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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강혁은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삐빅.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조용한 집 안으로 번졌다.문을 열자 실내의 공기가 먼저 흘러나왔다.새 가구 냄새는 어제보다 옅어져 있었다.대신 어딘가 사람이 머문 흔적이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슬리퍼 소리가 급하게 들렸다.거실 쪽에서 은유가 모습을 드러냈다.편한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막 쉬고 있었는지 머리카락 끝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놀란 기색이 스쳤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강혁은 인사하지 않았다.집 안을 한 번 훑었다.거실.주방.식탁.그리고 다시 은유."내가 들어오면."짧게 말을 꺼냈다."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없었다.계약서에도 없었고,가르친 적도 없었다.은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강혁의 얼굴을 바라봤다.그의 자세.현관에 선 위치.신발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몇 초가 흘렀다.은유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등을 세우고,손바닥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시선은 자연스럽게 강혁을 향했다."…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집 안이 조용해졌다.강혁은 그녀를 내려다봤다.지난번에 자세를 교정한 적은 있다.하지만 현관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한 적은 없었다.잠깐 생각했다.틀렸나.아니다.오히려 자연스러웠다.집에 들어온 자신을 맞이하는 방식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다.강혁은 고치지 않았다."일어나."은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강혁은 신발을 벗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앞으로도 내가 들어오면 그렇게 해."짧은 한마디였다.은유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네, 주인님."그 순간이었다.누구도 정한 적 없던 행동이,두 사람 사이의 규칙이 되었다.강혁은 그것이 자신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다.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원하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강혁은 거실 안쪽으로 걸어갔다.은유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주방.냉장고 앞.강혁이 문을 열었다.생수.우유.식빵.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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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강혁은 원래 규칙만 추가하려 했다.그런데 은유가 먼저 벌을 입에 올렸다.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자연스러웠다.규칙을 어기면 결과가 따른다.그게 계약이었다.강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식탁."은유가 아일랜드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손."식탁 위에 올렸다."더 앞으로."허리가 숙여졌다."다리 벌려."자세가 완성됐다.강혁은 그녀의 뒤에 섰다.손바닥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이번 벌은."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대가다."은유는 눈을 감지 않았다."…네, 주인님.""숫자는.""말하지 않겠습니다."은유가 먼저 대답했다.강혁은 손을 멈췄다."…왜.""이번에는 몇 대 맞는지가 중요한 벌이 아닌 것 같습니다."잠깐의 정적.강혁은 그녀를 내려다봤다.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았다."그래."짧게 답했다."이번엔 기억하는 벌이니까."첫 번째 손바닥이 떨어졌다.짧고 묵직한 소리.은유의 몸이 앞으로 조금 흔들렸다.신음은 삼켰다.강혁은 바로 두 번째를 때리지 않았다.손바닥을 천천히 붉어진 자리에 올렸다.열기를 느꼈다."앞으로."낮은 목소리."배고픈 걸 참지 마."은유는 숨을 골랐다."…네."두 번째.이번에는 조금 더 강했다.엉덩이가 미세하게 떨렸다.강혁은 다시 손을 얹었다."식사는.""…보고드립니다.""아니."강혁이 바로 끊었다."먹기 전에."은유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강혁이 말을 이었다."먹고 보고하면 이미 끝난 일이야."손바닥이 다시 올라갔다.세 번째.숨이 짧게 끊겼다."모르면."잠깐의 틈."먼저 묻고."네 번째.이번에는 조금 아래쪽이었다.은유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혼자 결정하지 마.""…네."다섯 번째.이번에는 가장 조용했다.소리는 크지 않았다.대신 손바닥이 오래 머물렀다.붉어진 피부를 천천히 감쌌다."내 서브는."손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잘 버티는 사람이 아니다."엄지가 살짝 눌렸다."잘 관리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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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오후 두 시.강혁은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눌렀다.삐빅.잠금이 풀렸다.문을 당기는 순간, 현관 안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은유가 보였다.등은 곧게 세워져 있었다.두 손은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놓였고, 시선은 바닥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에게 향해 있었다.어제 마지막으로 받은 문장이 떠올랐다.다음 방문 때는 현관에서 미리 무릎 꿇고 기다리겠습니다.강혁은 답했다.그래.그게 전부였다.몇 시부터 기다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준비하라는 연락도 없었다.강혁은 신발을 벗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얼마나 있었어.”“십칠 분 정도입니다.”“왜 그렇게 일찍 나와 있었지.”은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질문의 의도를 한 번 가늠한 뒤 입을 열었다.“도착하신 뒤에 급하게 무릎 꿇는 것보다, 먼저 준비하고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강혁의 시선이 그녀의 자세를 따라 내려갔다.무릎의 간격.손끝의 위치.허리를 세운 각도.처음 가르쳤던 자세와 거의 같았다.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그가 시키기 전에 스스로 그 자세를 택했다는 것이었다.“내가 늦었으면.”“계속 기다렸습니다.”“얼마나.”“오실 때까지요.”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사람을 기다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하지만 언제 올지 확실하지 않은 상대를 위해 자세까지 갖추고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그는 그것을 충성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자신의 기준을 먼저 읽고 행동하는 능력.그렇게 분류했다.강혁이 손을 뻗었다.손가락이 은유의 턱 아래에 닿았다.가볍게 들어 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위를 향했다.긴장하고 있었다.입술이 다물린 힘과 조금 빨라진 호흡에서 드러났다.그런데도 눈은 피하지 않았다.“기다리는 동안 무슨 생각 했어.”“문이 언제 열릴지 생각했습니다.”“그것뿐이야?”은유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거짓말을 할 때가 아니라, 진심을 말할 때 나오는 움직임이었다.“들어오셨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강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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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은유는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강혁이 한 걸음 나간 뒤에야 조용히 뒤를 따랐다.현관에서부터 그와 자신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반 걸음 정도 벌어져 있었다.강혁이 일부러 만든 간격이 아니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오히려 보기 편했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문이 닫히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비쳤다.강혁이 거울 속 은유를 바라봤다.“밖에서는.”은유가 시선을 들었다.“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네.”“사람들 앞에서는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은유는 잠깐 생각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필요하면 내가 먼저 말해.”“알겠습니다.”짧은 대답이었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문이 열리자 입주민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강혁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은유는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강혁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반 걸음.딱 그 정도였다.너무 멀지도,너무 가깝지도 않았다.그 거리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건물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뒤 강혁이 걸음을 멈췄다.은유도 바로 멈췄다.강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왜 멈췄지.”“주인….”은유가 입을 다물었다.방금 규칙을 떠올린 것이다.“왜 멈추셨는지 모르니까요.”강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걸었다.몇 걸음 뒤.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은유의 등 뒤에 손을 올렸다.손바닥이 허리 바로 위에 가볍게 닿았다.“앞으로.”은유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손이 떨어졌다.다시 몇 걸음.이번에는 목덜미 아래를 손가락 두 개로 가볍게 눌렀다.은유의 걸음이 즉시 멈췄다.주차장을 지나던 사람이 둘을 스쳐 지나갔다.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잠깐 등을 만진 남자와,잠깐 멈춘 여자.그뿐이었다.강혁은 사람을 한 번 흘겨본 뒤 다시 은유를 향했다.“밖에서는 말보다 빠른 게 있어.”은유는 조용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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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일반 탈의실과는 달랐다.문 대신 두꺼운 커튼이 달려 있었고, 안에는 낮은 소파와 전신 거울,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조명까지 갖춰져 있었다.직원이 세 벌을 은유에게 건네려 했다.강혁이 먼저 받아 들었다.세 벌을 한 번 내려다본 뒤, 검은색 한 벌만 은유에게 내밀었다.“이거부터.”은유가 받아 들었다.커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강혁이 말했다.“입고 나오면 내가 확인한다.”은유가 돌아봤다.“어디까지요.”“그건 내가 정해.”커튼이 닫혔다.강혁은 소파에 앉았다.직원이 음료를 내려놓았지만 손대지 않았다.시선은 줄곧 커튼에 머물러 있었다.안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금속 고리가 닿는 작은 마찰음.잠시 정적이 이어졌다.커튼이 걷혔다.은유는 검은색 속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강혁의 시선이 가운에 멈췄다.“벗어.”직원은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시야에서는 비켜나 있었다.은유는 주변을 짧게 확인했다.손이 허리의 매듭으로 향했다.천천히 매듭을 풀었다.가운이 양쪽으로 벌어졌다.어깨에서 미끄러진 천이 팔을 따라 내려왔다.강혁은 소파에 앉은 채 오래 바라봤다.검은색이 피부 위에서 어디를 끊고, 어디를 강조하는지 눈으로 확인했다.“돌아.”은유가 몸을 돌렸다.“팔 들어.”양팔이 올라갔다.“허리 펴.”등이 곧게 세워졌다.강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까이 다가가 어깨끈을 손끝으로 옮겼다.등 뒤로 손을 넘겨 잠금 위치를 확인했다.옆선이 뜨는 부분을 짚고, 옷과 피부의 경계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은유의 숨이 조금 빨라졌다.강혁은 그것을 피팅 때문에 긴장한 반응으로 받아들였다.“걸어.”은유가 피팅룸 안을 천천히 걸었다.“다시.”반대 방향으로 돌아왔다.“앉아.”소파 끝에 앉았다.“일어나.”은유가 다시 섰다.속옷이 움직일 때 어느 부분이 뜨고, 어디가 피부를 누르는지 확인하기 위한 동작들이었다.검사는 꼼꼼했다.필요한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이어졌다.똑똑.커튼 밖에서 직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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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오전 여섯 시.강혁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삼십 분.속도도, 시간도 매일 같았다.샤워를 마친 뒤에는 주방으로 향했다.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습관은 생각보다 빨랐다.생각은 오히려 그 뒤를 따라왔다.서재.모니터 세 대에 전원이 들어왔다.해외 시장 마감.국내 시장 개장 전 동향.보유 자산 변동.숫자들이 화면 위를 가득 채웠다.강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평소라면 여기서 바로 차트를 읽기 시작했다.오늘은 아니었다.휴대폰을 먼저 집어 들었다.잠시 화면을 바라봤다.익숙하지 않은 순서였다.메신저를 열었다.커서를 잠깐 움직인 뒤 짧게 입력했다.오늘은 검정.전송.끝이었다.설명도,이유도,붙이지 않았다.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몇 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렸다.은유였다.네, 주인님.강혁은 읽기만 했다.답장은 보내지 않았다.이미 전달은 끝났다고 생각했다.다시 차트로 시선을 돌렸다.해외 지수가 예상보다 조금 높게 마감했다.환율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오늘 장은 무난할 가능성이 높았다.그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사진 한 장.강혁은 화면을 눌러 확인했다.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얼굴은 나오지 않았다.목 아래부터 무릎 위까지만 담겨 있었다.오늘 아침 자신이 지정한 검은색이었다.주름 없이 정리되어 있었고,착용 상태도 깔끔했다.강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몇 가지를 확인했다.사이즈.위치.불편해 보이는 부분.특별한 문제는 없었다.그는 화면을 닫으려 했다.그 순간.메시지가 하나 더 올라왔다.입었습니다.그런데…강혁의 손가락이 멈췄다.뒤가 없었다.화면을 한 번 새로고침했다.아무것도 오지 않았다.몇 초를 그대로 기다렸다.여전히 조용했다.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모니터를 바라봤다.차트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시선은 숫자를 따라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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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조금 전 보낸 사진이 아직 화면 위에 남아 있었다.검은색.오늘 아침 주인님이 직접 골라준 속옷.사진을 보낸 뒤에는 보고를 마치는 게 맞았다.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입었습니다.잠시 멈췄다.그리고 한 줄을 더 적었다.그런데…커서가 다음 줄에서 깜빡였다.은유는 그대로 화면을 바라봤다.사실 뒤에 이어질 문장은 이미 떠올라 있었다.‘오늘은 계속 주인님이 생각납니다.’너무 쉬운 문장이었다.그래서 더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그건 보고가 아니었다.감정이었다.강혁은 언제나 필요한 것만 말했다.질문도 짧았고,명령은 더 짧았다.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기분을 덧붙이는 건 규칙 밖의 행동처럼 느껴졌다.‘괜한 말이다.’은유는 지우려 했다.그 순간.손끝이 잘못 닿았다.전송.“…어.”메시지가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다.은유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아니.’‘이게 아닌데.’곧바로 뒤를 이어 쓰려 했다.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맴돌았다.‘계속 주인님 생각이 났습니다.’적었다.다시 지웠다.‘새 속옷이 마음에 듭니다.’적었다.또 지웠다.어느 문장도 맞지 않았다.보내려는 순간마다 같은 생각이 들었다.‘이건 보고가 아니다.’‘괜히 시간을 빼앗는다.’그때 진동이 울렸다.강혁이었다.뭐.짧은 한 글자.은유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평소 같았으면 바로 답했을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는 더 어려워졌다.이제 와서 감정을 말하면 이상한 것 같았다.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휴대폰을 내려놓았다.다시 들었다.입력창을 열었다.몇 글자를 적었다가 지웠다.결국 보낸 건 다른 문장이었다.죄송합니다.전송.메시지는 도착했다.하지만 은유는 알고 있었다.사과가 아니라,끝나지 않은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그 사실을 알면서도,다음 문장은 끝내 보내지 못했다.휴대폰 화면이 천천히 꺼졌다.은유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봤다.얇은 셔츠 아래에는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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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거실 안이 조용해졌다.강혁은 현관 앞에 선 채 은유를 바라봤다.“보고.”짧은 한마디였다.은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죄송합니다.”“그 다음.”강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왜 끝까지 안 했지.”은유는 한 번 숨을 골랐다.“계속 쓰려다가… 지웠습니다.”“왜.”“보고가 아닌 것 같아서요.”짧은 침묵.강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주인님은 필요한 것만 말씀하시니까.”“제 감정을 보내는 건… 시간을 뺏는 일 같았습니다.”“그래서 지웠습니다.”강혁의 시선이 조금 길어졌다.“그런데는 왜 보냈지.”은유는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실수였다.변명할 수도 있었다.손이 미끄러졌다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쓰다가.”“실수로 전송됐습니다.”“뒤를 쓰려고 했는데.”“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서…..”“그래서… 아무것도 못 보냈습니다.”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뒤에는 원래 뭐라고 쓰려 했지.”이번에는 은유가 오래 침묵했다.거짓말을 고르는 침묵이 아니었다.말해도 되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침묵이었다.“말해.”낮은 목소리.명령이었다.은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아침.”“주인님이 고르신 걸 입었는데.”잠시 멈췄다.“…계속 주인님 생각이 났습니다.”그 말을 끝내는 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방 안이 조용해졌다.강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은유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걸 보내려다가.”“보고가 아니라 제 감정 같았습니다.”“그래서 지웠습니다.”강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은유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혁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보고는.”짧게 말을 끊었다.“끝까지 하는 거야.”“필요한지 아닌지는.”그의 시선이 은유에게 고정됐다.“내가 판단한다.”은유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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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침대 위에 상체를 숙였다.두 팔을 뻗어 시트를 짚었다."옷."은유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팬티를 내렸다.찬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강혁은 그녀의 뒤에 섰다."몇대인지는..."은유가 잠깐 숨을 골랐다."…말씀 안 하십니까.""안 해."짧은 대답이었다."끝날 때까지 모른다."은유의 손끝이 시트를 움켜쥐었다.지난번과 다른 규칙이었다.지난번엔 다섯이었다.이번엔 몇 대인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첫 번째."강혁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낮게 울렸다."왜 지웠지."첫 번째가 떨어졌다.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살갗을 가르는 듯한 감각이 곧바로 뒤따랐다.은유의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였다.숨이 턱 막혔다.신음이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패들과는 완전히 달랐다.넓게 퍼지는 둔통이 아니라, 얇은 선을 따라 곧바로 파고드는 통증이었다."…쓸데없는 말 같아서요."겨우 짜낸 대답이었다."내가 필요 없다고 했어?"두 번째가 왔다.거의 같은 자리였다.전에 남은 열기 위에 새로운 통증이 겹쳤다."으윽…!"목소리가 참지 못하고 터졌다.몸이 앞으로 밀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아니요.""제가… 그렇게 판단했습니다.""네가 결정했어."강혁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세 번째.이번엔 아래쪽이었다.전혀 닿지 않았던 자리라 통증이 더 생생했다.은유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눈앞이 잠깐 하얘졌다.숨을 쉬려 했지만 제대로 들이켜지지 않았다."흐윽… 네…""제가 결정했습니다.""왜."강혁이 낮게 물었다.이번 질문은 앞의 것들과 결이 달랐다.은유는 대답을 찾다가, 준비했던 말 대신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혼날 줄 알았습니다."숨이 갈라진 채였다."부담을 드릴까 봐… 겁이 났습니다."강혁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예상한 대답이 아니었다."겁이 나서."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판단권까지 가져갔어."네 번째.이전보다 조금 더 강했다.은유의 몸 전체가 떨렸다.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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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케인이 케이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강혁은 그것을 서랍장 위에 내려놓았다.돌아서서 은유를 바라봤다."앉아."은유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아직 자세가 완전히 편해지지 않은 채였다.강혁은 맞은편 의자를 끌어와 마주 앉았다."방금 한 말."낮은 목소리로 시작했다."감정."은유가 그를 바라봤다."그거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야."강혁이 손끝으로 무릎을 짚었다."행동.""몸 상태.""감정."한 마디씩 끊어 나갔다."욕구.""고민."은유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전부."강혁이 마지막 단어를 덧붙였다."오늘부터."방 안이 조용해졌다.은유는 그 단어들을 하나씩 되짚었다.행동은 이미 익숙했다.몸 상태도 어렵지 않았다.감정은 방금 처음으로 넘겼다.그런데.욕구.고민.그 두 단어에서 숨이 살짝 멈췄다."…어디까지입니까."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방금 말씀드린 것도 사실은.""말해도 되는지 한참 고민했습니다."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그것부터.""…네?""방금 한 고민."강혁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그것도 보고해."은유는 순간 말을 잃었다.이건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지나간 감정을 보고하는 것과, 지금 이 순간의 망설임을 즉시 꺼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지금요.""지금."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그저 기다렸다.은유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잠깐 내려다봤다."말씀드리기 전에."목소리가 작아졌다."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건지.""실망하시지 않을지.""그런 걸 계속 생각했습니다."표정은 여전히 읽히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는, 그 무표정이 전처럼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실망."그가 그 단어를 그대로 따라 했다."그건 네가 판단할 게 아니라고 했잖아."은유는 고개를 숙였다."…네.""그런데 방금도 했어."부정할 수 없었다.강혁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욕구는."낮은 목소리였다."지금 있나."은유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이런 질문을 이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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