했다. 함교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 준위! 기다리고 있었소!" ​리 웨이가 갑판으로 뛰어 나왔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인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은 퀭하고 수염은 덥수룩한 게, 며칠 동안 잠 한숨 못 잔 폐인 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리 웨이 씨.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말도 마시오. 이놈의 열기 때문에 에어컨도 다 터져나가고... 지옥이 따로 없소."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나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2
더 보기

57화: 남중국해의 쌍둥이 2

​"반대죠, 아저씨." "뭐?" "지킬 게 있으니까 악착같이 버티는 겁니다. 아저씨처럼 잃을 게 없으면 막살게 되거든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칼이랑, 살아서 돌아가야 하는 칼이랑... 부딪히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류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주변 공기가 서늘해졌다. 끓고 있던 바다의 열기가 무색할 만큼 차가운 검기(劍氣)가 뿜어져 나왔다. ​"입만 산 놈인지, 실력도 있는지... 확인해 볼까?" ​그가 검을 뽑으려는 찰나, 리 웨이가 끼어들었다. ​"그만하시오! 내 배 위에서 싸우지 마시오! 다 가라앉힐 셈이오?!" ​리 웨이의 호통에 류지가 쳇, 하고 혀를 차며 검에서 손을 뗐다. ​"전장은 바다 위다. 거기서 증명해 봐라, 애송이." "그러죠. 구경이나 잘 하십쇼." ​나는 뒤돌아섰다. 까칠하긴. 그래도 실력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저런 인간이 아군이라니 든든하긴 하네. 성격 파탄자만 아니면 딱인데. ​쿠구구구-!! ​그때, 배 전체가 요동쳤다. 지진? 아니, 해저 폭발이다. ​"온다!" ​리 웨이가 고함을 질렀다. 정오가 되자, 바다 한가운데서 거대한 물기둥... 이 아니라 시뻘건 [용암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콰아아앙-!!!! ​바다가 갈라지고, 끓어오르는 용암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튀어 올랐다. 하와이의 베히모스처럼 둔해 보이는 놈들이 아니었다. 날렵하고, 흉폭하며, 거대했다. ​하나는 전신이 시뻘건 마그마가 흐르는 가죽으로 뒤덮인 붉은 도마뱀. 하나는 번들거리는 흑요석 비늘을 두른 검은 도마뱀. ​[심해 군주: 작열의 파이로 (Pyro)] [심해 군주: 흑철의 옵시디언 (Obsidian)] ​크기는 각각 3km 정도. 하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덩치에 맞지 않게 빨랐다. 마치 거대한 코모도왕도마뱀처럼 수면을 박차고 함대를 향해 돌진해왔다. ​"키에에엑!!" ​파이로가 입을 벌리자, 거대한 화염탄이 함대를 향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2
더 보기

58화: 춤추는 칼날, 노래하는 뇌전 1

[남중국해 빙하 필드] ​쿠구구구-!! ​내가 만든 거대한 얼음 대륙 위에서, 3km짜리 괴물 두 마리가 동시에 포효했다. 그 소리에 빙하가 쩌적 갈라지고, 주변의 바닷물이 튀어 올랐다. 보통 헌터라면 오줌을 지리고 도망갔을 광경이지만, 내 옆에 있는 아저씨는 달랐다. ​"흥. 덩치만 컸지 굼뜨군." ​카미키 류지. 낡은 도복을 입은 이 중년의 검객은, 3km짜리 괴수를 보고도 '굼뜨다'고 평가했다. SS급의 패기인가, 아니면 그냥 성격이 더러운 건가. ​"갑니다, 아저씨! 내기 잊지 마요!" "짖지 마라, 애송이. 내 칼이 더 빠르다." ​팟-!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류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다. 내 Z급 동체 시력으로도 잔상만 겨우 보일 정도의 초고속 이동. 그는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검은 도마뱀 [옵시디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키에에엑!" ​옵시디언이 반응했다. 놈이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 끝에 달린 거대한 흑요석 철퇴가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스치기만 해도 항공모함이 두 동강 날 위력. ​하지만 류지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한 걸음 더 내디뎠을 뿐. ​발도(拔刀). ​챙-! ​맑은 금속음이 전장을 울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투욱. ​옵시디언의 거대한 꼬리 끝부분, 집채만 한 철퇴가 깔끔하게 잘려 얼음 바닥으로 떨어졌다. 절단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하다는 흑요석 비늘을, 마치 두부 자르듯 베어버린 것이다. ​"와... 미쳤네." ​레비아탄 콕핏 안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저게 사람인가? 기계인 나보다 더 기계 같다. 마력 포격도 아니고, 그냥 쇠붙이 하나로 저런 절단력을 낸다고? ​"크르르...!" ​꼬리가 잘린 옵시디언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더니 팽이처럼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등껍질에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2
더 보기

59화: 춤추는 칼날, 노래하는 뇌전 2

놈의 머리가 빙하 바닥에 처박혔다. 턱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용암 튀고, 얼음 조각 튀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때요, 아저씨. 제가 좀 더 빠르죠?" ​내가 스피커로 류지를 도발했다. 류지가 쳇, 하고 혀를 차려는 순간. ​쿠르릉! ​처박혀 있던 파이로와, 등껍질이 깨진 옵시디언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놈들의 눈빛이 변했다. 생존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료애? 아니, 융합이었다. ​철컥- 치이익! ​옵시디언이 몸을 웅크려 방어 태세를 취하자, 파이로가 그 위에 올라탔다. 검은 장갑차 위에 붉은 포탑이 올라간 형상. 파이로의 용암이 흘러내려 옵시디언의 깨진 등껍질을 메우고, 더 단단하고 뜨거운 [용암 전차]가 되었다. ​"키에에에엑!!" ​놈들이 동시에 포효했다.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내가 만든 빙하 필드가 급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발 디딜 곳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젠장. 합체 로봇은 내 로망인데. 감히 괴수 따위가?" ​빙하가 쩍쩍 갈라지며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다. 류지가 밟고 있던 얼음 조각도 녹아내렸다. ​"발판이 사라진다. 네놈의 얼음, 이게 한계냐?" ​류지가 허공을 밟으며(경공술) 내 쪽으로 튀어왔다. ​"그럴 리가요. 리필해 드립니다." ​쾅! ​레비아탄이 발을 구르자, 녹아내리던 빙하가 다시 두껍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놈들의 열기가 워낙 강해서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합체하니까 단단하고 뜨겁군. 내 검으로 껍질은 깔 수 있지만, 그 안의 심장까지 닿으려면 틈이 부족해." ​류지가 냉정하게 분석했다. 옵시디언의 방어력에 파이로의 열기 장막까지 더해지니, 접근해서 베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나는 레비아탄의 오른팔을 변형시켰다. 손이 사라지고, 거대한 드릴 형태의 파츠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껍질 좀 까주세요. 길만 터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2
더 보기

60화: 진정한 주인 1

​"끝난 게 아니야." ​류지가 검을 고쳐 쥐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쌍둥이 군주는 거대한 얼음 조각상이 되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지만, 저 멀리 솟아있는 [테라포밍 기둥]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니, 오히려 더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우우웅-! ​기둥 표면의 붉은 살점이 맥박 치듯 꿈틀거렸다. 마치 거대한 알처럼. ​[형님. 에너지 수치가... 측정 불가야. 저 안에 있는 거, 단순한 마석이 아니야. 생명체야.] ​레비아탄의 목소리가 떨렸다. Z급 기체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고밀도 에너지. ​쩍-! ​기둥의 외벽이 갈라졌다. 용암이 흘러내리듯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기둥 전체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자욱한 수증기와 붉은 안개. 그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괴수? 아니었다. 산맥만 한 덩치를 예상했던 내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벅. 저벅. ​안개를 헤치고 나온 것은, 고작 2미터 남짓한 인간형의 존재였다. 전신을 감싼 붉은색 판금 갑주. 투구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안광. 등 뒤에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망토가 날개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식별 코드: 제2 군단장] [염마(Flame Demon) - 이그니스 (Ignis)] ​"작네?"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작다고 얕보지 마라. 기운이... 압축되어 있다." ​류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놈이 입을 열었다. ​"시끄럽군." ​정확한 발음. 인간의 언어였다. 레비아탄의 통역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뇌리에 꽂히는 목소리. ​"내 정원지기들(쌍둥이)을 부순 게 네놈들인가? 장난감치고는 제법이구나." ​놈이 죽은 쌍둥이 군주의 얼음 조각상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마치 부서진 장난감을 보는 아이처럼, 슬픔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해? 이거 장르가 바뀌는데?" ​내가 당황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23
더 보기
이전
1
...
45678
...
17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