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독배는 세 번째 접시에 오른다: Chapter 1 - Chapter 10

13 Chapters

1화 — 죄인의 딸은 숯창고로

천막 너머의 심사관은 레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번호뿐이었다. 열일곱. 대기근 뒤 일손이 모자라진 왕실 대주방이 계절 조리인을 뽑을 때만 쓰는 방식이었다. 지원자는 이름도, 출신도 감춘 채 같은 재료와 같은 화덕을 받았다.레아는 냄비부터 불에 올리지 않았다. 보리알을 손바닥에 펴고 깨진 면을 살폈다. 젖었다 마른 것은 가운데가 희게 떴고, 오래 묵은 것은 손톱 아래 가루가 남았다. 상자 바닥의 뿌리채소 세 개도 단단한 순서대로 갈랐다. 좋은 재료를 골라내는 시험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버리지 않고 살리는지 보는 시험이라고 생각했다.옆 칸에서는 칼이 도마를 때리는 소리가 다급했다. 누군가는 상한 끝까지 크게 잘라 버렸고, 누군가는 향신료를 쏟아 오래된 냄새를 덮었다. 레아는 버린 껍질도 한쪽에 가지런히 모았다. 심사관이 재료의 무게를 다시 달아 본다는 소문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곡물 한 줌이 사라질 때마다 굶는 사람의 그릇 하나가 비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구휼곡을 훔친 죄로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칼끝이 잠시 멎었다. 레아는 손잡이를 고쳐 잡고 남은 뿌리를 더 얇게 저몄다.종이 두 번 울린 뒤 레아는 수프와 납작한 빵을 작은 창으로 밀어 넣었다. 한참 침묵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천막을 뚫고 나왔다.“열일곱, 불을 왜 중간에 줄였지?”“보리 껍질이 먼저 익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대로 두면 속이 익기 전에 쓴맛이 남습니다.”“냄새만으로 알았나?”“냄새와 냄비 가장자리의 거품을 같이 봤습니다.”짧은 웃음이 들렸다. 호의인지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아는 빈 조리대의 물기와 사용한 숯의 수를 기록지에 적었다. 여덟 해 동안 그녀가 배운 것은 설명보다 기록이 오래 산다는 사실이었다.오후의 마지막 종과 함께 합격자 넷이 불렸다. 열일곱도 그 안에 있었다.“천을 걷어라.”레아가 얼굴을 드러내자 중앙에 앉은 대주방장 브리짓 베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옆의 조달 서기가 명부를 받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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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이름 없는 수프

숯창고의 아침은 불보다 빨랐다.레아는 첫 종 전에 마른 숯을 화덕별로 나누고, 젖은 숯은 가장 아래 칸에 따로 표시했다. 어제 본 곡물 포대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신 장부 여백에 포대가 네 개라고 적고 창고 문고리에 숯가루를 얇게 발라 두었다. 누가 열면 손자국이 남을 터였다.두 번째 종이 울릴 즈음, 대주방에서 냄비 깨지는 소리가 났다.“불이 왜 이 모양이야!”셀린의 목소리였다. 오늘 왕궁에 머무는 지방 사절단에게 낼 뿌리채소 수프가 화덕 위에서 갈라져 있었다. 윗물은 번들거리고 바닥에는 으깬 채소가 눌어붙었다. 셀린은 숯이 나빴다고 몰아붙였고, 화덕장은 받은 수량이 같다고 맞섰다.레아는 빈 숯바구니를 내려놓고 냄비를 보았다. 장작 냄새보다 먼저 시큼한 유제품 냄새가 났다. 불이 세서만은 아니었다. 차가운 재료를 한꺼번에 부은 흔적이 냄비 벽에 층처럼 남아 있었다.“네가 가져온 젖은 숯 때문이잖아.” 셀린이 레아를 가리켰다.“젖은 숯은 남쪽 창고 아래 칸에 있습니다. 이 화덕에는 마른 숯 스물둘이 들어갔습니다.”“숯을 세기라도 했다는 거야?”“그게 제 일이니까요.”주변의 웃음이 작게 터졌다. 죄인의 딸이 숯 숫자나 세고 있다는 웃음이었다. 레아는 반박하지 않고 숯바구니 안쪽의 눈금을 보였다. 같은 크기로 나눈 자리가 스물둘 비어 있었다.브리짓이 다가와 국자로 수프를 한 번 저었다. “살릴 수 있나?”질문은 셀린이 아니라 레아를 향했다.“탄 바닥까지 긁지 않았다면 가능합니다.”셀린이 얼굴을 붉혔다. “대주방장님, 저 아이는 잡역입니다.”“그래서 네 냄비가 저 꼴이 된 게 나아지나?”브리짓은 레아에게 국자를 던졌다. “살려. 실패하면 숯창고 청소가 두 배다.”레아는 먼저 멀쩡한 윗부분만 다른 냄비로 옮겼다. 눌은 냄새가 섞인 바닥은 미련 없이 남겼다. 오래된 빵의 속을 육수에 풀어 거친 물기를 붙잡고, 익힌 뿌리채소를 체에 눌러 농도를 되돌렸다. 불은 새로 세게 피우지 않았다. 남은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냄비를 화덕 가장자리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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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왕실 쟁반에 손댄 죄

사흘째 정오, 레아는 은쟁반을 붙잡았다.왕실 식당으로 향하던 쟁반이었다. 그것도 시식이 끝났다는 흰 끈이 매인 쟁반. 복도 시종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흰 끈 뒤의 음식에 허가 없이 손을 대면 훼손죄였다. 잡역의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접시 전체가 버려질 수 있었고, 왕실 모독으로 매질을 당할 수도 있었다. 레아는 쟁반을 지나치려 했다. 그때 푸른 유리표가 소스가 묻은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만큼 비껴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나치면 규정은 지킬 수 있었다. 대신 그 쟁반을 드는 아이가 무엇을 먹게 되는지도 알았다.“놓아.” 쟁반을 든 어린 시종 토마가 속삭였다. “이걸 늦추면 난 쫓겨나.”“네 식사표를 보여 줘.”“지금 무슨 소리야?”레아는 쟁반의 작은 곁접시를 보았다. 에델린 공주가 식사 전에 시종들과 나누는 빵이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시종을 위해 홍각 열매를 뺀 접시에는 푸른 유리표가 놓여야 했다. 푸른 표는 분명 있었지만, 접시 가장자리에 붙은 소스에는 잘게 간 붉은 껍질이 반짝였다.아침에 토마가 식재료 상자를 옮기며 홍각 열매만 닿아도 목이 붓는다고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레아는 냄새만 믿지 않았다. 조리대에 남은 칼자국과 소스 속 껍질, 잘못 놓인 유리표를 같이 보았다.“그 접시에 손대지 마.”그러나 토마의 손가락에는 벌써 소스가 묻어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잠시 뒤 얼굴이 붉어지고 목을 긁기 시작했다.레아는 쟁반을 가까운 창턱에 내려놓고 복도 종줄을 세 번 당겼다. 의원을 부르는 신호였다. 시종장이 달려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감히 시식이 끝난 왕실 쟁반을 바닥에 내려?”“바닥이 아니라 창턱입니다. 그리고 저 아이에게 의원이 필요합니다.”토마가 기침과 함께 주저앉았다. 그의 입술이 부어오르는 것을 본 시종장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의원이 달려와 아이를 눕히고 숨길을 살폈다. 복도는 순식간에 봉쇄됐다.문제는 아이가 숨을 돌린 뒤 시작됐다.선임 시식관 하론은 쟁반 앞에 선 레아를 마치 썩은 고기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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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일곱 가지 냄새

시험실에는 창문이 없었다.브리짓은 등잔 하나만 켜 둔 채 긴 탁자 위에 뚜껑 덮인 그릇 일곱 개를 늘어놓았다. 레아가 들어오자 문을 닫고 젖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어제는 눈으로 껍질을 봤지.”“그렇습니다.”“오늘은 못 본다. 냄새로 맞혀 봐.”셀린과 화덕장, 식료고 선임이 벽 쪽에 서 있었다. 셀린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숯창고 잡역이 우연히 접시 하나를 알아본 일을 브리짓이 너무 크게 친다는 표정이었다.첫 뚜껑이 열렸다. 달고 마른 향이 났다. 레아는 곧바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릇을 가까이 당겨 달라고 한 뒤 손등으로 올라오는 공기의 습기를 느꼈다.“말린 황금배입니다. 올해 것이 아니라 지난겨울 것입니다.”“이유는?”“새것이면 단내보다 껍질 향이 먼저 납니다. 이건 저장고 나무 냄새를 오래 먹었습니다.”두 번째는 콩가루, 세 번째는 오래된 짐승 기름이었다. 네 번째에서 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향신 잎 냄새 아래 옅은 숯내가 붙어 있었다.“이건 어느 창고에서 왔지?”“질문하지 말고 답해.” 셀린이 끼어들었다.레아는 그릇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가루가 아니라 잎이었다. 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축축했다.“북쪽 향신료고에서 온 백온향입니다. 다만 한동안 숯과 같은 통로에 있었습니다.”화덕장이 헛기침했다. 전날 창고가 넘쳐 향신료 상자 일부를 남쪽 통로로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의 반응이었다.다섯 번째는 소금이었다. 레아는 냄새가 없다며 끝내지 않고 그릇을 흔들어 달라고 했다. 알갱이가 구르는 소리 뒤로 작은 덩어리 하나가 부딪혔다.“절임용 굵은 소금입니다. 조리대용이 아닙니다.”“코로 소금 굵기도 아나?” 셀린이 비웃었다.“모릅니다. 그래서 소리를 들었습니다.”벽 쪽에서 누군가 웃음을 삼켰다.여섯 번째 뚜껑이 열리자 레아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곡물가루였다. 냄새는 평범했지만 코끝보다 손목의 솜털이 먼저 습기를 느꼈다. 그녀는 그릇을 들지 않고 탁자 표면을 만졌다. 다른 그릇 아래는 차가웠고, 여섯 번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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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두 번 찍힌 인장

곡물 포대는 밤사이 한 칸 옮겨져 있었다.어제는 숯더미 뒤에 가로로 누워 있었고, 아침에는 통로 벽에 세워져 있었다. 레아가 문고리에 발라 둔 숯가루에는 손가락 네 개가 선명했다. 하지만 창고 열쇠는 화덕장과 식료고 선임, 조달 서기까지 셋이 함께 썼다. 손자국 하나로는 아무도 지목할 수 없었다.레아는 포대를 끌어내지 않고 주변부터 살폈다. 바닥의 젖은 자국은 벽 쪽으로 이어졌고, 자루를 세운 자리에는 마른 곡물 몇 알이 떨어져 있었다. 포대 귀퉁이가 터진 것이 아니라 봉랍 아래 꿰맨 실이 느슨해져 나온 알이었다.표찰에는 한 포대가 같은 무게라고 적혀 있었다. 레아는 혼자 저울에 올리는 대신 숯집게의 긴 자루로 각 포대 밑을 아주 조금 들어 보았다. 둘은 비슷했고 하나는 유난히 무거웠다. 마지막 것은 젖었는데도 오히려 가벼웠다. 물을 먹은 포대가 가벼울 이유는 안의 곡물이 먼저 빠져나간 경우뿐이었다. 그녀는 ‘무게 불균형’이라고만 적었다. 얼마나 비었는지는 정식 저울 없이는 알 수 없었다.“숯이나 세라니까 남의 포대를 왜 들여다봐?”조달 서기 보조 게른이 문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어제 합격 명부에서 레아의 성을 가장 먼저 크게 읽은 자였다.“남의 포대가 제 창고에 들어와 있습니다.”“왕실 물건이니 네 창고가 아니지.”“그럼 왕실 기록에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장부에는 북쪽 건조고라고 적혀 있습니다.”게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그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비가 들이쳐 잠깐 피한 거다. 잡역이 조달 절차까지 배웠나?”레아는 대답 대신 봉랍을 가리켰다. 붉은 밀랍에는 납품자의 산양 표식이 찍혀 있었고, 그 위로 쌍사자를 새긴 왕실 조달부의 검은 밀랍이 눌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루를 확인한 뒤 왕실이 두 번째로 봉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포대는 달랐다. 붉은 밀랍이 깨진 틈 아래에 검은 밀랍이 깔려 있었다. 왕실 봉인이 먼저 찍히고, 납품자 봉인이 나중에 덮인 모양이었다.“두 번 봉한 순서가 바뀌었습니다.”게른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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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새벽의 삼백 개 빵

발효종이 죽은 것은 새벽 첫 종 직전이었다.제빵실의 나무통 세 개가 모두 축 늘어져 있었다. 신 냄새는 났지만 반죽을 밀어 올릴 힘이 없었다. 밤당번은 전날과 같은 자리에 두었다고 울먹였고, 선임 제빵사는 통째로 내다 버리라고 소리쳤다.그날 아침 대주방은 근위대 교대식과 왕실 회의에 맞춰 빵 삼백 개를 내야 했다. 곡물죽으로 바꾸기에는 솥이 모자랐고, 납작빵을 새로 반죽하기에는 화덕이 이미 고기와 수프에 배정돼 있었다.“숯창고 것 때문에 가루를 바꿔서 이 꼴이 났잖아.” 셀린이 레아를 보며 말했다. 사용 보류된 포대 대신 오래된 밀가루를 쓴 탓이라는 뜻이었다.레아는 발효통 가장자리를 눌러 보았다. 세 통이 모두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표면은 지나치게 시었지만, 벽 쪽에 붙어 있던 단단한 반죽에서는 아직 고른 기포가 올라왔다. 밤새 통이 너무 따뜻한 바닥에 놓여 가운데부터 상한 것이었다.“다 버리면 아침은 없습니다.”“그럼 죽은 반죽을 왕실에 내겠다는 거야?” 선임 제빵사가 물었다.“살아 있는 부분만 떼어 쓰겠습니다. 왕실 식탁이 아니라 근위대와 하인 식사용부터 모양을 바꾸면 됩니다.”셀린이 비웃었다. “네 금 간 화덕 하나로 삼백 개를?”레아는 벽의 배정표를 떼어 바닥에 폈다. 큰 화덕 둘은 일곱 번째 종까지 비어 있었다. 귀족 견습 전용 화덕 하나도 지금은 장식용 설탕을 말리는 데 쓰이고 있었다.“대주방장님, 제게 허락된 한 칸과 사용하지 않는 열을 함께 쓰게 해 주십시오.”브리짓은 발효통 냄새를 맡고 반죽을 갈랐다. “삼백 개를 못 채우면?”“제가 부족한 수를 장부에 제 이름으로 적겠습니다.”“채우면?” 셀린이 날카롭게 물었다.레아는 그녀를 보았다. “아침을 굶는 사람이 없어집니다.”승진이나 포상을 말하지 않자 셀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브리짓이 주방을 향해 손뼉을 한 번 쳤다. “설탕 장식은 창가로 옮겨. 빈 화덕은 전부 쓴다. 지휘는 모렌이 해.”레아는 멀쩡한 발효종을 통 가장자리에서 걷어 내고, 전날 남은 단단한 반죽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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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소금통의 반죽 자국

화덕 한 칸을 얻은 뒤부터 레아는 뚜껑마다 흔적을 남겼다.귀한 봉랍은 쓸 수 없었다. 대신 물과 곡물가루를 뭉친 작은 반죽을 통과 뚜껑 사이에 붙였다. 한 번 열면 말라붙은 반죽이 갈라졌다. 통마다 다른 가루를 썼고, 자국 한가운데에는 손톱으로 짧고 긴 선을 냈다.“도둑이라도 든다는 거야?” 옆자리 견습이 물었다.“들었는지 모르는 것보다 낫잖아.”레아는 소금통에는 거친 보릿가루 반죽을 붙였다. 짧은 선 둘, 긴 선 하나. 그 모양을 작업 기록 아래에도 똑같이 그렸다.다음 날 셀린은 귀족 화덕에서 연회용 흰 빵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레아에게는 하인 식당에 낼 양파빵이 맡겨졌다. 신분에 따라 화덕은 갈렸지만, 소금은 가운데 조리대의 같은 통에서 덜어 썼다.레아가 뚜껑을 잡자 반죽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모양은 짧은 선 둘과 긴 선 하나였다. 그러나 색이 지나치게 희었다. 전날 쓴 거친 보릿가루라면 마른 껍질에 갈색 점이 박혀 있어야 했다.그녀는 뚜껑을 열지 않았다.“화덕장님, 이 통의 사용을 멈춰 주십시오.”바쁜 주방에서 사람들이 짜증 섞인 숨을 내쉬었다. 셀린은 반죽 묻은 손으로 다가왔다.“이번엔 소금이 반역이라도 했어?”“통이 바뀌었습니다.”“자국이 그대로잖아.”“모양만 같습니다.”레아는 전날 기록한 쪽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보릿가루 반죽’이라는 말과 선 세 개가 함께 적혀 있었다. 뚜껑에 붙은 새 자국은 희고 매끈한 밀가루 반죽이었다. 누군가 흔적을 보고 흉내 냈지만 재료까지는 몰랐다.셀린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오늘 아침 바꿔 붙이고 소란을 만드는 건지 누가 알아?”“그래서 혼자 열지 않았습니다.”화덕장이 입회한 가운데 통을 열었다. 안에는 조리용 고운 소금이 아니라 저장육에 쓰는 굵은 소금이 들었다. 그대로 넣었다면 레아의 빵만 먹기 어려울 만큼 짜졌을 것이다.레아는 두 소금을 같은 양의 물에 따로 풀어 보였다. 바뀐 소금에서는 굵은 알갱이와 절임고의 마른 허브가 남았다. 하인용 빵에 들어갔다면 만든 사람의 실수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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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 철회된 포상

에델린 공주는 이름 없는 수프를 다시 찾았다.사절단이 비운 그릇 이야기가 공주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주문서는 정오 직전 대주방에 도착했다. ‘그날과 같은 방식으로, 만든 자가 직접 조리할 것.’ 마지막 문장이 셀린의 얼굴을 굳게 했다.“만든 자가 대주방 전체라고 적혀 있는데요.”브리짓은 주문서를 레아에게 건넸다. “손님은 장부보다 혀가 정확할 때가 있지. 네가 해.”레아에게 허락된 금 간 화덕이 처음으로 낮에 켜졌다. 그녀는 뿌리채소의 단단한 순서를 나누고, 눌어붙지 않도록 냄비를 돌렸다. 향을 돋우는 백온향은 식료고에서 봉인된 작은 통째로 왔다. 레아는 통 번호와 개봉 시각을 확인한 뒤 필요한 만큼만 받아 냄비에 넣었다.“공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면 포상이 나오겠지.” 셀린이 옆에서 말했다. “숯 한 자루쯤은 새것으로 주시려나.”레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완성한 수프 한 잔은 시식실로, 한 잔은 보존실로, 나머지는 에델린의 식탁으로 나갔다. 세 잔을 뜬 시각과 순서를 작업지에 적었다.얼마 뒤 공주의 시녀장이 직접 주방에 내려왔다.“전하께서 조리인을 부르신다.”왕실 소식당은 대주방보다 조용해서 숟가락이 접시에 닿는 소리까지 크게 들렸다. 에델린은 반쯤 비운 수프 그릇 앞에서 레아를 바라봤다. 마흔다섯의 공주는 화려한 장신구보다 곧은 자세로 사람을 눌렀다.식탁 한쪽에는 이미 은화 주머니와 공주의 문장이 찍힌 화덕 사용패가 놓여 있었다. 시녀장은 포상을 읽을 얇은 두루마리까지 펴 들었다. 주방에서 따라온 셀린과 견습들도 문 뒤에 줄지어 섰다. 레아가 가장 낮은 회색 앞치마 차림으로 식탁 앞에 선 순간부터, 이 칭찬은 둘만의 말이 아니었다.“네가 만들었느냐?”“그렇습니다.”“지난번 망가진 냄비도?”“마지막 조리를 맡았습니다.”에델린이 숟가락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좋다. 단맛으로 오래된 재료를 속이지 않았고, 향도 지나치지 않아. 이름을 말해라.”“레아 모렌입니다.”시녀장의 표정이 변했다. 공주의 시선도 아주 조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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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접시의 순서

식단표에는 시간이 없었다.‘뿌리채소 수프, 흰 빵, 붉은 과실주.’ 무엇을 먹었는지는 남았지만 어느 종 사이에 무엇이 올랐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시식 기록도 세 항목 모두 ‘이상 없음’이었다.레아는 다음 날 첫 종부터 배식실 문 앞에 섰다. 왕실 식당의 기록을 잡역에게 보여 줄 수 없다는 서기의 말을 들은 뒤에도 물러나지 않았다.“어제 에델린 전하의 수프를 만든 조리인입니다. 작업 기록과 반출 시각을 맞춰야 합니다.”“전하께서 포상도 철회했다던데, 아직 조리인인 척을 하나?”“칭찬은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조리한 사실도 기록하라고 명하셨고요.”서기는 할 말을 잃고 시녀장이 남긴 한 줄을 확인했다. 결국 식단표 원본은 아니어도 배식 종 장부를 열어 주었다.첫 번째 식사 종 직전 수프 여섯 그릇. 첫 번째와 두 번째 종 사이 빵 두 바구니. 세 번째 종 직전 과실주 한 병. 레아는 숫자를 베껴 적지 않고 허락된 난에 자기 작업 시각을 나란히 썼다. 사본을 몰래 만들면 훗날 도난 문서가 된다. 공식 장부에 비교 기록을 남기는 편이 느려도 오래 버텼다.“음식이 다 따로 시식을 통과했어.” 서기가 말했다. “공주님이 피곤했던 일을 왜 식단 탓으로 돌려?”“아직 탓하지 않았습니다. 순서를 확인하는 중입니다.”“수프 다음에 빵, 빵 다음에 술. 어느 식탁이나 그렇지.”레아는 설거지장으로 내려갔다. 그릇은 이미 씻겼지만 반납 시각은 나무패에 남아 있었다. 수프 그릇은 첫 번째 종 뒤, 빵 바구니는 두 번째 종 뒤, 술잔은 에델린의 식사가 갑자기 끝난 뒤 한꺼번에 돌아왔다. 시녀장에게 묻자 공주는 수프를 먹을 때는 멀쩡했고, 빵 뒤에는 귀가 울린다고 했으며, 과실주를 마신 뒤 손을 감쌌다고 했다.“그걸 병이라고 적을 수는 없어.” 시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의 허락도 없고, 의원의 진단도 없으니까.”“병이라고 적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하신 말씀과 시각만 확인해 주십시오.”시녀장은 오래 망설이다 ‘두 번째 종 뒤 귀울림 호소’라는 문장만 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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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세 번째 접시

레아는 전날 복원한 식단표를 화덕 옆에 펼쳤다. 백온향을 넣은 수프, 빵, 붉은 과실주. 첫 번째 종부터 세 번째 종 사이, 에델린 공주의 식탁에 오른 순서였다. 잉크가 번진 곳에는 시종 셋의 진술을 겹쳐 적었다. 한 사람의 기억은 흔들려도 셋이 들은 종까지 바뀌지는 않았다.“순서를 찾았으면 뭘 하겠다는 거냐?”화덕장이 비웃었다. 레아는 대꾸하지 않고 전날 남겨 둔 빵 부스러기와 술병 바닥의 자국, 백온향이 묻은 국자를 각각 다른 접시 위에 놓았다. 모두 폐기 목록에 오른 것들이었다. 브리짓에게 받은 한 칸짜리 화덕과 제한된 기록 열람권으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먼저 각각의 흔적을 발효지에 눌렀다. 밀가루 반죽의 숨을 살필 때 쓰는 거친 종이였다. 빵 쪽은 흐린 푸른 얼룩이 잠깐 번졌다가 열기 앞에서 사라졌다. 술과 향신료 쪽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옆에서 보던 조리사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축축한 포대라며. 곰팡이 자국 하나로 공주 전하의 떨림까지 설명할 셈이야?”“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레아는 새 발효지 세 장에 같은 흔적을 올리되, 식단표의 순서만 달리했다. 양을 재거나 사람에게 맛보이지 않았다. 남은 접시에서 묻어 나온 자국을 차례대로 겹치고, 각 단계마다 종이의 냄새와 색을 기록했다. 어느 것을 먼저 놓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붉은 과실주의 흔적이 마지막에 닿은 종이에서만 사라졌던 푸른 얼룩의 테두리가 잿빛 선으로 되살아났다.우연을 지우는 일부터 해야 했다. 레아는 새 밀가루와 새 술로 만든 대조 종이를 옆에 놓고, 접시도 창고에서 꺼낸 깨끗한 것으로 바꾸었다. 대조 종이에는 아무 선도 생기지 않았다. 술을 먼저 놓거나 향신료를 빼자 역시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맞는 결과보다 틀린 결과를 더 오래 적었다. 무엇이 아닌지를 남겨야 누군가 같은 시험을 되풀이할 수 있었다.레아는 그 선을 손톱으로 긁지 않았다. 종이 아래에 날짜와 종의 순서를 적은 뒤, 깨끗한 덮개를 씌웠다. 같은 과정을 다시 했을 때도 마지막 장에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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