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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솔지는 연나가 예겸의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예상과 다른 듯했다.“정말 대단하네요.” 연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요.”솔지는 말속에 섞인 비아냥을 알 수 있었다.그래도 마음에 담지 않았다.“오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셨길 바랍니다.”솔지는 영업용 인사를 건넸다. 돈을 벌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다른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연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솔지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돼요. 예겸 오빠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예요.”“예겸 오빠가 한 여자 때문에 유혁에게 그렇게 화를 냈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인지 빨리 보고 싶었어요. 직접 보니 역시 여자 보는 눈이 좋네요.”솔지는 연나 너머로 예겸을 바라봤다. 예겸의 눈에서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실제 관계를 아는 건 솔지와 예겸뿐이었다.솔지는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사실을 믿기만 바랐다. 예겸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낼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이리 와.” 예겸이 나른한 동작으로 옆자리를 두드렸다.솔지는 숨을 골랐다. “조금 뒤에 또 무대에 올라가야 해요.”예겸은 대답하지 않고 솔지를 똑바로 응시했다. 강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솔지는 입술을 한 번 꼭 깨물고 침을 삼켰다.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요.”“그래.” 예겸이 허락했다.솔지는 룸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연나의 웃음도 사라졌다. 예겸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리며 안으려고 했다.예겸이 손목을 잡고 포옹을 막았다.연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물었다.“왜?”“너도 알잖아.” 예겸은 연나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내일 돌아가.”“싫어!”연나가 화를 냈다.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른 여자와 저렇게 가까워졌잖아. 내가 더 늦게 왔으면 오빠도 정말 내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예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이유를 알잖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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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거울 속에서 잘생긴 남자는 여자의 뒤에 서 있었다. 옅은 웃음이 떠오른 얼굴과 매혹적인 눈만 보면 깊이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위험할 만큼 강한 힘은 솔지만 느낄 수 있었다.눈 깊숙한 곳의 싸늘한 기색도 솔지에게만 보였다.예겸도 모르는 사이 먼저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인 쪽은 솔지였다. 예겸이 문제 삼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너그러운 처사였다.솔지는 거울 속 남자를 향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싫으시면 괜찮아요.”어차피 이런 관계는 언제라도 끝날 수 있었다.싫증이 나면 헤어지면 되니까.“싫어.” 예겸은 단호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완벽히 통제하려고 했다.“알았어요.” 솔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무님 뜻대로 해요.”예겸은 눈치 빠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배짱이 크지만 영리했고, 처신까지 알았다. 충분히 괜찮았다.속으로는 수천 번 거절하고 싶어도 지금 하는 일을 지키려면 양보해야 한다는 걸 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예겸은 솔지가 자신을 이용해도 상관없었다.그 정도 이용은 예겸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되지 않았다.“가자.” 예겸이 손을 잡아 솔지를 일으켰다. “다른 곳에서 놀자.”솔지는 일어나 가방을 챙긴 뒤 예겸을 따라갔다.대기실을 나서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손을 맞잡은 모습을 모두 봤다.둘이 사라진 뒤 원석 옆의 직원이 말했다. “솔지 씨, 여기서 오래 일하지는 않겠네요.”원석의 생각은 달랐다.예겸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곳에 솔지를 내보낼 리 없었다.고작 잠깐 즐기는 관계일 것이다.그렇더라도 누구도 솔지를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다....솔지는 입구에 세워진 차를 바라봤다. 금속성 무늬가 은은하게 흐르는 짙은 와인색 벤틀리가 조명 아래에서 어둡고 화려한 빛을 냈다. 눈에 띄면서도 비밀스러웠다.이 색이 예겸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솔지가 조수석에 타자, 차는 맹수처럼 W시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내달렸다.“멀미 안 나?” 예겸은 속도를 꽤 높였는데 솔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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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30분 뒤 차는 고급 차량으로 가득한 주차장에 도착했다.예겸의 차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입구의 직원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려고 뛰어왔다.차가 멈추자 직원은 서둘러 문을 열고 정중히 인사했다. “전무님, 부 대표님과 진 대표님은 이미 안에 계십니다.”“그래.”조수석에서 내린 솔지를 보고 직원은 조금 놀랐다.지난 몇 년 동안 예겸의 조수석에는 아무도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여자친구가 셀 수 없이 많다는 소문과 달리, 예겸을 자주 보는 사람들은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굳이 한 사람을 꼽는다면 조연나뿐이었다.하지만 연나는 승우의 여자친구였다.차에서 내린 솔지는 옆에 세워진 차량 두 대를 자세히 봤다.한 대는 자홍색 그러데이션으로 도색한 팬텀, 다른 한 대는 짙은 초록색 카이엔이었다.예겸의 차까지 세 대 모두 개성이 강한 색이었다. 취향마저 닮은 사람들이 분명했다.예겸은 솔지가 오기를 기다렸다.솔지가 옆으로 다가가자 예겸이 먼저 손을 잡고 직원에게 짧게 소개했다. “한솔지 씨.”직원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손님.”예겸의 행동에 솔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조금 전의 소개는 가볍게 즐기는 여자에게 할 행동처럼 보이지 않았다.예겸이 이끄는 대로 들어선 벨로아는 미라주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회원제로 운영돼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실내는 호화롭게 꾸며졌고 장식품은 전부 하나뿐인 작품이었다. 소란한 소리 대신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만 흘렀다.엘리베이터에 탄 예겸은 솔지의 손을 놓고 7층 버튼을 눌렀다.거울처럼 반들거리는 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예겸은 큰 키에 어깨가 곧았고, 이목구비도 또렷하게 잘생겼다.평범한 흰 티셔츠와 청바지도 예겸이 입으면 눈에 확 띄었다.그 곁에 서 있자 함께 데이트하러 나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예겸이 앞장섰다.솔지도 걸음을 맞췄다. 얼마 가지 않아 예겸이 멈춰 서서 문 하나를 열었다.안에서 나누던 대화가 귓가에 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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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정민도 그쯤에서 멈췄다. “가자. 폼만 잡는 부승우도 소개해 줄게.”연나와 예겸이 대화할 때 솔지도 ‘부승우’라는 이름을 들었었다.가림막을 돌아가자 가장자리에 놓인 소파에 예겸이 앉아 있었다. 맞은편 긴 소파에는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 쭉 뻗은 골격에 서늘한 눈매가 지적인 인상을 줬다. 반무테 안경까지 써서 더욱 점잖아 보였다.거친 매력이 있는 예겸, 소년 같은 정민과는 결이 달라 보였다.눈앞의 인물이 바로 부승우일 것이다.“이쪽이 부승우야.” 정민이 예겸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 예겸의 옆을 가리켰다. “솔지 동생은 저기로 가서 앉아.”‘솔지 동생’이라는 호칭에 룸 안의 사람들이 모두 눈썹을 찌푸렸다.솔지도 난처했다. 예겸을 한 번 보고 곁으로 가서 앉았다.문이 다시 열렸다.연나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밝은 목소리부터 들려줬다. “예겸 오빠가 왔어?”들뜬 말투였다.가림막을 돌아 예겸 옆의 솔지를 보자 연나의 웃음이 살짝 사라졌다. “한솔지 씨.”솔지도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조연나 씨.”“주방에서 준비한 음식은 입에 맞았어?” 승우가 물었다.승우의 목소리는 사람처럼 온화하고 예의가 발랐다.연나가 웃었다. “다 승우 오빠가 부탁한 메뉴라던데,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어. 오늘은 한솔지 씨도 있으니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솔지는 못 먹는 게 없어.” 예겸이 대신 대답했다.솔지가 예겸을 보자 예겸도 마주 봤다.두 사람은 아직 함께 식사한 적도 없었다.그래도 솔지는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주인이 준비한 대로 따르는 게 예의였다.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솔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괜찮아요.”“그럼 됐네요.” 승우 곁에 앉은 연나는 팔을 다정하게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이번에 돌아온 뒤로는 다시 안 갈 거야.”승우가 곧바로 예겸을 봤다.솔지의 손을 잡으려던 예겸은 그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췄다.눈을 들어 연나를 바라봤다.연나는 예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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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예겸과 가장 가까이 앉은 솔지는 착 가라앉은 기류를 뚜렷이 느꼈다.옆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예겸은 결정을 내린 듯했다.“마음대로 해.”짧은 한마디를 듣고서야 연나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솔지는 남의 사생활을 캐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예겸과 연나의 관계가 정말 궁금했다.예겸은 연나에게 무척 엄한 오빠처럼 보였다.그러나 연나는 예겸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렀다. 평범한 여동생이 오빠를 대하는 태도와는 달랐다.셰프가 직원들과 함께 음식을 들여오자, 모두 옆쪽의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솔지 옆에 앉은 정민이 머리를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예겸이와 연나 사이가 궁금하지?”솔지는 부정하지 않았다.정민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정민이 짓궂게 웃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야.”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은 연나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깨끗하고 티가 없었다.예술 작품을 닮아 감상하기에는 좋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적어도 솔지에게는 식욕을 돋우지 못했다.W시 사람들은 이렇게 담백한 음식을 즐겨 먹지 않았다.어쩌면 이것도 사는 계층이 다른 데서 오는 차이일지 몰랐다.인터넷에서 본 재벌가 사모님들의 식사는 정교하고 양도 작았다. 한입에 수백만 원을 훌쩍 넘는 음식도 있었다.예전에는 과장처럼 보여 이해하지 못했다.직접 보니 이해하고 존중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섞일 수는 없었다.“솔지 씨,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연나가 솔지의 반응을 알아차렸다.‘한솔지 씨’에서 ‘솔지 씨’로 호칭이 바뀌었다. 마치 가까운 사람으로 받아들인 듯했다.솔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체중을 줄이고 있어요.”연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마른 사람이 왜요?”“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솔지는 입술을 다문 뒤 갑자기 예겸을 바라봤다. “전무님이 제 허리가 두껍다고 했거든요.”느닷없이 누명을 쓴 예겸은 음식을 씹다가 뚝 멈췄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전부 예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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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예겸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연나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만약... 솔지 씨를 사랑하게 되면 어떡하지?”“그럴 리가 없지.” 정민은 크게 반응했다.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사랑은 무슨. 걱정하지 마. 예겸이 이러는 건... 다 너를 지키려고 그러는 거야.”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는 억울함이 맺혔다. “난 다쳐도 안 무서워.”“예겸이 무섭다잖아.” 정민이 달랬다.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게 내버려둘 사람이 아니야. 예겸이를 믿어. 솔지 씨와 진짜로 이어질 일은 없어.”연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예겸 오빠도 잠깐 즐기는 거라고 했어. 그런데 예전에는 나 말고 곁에 둔 여자가 한 명도 없었잖아. 지금은 솔지 씨가 당당하게 예겸 오빠 옆에 서 있어.”정민은 어떻게 더 달래야 할지 몰라서 승우를 봤다.승우가 안경을 살짝 고쳐 썼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의 관계를 만난 지 며칠 된 사람이 대신할 수는 없어.”‘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는 말에 연나의 들뜬 불안이 잦아들었다....솔지는 복도에 서 있었다. 광택이 나는 대리석 바닥의 무늬가 조명 아래서 잔빛을 흩뿌렸다. 벽에 기댄 모습은 차분하면서도 외로워 보였다.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룸 안의 분위기는 솔지와 어울리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예겸은 서 있는 솔지를 바로 발견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게 분명했다.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솔지에게 다가갔다.두꺼운 카펫이 발소리를 모두 삼켰다. 예겸이 바로 옆에 선 뒤에야 솔지가 고개를 돌렸다.솔지는 화들짝 놀랐다.“내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게 싫어?” 예겸도 솔지처럼 벽에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빨았다. 고개를 기울여 솔지를 보는 눈이 깊었다.솔지는 담배 냄새를 맡으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가까운 친구분들이잖아요. 내가 있으면 편하게 대화하기 어려우실 테니까요.”“내 세계에 들어오고 싶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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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예겸의 목젖이 움직이면서 목 안이 바짝 말라왔다.솔지는 예겸의 숨결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몸에서 퍼지는 열기가 서서히 자신을 에워쌌다.“전무님...” 솔지가 불렀다. “나... 지금 집에 가야 해요.”예겸이 눈썹을 올렸다. “집에 가서 뭐 하게?”“쉬려고요.”“원석 밑에서 일하면 새벽까지 있어야 하잖아.” 예겸의 숨결은 뜨거웠다. 몸속의 욕망이 거칠게 날뛰면서 풀어 달라고 외치는 듯했다.솔지의 손은 여전히 가슴을 짚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강하고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예겸의 몸도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오늘은 모처럼 쉬니까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요.”“원 대표가 보상금까지 주면서 며칠 쉬라고 했는데 굳이 출근했잖아. 이제 와서 더 쉬고 싶다고?” 예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냥 나와 있기 싫은 거야?”솔지가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예겸을 잘 달래야 했다.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예겸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버리면, 이렇게 돈을 벌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이렇게 함께 있잖아요.” 솔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냈다.예겸도 솔지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자신을 화나게 했다가 든든한 배경을 잃을까 봐 겁내는 것뿐이었다.예겸은 솔지의 손을 잡고 허리를 폈다.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솔지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예겸에게 이끌려서 다시 룸 안으로 들어갔다.안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들어오자 말을 멈췄다.맞잡은 손을 정확히 발견한 연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우리 먼저 갈게.” 예겸은 솔지의 가방을 챙기고 친구들에게 말했다.“연나가 막 돌아왔는데 조금 더 있다 가지?” 승우가 물었다.예겸이 답했다. “둘이 같이 있어 줘.”연나의 체면을 구기는 말이었다.예겸은 이미 솔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차에 오른 솔지가 예겸을 봤다. “조연나 씨는 전무님에게 친여동생 같은 사람이잖아요. 막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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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차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솔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무런 대비 없이 급제동을 당해서 가슴이 아직도 뛰고 있었다.고요한 공간에는 서로의 숨소리만 흘렀다.창밖으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갑자기 길이 막히자, 영문을 모르는 운전자들이 화가 나서 조급하게 경적을 울렸다. 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어왔다가 곧 멀어졌다.솔지는 이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가 싫었다.예겸을 돌아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책임지실 필요 없어요.”예겸은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다. “피해자는 나야.”솔지는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예겸이 손해 본 쪽은 자신이라고 했던 걸 잊고 있었다.바람둥이로 소문난 남자가 솔지 앞에서는 순진한 동정남이라도 된 듯 굴었다.“집이 어디야?” 예겸이 다시 물었다.솔지는 이제 전만큼 긴장하지 않았다.“남자를 집에 데려가고 싶지는 않아요.” 꽤나 직설적인 대답이었다.예겸은 더 묻지 않았다. 몇 분 뒤 번화가에 들어서자 버스 정류장 앞에 차를 세웠다. “내려.”솔지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오늘은 마음이 없어.” 예겸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솔지는 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갈게요.”몸을 돌려 뒷좌석의 가방을 가져왔다. 차에서 내려서 문을 조심스럽게 닫더니, 옆에 선 채 예겸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후미등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집으로 가지 않고 택시를 탄 뒤 미라주로 돌아갔다.벌 수 있는 돈은 단 한 푼도 놓칠 수 없었다....4월의 새벽 두 시는 아직 쌀쌀했다.솔지는 겉옷을 챙겨 업소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잿빛 안개에 덮여 있고 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전동 스쿠터를 탄 다은이 솔지 앞에 멈추고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공주님, 어서 타시죠.”솔지도 웃었다.다은이 내민 헬멧을 받아쓰면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동료 대신 야간 근무했어. 네 퇴근 시간이랑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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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다은도 솔지처럼 요가원에서 부업으로 강습을 했다.삶에서는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제대로 사는 법을 고민하는 건 그다음이었다.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갓 찐 만두가 나올 때까지도 그랬다.다은이 물었다. “그분하고는 요즘 어때?”“누구?”“‘하’ 씨.”“그냥 그래. 어차피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관계야. 마음 없는 연애 한 번 하고, 마음 없는 남자 친구 하나 사귀는 셈 치지 뭐.”다은은 태연한 표정을 살폈다. “넌 늘 자기 생각이 분명했고 배짱도 컸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앞뒤를 다 따져 봤고.”솔지가 웃었다.“이번에는 정말 아니야.”이어 말했다. “그냥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 내가 살아 있고 목숨도 붙어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다은은 솔지의 이런 기세가 좋았다.어떤 일도 솔지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했다.“그래도 난 네가 시작은 연기였어도 끝은 진짜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하예겸이 너한테 푹 빠지는 거지.”다은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인간 마음을 꽉 잡아서 평생 사랑받는 사람이 돼. 그러면 네가 고기 먹을 때 나도 국물 한 숟갈은 얻어먹겠지.”솔지는 웃음이 터졌다.휴지를 뽑아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노력해 볼게. 너도 시간 날 때 절에 가서 열심히 빌어. 내가 하루빨리 재벌가에 시집가게 해 달라고.”다은은 만두 하나를 입에 넣으며 웃었다. “난 널 믿어. 충분히 해낼 수 있어.”“그만해.” 솔지가 일어나면서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집에 가서 잘 때 베개나 높이 받쳐.”다은은 솔지의 팔을 끌어안고 분식집을 나섰다. “난 네 덕에 재벌가 사모님이 될 날만 기다릴 거야. 네 집의 가사 도우미로 취직해서 날마다 좋은 것만 먹고 살아야지.”반달처럼 눈꼬리를 한껏 휜 솔지가 환하게 웃으면서 헬멧을 썼다. “좋아. 젊고 잘생긴 집사도 몇 명 뽑아서 네가 마음껏 부리게 해 줄게.”다은은 스쿠터에 올라 핸들을 잡고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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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다은은 솔지가 사는 다세대주택 앞까지 데려다줬다.낡고 허름한 건물을 본 다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데로 이사하면 안 돼? 여기는 너무 위험해 보여.”경비원도 공동 현관 잠금장치도 없어서 누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솔지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 생각보다 괜찮아. 어르신들이 많이 살거든. 마주치면 다들 인사도 해. 기억력이 워낙 좋아서 낯선 사람만 나타나도 금방 경계하고.”“그래도 너무 낡았잖아.” 다은은 솔지가 걱정됐다.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지켜보면 큰일이었다.“정말 괜찮아.” 솔지가 다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가서 쉬어. 천천히 운전하고.”“알았어. 갈게.”솔지는 다은이 골목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계단을 올랐다.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건물에 사는 노인들은 대부분 일어난 뒤였다.솔지는 4층까지 올라가 열쇠로 낡은 철문을 열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신발을 갈아 신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이곳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은 더 적었다.문을 열자 박민재가 서 있었다.“누나.” 민재가 활짝 웃으며 희고 고른 이를 드러냈다.솔지가 놀라 물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민재는 들고 온 물건을 들어 보였다. “이거 가져다주려고.”손에는 커다란 종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솔지가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서 물었다. “학교에 결석한다고 했어?”“응, 잠깐 늦는다고 말했어.” 민재는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직접 열어 봐. 난 자율학습 들어가야 해.”솔지는 상자를 쳐다봤다. “대체 뭔데?”“누나가 봐. 나도 몰라.” 민재는 끝까지 비밀스러운 척했다.민재가 문으로 가자 솔지도 따라가 배웅했다. “쓸 돈은 있어?”민재가 웃었다. “있어. 이번 달에는 용돈 안 줘도 돼.”“너무 아끼지는 마. 부족하면 말하고.” 솔지는 어머니만 같은 남동생에게도 애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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