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버린 아내가 태림을 샀다의 모든 챕터: 챕터 91 - 챕터 100

143 챕터

92화 — 법정에서 만난 어머니

“고인의 음성만으로 선창작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해원 측 변호사는 재생 버튼이 눌리기도 전에 위조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법정에 왔지만, 딸의 기억으로 증명할 생각은 없었다.“그래서 음성 하나만 내지 않았습니다.”재하가 증거 목록을 화면에 올렸다. 서지안의 원본 음성, 김문호의 인장, 장인·직원 공동 신탁계약, 태림과 해원의 이면장부. 네 갈래 기록의 날짜가 한 줄로 포개졌다.재판장이 감정인에게 물었다.“음성 파일의 생성 시점을 확인했습니까?”“원본 저장 장치의 기록은 십칠 년 전입니다. 편집 흔적은 없고, 장치 일련번호는 당시 루미에르 복원실 자산대장과 일치합니다.”“후대에 시간을 바꿨을 가능성은요?”“봉인 뒤 해시값이 세 차례 이관 기록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현재 기술로 삽입했다면 값이 같을 수 없습니다.”해원 변호사가 나를 가리켰다.“자산대장은 원고 측 회사가 보관했습니다.”“보관자는 태림이 아니라 폐업 당시 관재인입니다.” 재하가 답했다. “원고는 법원 명령으로 사본만 받았습니다.”마침내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렀다.‘문호 선생님, 첫 나침반 인장은 수선 이력표에 찍어 주세요. 상품이 누구 손을 거쳤는지 지우지 않는 게 이 설계의 시작이에요.’숨을 들이켰다. 다정해서 아픈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울음이 아니라 다음 증거를 바라봤다.재판장이 김문호에게 원형 인장을 보였다.“이것이 녹음에서 말한 첫 인장입니까?”“예. 제가 깎았고 지안 씨가 일련번호 체계를 그렸습니다.”“해원에 넘긴 적 있습니까?”“없습니다.”“채무조정을 받은 대가로 증언한 것 아닙니까?”문호 선생은 잠시 나를 본 뒤 고개를 저었다.“도움 계약과 증언은 분리돼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을 뒤집어도 채무조정을 잃지 않습니다.”“그 문구를 누가 넣었습니까?”“서은채 대표가 넣었습니다. 제 입을 산다는 의심부터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변호사는 인장을 모조품이라고 공격했다. 감정인은 인장 밑면의 칼자국이 신탁계약 초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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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 윤태성의 마지막 협박

“나를 체포하면 해원 직원 만 이천 명이 길에 나앉아.”윤태성은 수사관 사이에서도 직원 수를 인질처럼 불렀다. 법원 계단 아래에는 해원 납품사 대표들이 불안한 얼굴로 몰려 있었다.“대표님이 고소를 거두면 영장은 멈출 수 있습니다.” 그의 변호사가 낮게 말했다.“형사 절차는 제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윤태성이 손목을 빼며 웃었다.“그럼 내일 오전부터 결제가 끊긴다. 해원 물류 계좌에 공동서명권을 걸어 뒀어. 내가 구속되면 은행이 기한이익 상실을 선언하지.”“이미 선언했습니다.”“뭐?”나는 재하에게 서류함을 받았다. 표지에는 채권단 공동관리 개시와 필수 운영비 우선 집행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윤태성의 구속을 기다렸다가 만든 서류가 아니었다. 해외 자금이 빠지기 시작한 날부터 채권 만기와 결제일을 맞춰 둔 결과였다. 직원대표들은 회장에게 알리지 않은 채 본부별 필수 인력과 가동 비용을 직접 계산했다.내가 준비한 것은 그의 몰락이 아니라, 그가 몰락해도 쓰러지지 않을 순서였다.어젯밤 주채권은행을 포함한 칠 개 기관이 서명했다. 회장 개인의 유고와 현장 운영을 분리하는 약정이었다.윤태성은 자기 허락 없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윽박질렀다. 나는 해원이 이미 상환 조건을 어겼으므로 채무 약정에 따른 권리라고 설명했다.그는 납품사 대표들을 돌아봤다.“저 여자가 인증사업만 떼어 가면 너희 채권은 휴지가 돼. 아크는 돈 되는 것만 살 거다.”한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서 대표님, 이번 주 어음은 정말 결제됩니까?”“필수 납품채권은 인수대금보다 먼저 지급됩니다.”한 대표는 말로는 못 믿겠다며 이번 주 어음 결제를 따져 물었다. 나는 믿으라고 요구하는 대신 우선변제 계좌와 지급 순서를 내밀었다. 각 업체가 그날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다.사업부가 잘리면 계약도 끝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계약 승계를 아크 혼자 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채권단, 직원대표, 납품사 협의회가 공동 심사하는 구조였다.윤태성이 비웃었다.“위원회 몇 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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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 적의 회사를 살리는 이유

“윤태성 회장이 구속됐다고 창업가 의결권까지 없앨 수는 없습니다.”해원 측 사외이사는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자마자 해임안 철회를 요구했다. 윤세라는 비어 있는 회장석 옆에 앉아 아버지 명패를 붙들고 있었다.“가족 중 한 명은 남겨야 경영 공백을 막을 수 있어요.” 세라가 말했다.“경영 공백은 현장 책임자들이 이미 막고 있습니다.”나는 직원대표와 채권단이 서명한 칠십이 시간 운영보고서를 화면에 올렸다. 물류는 멈추지 않았고, 체불임금과 긴급 납품대금은 우선계좌에서 집행됐다.세라는 그 돈도 결국 해원 자산이라고 생색냈다. 나는 직원이 번 돈으로 직원의 임금을 준 것이며, 윤씨 일가의 선의가 아니라고 잘랐다.세라는 준비한 답을 찾으려 비서가 써 준 문서를 넘겼다.“저는 글로벌 브랜드를 관리해 왔고, 오리진 패스의 얼굴이었습니다.”직원주주가 물었다.“권리 보증서에 서명한 분이 윤 전무 맞습니까?”“그건 법무팀이 검토한 형식 문서였어요.”“해외 법인이 자금을 회수한 책임도 법무팀에 있습니까?”“저는 세부 계약까지는 모릅니다.”한숨이 회의장을 훑었다. 세라에게 남은 경영 근거는 직함뿐이었고, 그 직함으로 한 일은 모른다는 답뿐이었다.의장이 첫 안건을 상정했다.“윤태성, 윤세라를 포함한 특수관계인 추천 이사 전원의 해임안을 표결합니다.”윤씨 측 대리인이 손을 들었다.“아크가 적대적 인수 뒤 해원을 해체하려 합니다. 주주가치 훼손입니다.”“인수 범위를 읽고 말씀하세요.” 내가 답했다.대리인은 수익성 높은 인증사업만 헐값에 가져가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수가는 독립평가기관 세 곳의 평균보다 팔 퍼센트 높았고, 일부는 납품채권 변제와 고용승계 보증금으로 묶였다.매각 대상이 아닌 계열사도 버리지 않았다. 채권단 공동관리 아래 별도 회생하되, 아크가 지배권을 얻으려고 부실까지 숨겨 사지 않는 구조였다.직원대표가 인수계약의 고용 조항을 읽었다.“인증사업, 물류운영, 고객보호 부서의 고용을 삼 년간 승계하며 일방적 임금 삭감을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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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 악녀의 가장 작은 몫

“가방 하나와 자문 직함만 보장해 주면 아버지 지시를 전부 말할게요.”세라는 주주총회장 옆 조사실에서도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해원 경영권이 사라진 날, 그녀가 지키려는 것은 직원도 회사도 아니었다.“이미 확보한 녹음보다 새로운 내용이 있습니까?” 검사가 물었다.“제가 해외 법인카드 사용처를 알아요. 아버지가 시킨 일이니까 저는 피해자고요.”나는 피해자 측 대리인과 유리벽 밖에서 조사 영상을 확인했다. 세라는 내부고발자라는 단어를 자기 직함처럼 붙였다.“박상철에게 복제키를 전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비서가 했어요.”“비서에게 봉투를 준 영상에는 본인이 찍혔습니다.”“아버지가 들고 가라고 해서 든 것뿐이에요.”“은채 대표 명의의 초대장을 위조한 건요?”“홍보팀이 만들었어요. 저는 행사인 줄 알았죠.”“가짜 위임장에 본인 서명이 열두 번 있습니다.”“서명은 전무가 원래 많이 해요.”검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 세라는 그 침묵을 협상이 시작된 신호로 착각했다.세라는 고문 직함 정도면 되고 가방에는 자기 돈도 보탰다며, 둘을 압류에서 빼 주면 계정 비밀번호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비밀번호는 전날 포렌식에서 복구됐다.그녀가 다음 값으로 꺼낸 해외 창고 주소도 박상철 진술로 압수한 뒤였다. 마지막으로 차명계좌를 내세웠지만, 그 계좌 돈으로 결제된 물건이 바로 품에 안은 가방이었다.검사가 영수증을 화면에 띄웠다. 세라가 자산 동결 직전 가방 소유권을 개인 명의로 바꾸려 한 신청서도 붙어 있었다.“차명 자금임을 알고 재산을 은닉하려 한 정황입니다.”“아니, 선물 받은 거예요. 선물은 제 거잖아요.”“범죄수익에서 나온 선물은 다릅니다.”세라의 얼굴이 그제야 창백해졌다.“서은채 대표랑 얘기하게 해 주세요. 제가 도와줬다고 말하면 알 거예요.”검사가 내 쪽을 봤다. 나는 재하에게 고개를 저었다.“직접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피해자 의견서는 정식으로 제출하죠.”“선처 의사가 없다고 쓸까요?”“제가 형량을 정하는 것처럼 쓰지 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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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 후회하는 남자의 두 번째 질문

“약혼자분은 안쪽에서 기다리십니다.”법원 앞에서 질문할 허락을 받은 뒤, 사건 종료 보고회가 열린 루미에르관으로 왔다. 직원이 내 왼손의 나침반 반지를 보고 말했다. 나는 문고리를 잡기 전에 호칭부터 바로잡았다.“아직 약혼한 건 아닙니다.”직원은 당황해 사과했다. 은채가 안에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루미에르 복원실에는 십칠 년 만에 돌아온 두 장의 설계노트가 놓여 있었다. 은채는 마지막 점검표에 서명하고 있었다.은채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직원이 그녀를 약혼자라 불러 바로잡았다고 말했다.은채의 손이 멈췄다. 기분이 나빴느냐는 물음에, 바라던 호칭이라서 더 정확히 해야 했다고 답했다. 그녀는 내가 바란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짚었다. 그래서 오늘 말하고 묻겠다고 했다.나는 주머니 속 상자를 만지지 않았다. 이미 그녀 손에 낀 반지를 새 질문의 대답으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예전의 나는 결론부터 정해 놓고 은채에게 서명만 요구했다. 육 개월 뒤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도, 집을 비우고 떠나는 결정도 내가 옳다고 믿는 순서 안에 그녀를 넣은 일이었다. 오늘은 결혼이라는 결론을 준비해 온 사람이 아니라 질문할 사람으로 서고 싶었다.그래서 새 반지도, 합칠 집의 계약서도 가져오지 않았다. 사건이 끝났다는 날짜를 관계의 기한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내가 준비한 것은 숨기지 않을 내 바람뿐이었다.“지금 물어도 될까?”“무엇을요?”“결혼 자체를 당신도 원하는지.”은채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침묵을 거절로 두려워하거나, 반지를 끼워 줬다는 사실부터 꺼냈을 것이다.나는 기다렸다.“왜 지금이에요?” 그녀가 물었다.“사건이 끝나서가 아니야. 해원을 이겼으니 보상처럼 다음 단계로 가자는 뜻도 아니고.”“그럼요?”“평범한 생활을 같이 원한다는 말을 계속 숨겼어.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바람을 말할 책임을 피한 것 같아.”은채가 펜을 내려놓았다.“당신이 원하는 평범함은 어떤 건데요?”“같은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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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 재혼 계약서의 첫 조항

“첫 조항은 받아들일 수 없어.”건우는 내가 보낸 재혼 합의서를 읽자마자 반대했다. 재산이나 경영권 분리 조항이 아니라, 갈등이 생기면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문장이 문제라고 했다.“내가 당신 도움을 거절할 권리는 있어요.”“물론이야. 그런데 아예 알리지 않을 권리까지 넣으면 예전처럼 혼자 버티겠다는 뜻이 될 수 있어.”나는 계약서를 다시 봤다. 상대가 대신 결정하지 못하게 막는 데 집중한 나머지, 나 역시 침묵으로 결론을 만들어 버릴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어떻게 고치고 싶어요?”건우는 미리 써 온 문장을 내밀지 않았다. 먼저 말로 제안했다.“도움을 받을지는 각자 결정하되, 공동생활에 영향을 주는 문제는 숨기지 않는다.”“영향의 범위는 누가 정하죠?”“한쪽이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면 대화할 의무가 생기는 건 어때?”“무조건 동의할 의무는 아니고요?”“응. 말하고 듣는 의무까지만.”나는 그 문장을 첫 조항으로 옮겼다. 건우의 요구는 내가 약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혼자 강한 척하며 문을 닫지 말라는 상호 조건이었다.재하는 독립 변호사 두 명을 각각 연결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합의해도 법률 조언은 따로 받았다.우리는 같은 문서의 수정 이력을 공유하되 각자 변호사와 나눈 조언은 열어 보지 않았다. 상대가 무엇을 숨기는지 확인하겠다는 조항도 넣지 않았다. 동의는 모든 비밀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었고, 법률 조력을 따로 받는 것이 불신의 표시도 아니었다.초안에는 변경 사유를 한 줄씩 적었다. 건우가 제안한 문장도 내가 거절하면 그대로 남았고, 내가 만든 조항도 그의 반대 이유와 함께 보존됐다. 최종본만 보면 사라질 망설임까지 기록해야 다음 갈등에서 누가 이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걱정했는지 다시 볼 수 있었다.내 변호사가 물었다.“태림과 아크 지분은 혼인 전후 모두 서 대표의 특유재산으로 유지할까요?”“네. 건우 씨의 센터 지분과 소득도 분리합니다.”“상대 채무에 대한 보증은요?”“별도 서면 동의 없이는 금지해요.”건우도 자기 변호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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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 신부가 고른 결혼식

“호텔 대연회장 예약을 취소하세요.”재혼 합의서에 최종 서명한 다음 날, 태림 홍보팀이 양가 통합 예식안을 가져왔다. 하객 천 명과 생중계, 아크와 태림 로고가 박힌 무대까지 이미 가예약돼 있었다.“시장 안정에는 이 형식이 가장 좋습니다.”“누가 예약을 지시했죠?”홍보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재혼이 알려지자 이사회 몇 사람이 알아서 충성 경쟁을 시작한 것이었다.건우가 기획서를 넘기지 않고 물었다.“내가 취소 의견을 말해도 될까?”“먼저 당신이 원하는지 말해요.”“원하지 않아. 우리 결혼이 태림가 복귀 발표처럼 보이는 것도 싫어.”“나도요. 취소 책임은 내가 회사에 지겠습니다.”“개인 비용이 생기면 같이 부담하고 싶어.”“가예약이라 위약금은 없습니다. 그래도 내역은 함께 확인해요.”우리는 홍보팀을 꾸짖는 데서 끝내지 않았다. 대표 가족 행사를 회사가 선점하지 못하게 승인 규정을 바꿨다.“그럼 예식은 어디서 하십니까?”“루미에르관 휴관일에 합니다.”“브랜드 행사가 없는 날은 석 달 뒤뿐입니다.”“그날이면 돼요. 날짜를 당길 이유가 없습니다.”건우는 달력을 확인한 뒤 내게 물었다.“그날 나도 괜찮아. 확정할까?”“각자 꼭 부르고 싶은 사람부터 정한 뒤요.”초대 명단은 서른 명에서 시작했다. 외조부, 재하, 김문호와 장인 대표, 화재 유족 대표, 회복센터 직원들이 있었다.“센터 전 직원을 부르고 싶지는 않아?” 내가 물었다.“일 때문에 아는 사람을 의무 하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친한 세 사람에게 먼저 물을게.”“태림 임원도 마찬가지예요. 초대받지 않아도 인사상 불이익 없다고 공지할게요.”우리는 참석을 충성 표결로 만들지 않았다. 유족 대표에게는 결혼을 축복해야 할 의무가 없으며 거절해도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따로 적었다.초대장은 참석 여부를 회신하지 않아도 된다고 적었고, 좌석표는 답을 준 사람만으로 만들었다. 회사 비서들이 하객을 설득하지 못하게 연락 창구도 외부로 옮겼다. 축의금은 받지 않고 각자 원하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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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 오늘도 내 손으로 고른 사람

“서은채, 오늘도 내가 손을 내밀어도 될까?”닫힌 문 너머의 질문을 들으며 나는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결혼식은 삼십 분 뒤였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우는 내가 나오지 않아도 문을 열지 않겠다고 했다.나는 문을 직접 열었다.그는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손도 아직 내밀지 않은 채였다.“오늘은 내가 먼저 잡을게요.”내가 손을 내밀자 건우의 눈이 천천히 젖었다. 그는 붙잡기 전에 다시 물었다.“괜찮아?”“네. 지금은요.”“그럼 잡을게.”손가락이 겹쳤다. 과거의 결혼식에서는 정해진 순서에 맞춰 그의 팔을 잡았다. 오늘은 문 앞에서 서로의 대답을 들은 뒤 함께 걸었다.루미에르관에는 회사 로고도, 재벌가의 화환도 없었다. 어머니의 나침반과 화재 희생자 명패 사이에 의자 서른 개만 놓여 있었다. 먼저 도착한 외조부가 일어나려 하자 내가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그대로 앉아 계세요.”“네가 정한 자리니 따르마.”유족 대표는 박수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분이 우리를 용서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침묵까지 하객의 권리였다.사회자는 우리 이름만 불렀다. 이건우 전 태림 대표도, 서은채 아크 대표도 아니었다.건우가 먼저 자기 서약을 펼쳤다.“나는 당신을 대신해 옳은 답을 정하지 않겠습니다. 겁이 나도 숨기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로 결과를 없애려 하지 않겠습니다.”그는 종이에서 시선을 들었다.“당신이 내 손을 놓는 날이 와도 벌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다만 잡고 싶은 날에는 먼저 물을 기회를 주세요.”내 차례가 됐다.“나는 당신의 후회를 보상하기 위해 여기 서지 않았습니다.”건우는 피하지 않았다.“버려진 아내의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아요. 나는 내 회사와 어머니의 이름과 내 삶을 되찾았고, 그 삶에 당신을 다시 들이기로 오늘 선택했습니다.”나는 외워 온 마지막 문장을 접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을 골랐다.“나도 혼자 견디는 일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불편하면 말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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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 결혼 다음 날 도착한 위임장

“이 문서는 내가 먼저 읽을게요.”결혼 다음 날 아침, 건우는 식탁 위의 국제등기에서 손을 뗐다. 함께 사는 첫날이어도 내 문서까지 공동 소유가 되지는 않았다.“다 읽은 뒤 내가 알아야 할 부분을 말해 줘.”“당신 이름이 나오면 바로 보여 줄게요.”“내 이름이 없어도 위험하면 알려 줘. 결정은 당신이 하고.”나는 봉인을 잘랐다. 낡은 겉봉투 안에는 어제 출력한 듯 선명한 긴급 소집장이 들어 있었다. 제목은 ‘북극성 공동신탁 수익권 긴급 이전 표결’이었다.북극성 신탁.서지안이 열두 도시 장인들과 만든 국제 상품이력 공동체. 루미에르 패스포트는 그중 서울 기록망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두 번째 설계가 끝이 아니었던 셈이다.동봉된 지도에는 서울에서 열두 도시로 뻗은 선이 있었다.“어머니는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요?”“당신에게만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건우는 위로하듯 단정하지 않았다.“추측이야. 편지에 답이 있을 수도 있고.”“맞아요. 서운함이 사실을 대신하게 두지 않을게요.”나는 지도의 복사본부터 만들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또 도용됐다는 경계가 먼저였다.“활성화 조건이 적혀 있어요.”루미에르 원권리 회복, 공동신탁 설립, 최소 세 도시의 기록 복구. 우리가 해원과 싸우며 완성한 세 조건이 모두 지난달 충족됐다.건우가 물었다.“그럼 십칠 년 동안 잠겨 있던 신탁이 다시 열린 건가?”“그런데 첫 표결이 어제였어요.”우리 결혼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누군가 내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의안은 북극성 신탁의 공동 권리를 ‘아틀라스 진위·이력 협의회’에 삼십 년간 독점 허가하는 내용이었다.찬성 일곱, 반대 셋, 기권 둘.내 표는 찬성이었다.건우가 서류를 받으려다 멈췄다.“봐도 될까?”나는 그에게 마지막 장을 건넸다. 위임자 서은채, 대리권 범위 전부. 전자서명과 나침반 인장까지 틀림없어 보였다.“어제 이 시각 당신은 내 앞에 있었어.”“그래서 결혼식을 노린 거예요. 내가 사적인 일에 정신이 팔렸다는 이야기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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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 내가 한 적 없는 찬성

“혼인 합의서 원본부터 봉인하세요.”내 전자서명은 오래된 것인데, 손글씨는 어제 쓴 그대로였다. 결혼식장 안에 있던 누군가가 서명을 찍어 보냈다는 뜻이었다.“하객을 의심하자는 겁니까?” 경비 책임자가 물었다.“아니요. 접근 경로를 확인하자는 겁니다. 사람 이름부터 세우면 진짜 구멍을 놓쳐요.”사진가의 원본, 확인인의 스캔 기록, 외부 연락망을 각자 보전했다. 누구도 휴대전화를 내놓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동의 없이 시작한 조사는 또 다른 침해가 될 뿐이었다.조사 동의서는 하객 서른 명에게 같은 문장으로 갔다. 협조하지 않아도 태림·아크·회복센터와의 관계에 불이익이 없고, 결혼식과 무관한 사적 자료는 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답을 재촉하는 전화도 금지했다.외조부도 예외 없이 같은 범위의 기록만 내놓았다. 권력보다 같은 경계가 중요했다.건우가 먼저 자기 기기를 법무팀에 맡겼다.“내가 당사자라서 더 늦게 봐야 합니다.”“진술 순서도 다른 하객과 같게 해요.”“알겠어.”재하가 전자서명 인증서의 이력을 화면에 띄웠다. 발급일은 육 년 전, 첫 결혼 당시였다. 태림 가족문서용으로 만든 뒤 이혼일에 폐기한 인증서였다.“폐기됐는데 어떻게 유효값이 나왔죠?”“인증서 자체가 살아난 게 아닙니다. 폐기 전 서명값과 개인키 일부를 복제해 신탁의 구형 검증기에 넣었습니다.”“신탁이 십칠 년 동안 잠겨 있어서 검증 체계도 옛날이군요.”“네. 최신 폐기목록을 조회하지 않고 내부 원장만 맞으면 통과하도록 돼 있습니다.”서명 위조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방치된 시간의 문제였다. 누군가는 북극성 신탁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오래된 열쇠를 보관했다.혼인 합의서 사본은 확인인이 행사장 안의 독립 단말에서 만들었다. 로그에는 외부 전송이 없었다. 대신 인쇄 대기열에 이름 없는 장치가 삼 초간 연결됐다.“서명 페이지만 가져간 겁니까?”“정확히는 화면 이미지를 복제했습니다. 내용은 못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건우가 낮게 말했다.“우리가 하객 얼굴을 찍지 않기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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