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짐승 취급한 두 여자를 길들이겠습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6 챕터

011화. 가도 돼

011화. 가도 돼 “왜 날 안 가둬?” 벨리사는 그 말을 하고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녁 식탁 위의 촛불이 두 사람 사이에서 낮게 흔들렸다. 식사가 끝난 뒤라 접시는 대부분 치워졌고, 와인잔 하나만 내 오른손 가까이에 남아 있었다. 나는 잔을 집지 않았다. “가두길 원해?” “그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뭔데.” 벨리사의 입술이 잠깐 다물렸다. 아침의 미소는 없었다. 머리카락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였고, 검은 겉옷의 매듭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남에게 보이기 전에 고쳤을 것이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알아야 해?” “당연하지.” “왜.” 벨리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 목숨이 달렸으니까.” 드디어 정확한 말이었다. 나는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럼 살아남으려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그게 이상해?” “아니.” 오히려 벨리사다웠다. 이 애는 명예보다 생존을 먼저 골랐다. 그 사실을 숨기려고 예쁜 말과 웃음을 붙일 뿐이었다. “그래서 가두는 게 편하다는 거야?” “적어도 알 수 있잖아.” “뭘.” “네가 나를 죄인으로 보는지.” 벨리사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어디까지 움직여도 되는지. 누구를 만나도 되는지. 뭘 하면 죽고, 뭘 하면 사는지.” 말할수록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지금은 방도 있고, 밥도 주고, 궁 안은 돌아다녀도 된다면서 전부 감시하잖아.” “맞아.” “그게 더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나는 잠깐 그 말을 들었다. 벨리사가 스스로 인정한 건 처음이었다. 무섭다. 모르겠다. 차라리 규칙을 달라. 오델린 밑에서 자란 사람답기도 했다. “그럼 규칙 하나 줄까?” 벨리사의 눈이 즉시 올라왔다. “뭔데.” “장례 끝나면 황궁 밖으로 나가도 돼.” 정적이 생겼다. 벨리사는 내 말을 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2화. 쫓아가지 않을게

012화. 쫓아가지 않을게 “어떤 신호.” “폐하께 버림받았다는.” 정확했다. “혹은 폐하에게 적대한다는 신호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보내시겠다고요?” “내가 쫓아내는 게 아니니까.” “밖의 사람들은 그렇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건 벨리사가 감당해야죠.” 오델린의 입술이 굳었다. “너무 가혹하십니다.” 나는 펜을 내려놨다. “뭐가요.” “그 아이는 황궁 밖에서 혼자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그랬는데.” 오델린이 멈췄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열아홉에 전쟁터 나갈 때.” “그건 명령이었습니다.” “맞아요.” “벨리사는 다릅니다.” “그래서 선택하게 두는 거예요.” 오델린은 아주 오래 나를 바라봤다. “복수입니까.” “모르겠어요.” “폐하께서는 너무 쉽게 모른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정말 모르니까.”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내가 벨리사를 가두면 당신은 나를 원망하겠죠.” 오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풀어두면 걱정하고.” “당연합니다.” “그럼 난 뭘 해야 해요?” “조사가 끝날 때까지 보호하십시오.” “보호.” 나는 그 말을 천천히 되짚었다. “벨리사가 싫다고 해도?” “필요하다면.” “그 애 선택은?” “지금은 판단력이 흐려져 있습니다.” 오델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딸을 위험하게 만드는 자유라면 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 “역시 오델린답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항상 그랬잖아요.” 오델린의 얼굴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사라졌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옷도. 친구도. 식사도. 외출도. 늘 같은 말이었다. 널 위해서. 황족에게 필요한 일이니까. 너는 아직 판단을 잘못할 나이니까. 좋은 의도로 포장된 통제는 오델린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었다. “벨리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3화.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013화.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황궁 정문이 닫히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컸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금갈색 머리카락을 자꾸 얼굴에 붙였고, 나는 손등으로 그것을 밀어내면서도 뒤를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칼리아가 계단 위에 그대로 서 있을 것 같아서. 정말로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첫 번째 교차로에서는 기분이 나빴다. 두 번째에서는 우연히 뒤를 봤다. 세 번째에 이르렀을 때는 아예 창문을 조금 열고 거리를 확인했다. 검은 군복도. 황실 근위대도. 없었다. 칼리아는 약속을 지켰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하.” 마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디로 모실까요?” 황궁을 나올 때는 갈 곳이 많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많아야 했다. 같이 차를 마셨던 사람. 내 생일마다 보석을 보내던 사람. 별장에 놀러 오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사람. 내가 골라 준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에 데뷔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을 말했다. “라세른 공작저.” 마차가 방향을 틀었다. 리아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첫 사교계 데뷔 날에는 내 손을 붙잡고 울기까지 했다. 벨리사, 네가 없었으면 나 진짜 망했을 거야. 그러니까 평생 잘해. 내가 웃으며 했던 말에 리아나는 진지하게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 기억은 라세른 공작저의 철문 앞에 서기 전까지는 꽤 믿을 만했다. “황녀 전하.” 경비병이 나를 알아보고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리아나에게 왔다고 전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병 하나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철창 사이로 보이는 저택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현관 앞에는 손님용 마차까지 두 대 서 있었다.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4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014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었다. 이번에는 어머니 쪽 먼 친척을 찾아갔다. 예전에는 황궁 초대장을 하나 얻으려고 내게 몇 번이나 선물을 보냈던 집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 도착했다. 집사가 처마 아래에서 나를 맞았다. “주인어른께서 외출 중이십니다.” “언제 오는데.” “기약이 없습니다.” 안쪽 응접실 커튼이 조금 움직였다. 누군가 서 있었다. 나는 그쪽을 보다가 웃었다. “그래.” 집사는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다들 왜 나한테 미안하대.” 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우산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부가 급히 달려왔다. “전하, 비가 옵니다.” “알아.” “우산을—” “됐어.” 처음에는 어깨만 젖었다. 마차까지 몇 걸음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문 앞에서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저택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문을 열어 줄 수도 있다. 차를 내올 수도 있고. 하룻밤을 재워 줄 수도 있다. 내 얼굴을 보고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같은 질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황궁에는 언제 돌아가시나요. 폐하와는 어떻게 되셨나요. 언제까지 머무르실 생각인가요. 나는 문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턱 아래까지 흘렀다. “전하?” 마부가 다시 불렀다. “어디로 모실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세른. 하르트. 에르반. 린데르. 불러 줄 이름은 많았다. 갈 곳은 없었다. 빗소리가 점점 굵어졌다. 마부가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조금 더 젖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얼굴은 내가 만든 얼굴이 아니었다. 화장이 빗물에 번지고, 머리카락이 뺨에 붙었다. 치맛자락 끝에도 진흙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5화. 머물게 해줘

015화. 머물게 해줘 “생각보다 빨랐네.” 벨리사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젖은 금갈색 머리가 뺨에 붙어 있고, 화장은 거의 지워졌다. 흙 묻은 검은 드레스. 빈손. 이틀 만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알았다. 연기가 빠져나간 얼굴이라는 걸. 평생 모든 표정을 계산해서 지어 온 여자가, 지금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있었다. 만들 수 없었다. 빗물이 다 지워 버렸다. “왜 왔어.” 벨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돌아왔어. 갈 데가 없었어. 잠깐만 있게 해줘. 그 말들이 목구멍에서 모양을 바꾸고 있는 게 보였다. 예전 같으면 벌써 웃고 있었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오늘은 웃지 않았다. “밖이 별로였어?” “별로였다고 하면 좋아?” “내가 왜.” “쫓아낸 사람이니까.” “문 열어 준 사람이지.” “결국 나가게 만들었잖아.” “마차 탄 건 너였고.” 벨리사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라 더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 나는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여자는 평생 상대를 기다리게 만드는 쪽이었다. 지금은 반대였다. 나는 그게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사람들 만나 봤어.” “그래.” “리아나도. 안 받아줬어.” “하르트 백작 부인은 차는 줬고.” “근데.” “하룻밤은 있어도 된대.” “그런데 안 있었네.” “불쌍해서 재워 주는 것 같아서 싫었어.” “지금은?” 벨리사가 눈을 들었다. 젖은 속눈썹. 그 눈빛에서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갈 데가 없어. 그 말을 입에 담는 건 그녀에게 칼을 쥐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물어 주지 않았다. 기다렸다. 이번에는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여기 있어도 돼?” 드디어 나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6화. 처음으로 나를 붙잡았다

016화. 처음으로 나를 붙잡았다 “예쁜 건 알아. 그래서?” “……그래도.” “그래도 뭐.” “멈추지 말아 줘.” 그 말이 그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연기라면 이렇게 목이 잠기지 않는다. 벨리사 아르젠티아가 처음으로 무기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부탁하는. “네가 벗겨.” “뭐?” “내 옷. 네 손으로.” 벨리사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들어 내 군복 단추에 올렸다. “못 해?” “……할 수 있어.” “해봐.” 벨리사의 손가락이 단추를 풀었다. 떨리고 있었다. 한 개. 두 개. 검은 군복이 벌어지고,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가 드러났다. 그녀는 잠깐 멈췄다. 낯선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데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손을 움직였다. 셔츠 단추까지 풀었다. 셔츠가 어깨를 타고 내려갔다. 가슴이 드러났다. 벨리사의 시선이 거기에 머물렀다.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며, 그녀가 남의 몸을 이렇게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손끝이 내 쇄골을 스쳤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 벨리사가 말했다. 손끝이 옆구리로 내려가 흉터 위에 닿았다. 오래된 상처. 전쟁이 남긴 것. “무서웠어?” “그건 예전 일이야.” “지금은?” 나는 벨리사의 손을 잡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지금은 네가 만지고 있잖아.” 벨리사의 손바닥이 내 가슴을 감쌌다. 굳은살 없는, 부드러운 손이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만 쓰던 손이, 지금은 처음으로 남의 몸 위에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감싸고, 엄지로 젖꼭지를 스쳤다. 아주 서툴렀다. 그러나 곧 익숙해졌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응.” “이게…… 좋아?” “네가 만지니까.” 벨리사의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7화. 황녀가 아닌 벨리사

017화. 황녀가 아닌 벨리사다음 날 아침, 벨리사는 평소보다 늦게 나타났다.정확히는 늦은 게 아니었다.내가 부른 적이 없으니까.오전 회의를 끝내고 첫 번째 문서 더미를 절반쯤 처리했을 때 로웬이 문을 두드렸다.“폐하.”“들어와.”“황녀 전하께서 면담을 청하셨습니다.”펜 끝이 멈췄다.황녀 전하.아직 법적으로는 맞는 호칭이었다.그런데 어제부터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밖에 있어?”“예.”“얼마나.”“이십 분 정도 됐습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왜 바로 안 들였어.”“다른 면담이 먼저 잡혀 있었습니다.”그게 맞았다.순서대로 처리하라고 한 건 나였다.“벨리사가 기다렸어?”로웬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먼저 들어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그게 더 눈에 걸렸다.“들여.”로웬이 문을 열었다.벨리사는 혼자 들어왔다.어제 비에 젖어 있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금갈색 머리는 반만 묶여 있었고, 검은 드레스에는 장식이 거의 없었다.평소라면 목이나 귀에 하나쯤 걸었을 보석도 없었다.그런데 가장 먼저 보인 건 옷이 아니었다.거리였다.평소의 벨리사는 내 책상에 가까이 붙었다.내가 읽는 문서를 슬쩍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오늘은 두 걸음 멀리 섰다.“폐하.”나는 눈을 들었다.“왜 그렇게 불러.”벨리사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황제니까.”“어제는 아니었나.”입술이 다물렸다.대답은 없었다.나는 더 묻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었다.어제의 일을 없던 일처럼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다시 꺼내서 벨리사를 몰아붙일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오늘 어떤 얼굴로 올지 보고 싶었다.그 얼굴을 지금 보고 있었다.웃지 않았다.시선을 일부러 부드럽게 만들지도 않았다.어젯밤에는 벨리사가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순간이 많았다.그런데 오늘은 반대였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쪽에 가까웠다.내가 손을 움직이면 시선이 따라왔다가 늦게 돌아갔고,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어깨가 먼저 반응했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8화. 잘했다는 말을 기다렸다

018화. 잘했다는 말을 기다렸다“미쳤어?”“일 찾으러 왔다며.”“죽을 일 찾으러 온 건 아니야.”“며칠.”벨리사가 장부 두께를 확인했다.“사흘.”“이틀.”“사흘.”“둘 반.”벨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 그런 걸 흥정해.”“네가 반응하니까.”“성격 더러워.”“알아.”벨리사의 입꼬리가 다시 움직였다.이번에도 완전히 웃지는 않았다.나는 빈 종이를 앞으로 밀었다.“조건 하나.”“뭔데.”“네가 아는 것과 추측하는 걸 구분해.”벨리사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그건 해야지.”“왜.”“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나쁘게 적으면 이게 무슨 소용이야.”나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해 둘 생각이었다.벨리사는 정치 천재가 아니다.행정에도 능하지 않다.숫자를 보면 쉽게 지루해하고, 장문의 법률 문서를 읽으면 세 장째부터 하품한다.하지만 사람을 읽는 일에서는 달랐다.그건 아마 살아남기 위해 익힌 능력이었다.어릴 때부터.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누가 질투하는지.누가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는지.누가 조금만 더 웃어 주면 원하는 걸 내놓을지.벨리사는 그런 것들을 너무 오래 봤다.나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그래서 더 잘 알았다.그 재능이 얼마나 정확한지.“가져가.”내가 말했다.벨리사는 장부를 안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내 방에서 해도 돼?”“네가 편한 데서.”“여기서는?”“내가 방해되는데.”“네가?”“내가 아니라 네가.”벨리사가 나를 노려봤다.“내가 왜.”“자꾸 쳐다보잖아.”눈이 멈췄다.정확히 찔렀다.벨리사는 오늘 들어온 뒤부터 몇 번이나 나를 봤다.내 손.얼굴.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잠깐씩.어제 이전에는 그런 시선이 계산되어 있었다.오늘은 먼저 보고 나서 뒤늦게 피했다.나는 그 차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방에서 할게.”벨리사가 장부를 다시 들었다.문 쪽으로 갔다.“벨리사.”걸음이 멈췄다.“왜.”“하기 싫어지면 그만둬.”벨리사가 뒤를 돌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19화. 아버지가 죽던 날

019화. 아버지가 죽던 날벨리사가 만든 분류표는 생각보다 빨리 쓸모가 생겼다.정확히는 내가 보지 못했던 걸 보게 만들었다.연회와 접견, 선물과 황후궁 출입 횟수는 그대로였지만, 벨리사가 옆에 적은 설명을 붙이자 의미가 달라졌다.사교형.중개형.청탁형.눈치형.충성형.그리고 몇몇 이름 옆에는 작은 표시가 하나 더 있었다.황후를 통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음.그 표시가 붙은 열두 명 가운데 절반은 평범했다.문제는 나머지였다.“이 사람들 출입 기록 다시 가져와.”로웬이 책상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기간은 어디까지 보시겠습니까?”“아버지가 죽기 석 달 전부터.”“황후궁만요?”나는 벨리사의 보고서를 한 장 더 넘겼다.한 이름이 눈에 걸렸다.루카스 펠든.왕도 남쪽의 약제상.황궁 정식 납품업자는 아니었다.그런데 벨리사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로제트 후작 부인의 개인 약재상.황후궁 차 모임에 두 번 배석.사람보다는 사람을 소개하는 쪽.“황후궁만 보면 안 돼.”나는 종이를 들어 보였다.“황궁 전체.”로웬의 시선이 이름에 멈췄다.“약제상입니까?”“정식 납품 기록은 없을 겁니다.”“그러니까 보고 싶은 거야.”로웬이 나간 뒤 나는 나머지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벨리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이건 벨리사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었다.아버지의 죽음.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관 속에 있었다.병으로 죽었다고 했다.오래 앓았고, 갑자기 악화됐고, 의관들이 최선을 다했다고.그때 황궁은 왜 죽었는지보다 누가 다음 자리에 앉을지를 더 궁금해했다.그래서 더 늦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폐하.”로웬이었다.“들어와.”그가 가져온 건 얇은 장부가 아니었다.출입 기록 세 권.황후궁 접견 기록 두 권.약창고 반출 기록 한 권.그리고 궁의원 야간 당직표.나는 마지막 걸 먼저 집었다.“이건 왜.”“선황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동안 야간 호출이 많았습니다.”“몇 번.”“기록상 일곱 번입니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020화. 아버지에게 들어간 두 번째 약

020화. 아버지에게 들어간 두 번째 약“정확히는 몰라.”“대충.”“아버지 죽기…….”벨리사의 목소리가 끊겼다.그녀가 계산하듯 눈을 움직였다.“열흘 전쯤.”나는 날짜를 적었다.아버지 사망 열흘 전.루카스 펠든.황후궁 비공식 방문.“리나는 지금 어디 있어.”이번에는 벨리사가 바로 답하지 않았다.내가 펜을 내려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아직 궁에 있을걸.”“어디 소속.”“내 쪽.”“불러.”“지금?”“응.”“물어볼 게 있으니까.”벨리사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나는 기다렸다.재촉하지 않았다.결국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부를게.”“로웬이 부르면 돼.”“아니.”벨리사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내가 부를게.”평소라면 시종에게 넘겼을 일을 직접 하겠다고 했다.“왜.”벨리사의 턱이 아주 조금 들렸다.“내 시녀니까.”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이유였다.하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그래.”벨리사는 문 쪽으로 걸었다.손잡이를 잡기 직전 내가 불렀다.“벨리사.”걸음이 멈췄다.“리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뭘.”“우리가 뭘 찾는지.”벨리사의 어깨가 굳었다.아주 잠깐.그리고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알겠어.”문이 닫혔다.아는 게 있다.얼마나인지는 아직 모른다.*오델린은 오후 늦게 불렀다.일부러 벨리사가 돌아오기 전에.둘을 같은 방에 두고 반응을 비교할 수도 있었다.그러지 않았다.지금은 따로 보는 편이 정확했다.오델린은 검은색과 짙은 와인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고 들어왔다.아직 황후 폐하였다.오델린은 내 책상 앞에 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부르셨습니까.”“앉아요.”“서 있겠습니다.”“편한 대로.”나는 약창고 기록을 앞으로 밀었다.오델린은 바로 손을 대지 않고 나를 봤다.“무엇입니까.”“아버지 약 기록.”그제야 손이 움직였다.길고 정돈된 손가락.반지를 오래 낀 자국과 깨끗한 손톱.감정을 숨길수록 움직임이 느려지는 버릇까지 나는 알고 있었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02
더 보기
이전
1234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